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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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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The letter 11 김광근 - 도움은 여호와에게서 내려옵니다 크리스천헤럴드2025.08.07
    "내가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시편 121장 1-2절발밑의 거친 자갈만 바라보면 앞이 막막하지만, 눈높이를 높이면 지형의 윤곽이 보이기에 광야 가운데서 시선을 '산'으로 옮깁니다. 어려움이 길을 가려도, 마음의 카메라 앵글을 위로 돌리는 순간 풍경이 달라집니다. 시선의 전환이 곤 소망의 출발선입니다."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라는 질문은 공허한 수사가 아닌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 뿌리를 두는 확신의 고백입니다. 문제 해결 능력이 '내 안'에 있지 않음을 인정할 때, 우리는 진짜 도움의 근원을 만납니다. 창조주께서 시작하셨다면, 유지와 완성 역시 그분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현실은 변하지 않아도, 방향을 재설정하면 우리의 걸음은 가벼워집니다. 오늘 해야 할 일, 치러야 할 관계의 과제들이 여전해도 '도움이 위에서 온다"는 사실이 마음 깊은 곳을 지지해 줍니다. 고개를 들 때마다 우리는 같은 하늘 아래 있지만. 하나님의 능력과 보호 안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오늘 하루가 버겁게 느껴지시나요?잠시 걸음을 멈추고 눈을 들어 보세요. 도움은 이미 머리 위에서, 천지를 만든 분에게서 오고 있습니다. 그 시선이 여러분의 걸음을 밝히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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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7
    [오피니언] 김병학 목사의 소통하는 교회 - 소통은 설계도이다 크리스천헤럴드2025.08.07
    최근 한국 사회에 의미심장한 두 가지 현상에 대한 신문 기사를 읽었다. 하나는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국내 유수 대학에서 교수가 해외로 자리를 옮기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4년간 서울대에서만 56명의 교수가 떠났다고 한다. 또 하나는 신학대학원 졸업생의 절반 이상이 교회 사역을 할 생각이 없다고 응답했다는 보도다. 여기에 더해, 이제는 신학대학원 입시 경쟁률마저 1:1 아래로 떨어졌다는 소식도 더 이상 낯선 것도 아니다. 이 세 현상은 서로 다른 분야처럼 보이지만, 모두 공통된 구조를 보여준다. 바로 ‘떠남’이다.‘떠남’은 단순히 연봉이나 조건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더 이상 그곳에서 자신의 고민이 들리지 않고, 소망이 존중받지 않으며, 구조적 개선이 이뤄질 것이라는 믿음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교수는 연구에 몰입할 수 없는 환경을, 신학생은 삶을 감당할 수 없는 교회 현실을 경험한다. 신학대학원에 아예 들어오려는 사람조차 줄어드는 지금, 한국 교회의 미래는 이미 영적 지도자 부족의 실체적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이 모든 현상은 ‘소통의 실패’라는 공통된 원인을 지닌다.교회 안의 소통도 마찬가지다. 최근 보도된 설문에 따르면, 신학대학원생 중 절반이 사역 의향이 없다고 답했으며, 이들 중 68%는 소명을 후회하고 있다. 주요 이유는 경제적 어려움, 과중한 업무, 낮은 보수, 권위적인 조직 문화다. 이는 교회가 사역자의 삶에 진지하게 귀 기울이지 않고, 현실적 어려움에 구조적으로 응답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떠난다’는 현상 자체가 교회 내부의 목소리를 듣고 교감하는 데 실패했다는 진단으로 볼 수 있다.그렇다면 소통하는 교회는 무엇이 다른가? 단지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서로의 고민을 인식하고 구조적 대안을 함께 설계하는 것이다.먼저 세대 간의 소통을 강화해야 한다. 20‒30대 신학생은 부교역자나 선교사를 선호하지만, 40대 이상은 담임 목회나 개척을 우선순위로 둔다. 이 차이는 단순한 의견의 다름이 아니라 경험의 간극이다. 이를 메우기 위해 세대 간 코칭과 멘토링, 비전과 진로 상담, 인생 경력 나눔 같은 장을 정기적으로 마련할 필요가 있다. 경험의 공유는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니라 공동체적 시선의 확장을 가능하게 한다. 둘째, 권위주의적인 구조를 넘어 평등한 대화의 구조를 마련해야 한다. 목회자들은 서로의 사역 상황과 한계를 공유하고, 정기적인 대화 테이블을 통해 신뢰를 쌓는 노력이 필요하다. 상명하복의 수직적 구조는 교회의 미래를 닫아걸지만, 수평적 소통은 새로운 가능성을 연다.셋째, 교회는 피드백의 문화를 세워야 한다. 사역자 간 정기적인 피드백 모임, 사역 일지 공유, 목회자의 아내 및 가족까지 포함하는 지지 네트워크는 소명의 흔들림을 공동체적 지지로 보완하는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함께 사역한다’는 공동 감각은 구조로 표현될 때 힘을 가진다.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교회가 사역자를 ‘업적의 도구’가 아닌 ‘영적 동반자’로 대하는 존중의 문화를 회복하는 일이다. 사역자를 단지 일의 성과나 숫자로 평가하는 문화 속에서는 동역자가 아니라 기능적 인력으로 전락하게 된다. 교회는 사역자를 업적자로서 대하기보다, 영적 동반자로서, 가능성의 주체로서 존중하고 환대하는 문화를 키워야 한다. 이는 단지 예의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가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는 기본 태도이기도 하다.마지막으로 교회는 사람이 떠나지 않는 공간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 비전 공유, 정책 공청회, 열린 재정 보고 등 투명한 공동체 운영이 필요하다. ‘사역자는 교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지 알고 있다’는 감각, 그리고 그 방향을 함께 설계할 수 있다는 확신은 구성원이 오래 머물게 하는 힘이다.소통은 대화를 넘어 교회의 미래를 설계하는 도구다. 단지 사적인 공감이 아니라 제도와 구조를 세우는 설계도이자, 서로를 존중하고 신뢰할 수 있는 장치이다. 이제 교회는 질문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누구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함께 설계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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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6
    [오피니언] 조영석 목사의 생각하며 기도하며 - 가장 아름다운 비현실적인 이야기 크리스천헤럴드2025.08.07
    얼마전 흥행했던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로 인해 많은 남편들이 곤경에 처했었다. 한 소녀만 바라보고 살았던 소년, 커서 그 여인과 결혼해서 평생을 헌신하며 살았던 드라마 속 남편은 남자인 내가 보아도 감동적이다.  근처도 못 가는 자신의 남편을 보며 비교하는 아내들이 많았을 것이다.그러나 남편들도 할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드라마속 남자는 당시 현실과는 거리가 먼 설정 인물이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면 모를까 적어도 70-80년대의 보편적인 가장의 모습과는 대조된다. 당시 시대로 볼 때는 비현실적인 남편상이다. 가난한 나라에서 가난을 물려받은 가난한 아버지들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치열하고 전쟁 같은 삶을 살았다. 그런 하루를 보내고 집에 와서 아내에게 다정다감하고 아이들에게 친근한 아버지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힘들다. 더욱이 가부장적 문화에서 자란 아버지들은 자신들도 그런 경험을 한적이 없다. 이것이 당시 가정의 모습이다. 그 시대에 살았다면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편으로는 이 비현실적인 동화 같은 이야기가 사실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아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했던 주인공의 남편처럼 그 시대 남편들이 저렇게 아내를 위했더라면 얼마나 많은 가정들이 화목했을까, 지금 이혼율은 얼마나 낮았을까, 얼마나 많은 자녀들이 아버지에 대해 좋은 기억을 갖고 살았을까 싶어서이다. 내 딸도 저런 남자를 만나서 행복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속 캐릭터를 바램에 불과한 인물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여 평생동안 아내에게 잘하며 좋은 아빠로 살았던 남편들이 있었을 거라고 믿는다. 이런 사람들이 그때나 지금이나 있을 거라 믿기 때문이다. 시대가 그러니 어쩔 수 없었다 라고 변명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 믿기 때문이다.오늘날 교회를 보면서도 같은 마음이 듣다. 교회에 헌신하는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때이다. 교회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손해로 보이는 시대이다. 교회가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들 모두에게 손가락질 당하는 때이다. 사회와 언론에서 창피를 당하는 시대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를 감싸면 개념 없는 사람이 될 것 같은 때이지만 그래도 교회를 등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비현실적인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주님만 바라보며 수고하는 목사들이 있기 때문이다. 쓰러진 교회를 다시 세우기 위해 희생하는 성도들이 있기 때문이다. "폭싹 속았수다"는 제주 방언으로, 표준어 "완전히 속았다"와 달리 "무척 수고하셨습니다" 또는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전혀 다른 이 표현과 뜻이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속을 만큼 믿고, 다칠만큼 내 마음을 다 내어 주지 않으면 그렇게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기 힘들다.실망하고 교회를 떠난 이들이 속는 셈치고 다시 교회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젊은이들이 교회에 헌신하는 비현실적인 일이 이 시대에도 일어났으면 좋겠다. 교회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바보처럼 보이는 때이지만 끝까지 교회를 위해 수고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려왔으면 좋겠다. 우린 이보다 더 비현실적인 이야기에 대해 알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을 살리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이야기다. 죄인을 구하시려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신 예수님의 이야기다. 그가 인간을 사랑하셔서 비현실적인 선택을 하신 것처럼 우리도 교회를 위해서 다시한번 힘을 냈으면 좋겠다. 이 비현실적인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오늘이 되었으면 좋겠다.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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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5
    [오피니언] 김은주 교수의 탈진을 긍정하라 21-탈진 관점으로 본 선교사 이야기 8 <윌리엄 제임스 홀 일가> 크리스천헤럴드2025.08.07
    핍박 가운에 밀알로 썩어져 조선을 사랑한 일가를 본다. 윌리엄 제임스 홀(William James Hall)과 로제타 셔우드(Rosetta Sherwood Hall)는 평양 최초의 감리교 의료 선교사이다. 1890년 뉴욕시 메디슨가 빈민의료선교에서 만나 1891년 12월 조선 땅에 도착했다. 이들은 그 이듬해에 한국최초의 기독교식 결혼식을 올렸다. 닥터 홀은 평양선교를 위해 책임자로 임명되어 광성학당과 병원사역을 하며 복음을 전했다. 조선에 온지 2년째인 1894년 7월 청일전쟁 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치료하다가 자신이 병에 감염되어 숨을 거두었다. 로제타는 남편 없이도 여성선교를 감당했다. 그녀가 1890년에 도착하여 진료를 시작한 첫날 4명으로 시작하여 3년간 1만 4천명을 치료했다. 남편이 순직한 후 1894년 평양에 병원을 세웠고, 1894년 평양 여맹학교, 1898년 광혜여원, 1900년 평양외국인학교, 1909년 농아학교, 1928년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와 인천 간호전문보건대학 등을 설립했다. 그녀는 조선인 에스더와 박유산을 의사로 키웠고, 오봉래에게 점자를 가르쳐 특수교육 교사로 키웠다. 로제타는 43년간 조선을 위해 사역했다.로제타의 외아들 셔우드 홀은 의료선교사가 되어 조선 최초의 해주 결핵요양원을 설립했다. 그는 결핵 퇴치 자금 마련을 위해 조선 최초의 크리스마스 실을 발행했다. 셔우드 홀과 아내 메리안 홀은 15년간 헌신하다가 1940년 일제에 의한 강제추방을 당했다. 닥터 홀의 일가족이 조선을 위해 헌신한 기간은 73년이었다.필자는 닥터 홀 일가의 탈진을 발견하고자 한다. 첫째, 신체적 탈진이다. 로제타는 장질환을 앓았고, 닥터 홀은 기침으로 시달렸으며, 온 가족이 이질을 앓기도 했다. 홀은 의사, 간호사, 약제사, 안내역까지 혼자 맡아 일했기 때문에 고된 사역이었다. 평양에서 밤낮 환자를 치료해주다가 병에 걸렸다. 발진티푸스와 고열과 온 몸이 마비되어 결국 순직했다. 로제타는 여성선교사로서 수많은 환자를 쉴 틈도 없이 치료함으로써 힘겨운 사역이었다. 둘째, 심리적 탈진이다. 로제타는 남편을 잃고, 4살 된 딸을 하늘나라로 보내고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슬픔과 싸웠다. 그리고 영적 탈진도 경험했다. 가족의 절반을 잃음으로써 인생의 아픔과 두려운 시련을 겪었다. 가장 소중한 사람을 빼앗겨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교훈도 희미 해졌다. 셔우드 홀은 결핵요양소를 운영하다가 스파이로 몰려 형을 언도 받는 사건으로 조선을 떠나는 아픔을 겪었다. 닥터 홀의 일가는 환자를 치료하면서 초조와 공포감, 그리고 심리적 압박도 많이 경험했다.셋째, 문화적 탈진이다. 당시 천주교들이 처형을 당하던 시기였다.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조상을 숭배하는 관습과 힘든 투쟁의 시간이었고, 기독교 포교자는 사형한다는 법 때문에 공포와 위협을 당했다. 외국인들은 조선 아이들을 잡아먹고 약으로 쓴다는 소문이 퍼져 주의를 기울여야만 했다. 평양은 가장 문란하고 더러우며 폭력배들로 유명한 곳이었다. 10만 인구 중에 외국인은 닥터 홀 가정 뿐이었으므로 언제 폭도가 들이닥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이었다. 청일전쟁은 시체들이 널리게 했고, 악취와 몸서리 쳐지는 잔해를 낳았다. 선교사는 시험 이상의 고통과 시련을 경험했다.닥터 홀 일가의 탈진회복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닥터 홀의 지혜로운 대처방법이다. 문화충격과 열악한 환경을 탓하기 보다 어려움을 즐겁게 대처했다. 둘째, 닥터 홀의 굳은 신념과 헌신이다. 닥터홀은 조선인들의 적개심 앞에서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희생시켜 이 도시의 문을 여실 생각이라면, 나는 그 희생자가 되는 것을 피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의료사역에 헌신했다. 셋째, 로제타의 약속과 헌신이다. 가족을 잃은 상심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고, 사역을 감당할 것을 약속했다. 그녀는 네 번의 전쟁을 체험하면서도 여성사역과 병원 및 학교사역을 훌륭하게 감당했다. 넷째, 셔우드 홀의 사랑과 친절한 헌신이다. 그는 원수가 아버지 홀을 죽이려 했고, 자신의 사역을 방해하던 원수 같은 집안의 아들과 손자를 폐병과 결핵에서 치료해줌으로써 그의 가족들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기쁨을 누렸다.윌리엄 제임스 홀은 일생의 사역이 짧은 듯 했지만, 가족들의 선교사업에 길을 다져주었다. 그의 일가족은 조선을 향한 열망과 사랑의 헌신으로 가득 차 있었고, 마지막까지 태극기를 향하여 만세를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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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4
    [오피니언] 최재홍 목사의 하루한장 말씀 - 우리는 하나님의 깃발아래 있습니다 크리스천헤럴드2025.08.07
    교계의 연합행사에는 대부분 여러 모임 단체에서 주관하고 참가하기에 행사시간이 길고 많은 분들이 참석하기에 당연히 순서가 길어지고 다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중에는 국민의례 순서가 있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순서입니다. 그래서 행사에는 언제나 기수단이 깃발을 들고 앞서서 입장을 합니다. 저는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기수단원들이 입장할 때에 가슴이 뛰고 설렙니다. 행사의 개회선포와 같기 때문입니다. 기수단이 입장함으로 행사가 시작되었다는 사인도 되고 순서자들은 ‘마음준비를 단디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항상 그렇듯이 자기 일처럼 일하는 봉사자들과 은밀한 섬김으로 힘을 더해주시는 조력자들과 봉사자들이 협력할 때, 그리고 참석자들의 호응이 뜨거울 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게 됩니다.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가까이에서 섬길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여러번의 행사 중에 눈여겨 보았던 몇몇 단체들이 있었습니다. 행사의 서막을 열어주시는 찬양팀들입니다. 그리고 합창단으로 각처에서 오셔서 헌신해 주시는 분들, 그리고 어떻게 생각하면 어른들의 모임과 거리가 먼 친구들, 바로 기수단으로 섬겨주는 우리 2세 청소년들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연합행사 모임의 시간은 주말 오후 시간에 이루어집니다. 그 이유는 각자가 섬기는 교회 공동체를 섬기는 일에 부담을 드리지 않기 위해서 가능한한 예배 시간을 피해서 모이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모임시간이 얼마나 힘들고 긴 시간이었을지 죄송한 맘이 들었습니다. 또한 행사 전에는 최종 리허설을 합니다. 한 시간 전에 오셔서 각자의 동선을 파악하고 의상을 입고 악보와 준비물을 챙겨야 합니다. 마이크부터 방송실과 순서에 대해서 의논을 해야 하고, 파킹 랏과 실내온도와 조명도 점검해야 합니다. 행사 전의 긴장감으로 이 시간은 모두가 예민한 시간입니다. 집중력이 필요한 시간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행사를 마치면 어두운 저녁시간이 되어서, 행사에 참석했다는 말은 온 주말의 시간을 다 허비한 것과 같습니다. 가정에서 쉬고 싶고, 친구들과 놀고 싶을 시간에 몇 시간동안을 바른 자세로 앉아 있어야 합니다. 정말 고맙고 감사한 친구들입니다. 성경에서도 중요한 깃발이 나옵니다. 바로 여호와 닛시(Jehovah-Nissi, 뜻: 여호와는 나의 깃발)입니다. NIV영어 성경에는 원어인 히브리어가 없습니다. 그대신 영어로 ‘The Lord is my Banner’ 입니다. 출애굽 직후, 이스라엘은 르비딤에서 아말렉과 전투를 치릅니다. 모세는 이 전투에서 여호수아를 내세우고, 모세는 산 위에서 두 팔을 들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모세의 팔이 힘들어서 쳐질 때면 아론과 훌이 모세의 양편에서 팔을 붙들어 줍니다. 여호수아가 아말렉을 쳐서 무찌릅니다. 승리 후에, 모세가 제단을 쌓고 ‘여호와 닛시’라고 명명합니다(출 17:5).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승리를 기념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대부분의 행사는 먼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우리는 지금 영적인 선한 싸움에 자원함으로 참가해서 전쟁을 치르는 중입니다. 우리의 대장되시는 예수님을 따라서 최후의 승리를 위해 영적전투 중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영적전선의 최전방에서 함께 싸우는 동지들입니다. 여호와의 군대, 용사들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찬양팀, 합창단, 기수단은 우리 모두를 대표해서 영광을 돌려드리는 분들입니다. 드러나지 않지만 거룩한 깃발을 높이들고 주께 찬양하는 그리스도의 군사들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가든지 우리는 하나님의 깃발아래 있습니다. 우리 교회들은 여전히 펜데믹 후유증을 앓고 있습니다. 예전처럼 높은 출석율과 자녀들의 웃음소리가 교회에 더 울려퍼지도록 회복되어야 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많은 예배에 참석하고, 교회를 방문하는 친구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든든하게 수호하는 주 예수의 군대로 성장하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예배를 함께 준비하며 수고해 주시는 모든 분들께, 우리의 친구들이 어른들의 예배에 힘을 더해주니 만날 때마다 힘이 생기고 든든함을 느낍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 간구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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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3
    [오피니언] 김은주 교수의 탈진을 긍정하라 20 <탈진 관점으로 본 선교사 이야기 7 - 아델 매리언 필드> 크리스천헤럴드2025.07.07
    전체 선교사의 30%이상이 중대한 스트레스를 경험한다. 그 중에 소수는 스트레스와 탈진으로 인해 알코올 섭취, 약물 과다, 흡연 증가 현상을 나타내기도 한다. 흥미롭게도, 스트레스와 탈진 유발 원인은 훈련을 통해 어느 정도 회복 탄력성을 갖는다.19세기 후반은 여성들의 해외사역이 빛을 발휘한 시기이다. 여성 선교기관과 더불어 독신 여성 선교사가 급증했고, 세계 복음화 사역에 놀라운 역사를 남겼다.아델 M. 필드(Adele Marion Fielde, 1839-1916)는 독신 여성 선교사, 사회운동가, 과학자, 작가로서 활약했다. 그녀는 의학을 공부했고, 2년 동안 생물학도 공부했다. 또한 주립 사범대학에서 공부한 뒤 교사가 됐다. 부모님을 따라 침례교도에서 자라났지만, 젊은 시절 부모님의 허락 하에 만인구원파 신자가 되었다. 27세 때, 침례교도 태국 선교사 후보생인 사이러스 칠콧(Cyrus A. Chilcott)과 약혼 했다. 두 사람은 태국에서 만나기로 했지만, 그녀가 100일 정도의 험한 항해 끝에 만난 것은 신랑이 방콕에서 장티푸스에 걸려 사망했다는 비통한 소식이었다. 그녀는 당시 항해를 이렇게 기록했다. “고국 땅 해안이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고 서 있노라니 갑판 위로 천천히 함박눈이 내렸다…다음 날은 밤새도록 파도가 높이 일었고 며칠 연속 우리는 선실 침대에서만 지내야 했다…인도양에서 만난 태풍은 우리가 탄 배를 며칠 동안 거칠게 몰아갔다…자비와 수마트라 사이의 좁은 해협을 지날 때에는…밀림 열병이 선장을 제외한 모든 승객들을 덮쳤다…혈관으로 마치 얼음이 지나는 것 같은 한기가 느껴지더니 이내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졌다…혼수상태에 빠진 나는 이제 죽는가 보다 생각했다”필드는 태국에서 6년동안 선교사역을 했고, 그 다음 중국에서 20년간 약 500여명의 전도부인을 훈련시켰다. 그녀의 훈련방식은 예전과 달리 훈련구조, 운영 방식, 훈련 목표를 제도화하며, 조직 관리 실력과 훈련계획을 활성화시켰다. 전도부인들의 이야기는 “탑 그림자”라는 책으로 출간했다. 그후 1889년 선교사직을 사임했다. 그녀는 사후 10년 후, 침례교 선교회에서 “우리 성경 학교들의 어머니”라는 찬사를 받았다. 필자는 필드의 탈진에 대해 발견하고자 한다. 첫째, 신체적 탈진이다. 그녀는 선교사로서 첫 항해의 출발은 죽음을 넘나드는 고통이었다. 100일여간의 항해는 열병으로 혼수상태를 경험했고, 태풍과 좁은 해협은 두려움의 한계를 느끼게 했다. 둘째, 심리적 탈진이다. 약혼자의 사망소식은 공허함과 고뇌와 비통함을 자아냈다. 침례교 태국 선교내의 동료 남자 선교사와는 충돌과 긴장감이 악화되었다. 미혼 여성으로서의 오해와 불신자들과 어울린다는 비난과 남자 선교사 보다 상당히 낮은 연봉처우 등은 종종 시험 거리였다. 그녀가 침례교에서 금지하는 카드놀이를 한 것과 댄스파티에 참석한 것은 비난의 소재였다. 6달에 걸친 논란은 그녀가 급기야 대마초 여섯 통을 피우게 만들었다. 주체할 수 없는 신경과민으로 약물을 남용했다. 셋째, 문화적 탈진이다. 방콕과 중국의 사역 환경은 심히 열악했다. 적막하고 지독한 쓴맛을 경험했다. 서양인 속에도 남녀 선교사간의 차별과 특히 독신 여성으로서 부당한 처우를 경험했다. 필드의 탈진회복 방법을 모색한다. 첫째,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지도 못하고, 만나지도 못한 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낸 아픔은 하나님을 믿기에 견딜 수 있게 해줬다. 둘째, 독신 여성 선교사로서 자부심이었다. 독신 여성으로서 부당한 처우는 2년간의 논란 끝에 합당한 대우를 하도록 만들었다. 독신 여성이 기혼 남성에 비해 효율적이라고 증명했다. 셋째, 그녀는 재능을 잘 활용했다. 싹싹한 성격과 능숙한 중국어와 타고난 글 솜씨는 선교회에 귀한 자산이 되었다. 그녀는 여러 저술과 학술 논문과 중국의 “산터우 방언 사전”과 가이드를 완성했고, 개미 연구로 개미학에도 공헌을 했다. 탈진은 훈련을 통해 회복이 가능하다. 아델은 자신의 싹싹한 성격과 글솜씨를 활용하여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사회운동가로서, 과학자로서, 작가로서 많은 업적을 기여했다. 이처럼 긍정심리학의 도구인 성격 강점과 대표 강점 적용하기를 추천한다. 자신을 돌아보아 성취한 것, 경험 등은 자신을 잘 대표하는 상위 강점이다. 대표 강점은 현재의 정체성이며, 미래의 소중한 자산이다. 대표 강점을 많이 적용할수록 회복 탄력성을 갖고, 행복 지수가 상승하는 사실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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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조영석 목사의 생각하며 기도하며 - 타이밍 크리스천헤럴드2025.07.07
    아르헨티나에서 살다 미국으로 온 아내 덕분에 남미 바비큐인 “아사도” 를 알게 되었다. 소고기를 부위별로 숯불에다 장시간 구워서 먹는 요리이다. 모든 부위를 통갈비처럼 두껍게 잘라서 굵은 소금과 레몬으로만 간을 해서 구워 먹는 단순한 조리법이지만 먹으면 먹을수록 고기의 참 맛을 느끼게 해주는 별미이다. 다른 양념 없이 절묘하게 간만 해서 먹는 이 요리는 먹어본 사람은 그 진가를 안다. 간을 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잘 굽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먹는 방법은 얇게 썬 고기를 불 위에 올려놓고 익으면 먹는 것이지만, 아사도는 큰 고기덩어리를 통 채로 굽기 때문에 익는데 오래 걸려서 불조절을 잘 못하면 태우기 십상이다. 그래서 아사도를 시도하는 초보자들이 가장 흔히 하는 실수가 고기 겉은 태우고, 속은 날고기처럼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설익게 굽는 것이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비싼 고기를 잘못 구워서 절반도 먹지 못하고 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만만하게 보았다가 손님들을 모셔놓고 여러 번 곤욕을 치렀다.  굽는 과정은 사실 간단하다.  숯을 태워서 불길이 더 이상 올라오지 않을 정도로 죽으면 고기를 구울 수 있는 불이 된다. 그런데 그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불이 채 죽기 전에 고기를 먼저 올려 놓았다가 센 불에 고기를 태우고 마는 것이다. 고기속까지 익으려면 아직 멀었는데 열이 너무 쎄서 더 굽지 못하고 불판에서 빼야 한다. 이렇게 불 위에 올렸다 뺐다 를 반복하다 보면 결국 고기 겉은 타고 속은 전혀 익지 않아 맛있게 먹을 수가 없게 된다.그렇게 실패를 거듭하다 어느정도 경력이 쌓여 이제 나름 가족과 주위에서 아사도를 잘 굽는 사람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그 비싼 대가를 치르고 터득한 비결이 생각보다 간단하다. 바로 고기를 불판위에 올려놓는 타이밍이다.  한 시간 가까이 숯불 위에서 익혀야 하기 때문에 불이 너무 강해도 안 되고, 너무 약해도 안 된다. 조절이 가능한 가스불과 달리 숯은 열을 가할 수 있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고 굽기에 알맞은 적정 온도가 있기 때문에 그 때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고기를 잘 굽는 비결은 그 시간이 될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심이다. 빨리 구워 먹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야 하고, 더 기다리면 불이 꺼질 것 같은 불안감과 조바심을 이겨내야 한다. 그리고 때가 되어 고기를 불 판에 올려 구워 보면 절대로 늦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내하고 기다리다 보면 겉이 타지 않고 속도 아주 잘 익은 최상의 고기 맛을 즐기게 된다. 고기를 구워 본 사람이라면 의외로 가장 잘 구운 고기는 처음보다 나중인 것을 경험한적이 있을 것이다. 그때가 가장 좋은 타이밍이라는 증거이다.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이 되는 것도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의욕이 앞선다고, 불같이 뜨거운 열정이 있다고 해서 주님께서 일을 맡겨 주시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적당히 죽어야 고기를 구울 수 있는 쓸모 있는 불이 되는 것처럼 내 자아가 죽었을 때 비로소 주님께서 쓰실 수 있는 사람이 된다.성급해서, 내가 너무 원해서 그 타이밍을 주시하지 않을 때가 있다. 그것이 개인의 계획이든 사업 확장이든 교회 건축이든, 중요한 일을 앞두고 오히려 적절한 때를 감지하지 못해 실수를 할 때가 있다. 주님의 시간이 될 때까지 꾹 참고 인내하고 기다려야 하는데 섣불리 달려 들었다가 타버린 고기처럼 투자한 것의 절반도 못 건질 때가 있다. 인내는 주님에 대한 신뢰이며 타이밍은 하나님의 시간인 것이다.“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전 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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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1
    [오피니언] 김병학 목사의 소통하는 교회 - 소통은 빛이다 크리스천헤럴드2025.07.07
    지난 6월 8일, 영국 플리머스 대학 연구진은 주목할 만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전 세계 해양의 약 21%가 지난 20년간 점점 어두워졌다는 것이다. 이른바 ‘오션 다크닝(Ocean Darkening)’이라 불리는 이 현상은 바다 표층의 변화로 인해 태양빛이 더 이상 바다 깊숙이 침투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이 영향은 해양 생물의 90%가 살아가는 ‘광달층’에 직격탄이 된다. 광합성이 가능한 이 층에서 플랑크톤이 자라지 못하면, 먹이 사슬이 붕괴되고 생물 다양성이 위협받는다. 생태계 전체가 흔들리는 것이다.이 뉴스를 읽으며 문득 오늘날 교회 생태계가 떠올랐다. 교회의 생태계의 변화가 한국과 미국의 대통령 선거의 과정에서 더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교회도 ‘처치 다크닝(Church Darkening)’이라는 비슷한 과정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닐까. 외형은 여전하지만, 신앙의 생명력이 스며들던 깊은 층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다. 말씀은 선포되지만 마음으로 흡수되지 않고, 공동체는 모이지만 서로를 잘 알지 못하며, 소통은 있지만 진심이 부족하다. 교회 내부에 빛이 닿지 않는 그늘이 생기고 있는 것이다.우리가 사는 사회는 지금 커다란 변곡점에 있다. 정치적 양극화는 한국과 미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사회적 신뢰를 약화시키고 있으며, 소셜미디어를 통해 강화되는 진영 논리는 공동체 구성원 간의 대화를 갈라놓는다. 이러한 흐름은 단지 바깥 세상 이야기로 그치지 않는다. 교회 안에도 이미 그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같은 설교를 듣고도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며, 동일한 사안을 두고 극단적으로 갈라지는 모습이 곳곳에서 나타난다. 목회자와 교인 사이, 교인과 교인 사이, 세대와 세대 사이의 균열은 점점 더 깊어지고 있다.이 모든 문제의 중심에는 ‘소통의 부재’가 있다. 교회는 서로 이야기하지 않게 되었고, 무엇보다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빛이 사라진 바다에 생명이 머물 수 없듯, 소통이 없는 교회에도 건강한 공동체는 존재할 수 없다. 생명의 빛이 닿지 않는 교회, 그것은 이름만 남은 조직일 뿐이다.오션 다크닝을 극복하려면 바다의 순환 구조, 조류, 온도를 바르게 조정해야 한다. 교회 생태계도 마찬가지다. 관계의 흐름을 복원하고, 서로의 온도를 느끼며, 방향을 바로 잡을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 그 중심에는 소통이 있다. 소통은 단순히 말을 주고받는 기술이 아니다.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나의 언어를 나누는 깊은 행위다.소통의 회복을 위해 교회가 우선해야 할 첫 번째 변화는 ‘듣는 리더십’이다. 이제는 설교만으로 통하지 않는 시대다. 목회자는 공동체 안의 다양한 목소리를 듣고, 다양한 삶의 자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교인은 신앙의 대상이자 사역의 동반자다. 그들의 이야기가 교회 정책과 방향 속에 반영되어야 진정한 ‘몸의 공동체’가 된다.둘째, 세대 간 대화가 절실하다.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단순히 재미없어서가 아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자신의 언어로 신앙을 표현할 기회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른 세대는 ‘우리가 하던 대로’만 고수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방식, 그들의 질문에 열린 마음으로 다가가야 한다. 어른들은 가르치려 하기보다 들으려는 태도를, 청년들은 비판보다 제안과 참여를 통해 다리를 놓을 수 있어야 한다.셋째, 디지털 시대에 걸맞은 소통 전략이 필요하다. 코로나19 이후 온라인 예배와 비대면 교제가 일반화되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관계를 피상적으로 만들었다는 반성도 있다. 그러나 디지털 소통은 피할 수 없는 흐름이다. 중요한 것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다.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그 안에 ‘진심’이 담겨야 한다. 교회는 온·오프라인을 연결하는 ‘디지털 융합 공동체’를 지향해야 한다.플랑크톤은 바다에서 산소를 만들고 먹이 사슬의 기초를 형성한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의 소통은 신앙의 산소이자 공동체의 기반이다. 듣고, 말하고, 함께 걷는 단순한 행위 안에 교회의 본질이 담겨 있다. 교회가 세상의 빛이라는 성경의 말씀이 의미 있으려면, 먼저 교회 안에서 그 빛이 살아야 한다.“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이 한마디가, 지금 이 시대 교회를 밝힐 수 있는 가장 실제적이고 강력한 빛이 될 것이다. 세대와 진영 논리에 치우친 침묵을 깨는 용기, 그것이 곧 회복의 시작이며, 소통은 그 가장 중요한 열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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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0
    [오피니언] The letter 10 김광근 - 영원한 것을 바라보는 시선 크리스천헤럴드2025.07.0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잡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고린도후서 4장 17-18절 하루하루를 살아가다 보면, 몸은 지치고 계획은 어그러지며 때로 사람들의 기대와 현실 사이에서 마음이 소모되곤 합니다. 사도 바울도 같은 현실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걸사람'이 쇠하여 가는 대신 '속사람'이 날마다 새로워진다고 고백합니다. 시선을 현실적인 어려왔이 아닌,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에 고정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현실을 부정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현실 위에 놓인 더 큰 진리를 바라보는 능력입니다 고난은 결코 가볍지 않지만, 하나님은 그 무게를 헛되게 두지 않으십니다. 순간적인 환난은 결국 영원한 영광을 빚어 내는 재료가 됩니다. 우리는 눈앞의 손익 계산으 로는 해석할 수 없는, 하나님의 깊은 섭리 속에 초대된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각자의 자리에서 어려움이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때마다 마음의 렌즈를 바꾸어 보십시오 우리 삶의 현실속에 놓인 환경 너머를 바라볼 때 약해져 가는 것 같은 우리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은 조용히 영원한 영광을 심고 계십니다. 잠시의 환난이 빚어 낼 영원한 영광을 소망하며 . 오늘을 흔들리지 않는 담대함으로 걸어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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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최재홍 목사의 하루한장 말씀 - 핑계가 많은 사명자 크리스천헤럴드2025.07.07
    좋은 뜻으로 함께 모여서 한마음으로 열정적으로 일을 하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어긋나고 마음이 불편해지는 경우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런 경우에는 마음속 표현을 상대방에게 전달하기도 조심스럽습니다. 몇 번은 “사정이 있었겠지, 내가 이해해야지”, “그럴 사람이 아니지, 내가 더하면 되지” 하면서 상대방이 힘을 내고 초심으로 회복할 것을 기대해봅니다. 그런데 상대방은 여전히 내 마음과 다르게 행동합니다. 눈치없이 이번에는 핑계를 댑니다. 말도 함부로 하고 자신이 옳다고 합니다. 누구에게나 약속은 자신의 명예와 삶이 걸린 소중한 가치와 시간입니다. 핑계와 변명의 특징은 금방 들통이 난다는 것입니다. 핑계와 변명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열정을 약화시켜서 하나되기가 어렵습니다. 핑계하고 변명은 습관이 됩니다. 자기만 모르고 남들이 다 아는 습관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전을 찾아보니 핑계란 “내키지 아니하는 사태를 피하거나 사실을 감추려고 방패막이가 되는 다른 일을 내세움” 혹은 “잘못한 일에 대하여 이리저리 돌려 말하는 구차한 변명” (네이버사전) 이라고 정의합니다. 변명은 “어떤 잘못이나 실수에 대하여 구실을 대며 그 까닭을 말함”으로 정의합니다. 우리 인간의 핑계와 변명은 창세기의 하나님께서 천지창조하신 이후에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것이 우리 죄의 시작이 될 줄은 아담과 하와도 몰랐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살펴볼 때에 핑계와 변명은 거짓과 불의함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 결과들이 대부분 찝찝하고 우울하게 만들기도하고 마음을 불편해집니다. 선을 넘으니 결국 죄가 되었고 하나님과는 영원히 단절되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막중한 사명을 감당하면서도 핑계와 변명을 댑니다. 이래서 안되고 저래서 못하고, 이 사람은 맘에 안들고 저 사람은 나쁘고, 그렇게 말하다가 자기의 연약함과 약점도 변명거리가 됩니다. 모세가 그랬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연약함을 핑계로 대며 하나님께서 명령을 철회하시길 기대합니다. 언변에 능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말주변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어려서부터 애굽의 학문을 익혔고, 말과 행사에 능한 사람이라고 성경이 말씀합니다(행7:22). 결국 언변이 부족하다는 핑계는 애굽으로 가지 않으려는 핑계고 꼼수입니다. 하나님 뜻에 순종하지 않으려는 불순종과 거부입니다. 창조주 앞에서 자신은 ‘본래’ 말을 잘하지 못한다고 말하지만 아닙니다.출애굽기 4:10~17은 하나님과 모세의 대화입니다. ‘입’, ‘혀’, ‘말’이라는 단어가 무려 14번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설득하시는 장면입니다. 뭔가 주객이 전도된 느낌입니다. 사명은 사명을 받은 자의 조건에 의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명은 보내신 이의 능력에 의해서 이뤄집니다. 당연히 사명자는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야 옳습니다. 결국 모세의 핑계를 들으신 하나님은 ‘입’을 지으신 창조주이심을 천명하시고, 모세의 입과 함께 계셔서 모세가 할 말을 가르치겠다고 약속하십니다.오늘날 우리들의 이유를 들어보면, 노래를 못해서 성가대를 못하고, 가르치는 은사가 없어서 교사를 못합니다. 바빠서 교회에 못가고, 피곤해서 예배를 드릴 수 없다고 핑계를 댑니다. 정말로 몸이 약하고 병 중에 있어서 혹은 직업상 예배와 봉사 시간이 겹쳐서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핑계인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행사의 책임자이고 초청인임에도 불구하고 약속된 모임에 불참을 하고 핑계를 둘러대기도 합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어린아이들도 하지 않는 일을 부끄럼없이 저지릅니다. 핑계와 변명을 둘러대는 모습을 공동체에서 내 가족과 어린 자녀들이 보고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그럼에도 하나님께 쓰임받는 것은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고집과 연약함, 불순종하는 죄를 하나님이 끝까지 인내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모세의 불평과 핑계때문에 그를 포기하셨다면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무명의 양치기로 인생을 마쳤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대장정의 구원을 인도하는 역사의 주인공과 사명자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고집도 세고 성질도 못난 우리를 참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사명마다 핑계거리를 대고 변명구실을 찾는 우리를 설득하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새 길을 만드시며 일꾼으로 빚어가십니다. 이민생활 속에서 감당해야 할 사역이 어렵게 느껴지더라도 사명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충성스런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부터 이제라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더욱 정직한 말을 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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