[오피니언]
김병학 목사의 소통하는 교회 - 소통은 회복의 통로이다
크리스천헤럴드2025.06.01
2025년 조기 대선을 앞둔 한국 사회는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분열 속에서 깊은 위기를 지나고 있다. 대통령 탄핵과 정치 지도자들의 사법 리스크, 여야의 극단적 대립은 단순한 정쟁을 넘어 국민들의 일상에 피로와 냉소를 퍼뜨렸다. 민주주의의 근간인 신뢰와 대화는 점점 사라지고, 사회는 진영 논리에 갇혀 상대를 ‘대화의 대상’이 아닌 ‘무너뜨려야 할 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혐오와 배제의 언어가 익숙해지는 시대, 우리는 어느새 ‘함께 살아가는 법’을 잃어가고 있다.이 시점에서 교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나? 교회도 한쪽의 입장과 함께해야 하나? 무엇을 해야 사회에 신뢰를 줄 수 있을까? 오늘의 교회는 더 이상 예전처럼 자동적으로 ‘도덕적 권위’를 인정받는 존재가 아니다. 많은 이들이 묻는다. “교회는 지금 사회의 고통을 진심으로 듣고 있는가?”라고. 이 물음 앞에 교회는 정직하게 서야 할 때다. 교회는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의 안전함보다, 공동체의 아픔과 함께 울고, 회복을 위한 걸음을 동행하는 일이 더 중요해졌다.소통은 단순한 언어의 교환이 아니다. 진정한 소통은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의 고통에 공감하려는 마음에서 출발한다. 한국 교회가 이 ‘소통의 감각’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복음은 아무리 외쳐도 세상의 마음에 닿지 않을 것이다. 세상이 교회의 말을 듣지 않는 이유는, 교회가 먼저 세상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지금처럼 혼란과 분열의 세상과 교회는 어떻게 소통을 해야 하나?첫째, 교회는 정치적 중립성과 진리의 균형을 회복해야 한다. 복음은 결코 특정 정당이나 이념에 종속된 메시지가 아니다.하나님의 말씀은 시대의 죄악을 꾸짖고 정의를 요구하지만, 동시에 어느 한 진영의 손을 들어주는 언어가 아니다. 그러나 일부 교회는 정치적 편향을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며, 복음을 세속 권력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해 왔다. 이러한 언행은 신앙의 본질을 흐리고, 교회의 신뢰도를 떨어뜨린다. 이제 교회는 정치적 중립을 지키면서도 시대적 불의를 분별할 수 있는 성숙한 신앙의 언어를 회복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첫 단추다.둘째, 공동체 안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포용하는 문화를 세워야 한다. 교회는 청년과 노년, 남성과 여성, 이주민과 장애인, 비기독교인까지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작은 사회다. 그러나 현실의 많은 교회는 아직도 획일적인 언어와 문화, 동일한 목소리만을 요구하며, ‘다름’을 불편해한다. 세상의 갈등을 치유하려면, 교회 안부터 다양한 목소리를 품고, 다름을 통해 더욱 풍성해지는 공동체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포용은 진리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진리를 더 깊이 적용하고 확장하는 능력이다. 서로를 이해하려는 태도, 낯선 생각에 대한 열린 마음이야말로 오늘날 교회가 가장 먼저 실천해야 할 ‘소통의 덕목’이다.셋째, 사회적 약자를 향한 섬김과 연대는 교회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언어다.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이 많다. 청년 실업자, 독거노인, 비정규직 노동자, 외국인 노동자, 탈북민 등 우리 주변의 이웃들은 점점 더 외로워지고 있다. 교회가 이들의 아픔을 듣고, 구체적인 지원과 돌봄을 실천할 때, 그 행위 자체가 세상과의 소통이 된다. 말보다 삶으로 전하는 복음, 그것이 진짜 소통이며, 회복의 씨앗이 된다.몇 번을 강조하지만, 이제는 교회가 말하기에 앞서 먼저 들어야 할 때다. 세상이 고통 속에서 내는 신음에 귀 기울일 때, 우리는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다시 들을 수 있다. 교회가 소통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소통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 정죄보다 공감으로, 배타보다 환대로, 주장보다 경청으로 나아가는 교회. 그럴 때 비로소 세상도 교회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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