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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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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김병학 목사의 소통하는 교회 - 소통은 역사의 거울이어야 한다 크리스천헤럴드2024.09.03
    한국 사회는 지금, 역사를 둘러싼 뜨거운 논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특히 건국일 논쟁과 더불어, 독립운동과 현대사의 특정 사실관계를 두고 서로 다른 역사적 해석을 내놓으며 진실 공방을 벌이고, 역사 교과서를 둘러싼 이념 논쟁은 끊이지 않는다. 이 논쟁에 교회가 개입되어 있다. 이러한 논쟁은 단순한 과거 역사적 사건의 해석을 넘어, 현재와 미래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과 함께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현재의 정당성이 좌우된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이런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는 누가 쓰는 걸까? 단순한 과거 사실의 나열일까, 아니면 특정한 시각을 담은 이야기일까? 오히려 역사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다리이자 미래를 향한 나침반이라고 할 수 있다.기독교는 2천 년 넘게 우리 역사 속에서 숨 쉬어 온 종교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역사를 어떻게 바라볼까? 기독교의 역사관은 무엇이며, 역사의 흐름 속에서 어떤 의미를 지닐까? 특히 진정한 역사를 갈망하는 사회에 기독교 정신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까?기독교 역사관의 핵심은 '창조', '섭리', '구원', '종말'이라는 네 가지 핵심 단어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기독교는 역사의 시작을 '창조'로 본다. 하나님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했고, 이는 역사의 시작점이자 존재와 의미의 근원이다. 모든 인간은 인종과 성별의 차별 없이 하나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점에서 존엄하며, 평등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도록 부름 받았다. 둘째, 역사는 단순한 우연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하심이라는 '섭리' 개념을 강조한다. 그래서 우리가 역사의 고통과 좌절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살아가도록 격려한다. 셋째, ‘인간의 타락과 구원’은 역사의 중요한 주제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완전해질 수 없기에, 역사 속에서 방황하고 고통받는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은 역사의 중심이며, 이를 통해 인간은 구원을 얻고 새로운 역사, 즉 사랑과 용서, 화해의 역사를 경험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기독교는 역사의 끝, 즉 '종말'을 이야기한다. 역사는 영원히 순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최종적인 목적지를 향해 나아간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역사에 대한 책임감을 일깨워주고, 정의와 평화를 위해 노력하도록 독려해야 한다.오늘날 기독교는 과거의 영광과 오류를 거울삼아, 겸손과 성찰의 자세로 역사 앞에 서야 한다. 먼저 역사 속에서 저지른 잘못과 실패를 인정하고 반성해야 한다. 십자군 전쟁, 종교재판 등은 기독교가 역사 앞에 겸손해야 함을 보여주는 사례다. 또한, 기독교는 과거의 영광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사회 정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빈곤, 차별, 환경 문제 등 현실 속에서 기독교적 가치를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특히 한국과 미국 사회는 특정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단편적인 해석이 아닌, 역사의 흐름 속에서 입체적인 시각으로 과거를 조명해야 한다. 또한 역사를 정치적 도구로 이용하거나 특정 이념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시각을 인정하고 건강한 토론 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한국과 미국 사회는 과거의 아픔을 치유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기독교 역사관은 단순히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의미와 방향을 제시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존엄성,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용서와 화해, 그리고 정의와 평화를 향한 소망은 분열과 갈등을 겪고 있는 미국과 한국 사회에 깊은 통찰력을 제공한다. 역사는 계속 이어진다. 기독교는 앞으로 어떻게 역사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까? 이 질문은 기독교인 각자가 끊임없이 고민하고 답을 찾아가야 할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모두 역사 앞에 겸손히 서서, 기독교 정신으로 진정한 역사의 의미를 되새기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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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7
    [오피니언] 신선묵 교수의 교수칼럼 - “삶에 대한 전략적인 관점” 크리스천헤럴드2024.09.03
    몇년 전부터 책을 출간하려는 생각을 가지고서 나의 글들을 정리하는데 그 동안 많은 글을 써왔지만 그리고 최근에 쓴 글들도 많지만 그것을 책으로 묶으려고 하니까 너무 힘들었다. 그것을 전체로 묶는 일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그 동안 작은 글들을 계속 써오던 것도 중단이 되었다. 오랫동안 글을 쓰는 일이 침체에 빠진듯한 느낌이다. 조각 글들을 계속적어야 하는데 조각글들을 적지 않으니까 새로운 글들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괜히 책을 쓸려다가 그나마 적던 조각글들도 멈추어서 글을 쓰는 일이 중단된 것 같아서 조급하다.  또 하나는 새로운 공부를 하면서 조금씩 깨달은 것을 가지고 조각글들을 써 왔는데 최근 몇년 동안은 새로운 것을 배우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것은 게을러서가 아니라 나의 생각들을 정리하고 글로 표현하고 싶어서이다. 남의 글을 통하여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무엇인가 나의 생각을 정리하고 표현해야하는 시기가 왔다고 느껴진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두가지의 노력이 나로하여금 새로 배우는 것이나 글을 써 내려가는데 있어서 침체를 가져온듯한 느낌이 들었다.이런 침체와 같은 느낌이 나의 조급함을 부추긴다. 현재 나의 노력들 나의 생각들을 글로 정리하는 것과 책으로 묶으려는 나의 노력이 너무 진척이 안되니까 지금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작은 조각의 글을 지속적으로 써야하지만 그것의 바탕에는 분명히 나의 철학이 반영되어 있어야하고 동시에 그냥 조각 글들이 아니라 전체적인 방향과 철학이 있어야하고 목적과 비전이 분명한 글이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너무 오래걸리고 추상적인 작업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일단 배우는 일에 그리고 떠오르는대로 조각글들을 적고 싶은 유혹이 빠져들고는 한다. 우리 삶에서도 그런 것 같다. 열심히 살고 그때 그때 의미를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그런데 어느 시점이 되면 우리는 크고 깊은 생각을 해야한다. 나의 삶의 가치와 목적 그리고 비전을 생각해야 한다. 그때 그때 충실히 사는 것이 바탕이 되어야하지만 그것으로만 끝나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게되면 외형적으로 진척이 안되니까 답답하고 침체된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색깔을 찾고 나의 가치관을 정립하고 그리고 목적과 비전을 정하고 그것을 향하여 한걸음씩 나아가는 것은 결단이 필요하고 시간이 필요하고 에너지가 필요한 지루한 작업이다. 그래서 이 중요한 것을  때로는 회피한다.그 동안 써온 조각글들이 다 좋은 글들인데 하나로 엮기가 너무 힘들듯이 어쩌면 나의 인생도 그런 것이 아닐까? 내가 나의 조각글들을 엮으려고 하다 보니까 나의 인생을 먼저 엮을 필요가 생긴다. 나의 책은 결국 나의 삶의 반영인데 삶이 하나로 엮어지지 않으면 책이 하나로 엮어질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조급함과 불안함이다. 물론 우리가 삶 가운데 추상적인 개념과 본질만을 생각하고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일들을 해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문제일 것이다. 우리 삶 속에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일들을 해 나아가야 한다. 당장에 해결해나아가야할 일들이 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해 나아갈 때에 방향성이 있어야하고 그 방향성을 위하여 우리가 투자를 해야하는 것이다. 가치를 정하고 목적과 일의 결과물들을 정하고 평가하고 비전을 세우고 구체적인 목표들을 세워서 실행해 나아가야 한다. 일의 경중과 순서를 정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럴 때에 어찌보면 당장의 외형적인 성과가 줄어들지 모르지만 모든 일을 의미와 방향성을 가지고 나아가게 되므로 결국에는 의미있는 성과를 창출할 수 있다. 그래서 당장의 성과에 얽매이지 않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가장 바탕에 무엇보다도 우리의 마음을 지켜야 한다. 하나님 은혜 앞에 나아가 우리의 마음에 긍정과 감사 낙관과 믿음 그리고 소망과 사랑이 충만해야 한다. 그래서 두려움과 걱정이 아닌 소망과 믿음이 우리의 삶의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기도라는 귀한 선물이 주어져있다. 모든 일을 대할 때에 기도를 통하여 평안의 마음을 가지고 시작하고 그 마음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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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6
    [오피니언] 송경화 교수의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상담 - 아이 발달 과정에 따른 자녀 양육 크리스천헤럴드2024.09.03
    자녀양육 목적은 "떠나보내기"한 생명이 잉태되는 것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경이로운 신비 체험이다. 엄마와 아빠가 아이를 만든 것 같지만, 사실 생명의 잉태와 발달에 엄마와 아빠가 한 것은 거의 없다. 나는 내 뱃속에 열달 동안 아이를 품고 있는 내내 이 생명이 창조되어 내 뱃속에서 조금씩 자라가면서 한 인간으로 형성되는 과정에 내가 하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여실히 느꼈다. 내가 뭘 하지 않아도 아이는 알아서 서서히 완성되었다. 이 모든 과정은 내 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하나님이 한 생명을 창조하셨고 내 몸에서 잉태되게 하셨고 주수에 맞춰 성장하면서 이 세상에 나와도 살아갈 수 있는 완벽한 인간의 모습으로 서서히 빚어 주셨다. 모든 아이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님의 것이다. 그저 내 몸을 빌어 태어났을 뿐, 나에게는 소유권이 없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이를 잘 키워 달라고 부모에게 부탁하신 것이다. 부모된 자는 자녀의 소유권이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처음부터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아이를 키우는 내내 소유권에 대해 늘 상기해야 한다.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찾아온 자녀를 품에 안게 되면, 부모들은 다양하고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벅찬 감격으로 설레고 기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난감하고 두려워지기도 한다. 그 아이를 어떻게든 잘 키워 보려고 할 수 있는 대로 정보를 얻고 돈도 아끼지 않으면서 좋다는 건 다 해 주려고 한다.이 위험한 세상에 아이가 안전하도록, 나쁜 것은 보지도 듣지도 않게 보호하도록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아이를 위한 청사진을 그려 보면서 아이가 가장 편하고 좋은 꽃길만 걷기를 바라기도 한다.이러는 동안 부모들은 아이가 마치 내 것인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고 서서히 그 착각을 절대 진리처럼 믿게 된다. 아이를 내 것이라 생각하는 순간 아이에게 부적절한 양육이 시작된다. 아이에게 함부로 말하고 부모가 좋은 대로 하도록 강요한다. 부모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으면 무섭게 위협하기도 한다. 그리고 아이가 자기만의 길을 가려 할 때 배신감을 느끼고 강력하게 저항한다. 아이가 부모의 뜻대로 자라줘야 한다고 굳게 믿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하지만 이건 처음부터 틀린 것이다. 아이는 부모의 것이 아니다.아이는 하나님의 소유다. 부모에게는 잘 키워달라고 잠시 위탁한 것 뿐이다. 부모는 아이를 잉태한 순간부터 아이와 함께 자라가는 동안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부모에게 아이를 맡기신 하나님이 바라는 것은, 부모가 이 아이를 하나님의 마음과 손길로 따뜻하고 행복하게 잘 키워서 씩씩한 성인으로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 지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이를 잉태한 그 순간부터 부모의 목표는 이 아이가 성인으로 잘 자라 독립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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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5
    [오피니언] 조영석 목사의 생각하며 기도하며 - 후회와 회개 크리스천헤럴드2024.08.19
    후회와 회개는 다르다. 앞을 보면 같지만, 뒤를 보면 확연한 차이가 있다. 앞을 보면 자기성찰로 시작 되어 같아 보이지만 뒤로 가면 결과가 다르다.회개는 회복으로 이어지는 반면, 후회는 더 깊은 좌절에 이르게 한다. 회개는 분명한 대상이 있어 그에게 저지른 행동을 뉘우치고, 용서를 받음으로써 그 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그러나 후회는 스스로가 대상이어서 자기가 자기자신을 용서하고 자유로울 수 없으니 오히려 더 큰 무력감과 깊은 상처가 남는다. 그래서 회개로 나아가지 않는 자각심은 자기연민으로 남아 평생을 그 후회의 순간을 떠나지 못하게 하며, 그 주위를 맴돌게 한다. 엉뚱한 참회는 바로 후회이다.후회가 없는 인생은 없을 것이다. 나 또한 내 삶에 많은 후회가 있다. 기억에서조차 지웠으면 하는 부끄러운 잘못과 실수들이 있다. 돌이킬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에 잠시 머물게 될 때도 있다. 머리 속 깊이 박혀있는 후회의 순간들은 나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발목을 잡을 때도 있다.그러나 그 후회마저도 복음의 눈을 통해서 바라보고 해석해야 한다. 후회가 많은 인생이기에 죄인을 찾아오신 주님을 만나게 되었고,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이 있기에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의 사랑을 찾게 되었다. 오늘도 허다한 후회를 덮는 은혜를 날마다 경험하며 살고 있다. 지금 내가 나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여전히 부족하기 짝이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나는 바로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의 결과물인 것이다. 그러니 한 순간도 후회 속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설령 돌이킬 수 있다 해도 돌이켜서는 안 된다. 내 삶에 수없이 발견되는 하나님의 손길을 어찌 지울 수 있겠는가. 나의 악까지도 선으로 바꾸신 하나님의 열심이 내 삶에 가득한데 그것을 어떻게 외면하고 이전으로 돌아가려 하겠는가. 나 삶의 후회를 지우려 할 때 그가 일하신 흔적도 함께 지워야 한다.그러니 나의 나 된 것을 감사하며 오늘도 그 은혜로 받은 새 삶을 기뻐하며 살아야 한다. 내 삶에 끊임없는 회개는 있을지 언정 후회는 없어야 한다. 어제의 후회와 무력감에 빠지지 않고 오늘 내가 받은 은혜가 헛되지 않게 다시 시작하는 모습이 진정한 회개이며, 은혜에 부응하는 삶이다. 오늘도, 내일도 계속해서 실수와 부끄러움이 반복 되겠지만, 또 다시 뉘우치고, 털고 일어서야 한다. 밭을 가는 자가 뒤를 돌아보며 앞의 땅을 제대로 갈 수 없듯이, 어제의 후회에서 벗어나야 앞으로 전진할 수 있다. 나는 내게 주어진 길을 걸으며 새로 허락된 오늘을 소중히 가꾸며 살아야 한다. 후회에 대해서는 날마다 죽고, 회개로 다시 일어나 새날을 살아야 한다."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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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4
    [오피니언] 김은주 교수의 탈진을 긍정하라 11 <선교사 사례로 보는 탈진> 크리스천헤럴드2024.08.19
    ‘조용한 아침의 나라’ 한국은 정치와 사회적 격변을 맞이하면서 1866년 로버트 토마스(Robert J. Thomas)의 순직으로 개신교 선교역사의 서막을 열었다. 그후 1945년 해방 전까지 1,500여 명의 선교사가 사역을 했다. 한국은 불교와 유교가 뿌리 깊이 자리잡고 있던 때라 기독교 문화가 생명을 불어넣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선교사들은 옛 선비들처럼 입고 먹고 살며 복음-교육-의료에 새물결을 형성했다.선교사가 선교지 상황에 맞추어 살아가는 것은 복음전파의 기쁨과 동시에 고통이 따른다. 문화적 상황을 이해하고 적응하려면 문화 충격과 문화 적응 스트레스가 발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선교는 한민족의 처절한 상황과 일제의 강압과 무단적 지배에 맞서 눈물과 헌신이 끊이지 않았고 선교사들의 순직과 순교에 복음으로 우뚝 서게 하였다. 필자가 만난 한국 선교사들은 서양 선교사들이 조선을 방문하여 복음의 열매를 맺었듯이 타문화권에서 복음의 씨앗을 심었다. 선교의 길은 아픔과 고초가 있어도 영혼을 바라봄으로 인내하고 도전하며 승리로 이끈다. A남성 선교사는 장단기 포함하여 28년차 멕시코 선교를 했다. 그의 문화충격 1순위는 언어였다. 현지언어가 능숙하지 못함으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고 오해와 와해를 낳았다. 2순위는 재정적 압박이었다. 선교사는 스트레스로 인해 탈진과 건강이 악화되며 정신 및 영적 침체를 맞았다. 해결방안은 문화적응의 노력이었다. 탈진에 맞서 도전했다. 건강을 위해 스스로 운동하고 관리하며 취미생활을 했다. 그 외에 멘토와 상담하고 조언을 받았으며 말씀을 묵상함으로써 회복했다. B여성 선교사는 14년차 일본 선교를 했다. 한국에서부터 일본어를 전공했고 일본에서도 8년 정도 학업을 마쳤기 때문에 언어와 문화 충격은 없었다. 원활한 문화 적응은 일본문화 지식의 풍성함과 일본인 공동체 생활의 다양한 사역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선교사의 스트레스는 전도 열매가 없으므로 낙심하게 만들었다. 탈진은 교단 내의 갈등과 과도한 사역으로 빚어졌고 결국, 암진단을 받았다. 해결방안은 경청이 중요했다. 하나님의 음성에 경청했고 복음의 수신자에게 경청했다. 일본인의 첫 만남은 상대방이 말을 할 때까지 3-4시간을 침묵으로 기다리기도 했다.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인의 습성을 적응한 결과이다. 그 외에 1대1 데이트와 편지를 쓰는 것은 주님의 사랑을 전하기에 특수한 효과를 발휘했다. 선교사는 초 긍정의 자세와 감사로서 문화 적응을 하고 탈진을 극복했다. C여성 선교사는 필리핀, 케냐, 인도네시아 선교 23년, 한국 선교 5년, 캄보디아 2년차 사역을 했다. 선교사는 기후변화와 풍토병으로 생사를 경험했다. 잦은 열병, 말라리아, 온갖 질병과 씨름했고 과다한 사역과 학교 설립은 심한 부담감을 느끼며 불가능을 역설했다. 그 후 파송 단체로부터 강제적 사임은 몸과 영혼을 녹여버렸다. 수차례의 탈진으로 두통, 구토, 설사, 불면증 등 신체를 악화시켰고 심리적 두려움과 영적 침체에 빠뜨렸다. 해결방안은 타인을 용서하고 하나님께 맡기며 기도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영혼육의 안식과 깊은 성찰의 시간이 필요했다. 말씀 묵상과 기도의 시간이 많아지자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었고 평안과 영적 회복이 일어났다. D남성 선교사는 8년차 중국 선교를 했다. 중국의 가정교회 사역은 건강하고 무난했으나 중국정책으로 강제추방 되었고 심리적 탈진이 일어났다. 남편 선교사는 아내의 탈진을 이해하지 못하고 갈등을 빚었다. 해결방안은 치유상담대학원 과정을 이수하며 탈진을 회복했다. 그 후 선교사는 자아를 찾고 선교적 관점이 변화되었으며 자신을 믿고 따라준 아내를 이해했다. 중국 선교가 하나님의 선물이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는 과정을 주셨음에 깊이 감사했다. 선교사는 다시 한번 타문화권 선교에 도전할 여유를 가졌다.한국 선교사들의 탈진은 불굴의 의지를 보여줬고 회복의 역사를 이뤘다. 그들의 눈물과 헌신은 자신을 살리고 또 다른 영혼을 살리며 그 나라를 부흥케 하는 복음의 씨앗을 심었다. 탈진의 경험은 복음을 더욱 고귀하고 값지게 만들었고 영혼을 살리는 열정의 도가니로 변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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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3
    [오피니언] 이효상 컬럼 - 변화와 변심 사이에서 크리스천헤럴드2024.08.19
    세상사가 참 변화무쌍하다. 지인이 늘 하는 말이 있다. “첫사랑을 잊지 마세요”, “초심을 잊지 마세요”라고. 첫사랑은 많은 것들을 가르쳐준다. 우리에게 설렘과 기쁨, 아픔과 상처를 안겨준다. 그 모든 경험들은 우리를 성장시키고, 인생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설펐던 첫사랑도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했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데 있어 기초가 됐기 때문이다.초심도 마찬가지다. 어떤 일을 시작할 때 항상 열정적이고, 열망에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점점 지치고 의욕이나 방향을 잃어갈 수 있다. 자기의 정체성과는 상관없이 급변하는 흐름에 맞춰 처신하는 것이 지혜로운 듯 사람들도 얼굴이 가면을 쓰기 시작한다. 새로운 환경, 새로운 경험, 새로운 사람, 새로운 도전들이 성장과 발전을 가져온다. 이런 변화는 삶에 새로운 의미와 열정을 불어넣어 환경을 상상 더 이상으로 새롭게 할 수 있다. 변화하기 위해선 필요 없는 것을 버리고 필요한 것은 습득해야 한다.하지만 ‘변심’이라는 것은 변화와는 또 다른 이야기다. 변심은 우리가 이전에 가지고 있던 가치관, 신념, 약속 등을 무시하고 새로운 것만을 추구하는 일방적 외면을 의미한다. 변심은 신뢰와 믿음을 훼손하고 스스로 진정성을 손상시킨다. 나쁜 마음을 좋은 쪽으로 고쳐먹는 것을 개심(改心)이라 하는 데, 정치인들처럼 그냥 두어도 멀쩡한 것을 바꾸겠다고 널리 공약한 후 내 마음 변했다고 없었던 것으로 한다면 전형적인 변심(變心)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지금의 현실을 살펴보면 광야길 40년을 지났건만 돌고 돌아 제자리인 이스라엘의 출애굽 상황은 아닐까. 세상사가 다람쥐 쳇바퀴 돌듯하다 보니 사람까지도 그런 모양이다. 앞으로 나가려 하지 않는다.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독안에 갇힌 쥐처럼 그 안에서 만족하고 변화를 잘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한다. 하지만 앞으로 나가야 한다. 미래로 가야 한다. 프랑스 파리 올림픽을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보면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최소한의 인원으로 참가해 금메달 13개, 은메달 9개, 동메달 10개를 획득하며 종합순위 8위에 올랐다. 젊은 선수들은 경험이 재산이라는 올림픽에서 패기와 무서운 집중력으로 생애 최고의 결과물을 냈다. 12년 만에 메달리스트를 배출한 수영과 복싱도 희망을 쏘아 올렸다. 하지만 이 같은 긍정적인 요소가 있는 반면 단체 구기 종목의 하향세와 메달 종목의 편중은 전체적인 스포츠 발전에도 결코 순기능이 아닌 만큼 균형발전에 대한 대안이 필요하다. 여기에 협회의 변화를 요구하는 안세영의 작심발언에 공감하며 더욱 안타까움을 느낀다. 또한 얼마 전 79주년 광복절 행사와 관련해 ‘광복’논쟁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보며 역사를 보수와 진보로 나눠 서로 편먹고 맥(脈)살잡이하는 것은 아닌지 제자리 뛰면서 계속하고, ‘돌고’ ‘돌고’를 반복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된다. 결국 이러한 모든 현상을 모며 ‘변화는 무죄이고, 변심은 유죄’라는 말을 생각하게 된다. 변화를 통해 성장하고 발전하면서도 잊지 말아야 하는 역사와 양심, 타인과의 신뢰 관계에선 부끄럽지 않도록 초심을 소중히 여기며 앞으로 나가야 한다. 초심은 성장하고, 인생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줄 수 있는 경험과 열정에 대한 소중한 자산으로서의 진정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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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정재영 칼럼 - 평신도의 의미 크리스천헤럴드2024.08.19
    최근 평신도의 역할이 다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한국 교계에서 평신도 교회론이 강조된 것은 1980년대부터지만, 최근 부교역자 기피 현상이 나타나면서 불가피하게 평신도 사역이 더욱 중요하게 됐으며, 앞으로 새로운 트렌드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그런데 평신도라는 말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성경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묘사되는데, 이 ‘하나님의 백성’의 헬라어 표현에서 오늘날의 ‘평신도’라는 말이 파생됐다. 그러나 평신도란 흔히 잘못 이해되는 것처럼, 성직을 전담하고 있는 성직자와 이원화하여 본질 성격상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것은 목회자와 평신도를 똑같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두 개의 다른 신분으로 볼 것이냐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이 성직자와 평신도의 이원화 현상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교회가 성장하고 발전해 감에 따라 교회 운영과 조직의 필요성이 대두돼 교회에는 감독, 장로, 집사들이 나타나 세분화된 직분을 수행하게 됐다. 이와 같은 성직의 변천 과정에서 교회에는 교권 제도가 강화돼 성직자와 평신도를 두 신분으로 구분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그러면서 평신도는 교회 운영으로부터 점차 소외되기 시작했으며, 교회 운영을 전담한 성직자들에게 의존하는 피동적인 계층으로 여겨지게 됐다.성직자와 평신도의 양분화 된 현상이 수 세기 동안 지속해 오던 중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에 의해 ‘만인사제론’이 주장되면서 이러한 현상이 극복됐다. 결국 오늘날의 목회자와 성직자는 똑같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직무의 차이를 제외하고서는 둘 사이에 아무런 구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목회자는 신학교에서 목회에 필요한 전문 교육을 받고 영성과 관련된 다양한 훈련을 받기 때문에 전문성을 갖춘 교회 지도자로 인정받고 존중돼야 한다. 그러나 목회자와 평신도 사이에 신분상의 차이가 있거나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서 일부에서는 평신도라는 말 자체를 쓰면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를 대체할 마땅한 말이 없다는 현실의 한계 때문에 계속 사용되고 있는 상황이다. 평신도 신학자인 폴 스티븐스조차 평신도를 다른 말로 하면 ‘목회자 아닌 하나님 백성’이라고 할 수 있지만 딱히 한 단어로 대체하기 어렵다고 말했을 정도다. 일부에서는 ‘성도’라는 말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목회자도 성도에 속하기 때문에 목회자 아닌 성도를 표현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평신도 중심의 교회론20세기 후반에 들어서 서구 교회에서는 평신도 신학과 관련된 교회론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세속화돼 가는 사회에 대한 교회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과 그것을 위해 평신도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인식에서 비롯됐다. 서구 사회가 교회의 권위로부터 이탈·세속화됨에 따라 세상에서 기독교 윤리를 실천할 수 있는 평신도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게 됐다. 또한 사회 환경의 변화와 함께 현대 사회가 다원화, 전문화됨에 따라 목회자 혼자서 모든 사역을 담당할 수 없게 된 상황도 평신도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데 한몫 했다. 사회의 다원화와 직업의 세분화는 교회 운영의 구조와 형태에서 근본으로부터의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다양한 문화와 세계관, 개인의 경험과 가치관의 차이 속에서 이제 목회자 일인 체제의 교회 운영은 한계에 다다르며 전문화와 세분화를 요구받게 됐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 안에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평신도들을 방치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유휴한 자원으로 남아있는 평신도들을 교회의 활성화를 위한 자원으로 개발·훈련해 동역자로 세울 필요성이 제기됐다. 이렇게 함으로써 교회 조직 자체도 더 효율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평신도 중심의 교회관은 교회의 공동체성 회복에도 큰 역할을 한다. 목회자와 평신도를 구분해서 평신도를 부수적인 위치에 고착시키는 것은 교회의 공동체성을 저해한다. 이러한 평신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성직을 전담하고 있는 목회자와 평신도의 역할을 이원론식으로 구분하는 것은 교회의 본질 성격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흔히 평신도라고 하면 마치 기업에서의 ‘평사원’과 같이 집사, 권사, 장로 등의 직분이 없는 말단 교인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전적으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평신도의 활동을 독려하는 평신도 운동은 종래의 목직자 위주의 교회관으로부터 교회의 공동체성 회복을 위한 교회 혁신 운동의 성격을 나타낸다.평신도의 자리와 역할 그러나 평신도의 올바른 자리와 역할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대개의 교회 지도자들은 평신도들을 훈련시켜서 교회 안에서 많은 봉사를 하도록 요구한다. 요즘 보편화돼 있는 ‘작은 목자’라는 개념은 평신도를 목회의 동역자로 인정한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만하나 자칫 평신도를 교회 안에만 매여 있게 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물론 교회 안에서 요구가 있을 때 이를 위해 봉사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특히 부교역자가 부족해지고 있는 요즘 상황에서 평신도가 보다 적극적으로 교회 사역에 동참할 것이 요구되고 있다. 교회 공동체 자체가 약해지면 교회의 외부 사역도 힘을 잃게 되고 지속가능성을 담보하기 어렵다.그러나 평신도들이 교회 안에만 매여 있는 것 역시 바람직한 상황이 아니다. 평신도는 오히려 소명을 따라 직업 활동을 통해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 루터가 이야기한 만인사제론도 교회 안에서 목회자와 평신도가 동등하다는 의미보다는 세상에서 사제와 같은 사명을 가지고 신앙을 실천해야 한다는 뜻이 내포돼 있다. 그럼에도 목회자들은 훈련받지 않은 평신도들이 세상에 보내졌을 때 제대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므로 체계를 갖춘 훈련을 통해 준비를 시킨 후에 내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앙 훈련이라는 것은 단시일에 끝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앙이 먼저, 사회 참여는 나중에’라는 것은 논리상의 순서인 것이지 시간상의 순서가 아닌 것이다. 평신도들은 이미 세상에 보내졌기 때문이다. 또한 ‘성화’라는 표현을 쓰듯이, 신앙 훈련은 일생을 통해서 이뤄져야하는 것이다. 일상생활의 대부분의 시간을 직장과 같은 사회에서 보내는 평신도들은, 전문 목회자들과 같이 교회 안에서의 활동에 몰두하기보다는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책임을 다해야 한다. 평신도들의 삶의 자리는 교회라기보다는 사회인 것이다. 이미 보냄 받은 사회 안의 각각의 영역에서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책임의식을 가지고 선교의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이들이 철저하게 기독교인의 삶의 원리를 따라 사회생활을 하며 주위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미칠 때 평신도들은 자연스럽게 우리 사회를 변혁시킬 주체자의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 평신도들의 사역과 균형 있는 역할에 대해 올바른 시각의 정립이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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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김병학 목사의 소통하는 교회 - 소통은 나아갈 방향이다 크리스천헤럴드2024.07.28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예상치 못한 후보직 사퇴는 전 세계에 거대한 파문을 일으켰다. 고령으로 인한 건강 악화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에 따른 경제적 불안감 증폭, 서민들을 옥죄는 살인적인 물가 상승 등 해결해야 할 난제들이 산적한 가운데, 상대 후보와의 경쟁에서 끝없이 추락하는 지지율과 거세지는 사퇴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대통령 후보직에서 물러났다.바이든의 사퇴는 단순한 정치적 사건을 넘어, 예측 불가능한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깊은 불안감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우리는 지금 기후 변화, 팬데믹, 경제 위기, 국제 정세 불안 등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격변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불확실성은 개인의 삶 곳곳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증폭시킨다.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불안감이 역설적으로 ‘변하지 않는 가치’, ‘영원한 안식’, ‘흔들리지 않는 진리’에 대한 갈증을 더욱 심화시킨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자신을 지탱해 줄 수 있는 확고한 버팀목을 찾고 싶어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과거 절대적인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던 기독교는 현대 사회의 급격한 변화와 내부적인 문제들로 인해 그 영향력을 급격히 잃어가고 있다.특히 개신교는 건국 이후 오랜 시간 동안 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교회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교회 지도자들의 도덕적 해이, 교권을 둘러싼 추악한 다툼, 시대착오적이며 비성경적인 교리 해석과 권위주의적인 태도는 사회의 비판을 불러일으켰고, 젊은 세대들은 교회가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만 늘어놓는다고 생각하며 늙어 버리고 영적 건강을 잃은 교회를 떠나고 있다.물론 희망의 불씨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며 사회에 희망을 주는 교회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러한 교회들조차 급변하는 사회 분위기와 내부적인 문제들로 인해 미래를 낙관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그렇다면 혼란스럽고 불확실한 이 시대 속에서 교회는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할까? 과연 교회는 다시금 세상의 등불이 되고 길 잃은 영혼들을 위한 안식처가 될 수 있을까?교회는 세상과 분리된 채 고립된 섬처럼 존재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시대의 아픔에 공감하고 사회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가난과 질병, 차별과 혐오 등으로 고통받는 사람들 곁으로 다가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이다. 그러려면 교회는 초대 교회가 보여주었던 아름다운 공동체의 모습, 즉 서로 사랑하고 돕는 ‘섬김과 나눔의 공동체’를 회복해야 한다. 교회 내부적으로는 서로 사랑하고 격려하며, 어려움을 당한 지체들을 위해 기도하고 물질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나아가 교회의 문턱을 낮춰 누구나 쉽게 다가올 수 있도록 열려 있는 공간, 따뜻한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특히 교회는 교회의 미래이자 희망인 ‘다음 세대를 위한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젊은이들이 교회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신앙 안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그들의 눈높이에 맞는 예배와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그들의 고민과 아픔에 진심으로 귀 기울여야 한다. 또한 다음 세대가 세상의 리더로서 성장할 수 있도록 성경적인 진리에 대한 가치관과 리더십을 길러주고, 그들이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며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격려하고 지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교회는 시대의 변화에 뒤처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개혁하고 변화하는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 교회 건강이 악화되고 오래 전 과거의 영광에 안주하거나 그리워하면서 고정관념에 갇혀서는 안 된다. 급변하는 사회 변화에 발맞춰 끊임없이 개혁하고 변화하는 유연성을 길러야만 시대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바이든의 사퇴는 우리 시대의 단면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불확실성의 시대일수록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성경적 가치와 세계관을 붙들고 서로 격려하며 함께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우리를 인도할 교회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교회가 다시금 사랑과 은혜가 넘치는 공동체, 정의와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공동체, 세상의 아픔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공동체로 거듭나기를 소망한다. 젊은 교회로서 보여주는 용기와 희망이 혼란과 불안에 휩싸인 이 시대에 한 줄기 빛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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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김은주 교수의 탈진을 긍정하라 10 <문화속의 탈진> 크리스천헤럴드2024.07.28
    사람은 문화 속에 산다. 문화는 단일 문화 또는 복합 문화 간에 인간과 인간이 연결되는 상호관계의 총체적 체계이고 하나님의 천지창조 아래 포함한 모든 산물과 행위이다. 다소 복잡한 다문화는 사람에게 문화 충격을 안겨준다. 사람 마다 가치관 및 정체성이 다르고 환경의 서로 다른 이질감으로 스트레스를 낳고 심하면 탈진으로 이어진다. 단일 문화도 예외는 아니다. 각자가 문화를 이해하고 적응하기까지 도전과 변화가 필요하다.문화속의 탈진은 두가지를 이해하면 긍정의 관점을 발견하기가 수월하다. 첫째, 문화 충격이다. 자문화와 타문화의 다른 점에서 오는 충격은 정체성을 혼란 시키고 정신 뿐만 아니라 육체와 영적 타격도 불러온다. 토마스 홈즈와 마수수(Thomas Holmes and M. Masusu)는 생활의 변화로 생기는 스트레스를 측정했다. 배우자의 죽음을 100으로 설정했을 때, 이혼 73, 결혼 50, 직업 교체 36, 생활 환경의 변화 25, 거주지 이동 20, 함께 사는 가족 수의 변화 15, 식사습관의 변화 15를 나타냈다. 스트레스 150점 미만의 1/3정도가 2년 내에 큰 병이 걸릴 것이고 300점 이상 되는 4/5 정도는 향후 2년 내에 심각한 건강문제가 발생한다는 연구이다. 타 문화권의 신임 선교사는 보통 400점 이상의 스트레스를 쌓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경고를 울린다. 폴 히버트(Paul G. Herbert)는 이중문화를 만드는 그 자체도 스트레스라고 말한다. 이중문화는 단일문화 보다 스트레스 지수가 더 높다. 이민 문화를 가진 사람들은 자국을 떠나 언어장벽, 생활환경의 변화, 관계 갈등과 단절, 기후, 음식, 심리, 문화 장벽, 의사소통 부재 등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우울증 및 각종 질병 등으로 악화된다. 다양한 스트레스가 장기화 되면 에너지 고갈로 탈진한다.둘째, 문화 적응이다. 세월이 흐른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문화 적응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질적문화 적응은 긴장과 스트레스가 쌓이고 적대감 및 부적응의 의사소통의 부재로 어려움을 호소한다. 사회적 고립 또는 제약으로 심리 및 정신의 스트레스와 탈진을 유발한다. 문화 자체가 기하학적으로 복잡하고 잠재적 스트레스가 높지만 부정적 시각 보다 긍정적 영향이 많음을 기억해야 한다. 문화 충격이나 문화 적응의 스트레스는 스스로를 실패자로 여기거나 자살 충동까지 일으키지만 사람의 내면은 문화 적응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은 역동적 스트레스를 긍정의 자세로 수용하여 겸손과 존중을 배우고 공감하며 새로운 통찰력을 발휘한다. 일정한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이 속한 문화에 적응하고 새로운 사람과 친화하며 생존 기술을 연마한다. 자 문화와 타 문화 간에 상호 의사소통을 함으로써 공동체 의식이 높아진다. 문화 적응과 도전이 빠른 사람은 목표한 바 성장을 이루고 삶의 대처 능력이 향상된다. 결국, 능동적 문화 적응은 스트레스를 잘 관리하고 균형감각을 회복하며 고난을 승리로 이끈다.김영윤의 나선형 그래프를 생각해 보자. 동그라미의 연속인 나선형은 낮은 점의 퇴행과 재생을 통해 앞으로 상향한다. 스트레스와 적응을 반복하면서 탈진을 극복하고 성장한다. 파킹 설계의 혁명가로 불리는 하형록 목사님은 2012년 플로디가 주차협회 디자인상을 수상했다. 그는 어린시절을 목회하시는 부모님을 따라 부산 나환자촌에서 살았다. 친구들은 그가 나환자 촌에서 산다는 이유로 돌을 던지고 따돌림을 하였다. 그는 미국 이민을 와서도 인종차별과 인생의 쓴 뿌리를 경험했다. 곧 문화 충격과 문화 적응 스트레스를 받았다. 성공을 다짐했지만 교통사고로 심장이식을 두번이나 했고 약에 의존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마음을 새롭게 했다. ‘남을 위하여 살자.’ 인생의 어려운 난간이 여러 번 있었지만 새롭게 도전하여 나선형의 성공이 있었다. 결국 문화를 뛰어넘는 성장을 보여줬다.  문화는 사람과 분리될 수 없을지라도 사람은 문화를 지배하고 문화 속의 탈진을 극복하며 더 나은 미래로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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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아모스 목사의 일터영성 - ‘Follow Me’ 크리스천헤럴드2024.07.28
    한 사람의 영성은 그 사람의 됨의 한 부분이다. 나눌수 없다는 말인데, 무슨 말인가 하면, 교회 영성이 따로 있고, 일터 영성이 따로 있고, 영성을 드러내지 않아야 하는 혹은 않아도 되는 삶의 부분이 따로 존재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결코 그렇지 않다는 말이며, 그래서도 안될 뿐더러 그럴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실상은 많은 이들이 자신의 영성을 구분해서 발휘하고 있다고 생각 한다. 예배를 드릴때, 찬양을 할때, 기도를 할때, 공적인 신앙 모임이 있을 때에는 평소 집에서 혹은 직장에서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표정과 언어선택을 하며 최대한의 영성을 드러내려 하는 것을 보게된다.하지만 교회에서 모임을 마치고 그 자리를 벗어나는 순간, 그 영성의 스위치는 OFF가 되어지고, 또 다른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에게 되물어 보아야 한다. 필자의 컬럼도 큰 타이틀이 ‘일터영성’ 인데, 이것이 다른 영성과 구분 되어져야 하는 특별한 것이 되어서도 안되고, 그럴수도 없는 것이라 강조하고 싶다.종종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 혹은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고 있다, 라는 식의 표현을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그런 표현 자체가 어불성설이 아닌가? 우리의 삶은 하나다. 생명도 하나이고, 하나님도 한분 이시고, 결국 우리의 영성도 구분되어 질 수 없는 하나의 영성이다.예수님의 삶을 생각해 보라.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기 위해 애쓰셨던 삶의 부분이 따로 있으셨고, 세상과 어울려 살아내셨던 삶의 부분이 따로였다고 나눌 수 있는 삶이었던가? 결코 그렇지 않으셨다.예수님은 어떤 순간에도 예수님으로 사셨다. 계획하신 사역들을 이루어 가시는 순간에도 예수님은 예수님 답게 사셨고, 우연히 지나가시던 곳에서 만났던 그 어떤 만남의 순간에도 예수님은 예수님으로 사셨다.제자들과 밥을 드시거나 대화를 나누실때는 케주얼한 복장을 입으셨다가도, 회당과 길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천국을 가르치실때에는 정장으로 갈아입으시고 옷 매무시를 보다 더 신경을 쓰셨다는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예수님이 예수님으로 사셨다 라는 표현을 다르게 바꾼다면 “예수님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를 마주하시던지 사랑의 사람으로 사셨다.” 가 아닐까. 멋지지 않은가? 그렇다.우리 또한 예수님의 제자라면 예수님 처럼 삶을 살아내야 마땅하다. 교회사역, 예배, 기도, 전도, 선교 등을 할때에만 신앙인 처럼 살아내다가 사역을 마치고 나면 자연인의 모습으로 돌아와 세상을 벗삼아 살아가고 있는 생활의 반복을 하고 있다면, 결국은 탈진하고 말것이며, 위선과 교만으로 가득찬 내 모습만 발견하게 될 것이다.의지적인 결단으로 사랑의 사람으로 살겠다 라고 결단하고 살아가는 삶이, 가장 아름다운 삶이며, 예수님 닮아가는 삶이며,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가장 모범적인 모습이라고 확신한다.예수님이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수제자 라는 말은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수제자 라고 하면 베드로를 떠올릴 것이다.처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만나셨을때(마4:19) 하셨던 말씀과, 부활하셔서 공생애의 마지막 즈음을 보내고 계시던 때에 베드로를 만나셨을때 (요21:22)의 말씀은 놀랍게도 같은 말씀이셨다.“Follow Me!” 나를 따르라 라는 말씀이셨다. 무엇을 이루고, 무엇을 유창하게 숙련되게 하는 것을 우리에게 원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그저 나를 따르지 않겠니? 라고 우리에게 간청하고 계신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 처럼 삶을 산다는 말이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어떤 순간에만 따르는 것이 아니라 호흡하고 있는 모든 순간에 예수님과 동행한다는 뜻이다. 나누어 생각 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예수님 따름의 가장 핵심은 예수님 처럼 사랑의 사람으로 매 순간을 살아간다는 말이다.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착각 한다. 대형교회, 유명한 목사, 특정한 능력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큰 일들을 해 낼 것이라는 바로 그것이다.하지만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이,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큰 업적을 이루어 내는 것 이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다.예수님이 가장 바라시는 것, 하나님이 가장 바라시는 것은 교회의 부흥과 성장이 아니다. 성도 한사람 한사람이 예수님을 닮아가기를 가장 소망하신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이란 결국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며, 그런 인생이라야 나와 내 주위가 예수의 향기와 기쁨과 축복과 행복으로 가득 채워질 수 있다.그런 이유로 나를 따르라 라고 지금도 말씀하시는 것이다. 크고 힘있고 영향력 있는 교회들이 뭔 일을 낼것이라는 망상을 버려야 한다. 곳곳에 작은 예수들이 필요한 세상이다기독교의 핵심은 예수님의 삶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이며, 그 사랑에 대한 성도의 바른 응답은, 나도 예수님 처럼 내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흐르게 하겠습니다, 라고 결단하는 것이다예수님은, 내 소원을 위해,내 성공을 위해, 내 교회의 부흥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지 않으셨다.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가장 사랑하는 것이 '나' 였기에 기꺼이 그리 하셨다!이것이 복음이며, 우리가 삶으로 전해야 하는 것이 이것이며, 그런 삶의 핵심이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행위를 드리는? 행위로 보여지는 신앙생활은 멈춰져야 한다.호흡하는 모든 순간을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예수님의 삶이 그러셨던 것 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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