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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Explo74대회 50주년을 맞아

작성일 : 2024-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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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plo’74 대회를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이루셨다. 그 중심에 김준곤 목사님이 있었고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준비하셨고 사용하셨다>

잠언 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이 말씀은 CCC역사와 김준곤 목사님을 준비하시고 그로 하여금 한국 민족을 위한 민족 복음화와 그를 통해서 날마다 꿈을 꾸게 하시므로 Explo’74와 세계선교 한국을 이루게 하시는 모든 사역을 대표하는 말씀이다. 

 한국 민족복음화 운동은 경제 개발의 속도에 맞춰 성취되었던 Explo’74는 하나님의 특별한 지혜로 전무 후무한 기독교 행사로 기록되고 있다. 그 시대를 살아온 성도들은 여전히도 Explo’74 50 주년을 맞이하면서 Explo’74에서 일어났었던 이야기를 듣고 나누면서 집회에서 경험한 간증에 마치 어제의 일처럼 감격하고 흥분한다.  

 그날의 50주년을 맞이하면서 이러한 열매를 맺기까지 하나님의 인도와 섭리에 대해서, 그리고 그 대회가 있기 까지 하나님은 과연 어떻게 준비하셨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하나님이 광주 숭일 중,고등학교의 32살의 교장 김준곤 목사를 1957년에 미국 풀러 신학대학교로 보내실 때부터 이미 Explo’74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빌 브라잇 박사를 만나서 캠퍼스 복음화의 비젼을 보여 주셨고, 다시 한국으로 인도하셔서 국내에서 CCC 활동을 전개하시므로 step by step 으로 (당시에 사람의 지혜로는 알 수 없었지만) 하나님은 이미 Explo’74를 준비하셨던 것이다. 

처음에는 학원(캠퍼스) 복음 전도 운동이었지만 그것이 곧 Explo’74의 출발점이었다.  잠언 16:9의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 시니라”라고 기록된 것 처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작정 가운데서 김준곤 목사님과 그와 동역한 CCC Staff들의 몸과 시간과 마음을 사용하신 것이다. 

1958년 10월에 광주지구가, 11월에는 서울지구가 세워졌는데, 이 때부터 민족 복음화가 시작 된 것이다. 

1958년은 자유당 시절, 1960년은 제 2공화국 민주당 시절, 1961년 5,16 군사 혁명으로 이어진 군사정권 시절을 지나오면서 정치적으로 불안정되고 혼란 스러웠지만 하나님은 김 준곤 목사님으로 하여금 준비케 하심을 보게 된다. 

   1965년 국회 조찬기도회를 시작으로1966년 대통령 조찬기도회가 시작되었다. 공화당 윤인식 의원, 박현숙 정무장관의 도움이 컸다 ( 박현숙 장관은 김준곤 목사님과 박정희 대통령의 연결 통로가 되었다). 

정동회관 현숙기도실은 박현숙 장로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서 붙여진 것이다. 그 후 김준곤 목사님의 청와대 방문과 학생운동의 전략적 훈련 센타 건립 목표로 서울 시로부터 정동 회관 부지를 무상으로 제공 받음으로( 1969년도 김현옥 서울시장 때) ccc 비전은 점점 고무되었다. 이것 역시 하나님께서 5년 후에 있을 Explo’74를 향하여 일을 하신 것이다. 

그 후 1970년도 어느 날, 미국 기독교 실업인 가운데 Krinsky 재단 Arther Dimas가 건축비 ½을 부담하기로 하고 송금 해 옴으로 공사가 21층으로 지어져 가게 되었다(1971년에 건축 시작 ). 

이 건물은 민족복음화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다시말하면 정동부지와 Explo’74와 어떤 관계가 있으며, 미완성이지만 21층으로 지어져 가는 건물과 Explo’74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우리가 ‘여호와 이레’ 라는 말을 가끔 사용하는데, 이 부지와 미완성 건물은 1973년 12월부터 74년 3월까지 30만명을 교육할 순장 훈련의 센타가 되었었다.  

대강당 (1200명 수송), 현숙 기도실(박현숙 장관), 성록 기도실(박성록 장로님), 5층 주방시설, 11층부터 15층까지 숙소는 순장 훈련을 위한 임시 시설이었다. 임시라도 이 건물이 없었으면 엑스플로 74 순장 교육을 할 수 없었다. 73년12월부터74년 3월까지 11주 동안 매주 평균 1,000명 정도 순장 교육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때 훈련을 받은 순장은 실제로는 전국 교회의 대표로서 동원의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순장이면서 동원 요원)

여기까지가 Explo’74가 있게 하는 인프라를 형성하는 기초라면, 그에 해당하는 소프트 웨어로 학원 복음화롤 각지구를 개척하고 CCC를 발전 시킨점, 이를 바탕으로 1970년 12월 31-1월2일 아침까지 3일간서울대 수원 농과대학 캠퍼스에서 CBS 라디오 방송 중계로 제야의 종소리와 함께 밤 자정에 김준곤 목사님의 선포로 민족복음화를 알리는 것부터 이다( 이 기간은 국가적으로 쉬는 연휴). 

제야의 종소리는 민족복음화를 전국에 알리는 타종 소리와 같았다. 이어서 1971년 8월 2-6일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민족복음화 요원 1만명 훈련, 1972년 7.31-8.04 기간에 춘천 성시화 운동이 있었다. 이 두 대회는 아직 Explo’74를 기획하기 전, Dallas 에서의 Explo’72 에서 김준곤 목사가 Explo’74를 선포하기 전에 이미 Explo’74 대회가 시작된 것이라고 보여진다.  이 때 구호가 “민족의 가슴마다 그리스도를 심어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 였는데, Explo’74에서는 “민족의 가슴마다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성령의 계절이 오게 하자”가 되었다. 

1972년 Dallas Cotton Bowl 에서 6월 12-17일(, 여기서 김준곤 목사님께서 1974년에 한국에서 Explo’74를 열겠다고 선언했다. 귀국하자 마자 Explo’74 행사 준비에 들어 가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국제 CCC 와 한국 CCC는 교회사의 한 부분을 장식하는 한 행사를 마치게 되었다.

 이는 김준곤 목사님께서 늘상 하시던 말처럼 하나님께서 마지막 시대에 한국을 들어서 세계의 선교를 이루시기위해서 교회사의 하나의 강을 건넜다고 하는 것이다. 

그 후부터 1977년 여름 충북 영동군 심천 미류나무섬에서 1만명 집회, 평창 리조트 수련가 있었고, 세계 선교에 선교사 헌신자를 결신 시켰던 80 세계 복음화 대성회가 여의도 광장에서 있었다. 지금도 선교사들의 헌신의 동기를 80 세계 복음화 대회에서 선교사로 헌신하기를 작정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모두가 Explo’74 후속타로 이어져 왔다.  

 Explo’74의 의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기독교 한국이 된 것이다. 기독교가 대중화 되었고, 한국 기독교인의 수가 날로 늘어나면서 교회가 많이 세워지게 된 것이다. 이렇게 평가 해 본다. 만약의 장로교 어느 총회가 Explo’74를 기획하고 진행한다고 가정했을 때, 타 교파인 감리교나 성결교나 침례교나 오순교회가 따라 주었을까? 아니다. 그 주체가 CCC이었고, 그 중심에 모세처럼 김준곤 목사님을 하나님이 세우셨기에 이 대회를 성공적으로 마쳤고, 그 결과  모든 교파가 성장을 가져와서 한국이 기독교 국가가 된 것이라고 본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Praise the 여호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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