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은주 교수의 탈진을 긍정하라 13 <탈진 관점으로 본 선교사 이야기 1 – 아펜젤러>
크리스천헤럴드2024.10.01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는 1858년 2월 6일 출생했다. 그는 아버지 기디언 아펜젤러(Gideon Appenzeller)와 어머니 머리아 거하드(Maria Gehard) 아래 3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미국 이민의 독실한 신앙 가정에서 자라나 영혼을 위한 목자가 되고, 은둔의 나라 한국에 자원하였다. 그는 아내 엘라 닷지(Ella. J. Dodge)와 함께 1885년 4월 5일 제물포(인천)에 도착했다. 필자는 그의 사역을 통해 탈진의 세가지 관점을 발견하고자 한다. 첫째, 신체적 탈진이다. 아펜젤러는 1885년 8월 배재학당을 세워 남학생을 교육했다. 이화학당은 여성을 대상으로 주로 고아, 과부와 같은 소외 계층을 교육도 선교했다. 1988년 1월은 삼문(한어, 중어, 영어) 출판사를 설립하고, 신문, 잡지, 정기간행물, 신약성서, 영문 월간지까지 발행하며, 한국사회를 알렸는데, 1900년까지 25만여권의 서적을 인쇄했다. 1897년 12월 26일 정동 제일 감리교회를 건축했다. 낮이면 교육, 선교, 의료, 출판, 문화 연구, 독립운동 지원 등의 사역을 하고, 밤이면 독서와 기록하는 일을 했다. 그 당시 미국 감리교에서 한국을 방문하여 보니 아펜젤러 혼자서 세 명의 몫을 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미국에서 안식년을 보낼 때도 한국에 올 선교사를 모집했다. 그의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때로는 한국인의 무지 때문에 외국인을 흡혈귀라 하여 몽둥이에 맞고 구타를 당했다. 의료시설이 없던 때라 벼룩, 모기, 이 등 벌레들이 몸을 괴롭혔다. 이동수단도 없어서 말을 타고 평양에 교회를 세울 전략으로 여행하기도 하고, 한국의 문화와 연구를 위해 전국을 탐험하기도 했다. 많은 사역으로 인해 한국에 도착한지 7년만에 27kg이 감소하여 야위고 늙어 있었다. 다방면으로 과도한 신체적 사역과 열악한 환경은 탈진을 가져 올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둘째, 심리적 탈진이다. 아펜젤러는 조선 선교회를 발족으로 현지 부책임자로 선정되었다. 주님을 위한 헌신이 불러오는 부담감을 안을 수 있다. 조선 입성 때는 한번에 올 수 없을 정도로 정세의 불안정과 긴장을 놓칠 수 없었다. 조선은 지독한 궁핍과 간난, 잔인함과 억압, 무지와 질병, 미신, 죽은 조상들을 존중했다. 여성들은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라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거나 아버지의 빚을 위해 기생으로 팔려갔다. 백성들은 무지하고, 독립정신이 없었다. 서양인들은 폭행을 당하고, 죽음을 맞기도 했다. 1887년 법령에 따라 조선사람이 기독교를 믿으면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복음을 전해야만 하는 심정과 많은 애국 투사들을 도우며, 위험천만을 감당했다. 그는 참담한 조선인 속에 살아가며, 답답하고 의로운 회의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심리적으로 고갈되었을 것이다.셋째, 문화적 탈진이다. 그는 미개한 나라에서 문화충격이 상당했을 것이다. 독일어, 헬라어, 히브리어, 라틴어에도 능통하였을지라도 언어가 통하지 않는 곳에서 한국어와 문화를 배우며, 서양 문물과 성경을 가르쳐야 했다. 여성을 천시하는 시대에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 성벽에서 사람을 광주리에 담아 밧줄로 내려 보내며, 위험을 감수했다. 깊은 잠에 빠진 민족을 자주독립 하도록 힘썼다. 1902년 6월 11일 성서번역위원회에 참여하기 위해 선상 했다가 갑작스런 선박 충돌이 있었다. 자신 보다 남들을 구조 하다가 안타깝게도 생명을 잃었다.그는 17년 선교의 어려운 순간 마다 기도로 극복하고, 주님을 위해 완전히 헌신했다. 탈진을 극복한 것은 신체적으로 철봉과 구기운동을 장려했고, 심리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영적으로 깨어 있었기에 조선의 어두운 결박을 끊고 자유와 빛을 달라고 간구했다. 미국 본부의 재정 지원과 위로, 그리고 조선 성도의 헌신적 사랑이 격려가 되었다. 그의 어질고 온화한 성격과 사랑은 가정과 타인에게 귀감이 되었다. 그는 먼저 문화적응을 위해 언어를 배우고, 조선문화를 이해하며, 탐구했다. 또한 한국의 근대화와 자립정신을 일깨웠다. 아펜젤러가 탈진을 몰랐을지라도 사망을 이기신 부활의 예수님을 전한 것처럼 영혼을 위한 사랑과 헌신으로 위기를 극복했던 것이다. 그는 조선에 빛을 비추고 생명을 다한 한국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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