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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지상설교 - 박희민 목사편 - 크리스천과 노동 (1)

작성일 : 2022-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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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9장 1절~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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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를 제대로 준비하는 목사들이라면 설교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자세는 물론, 삶의 철학, 세계를 보는 시각과 가치관 등이 담기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존경받는 목회자들은 자신만의 명설교들을 가지고 있다. 남가주 한인 기독교계에서 몇 안 되는 존경받는 원로로 꼽히고 있는 목사 중 한 명이 새생명선교회 회장 박희민 목사다. 박희민 목사는 1936년 충남 예산에서 출생했다. 에티오피아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1974년부터 남가주에서 목회했다. 1988년부터 나성영락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취임한 후 2004년 은퇴했다. 현재 새생명선교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박희민 목사의 지상설교 4번째 주제 ‘크리스천과 노동’ 첫 번째다. (편집자 주)


그러나 몇 주가 지나면 너무 무료하고 답답해서 사표를 내고 나갔다. 

그런데 한 사람은 너무 권태롭고 무료한 삶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을 매고 자살하고 만다. 

이 단편소설이 주는 교훈은 크다 


인생과 일은 땔 수 없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데칼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유명한 철학의 명제를 남겼다. 나는 이보다 더 좋은 명제가 “나는 일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 한다”라는 말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만큼 우리의 삶과 일은 분리해 생각할 수 없는 관계이다. 일처럼 삶에서 매일 중요한 요소가 없으며, 존재 의미를 더해주는 것이 별로 없는 것이다. 할 일이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일본사람이 쓴 단편소설 중에 ‘36호실’이라는 것이 있다. 어떤 큰 회사에서 고용인들에게 많은 퇴직금을 주지 않고 스스로 물러나게 하는 방법으로 고안해 낸 것이 36호실 발령이었다. 그곳으로 발령받은 사람들은 처음에는 너무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아무 일도 하는 일 없이 그저 놀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몇 주가 지나면 너무 무료하고 답답해서 스스로 사표를 내고 나가게 됐다. 그런데 나중에 한 사람은 너무 권태롭고 무료한 삶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을 매고 자살하고 만다. 이 단편소설이 주는 교훈은 크다. 일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며 할 일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불행인가를 말해준다.

무슨 일을 어떤 자세로 하느냐 하는 문제는 우리의 인격과 삶을 형성하고 결정해 주는 중요한 것이 된다. 6일 동안 열심히 일하고 주일에 안식하며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삶은 참으로 복된 삶인 것이다. 일평생 열심히 노동한 사람에게 은퇴의 삶은 더욱 빛나며, 의미가 있는 것이고 값진 삶이 되는 것이다. 

크고 위대한 일만이 귀한 것은 아니다. 집에서 자녀들을 돌보고 살림을 하고 가사 일을 하는 것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아주 값지고 똑같이 귀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는 일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아브라함은 75세에 부름을 받았다. 모세는 80세에 부름을 받았다. 이것이 얼마나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는지 모른다. 

강석규란 분이있다. 이분은 논산 근처에서 출생해서 성장했다. 너무 가난해 고등학교를 가지 못했다. 그러나 검정고시를 쳐서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학생회장을 지냈으며 나중에는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까지 됐다. 그리고 졸업 후 중고등학교에서 교사로 가르치다가 나중에는 명지대학 교수로 일하고 65세에 은퇴했다. 

은퇴 후 건강하니까 다시 대학을 세워 1대 2대 3대 총장으로 20년간 섬기다가 4대 총장으로 정근모 장로께 맡기고 이사장이 됐다. 그 대학이 호서대학이다. 그리고 90세가 넘어서 다시 사이버 정보 통신대학교를 세워 총장으로 98세까지 일했다. 전국 사립대학총장협의회 회장도 지내고 기독교수선교협의회 회장으로도 봉사했다. 교회에서는 원로 장로다. 

일본의 히노하라 박사도 101세다. 동경 세인트누가병원과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으며 병원 명예회장과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방지일 목사도 100세가 넘었음에도 설교하고 집회를 인도하신다. 창세기 6장 3절을 보면 하나님이 사람의 수명을 120세로 제한시켰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은 현대의학이 뒷받침해 주고 있다. 현대의학은 사람이 건강을 잘 돌보면 120세까지 살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나면서 시각장애자가 된 사람을 놓고 주신 교훈이 기록되어 있다.


고난으로 일하시는 하나님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우리가 고통당하는 것이 인간의 죗값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본문에 나오는 나면서 소경 된 사람에 대해 질문하기를 이 사람이 소경 된 것이 부모의 죄 때문인가 자기 자신의 죄 때문인가를 물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사람이 나면서 소경 된 것이 부모나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아주 새로운 관점에서 해석해 주셨다. 

유대인들은 인간의 고통을 바라보면서 그 사람을 정죄하고 비판하고 판단함으로 더 많은 고통을 가하였다. 고통당하는 사람에게 치유보다는 더 가혹한 고통과 상처를 주므로 그것을 보고 즐기려고 하는 잔인함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 그 문제를 보시고 대답해 주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을 통해서도 오히려 더욱 강렬하게 역사해 주신다는 것을 말씀해 주셨다. 

C.S. 루이스도 고난은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게 해 주시는 확성기라고 하였다. 보통 때는 하나님의 음성이 잘 들리지 않는데 고통당할 때는 더 잘 들리고 분명히 들린다. 그래서 그는 고난은 변장하고 찾아오는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은 고통이라는 채널을 통해 가장 생생하게 들린다. 

고정욱이라는 작가가 있다. 그는 소아마비로 장애인이 되어 비관하고 자살하고 싶었다. 옆집 할머니도 자기를 향해 아무 쓸모 없는 아이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많은 상처를 받았다. 그러나 믿음으로 일어섰고 마침내 공부해서 박사도 되고 글을 쓰기 시작하여 자기와 같은 고난 당하는 사람들을 대변하고 그들에게 희망을 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원망에서 해방되어 왜 나를 이렇게 고난 당하게 하셨는가? 그 답을 스스로 찾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 고난은 그로하여금 정금같은 인격과 신앙의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해 고난의 용강로를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 뜻 알 때, 복된 삶

예수님은 요한복음 4장 34절에서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 신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고 말씀했다. 

누가 세상에서 가장 복되고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것인가? 나를 보내신 이의 섭리와 뜻을 이해하고 그가 나를 통해 이루어 가시기를 원하는 일을 성취하며 사는 사람이 복된 삶이다. 학벌, 지위, 많은 돈 등이 인생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 그런 것들은 결국 다 버리고 가야하는 것이다. 영원히 남는 것은 하나님의 소명 안에서 살아가는 삶인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이루어 가시기를 원하는 것을 이루며 사는 삶인 것이다. 그런 일이 어떤 일인가? 내가 즐겁게 할 수 있고 하면 힘이 생기고 보람을 느끼고 오래 계속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일 즉 노동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죄의 대가로 남자들은 땀을 흘리며 일하며 살게 되었고 여자들은 해산의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는 말씀이 있다. 그래서 노동을 죄의 대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 사회에서는 특별히 불교나 유교문화권의 영향을 오랫동안 받아와서 노동은 쌍놈들이나 하고 양반은 먹고 편히 놀고 쉬는 것이 상팔자라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서양 선교사들이 한국에 와서 땀을 뻘뻘 흘리며 운동을 하니까 양반들이 아니 종들에게 시키지 왜 저렇게 자기들이 고생하며 뛰냐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있지 않은가? 이것은 스포츠를 모르는 무식에서 나오는 말이다.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한다.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죄에서 속죄해 주셨을 뿐 아니라 우리의 노동마저도 신성한 것으로 회복시켜주셨다. 할렐루야!

이 점에서 크리스천으로서 어떻게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을 바로 섬기고 믿음 생활을 잘할 수 있는가? 한마디로 매일 삶의 터전에서 일하고 노동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그를 기쁘시게 하느냐, 못하느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의 노동관과 직업관이 바로 정립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시간을 직장과 사업장에서 보낸다. 

고로 그리스도인의 인격과 삶이 어디에서 헝성되는가? 일터와 사업장에서 형성된다. 삶의 중심지와 제자훈련학교가 어디냐? 일터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업장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지 못할 때 신앙인으로 바로 살 수 없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기독교 교인들은 일터에서 무엇인가 다르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 때 멋진 그리스도인이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로 살아가는 것이다.


박희민 목사

새생명선교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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