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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병학 목사의 소통하는 교회 - 소통은 역사 의식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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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의식은 그 사건이 오늘의 언어와 상징 속에서 어떻게 살아있는지 살피는 감각이다

5월 18일, 한국의 스타벅스코리아가 텀블러 판촉 행사에 ‘탱크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가 거센 비판을 받았다. 홍보 문구에는 ‘책상에 탁!’이라는 표현도 함께 쓰였다. 문제는 그날이 5·18민주화운동 기념일이었다는 사실이다. 논란이 커지자 스타벅스는 행사를 중단하고 사과했다. 대표이사 명의의 사과문에서는 5·18 영령과 오월 단체, 광주 시민, 박종철 열사 유가족에게 사죄했고, 임직원 역사 교육과 내부 검수 절차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누군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상품 이름이 우연히 그렇게 정해진 것 아니냐고. 텀블러의 모양이나 행사 콘셉트 때문에 ‘탱크’라는 말을 쓴 것뿐 아니냐고. ‘책상에 탁’이라는 표현도 그저 가벼운 광고 문구 아니었겠느냐고. 물론 의도적으로 역사를 조롱하려 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번 논란은 단순한 홍보 실수로만 넘기기 어렵다. 날짜와 단어와 역사적 기억이 한꺼번에 겹쳤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5월 18일은 한국 현대사에서 아무 날짜가 아니다. 1980년 광주에서 시민들은 계엄군의 폭력 앞에 섰고, 탱크와 장갑차는 그 비극의 기억 속에 깊이 남아 있다. 그러니 그날 ‘탱크데이’라는 말이 등장했을 때, 누군가에게 그것은 이벤트 이름으로만 들리지 않았다. 어떤 이에게는 군홧발 소리로, 어떤 이에게는 금남로의 공포로, 또 어떤 이에게는 아직 다 아물지 않은 광주의 상처로 들렸을 것이다.
‘책상에 탁!’이라는 표현도 마찬가지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당시 권력은 한 청년의 죽음을 숨기려 했다.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말은 국가폭력의 거짓말로 한국 사회에 남아 있다. 그래서 ‘탁’이라는 한 글자는 어떤 이에게 경쾌한 의성어가 아니다. 그것은 고통을 지우려 했던 말, 죽음을 가볍게 덮으려 했던 말, 폭력의 책임을 회피하려 했던 말로 기억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말이 의도만으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역사 의식은 단순히 연도를 외우는 일이 아니다. 1980년 5월 18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것, 1987년 박종철 열사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역사 의식은 그 사건들이 오늘의 언어와 상징 속에서 어떻게 살아 있는지를 살피는 감각이다. 이 날짜에는 어떤 말을 조심해야 하는지, 이 표현은 누구의 상처를 건드릴 수 있는지, 이 상징은 어떤 기억을 불러낼 수 있는지를 묻는 태도다.
기업 마케팅은 늘 빠르다. 더 짧아야 하고, 더 눈에 띄어야 하고, 더 자극적이어야 한다. 사람들의 손가락을 멈추게 해야 하고, 클릭하게 해야 하고, 구매하게 해야 한다. 그런데 그 속도 속에서 자주 사라지는 것이 있다. 맥락이다. “이 말이 팔릴까”는 묻지만, “이 말이 누구를 아프게 할까”는 묻지 않는다. “재미있나”는 보지만, “역사 앞에서 괜찮은가”는 묻지 못한다.
이번 사건은 바로 그 빈틈에서 일어났다. 한 기업의 홍보 문구가 한 도시의 슬픔을 건드렸고, 짧은 이벤트 이름이 민주화의 상처를 다시 불러냈다. 이것은 단순히 한 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가 기억을 얼마나 쉽게 소비하고, 언어를 얼마나 가볍게 다루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소통은 말을 빠르게 전달하는 기술이 아니다. 소통은 말하기 전에 그 말이 닿을 사람의 기억을 생각하는 책임이다. 그러므로 이번 스타벅스 논란은 한 기업의 실수로만 끝낼 일이 아니다. 우리 사회가 역사적 기억을 얼마나 쉽게 지나치는지 보여주는 사건이다.
여기서 교회의 질문이 시작된다.
교회는 역사 앞에서 말을 조심하는 공동체인가. 우리는 상처 입은 사람들의 기억을 충분히 듣고 있는가. 아니면 너무 쉽게 “이제는 잊자”, “그만 넘어가자”, “너무 예민하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은가.
기독교 신앙은 본래 기억의 신앙이다. 성찬은 “나를 기념하라”는 주님의 말씀 위에 서 있다. 출애굽의 신앙도 기억 위에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애굽에서 종 되었던 시간을 잊지 말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고통의 기억을 잃어버린 공동체는 쉽게 강자의 언어를 쓰기 때문이다. 자신이 아팠던 시간을 잊은 사람은 남의 아픔에도 둔감해진다.
그래서 교회가 역사적 상처 앞에서 가져야 할 첫 태도는 해석이 아니라 경청이다. 역사의 아픔 앞에서 교회는 함부로 말하지 않아야 한다. 어떤 자리는 설명보다 침묵이 먼저다. 어떤 상처 앞에서는 정답보다 애도가 먼저다. 신발을 벗고 서야 하는 거룩한 땅처럼, 한국 현대사의 아픈 기억 앞에서는 우리의 언어도 낮아져야 한다.
소통하는 교회는 세상보다 말을 많이 하는 교회가 아니다. 사람들의 아픔을 더 깊이 듣는 교회다. 왜 사람들이 분노했는지, 왜 단어 하나가 마음을 무너뜨렸는지, 왜 “실수였다”는 해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지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 들음이 없으면 교회의 말은 복음처럼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또 하나의 판단처럼 들릴 수 있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셨다.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셨다. 이것은 단순히 따뜻한 성품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방식이다. 약한 것을 더 약하게 만들지 않는 말, 상처 난 곳을 다시 찌르지 않는 태도, 기억을 함부로 소비하지 않는 조심스러움. 그것이 복음의 언어다.
교회가 다시 교회다워지려면 말을 다시 배워야 한다. 더 멋진 말이 아니라 더 조심스러운 말. 더 강한 말이 아니라 더 낮은 말. 더 빠른 말이 아니라 더 오래 듣고 난 뒤에 나오는 말. 그리고 역사 앞에서 말을 조심하는 것.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소통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교회는 세상의 상처를 비껴가는 공동체가 아니라, 그 상처 곁에 조용히 머무는 공동체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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