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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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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황순원의 10가지 감사노트 - 4월, 부활주일에 드리는 감사 크리스천헤럴드2025.04.29
    1 오늘도 새로운 날을 주셔서 오늘에 주실 은혜와 축복을 기대하며 하루를 시작하게 하심 감사합니다.2 사모데이에 전할 말씀을 준비하면서 문득 미국땅에 처음 도착하자 맞이했던 인생의 밤이 생각났습니다. 그때 찾아왔던 절망감은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실패의 밤에 찾아와서 속삭이신 주님의 말씀은 지금도 잊을 수 없고 오히려 지금까지 견딜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어주어서 감격하며 원고를 써내려 가게 하신 은혜 감사를 드립니다.3 죽음을 이기고 승리의 부활주로 다시 다가오실 주님은 어떤 끔직한 고통보다 위에 계신 분으로서 고통을 점령하신 승리의 주님께 오늘도 찬양 올려 드리며 감사를 외쳐 봅니다.4 부활절 퍼레이드의 행진을 보면서 선교 140년을 맞이한 한국땅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했던 아펜셀러 선교사님의 5대손과 언더우드 선교사님의 4대손이 함께 참여하여 감격의 메시지를 전하는 모습에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5대,6대손 자녀들을 가진 나로서 하나님의 복음이 이들을 통해 어떻게 전달될지 궁금한 가운데 희망을 갖고 감사를 드립니다.5 한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자연원리는 수천년의 역사속에 아직도 진리로 남아 있으니 사모사역속에 감추인 고난의 씨앗은 수많은 사모들을 살리는 생명력을 품고 있음을 상기할때마다 고난의 의미는 또 하나의 신비임을 철저히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6 하나님의 사랑은 베드로의 실패의 자리까지 따라오셔서 기어코 그를 회복시키고 새사명을 주신 이유는 사명보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관계임을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질문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는 주님이 베드로의 사랑을 받고 싶어서가 아니라 "내가 이렇게 사랑하는데 반응을 좀 보여 주렴" 하는 주님의 간절한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오늘도 나에게 질문해 오시는 주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확인시키고 싶어하시는 마음을 알고 주님께 고백하면서 감사를 드립니다.7 불평을 품은 자들은 매 사건속에서 불평만을 선택합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어떤 사건과 환경속에서 감사만을 찾아서 고백합니다. 마치 철이 지남철에 가까이 하면 들어 붙듯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붙는 것이 다릅니다. 내안에 계신 주님으로 가득 채우기만 하면 어떤 상황도 부활의 능력으로 승리할 수 있어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8 디모데처럼 거짓이 없는 믿음만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역경을 지나는 동안에도 그분을 더 깊이 알수 있는 축복을 주실 것을 믿으니 새롭게 감사하는 마음이 솟아 오릅니다.9 인생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푼푼초초 우리를 단련하시어서 마침내 영광스러운 존재로 누리게 하시는지 생각할수록 알 수 없습니다. 욥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끝이 보이지 않은 고난의 터널을 지나가던 날들을 잊을수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지내온길 주의 크신 은혜라" 라고 고백하며 눈물의 감사를 드려봅니다.10 나를 위로하시고 다시 일으켜 세워서 당신의 계획을 이루어 나가시는 하나님이 이번 사모데이에 참여하시는 모든 사모님들을 만나 주시어 다시 일으켜 세우사 창공을 날으는 독수리처럼 모두 날게 하옵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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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84
    [오피니언] 최재홍 목사의 하루한장 말씀 - 생명의 말씀을 품은 크리스쳔 크리스천헤럴드2025.04.29
    요즘 저는 매일 아침 방송으로 요한계시록을 한 장씩 묵상하며 큰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그 중에 제 마음에 와닿는 말씀은 환란이 다가오고 종말의 때에도 우리를 끝까지 지키고 보호해 주는 유일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영원토록 변함없으신 생명의 말씀이 우리를 최후의 승리로 이끌어 주신다는 계시록의 내용입니다.어떤 사람들은 부적을 몸 속에 지니고 다니거나 차 내에 혹은 집안에 보관하면 나쁜 일이 생기지 않고 생명을 안전하게 보호해 준다고 믿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거금을 들여서 구입합니다. 우리가 아는 탁월한 지성인들마저도 이렇게 살아가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부적은 실제로 어떤 힘도 능력도 발휘할 수 없는 종이일 뿐입니다. 그런데 꼭 세상 사람들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부 크리스쳔도 동일한 생각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예를 들면 성경 책을 부적처럼 생각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렇게 적용하기도 합니다. 집에 보관하고 몸에 지니고 목에 십자가를 걸고 혹은 차에 달고 다니면 그것이 나를 지켜주고 안전하게 보호해 준다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어느 부분으로는 심리적 안정을 누릴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가 읽고 듣고 전하고 지킬 때에 생동감이 있고 능력이 나타납니다. 성경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증거할 때에 더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저자인 사도 요한은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고 말씀합니다. 크리스쳔의 제일 원칙은 말씀을 입에서 떠나지 않게하며 주야로 묵상하고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수1:8). 성도인 우리들의 삶을 바라보며 불신자들과 비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대로 살아가야 합니다.이 땅의 모든 크리스쳔은 하나님 나라를 대표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대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처신과 행동에 따라서 하나님 나라와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칭송을 듣게 됩니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우리는 천국의 외교관입니다. 하늘나라의 대사입니다. 외교관의 역할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본국을 대표합니다. 명예를 지키고 본국에 대한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 주재국의 관련 정보사항을 수집해야 합니다. 공개된 정보와  감추인 정보를 찾아내고 지역정세를 잘 살펴야 합니다. 셋째는 본국을 홍보하고 주재국과 관련된 본국의 입장을 설명하고 설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대사도 이와 유사한 역할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내리신 지상명령(마28:18~20)은,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등극한 후 사신들을 보내어 자신이 다스리는 세상에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라는 명령입니다. 왕에게 부름받고 훈련받고 파송된 사신, 대사의 역할이 바로 지상명령으로 부여된 전도의 사명입니다. 우리들 각자가 모두 하나님 나라의 대표입니다.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사도바울이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고 편지가 되어야 한다고 한 말은 하나님 나라의 대사로서의 역할을 잘하라는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대사는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그 나라의 왕되신 예수님이 세상을 위해서 하신 일을 증거하고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크리스쳔으로 살아간다는 의미는 예수님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혼들을 섬긴다는 것은 예수님을 전하고 친밀하게 교제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로 회복되고 돌아오도록 권하는 것입니다. 내 삶의 모습이 예수님을 드러내는 광고판입니다. 나의 표정과 행동이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나의 나눔과 섬김이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모두 다 그리스도로 옷을 입게 되는 그날을 꿈꾸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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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김병학 목사의 소통하는 교회 - 소통은 화해의 시작이다 크리스천헤럴드2025.04.13
    한국 대통령이 탄핵되었다. 한국 사회는 대통령 탄핵이라는 정치적 격변기를 겪으며 양극화와 분열을 경험했다. 이러한 정치적 갈등 속에서 종교, 특히 한국 사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독교의 역할과 소통 방식에 대해 새롭게 고찰할 필요가 있다. 탄핵이라는 대한민국 헌정 사상 중대한 결정 과정에서 기독교 공동체는 어떤 방식으로 소통했으며, 앞으로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대통령 탄핵 과정에서 한국 기독교계는 크게 두 진영으로 나뉘었다. 한쪽은 탄핵을 지지하는 진보적 기독교인들이었고, 다른 한쪽은 탄핵을 반대하는 보수적 기독교인들이었다. 이러한 분열은 단순한 정치적 견해 차이를 넘어, 성경 해석과 신앙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 차이를 드러냈다.보수 기독교계는 주로 대형 교회를 중심으로 국가 권위에 대한 순종과 기존 질서 수호를 강조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들은 로마서 13장의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는 구절을 근거로 정부 비판에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반면 진보 기독교계는 예언자적 비판 정신과 사회 정의 실현을 강조하며, 예수의 가르침에 기반한 사회 개혁을 주장했다.이러한 갈등은 결국 교회 내부의 분열로 이어졌고, 교인들 간의 소통 단절과 상호 비방으로 기독교의 사회적 신뢰도는 크게 하락했다.탄핵 과정에서 기독교 공동체의 소통 실패는 여러 원인에서 비롯되었다. 첫째, 정치적 이슈에 대한 종교적 해석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배타성이다. 자신의 정치적 견해만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하며 다른 의견을 가진 신앙인들을 배척하는 현상이 만연했다.둘째, SNS와 같은 디지털 미디어 환경에서 발생하는 에코 챔버(Echo Chamber) 현상이다.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들끼리만 소통하면서 자신의 견해가 강화되고, 다른 의견에 대한 이해와 존중은 점점 사라졌다. 이는 교회 내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다.셋째, 교회 지도자들의 정치적 발언이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문제가 있었다. 일부 목회자들은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마치 신의 뜻인 것처럼 표현하며 교인들에게 특정 입장을 강요했다.이러한 소통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기독교 공동체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첫째, '경청의 윤리'를 회복해야 한다. 야고보서 1장 19절은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가르친다.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의 이야기를 먼저 경청하고, 그들의 관점에서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둘째, '공론장'으로서의 교회 기능을 회복해야 한다. 교회는 다양한 정치적 견해가 공존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교회 내에서 정치적 이슈에 대한 토론회나 대화의 장을 마련하고, 서로 다른 입장을 존중하며 소통하는 문화를 형성해야 한다.셋째, 정치적 이슈를 다룰 때 '공동선'을 추구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특정 정파나 이념의 승리보다는 사회 전체의 공동선을 위한 관점에서 정치적 사안을 판단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이는 기독교의 핵심 가치인 이웃 사랑과 정의 실현에 부합하는 접근 방식이다.넷째, 디지털 미디어 시대에 맞는 '디지털 제자도'를 실천해야 한다. 소셜미디어(SNS)에서의 발언과 공유 행위에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책임과 윤리를 적용하며, 가짜 뉴스나 혐오 표현을 확산시키지 않는 미디어 리터러시를 함양해야 한다.탄핵 이후의 사회에서 기독교는 분열을 조장하는 세력이 아닌, 화해와 치유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이를 위해 기독교인들은 정치적 견해가 달라도 기본적인 인간 존엄성을 인정하고, 차이를 존중하는 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 또한 개인의 죄악에 대한 판단과 단죄를 넘어, 사회 구조적 불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개혁적 실천을 병행해야 한다.특히 탄핵 과정에서 깊어진 사회적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교회는 화해의 의례와 실천을 적극적으로 도입할 필요가 있다.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을 가진 교인들이 함께 예배하고 봉사하며, 공동의 신앙 고백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일치를 경험하도록 돕는 것이다.대통령 탄핵은 한국 사회와 기독교계에 깊은 상처와 분열을 남겼지만, 동시에 새로운 소통과 화합의 기회를 제공했다고 생각한다. 이제 기독교 공동체는 과거의 갈등을 반성하고, 보다 성숙한 신앙적 대화와 정치적 참여의 모델을 개발해야 한다.이를 위해서는 특정 정치 세력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나 반대를 넘어, 성경의 가르침과 그리스도의 사랑에 기초한 비판적 참여가 필요하다. 또한 교회는 다양한 목소리가 공존하는 가운데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다양성 속의 일치'를 추구해야 한다.대통령 탄핵이라는 정치적 위기는 역설적으로 한국 기독교가 자신의 정체성과 사회적 역할을 재정립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분열과 갈등의 시대에 기독교는 사랑과 화해의 메시지를 실천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치유와 통합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첫걸음은 서로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진 그리스도인들 간의 진정한 대화와 소통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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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The letter 06 김광근 -예수님의 눈물 위에 놓인 구원의 길 크리스천헤럴드2025.04.13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종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 누가복음 19장 41-42절 -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발걸음은 환영받는 입성이자 동시에 깊은 슬픔의 여정이었습니다. 군중의 외침은 열정으로 가득했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습니다. 그 눈물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향해 품으신 애끓는 사랑이었습니다.예수님은 그들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평화를 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아파하셨습니다. 그들은 기적과 권세는 보았지만, 십자가를 통한 구속의 계획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분의 눈물은 단지 당시 예루살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진리보다 기대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향한 것이기도 합니다.하나님의 평화는 세상이 주는 안정과는 다릅니다.그것은 십자가를 통해 가능해진, 하나님과의 깊은 화해이며 진정한 회복의 시작입니다. 종려주일은 단지 환호의 날이 아니라. 예수님의 눈물 위에 놓인 구원의 길을 다시 바라보는 시간입니다.오늘, 우리는 어떤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까?그분의 마음을 오해한 채 환호만 외치는 무리에 속해 있는 것은 아닐까요?눈물 흘리신 주님의 마음을 깊이 묵상하며, 참된 평화의 길로 나아가는 종려주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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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김민석 칼럼 - 절대적 믿음이 부르는 폭력성: 공공신학의 시선으로 본 오늘의 한국교회 크리스천헤럴드2025.04.13
    필자는 공공신학자다. 공공신학이란 신앙이 개인의 내면에만 머무르지 않고 사회와 공공의 삶 속에서도 의미를 발휘해야 한다고 믿는 신학이다.그래서 필자는 늘 기독교인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방식, 사회와 소통하는 태도에 관심을 가져왔다. 그러나 요즘 한국교회의 정치 참여를 바라보면서, 차라리 신앙이 공적인 영역으로 나오지 말고 조용히 기도와 예배에만 머물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곤한다.오늘날 기독교는 마치 우리나라가 기독교 국가인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다원주의를 기반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국가이며, 다양한 신념과 종교가 공존하는 사회다.따라서 기독교는 자신과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들과도 평화롭게 살아가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다양한 인종, 문화, 신념이 함께 공존하는 사회 속에서, 기독교는 어떻게 평화와 공공선을 위해 기여할 수 있을지를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생각해보라. 기독교, 천주교, 불교, 이슬람교 등 다양한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공존하는 사회에서 만약 모든 종교 집단이 각자의 신념을 고수하겠다며 사회적 힘겨루기에 나선다면 어떻게 될까? 그건 평화가 아니라 혼돈이고, 결국 지옥 같은 세상일 수 있다. 우리는 그런 세상을 자녀들에게 물려주고 싶은가?물론 이것은 기독교 신념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성경에 근거한 확고한 신념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 신념이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중한 태도와 합리적인 대화를 통해 표현되고 설득돼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믿는 진리는 강압이나 혐오가 아닌, 이해와 설득을 통해 전해질 수 있다.그런데 요즘 현실은 그와는 정반대다. 믿음이 절대적일수록, 즉 내 행동에 대한 신앙적 근거가 확고할수록 혐오와 배제를 정당화하고, 마침내는 폭력적인 언어와 태도까지 보인다. 우리가 그토록 비판하던, 테러를 수단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실현하려는 극단적 이슬람 무장단체와 같은 모습이다. 절대적 종교적 신념이 극단주의 정치와 만나면, 상대는 대화 파트너가 아닌 ‘악마’로 간주한다. 그러니 그 악마를 무찌르기 위해서 종종 폭력, 혐오, 전쟁을 용인하게 된다. 이쯤 되면 묻게 된다. “오늘날 믿음이 좋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생각해보자. 오늘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갈등은 정말 ‘이단’이나 ‘사이비’ 때문인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들 때문인가? 오히려 그런 경우는 관심조차 주지 않는 듯하다. 정작 더 극단적인 갈등과 혐오가 발생하는 지점은,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끼리다. 같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정치적 견해가 다르면 서로를 향해 “진짜 기독교인이 아니다”라며 정죄하고, 마치 적군을 대하듯 싸우려 든다.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정말 내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인가? 성경이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은 이슈들에 대해서도, 나의 해석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믿음이란 언제나 인간의 해석과 이해를 수반한다. 우리는 과거, 너무나도 확고한 믿음으로 인해 했던 행동이, 시간이 지나 내 안에서 생각이 바뀌면서 과거의 믿음을 철회한 경험이 많다. 그렇다면 진리가 변한 것인가? 아니면 그 진리를 해석한 나의 생각이 변한 것인가?오늘 한국교회 안에서는 “내가 옳고, 너는 틀리다”는 이분법이 너무 쉽게 통용된다. 특히 교회 안에서 정치적 의견이 다르면 더 이상 형제가 아닌 듯이 행동한다. 정치가 진리 위에 있는 듯 하다. 기독교가 강도나 창녀와도 함께 하신 예수님을 따른다면, 정치적 다름은 왜 함께할 수 없는 것일까?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을 보라. 양국의 기독교인 군인들이 서로 ‘이 전쟁은 하나님이 우리 편을 드시기 위한 성스러운 전쟁’이라고 믿는다. 똑같은 성경을 읽고, 똑같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서로를 죽이고 있다.하나님은 과연 누구의 편일까? 우리는 이 질문 앞에서 머뭇거릴 줄 알아야 한다. 둘 다 맞을 수도 있고, 둘 다 틀릴 수도 있다. 그 가능성을 열어두는 겸손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의 시작이 아닐까?더 걱정스러운 것은, 우리의 자녀들이 이런 어른들의 모습을 보며 자란다는 것이다. 부모가 신앙을 지킨다는 이유로 혐오와 폭력을 정당화하는 모습을 본다면, 아이들은 신앙이란 곧 ‘자신과 다른 이를 공격해도 되는 면허’라고 받아들이지 않을까? 더욱이 자신의 신앙이 오류가 없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는다면, 자신을 절대선으로 여기는 위험한 존재가 될 수도 있다. 나는 내 자녀가 그런 폭력적인 사람으로 자라기를 결코 바라지 않는다. 이 모든 이유 때문에 나는 다시 공공신학을 이야기한다. 공공신학은 기독교인의 정치 참여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특정 정당이나 정치세력을 노골적으로 지지하지 않으며, 정치가 신앙의 모든 답이라는 환상도 갖고 있지 않다.오히려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간접적으로 선한 영향력을 끼치기를 바란다. 그래서 공공신학은 공적 광장에서 종교적 언어를 남발하지 않고, 이웃과 소통 가능한 언어로 말하고 행동한다.오늘 한국교회는 공공신학이 던지는 이 질문에 귀 기울여야 한다. “당신의 믿음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그리고 “그 믿음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얼굴로 다가가고 있습니까?” 만약 그 믿음이 상대를 악마로 만들고, 혐오하고, 공격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게 만든다면, 그건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 있다.이제는 믿음을 말하기 전에, 믿음이 낳는 태도를 먼저 돌아봐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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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황순원의 10가지 감사노트 - 발을 씻기며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낮아짐에 감사 크리스천헤럴드2025.04.13
    1 오늘도 새날을 주시고 내일을 준비하며 설교하실 목사님들을 위해 중보기도하는 시간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2 사모님들로부터 기쁜 소식과 함께 기도의 응답의 내용들을 들으니 기쁨이 더욱 배가 됩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다시 입증하는 시간을 주셔서 감사하면서 기도응답보다 더 소중한 예수님의 이름이 주는 권세와 능력을 찬양하며 감사를 드립니다.3 한국 사모데이 마지막 준비팀들의 모임에서 최선을 다하여 준비하는 모습을 보면서 조장님들의 충성스러운 섬김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날뿐아니라 이미 이 땅에서 섬김의 행복을 누리는 사모님들의 얼굴이 환하게 빛이 나는 것을 보면서 이번에 주실 은혜가 소낙비같이 내려질 것을 기대하며 감사를 드립니다.4 주님은 십자가가 지시기 전에 사람을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시어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겨 주셨습니다. 상대의 발을 씻기기 위해서는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낮은 자리로 내려가야 합니다. 세족식에서는 자연스럽게 무릎을 꾾을수 있는데 가정에서 남편들에게는 낮은 자리로 내려가기가 그리도 어려운 일인지 가정 사역자로서 순간순간 고민하면서 주님께 질문을 던지면서도 감사를 드립니다.5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이 "내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는 고백은 의지와 감정까지도 포기하는 고백이 들어 있습니다. 수없이 같은 고백을 하곤 하면서도 막상 나의 감정을 향해 도전해 오는 어떤 사연들 앞에서는 가차없이 기승을 부리곤 하니 언제나 주님의 고백을 나의 고백으로 토해낼 수 있을까 고민하며 오늘 저녁에 동부에이레네 방 기도회를 준비하며 감사를 드립니다.6 예수님의 성육신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사건중에 가장 위대한 사건입니다. 한국에 직접 가는 대신 영상으로 사모님들을 섬길때마다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피부로 느낍니다. 시간대가 다르고 기온도 다르고 문화조차도 다른 것을 피부로 느끼면서도 이런 방법으로도 사역을 할 수 있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창조의 힘에 다시금 감탄섞인 감사를 드립니다.7 눅 21:27 "그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늘 것을 보리라" 이 말씀은 여느때와 달리 전세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한번에 볼 수 있을 것을 상상할때마다 신비함을 느끼며 그날이 속히 오기를 학수고대하면서 감사를 드립니다.8 해마다 사모데이를 준비할때면 변함없이 내게 찾아오사 간절히 요구하시는 주님의 간청을 듣게 됩니다. 이번에는 특별히 농촌교회를 섬기시는 사모님들이 문화의 혜택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고달프게 사역하는 사모님들을 향한 주님의 뜨거운 눈물을 흘리게 하십니다. 갈수록 목회가 쉽지 않아 신학교 입학생이 줄어들고 있는 이 때에 농촌에는 그 누구도 가려하지 않습니다. 이런 안타까운 소식을 접할때마다 어떻게 그들을 섬기고 위로해야 하는지 묻고 또 물으며 준비하게 하심 감사합니다.9 소외되고 힘겨워하는 사모님들을 주님 섬기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낮은 자리에서 그들의 아픔을 같이 아파하는 이번 사모데이가 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을 가질때마다 하나님의 미소를 볼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10 설교준비를 할때마다 항상 자신에게 질문하는 것이 있습니다. 설교는 너의 말이 아니고 너의 삶자체이다. 이 말만 떠오르면 준비를 하다가도 멈추게 됩니다. 과연 전하는 말씀대로 살아가고 있을까 점검하면서 떨리는 마음으로 다시 책상앞에 앉을 수 있게 하심에 다시금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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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최재홍 목사의 하루한장 말씀 - 사순절 나의 말과 행동이 예수님을 나타냅니다 크리스천헤럴드2025.04.13
    최근 사순절 말씀묵상은 민수기서입니다. 성경을 읽다가 ‘중앙’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Center, the midst이라고 하는 단어 말입니다. ‘중앙’이라는 의미는 사방의 중심이 되는 한 가운데, 양쪽 끝에서 같은 거리에 있는 지점 혹은 중심이되는 중요한 곳을 의미합니다. 최근에는 ‘중앙/가운데’의 의미가 퇴색되었다는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예배와 행사에서 기록사진을 많이 찍게 되었는데, 서로 맨 앞줄 가운데 자리를 앉으려는 분들을 보게 됩니다. 심지어 담당순서가 없는데도 꼭 가운데를 고집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행사 전, 출입 동선을 설명해도 들은 척도 안하고 강대상 중앙으로 펄쩍뛰어 올라가는 무례하고 몰상식한, 해괴망측한 실력을 과시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하고 존귀하게 여기고 마음으로 새기려는 행사의 분위기와 의미를 퇴색케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행사에 늦게와서 자기 순서를 주장하는 분도 있습니다. 사명자 의식도 결여된 자기중심적 작은 행동들로 오히려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중앙/가운데 라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성경에서도 중앙/가운데라는 의미가 창세기 2장에 기록된 에덴 동산(히브리어: גַּן עֵדֶן)의 ‘중앙’에 심겨진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라고 기록이 등장합니다. 에덴이라는 단어는‘헤덴(Heden)’에서 유래한 히브리어로 ‘환희의 동산’, ‘태고의 정원’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관계를 설정하고 함께하심을 보여주는 공간적 개념이 에덴동산이고 그 중심부에 하나님과우리 영혼을 이어주는 생명나무와 선악과의 위치가 설명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은 광야시대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열두 지파가 세 지파씩 네 그룹을 나누어서, 성막을 중앙에 두고 사방에 자리잡게 합니다. 그리고 행진을 할 때에도 성막을 중앙에 두고 선두에 앞서가는 하나님의 법궤와 구름기둥을, 사방의 네 그룹이 나란히 따라갑니다. 언제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중심에는 성막이 위치하고 있습니다.다시 확인해도 성경에서는 중앙, 중심, 가운데라는 의미가 중요한 것을 알게 됩니다. 왜? 성막은 이스라엘 진영의 중심에 배치가 되었을까요? 성전의 기본개념은 그곳이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소라는 뜻입니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이 곧 하나님의 성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으시는 장소는 다양했습니다. 족장시대에는 상수리 나무, 돌베개를 베고 잔 장소와 같은 곳에서, 하나님을 만난 장소에 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모세는 나이 80세에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한 체험을 하였고 시내산 자체가 하나님이 임재하신 거대한 성소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직접 출애굽기 25:8에서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지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성막이 하나님께서 백성 중에 거하시는 장소임을 말해줍니다. 또한 성막이 단순히 하나님이 거하시는 공간일 뿐더러, 친히 백성을 만나시고 그들과 소통하시며, 백성들이 신령과 진리로 준비한 예배를 받으시고 복과 은혜를 베푸시는 거룩한 공간임을 뜻합니다.그런 이유로 성막(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제사와 율법을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의 삶이 성막(성전)과 연결되어 있었기에 일상의 측면에서도 성막은 삶의 심장부요 원동력과 같은 장소입니다. 중심입니다우리 크리스쳔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전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이 세운 몸 된 교회는 사람 성전입니다. 성도의 모임인 교회가 참된 성전으로 우리 삶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거기서 하나님이 예배를 받으시고, 우리와 소통하시며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에게 축복하시며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의 중심에는 무엇이 자리잡고 있습니까? 우리 마음에도 중심이 있습니다. 지금 내 마음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입니까? 내 영성의 현주소입니다. 눈에 보이는 중심이 교회, 성전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좌정하셔야 합니다. 나의 말과 행동이 곧 예수님이고 성전이 됨을 기억하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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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이충희 목사의 "AI와 크리스찬의 만남" - AI 기술과 기독교 윤리적 관점 크리스천헤럴드2025.03.19
    최근 몇 년 사이 ChatGPT를 비롯한 다양한 인공지능(AI)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사회 전반이 변화의 소용돌이에 놓이게 되었다. 교육을 비롯해 모든 사회의 분야 특히, 교회 공동체 역시 이 기술적 변화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많은 교회가 온라인 예배와 디지털 사역이라는 새로운 방식에 적응해야 했으며, 이는 AI 시대가 이미 우리 곁에 깊숙이 다가왔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이제 AI의 등장과 활용은 교회가 더 폭넓은 사역의 기회를 얻는 동시에, 이에 따른 신앙적·윤리적 문제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대한 깊은 고민과 도전을 던지고 있다.현재 AI 기술의 발전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는 의료 분야이다. AI는 방대한 의료 데이터를 빠르게 분석하여 질병을 조기에 진단하거나 개인 맞춤형 치료법을 추천함으로써 실제 환자들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금융 분야에서도 AI를 이용한 알고리즘 트레이딩과 개인 맞춤형 금융자문 서비스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교육 분야에서는 개개인의 학습 능력과 관심사에 따라 맞춤형 학습 콘텐츠를 제공하는 인공지능 시스템의 탁월한 효과가 학생과 교수등 교육 현장에 적용되고 있으면 이에 대한 여러 논란들도 발생하고 있다.이러한 사회적인 AI의 급변하는 흐름 속에 교회도 역시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 다양한 AI 기반 시스템을 활용하고 있다. 일부 교회에서는 AI 기반의 영상 및 예배활용, 교육등의 시스템을 통해 교회 목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적용해 가고 있으며, 온라인 목회 상담 챗봇을 통해 성도들의 고민과 영적 문제를 해결해 주고 있다. 특히 미국 내 한인 이민교회들 중에는 AI 기술을 활용하여 다문화 사회에서 겪는 언어 장벽 문제를 극복하고, 보다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사례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실제로 일부 교회에서는 다국어 동시 통역 시스템이나 AI 기반의 성경 연구 프로그램을 통해 신앙 교육을 강화하고 있다. 본 AX Mission 연구소에서도 미국 엘에이를 중심으로 목회자와 성도들의 성경연구를 위해 돕기위해 온라인과 오프라인 세미나를 개최하여 많은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또한, 탁월한 AI학습법에 대한 세미나도 개최하여 학부모와 학생들이 AI기술을 이용해서 어렵고 힘든 학업의 과정을 맞춤식, 자기주도적 학습으로 최대한의 학업 성과를 이루기 위해 돕고 있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과 활용이 언제나 긍정적인 결과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AI 기술의 무분별한 사용은 프라이버시 침해, 데이터 남용, 알고리즘 편향성 등 심각한 윤리적 문제를 불러올 수 있다. 개혁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존귀한 존재이며, 기술은 어디까지나 인간을 돕고 섬기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져야 한다. 그렇기에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거나 인간이 가진 윤리적 결정과 인간 가치를 축소시키는 형태의 기술 사용은 단호히 경계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특히 AI가 사용자의 민감한 정보를 지나치게 수집하고 이를 상업적으로 활용하거나 무분별하게 관리할 경우, 개인과 공동체에 대한 신뢰는 크게 손상될 수 있다. 실제로 최근 몇몇 AI 챗봇 서비스가 개인정보 관리 문제로 논란을 일으킨 바 있으며, 이는 교회 현장에서도 잘못 사용될 경우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현실적인 문제이다.이를 방지하기 위해 앞으로 교회와 신학교가 중심이 되어 AI 윤리위원회를 구성하고, 기술 활용에 관한 명확한 기독교적 윤리 가이드라인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위원회는 각 교회의 AI 사용 사례를 평가하고 모니터링하며, 신앙 공동체가 기술적 위험을 예방하고 신학적 책임감을 가지고 기술을 활용하도록 지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이와 더불어 목회자와 신학생들이 AI 기술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고 윤리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신학교에서 AI 관련 교과목을 편성하고 신앙과 신학적 기준에 부합하여 기독교적 윤리 기준을 명확히 제시하여 바로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또한 실제적인 사례 기반의 워크숍과 현장 실습 프로그램을 제공하여, 모든 목회자들이 AI를 지혜롭고 신앙적으로 책임 있게 활용하도록 준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결론적으로, 교회가 AI 시대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기술을 받아들이는 차원을 넘어, 신학적·윤리적 관점에서 기술을 평가하고 활용해야 한다. 인간 존엄성과 창조 질서를 존중하면서 AI를 섬김의 도구로 활용할 때, 교회는 새로운 시대에도 여전히 영향력 있게 세상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중심이 될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지금 우리가 내리는 신학적 평가와 윤리적 결정이 미래 세대에게 건전한 신앙적 유산을 남기는 초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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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The letter 05 김광근 - 그분의 때에 그분의 방법으로 크리스천헤럴드2025.03.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베드로전서 5장 6절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겸손한 자는 결국 하나님께서 높이시고,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십니다.겸손은 단순히 낮아지는 것이 아닙니다.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내 힘과 지혜로 모든 것을 이루려 하기보다,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것이 참된 겸손입니다.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계획에만 의존하지만,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기다릴 줄 압니다.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지만,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낮출 때,하나님은 가장 적절한 때에 우리를 높이시고우리가 가야 할 길을 열어 주십니다.오늘도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해 보세요. 그분의 때에, 그분의 방법으로 당신을 높이시고 복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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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이정기 칼럼 - 지금 시국에 우리가 해야 할 일 크리스천헤럴드2025.03.19
    윤석열 대통령의 최후 진술이 끝나고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헌재가 어떤 결정을 내려도 절반의 국민이 격노할 살벌한 상황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회는 끊임없이 양분화되어 왔다. 동조와 반대, 좌와 우, 보수와 진보 등 다양한 형태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는 모습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반복돼 왔다. 이러한 양분화는 극단적인 대립과 갈등을 심화시켜 사회 통합을 저해하고 국가의 발전을 가로막는 주요 원인이 됐다. 양분화는 사회 몰락의 전조 현상이다. 극단적인 대립과 갈등을 극복하고 사회 통합을 이루기 위한 노력이 없다면 사회는 쇠퇴하고 결국 멸망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언론은 객관적이고 공정한 보도를 통해 사회 통합에 기여해야 한다. 극단적인 이념을 경계하고 합리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사회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정치인들은 국민의 신뢰를 바탕으로 사회 통합을 위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교육은 다양성을 존중하는 태도를 기르는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 사회 통합은 개인의 행복과 국가의 번영을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다. 모두가 사회 통합을 위해 노력하고, 더욱 발전되고 번영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느헤미야는 여러 면에서 독특한 사람이었다. 바벨론에서 태어나 바벨론에서 자랐지만 유대 언어와 문화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느헤미야의 공식 직함은 페르시아 아닥사드다 왕의 ‘술을 맡은 관원’이었다. 옛날 권력은 왕과 가까운 거리에 따라 비례했기에 왕의 신임을 받던 실질적인 실세였다. 그런데 동생 하나니를 통해 조국의 상황을 듣게 된다. 백성들이 능욕을 받고,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는 슬픈 소식이었다. 비통한 소식이었다. 느헤미야는 비참하게 무너진 조국의 모습과 고난당하고 있는 민족을 생각하며 수일동안 슬퍼했다. 무너진 조국 때문에 흘린 눈물이었다. 그리고 느헤미야는 조국을 위해 금식하며 기도한다.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느 1:5).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께 기도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한 나라의 흥망성쇠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느헤미야는 과거에 조상들이 지은 죄와 자신들이 지은 죄를 회개하며 기도한다.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였습니다.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않았습니다”(느 1:6~7). 우리도 기도할 때 이 민족이 거룩하지 못하고 우상을 섬기며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한다. 조금 잘살게 되었다고 절제하지 못하고 낭비하고 사치한 죄, 동성애를 옹호하는 죄악도 회개해야 한다. 느헤미야는 언약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면 여러 나라 가운데 흩으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하나님, 이제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행하면, 흩어진 자가 하늘 끝에 있을 지라도 예루살렘에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말씀을 기억해 주시옵소서”(느 1:8~9).  느헤미야는 절망 속에서 희망을 보며 기도했다. 범죄하면 흩으시겠다는 말씀처럼 흩어버리셨지만, 돌아와 계명을 지키면 다시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말씀을 기대하며 기도했다. 그의 간절한 기도는 약 4개월간 지속됐다. 당시 느헤미야는 왕이 가장 신임하는 술 관원이었다. 어느 누구보다 안락하게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벽 재건에 자신을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형통하게 해주시기를 기도한다.(느 1:11). 왕의 은혜를 입어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앞장설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였다. 하나님은 느헤미야의 기도에 응답하신다.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을 움직여 느헤미야를 돕도록 섭리하신다. 마침내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성벽을 52일 만에 재건한다. 하나님의 손이 도와주셨다. 느헤미야는 나중에 백성들에게 왕궁에서 일어난 일을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셨다”(느 2:18),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셨다”(느 2:20). “그들이 우리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이루신 것을 알았다”(느 6:16)라고 말한다. 모든 일의 시작과 끝이 하나님에 의해서 된 것임을 선포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기 조국을 사랑한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숭배의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이 진멸하시려고 하자 이렇게 기도한다. “이 백성이 큰 죄를 범하 였나이다.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 32:31~32).  모세가 자기 민족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사도 바울도 자기 동족이 구원을 받을 수만 있다면, 자신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그것을 원한다고 고백했다(롬 9:3). 지금 우리 사회를 보면 얼마나 부조리가 많은지 모른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비판보다는 기도를 더 많이 해야 한다. 비판하는 입술을 기도하는 입술로 바꿔야 한다. 느헤미야처럼 공동체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느헤미야처럼 조국을 생각하며 마음 아파하며 금식하며 기도해야 한다. 나라가 하나 되고 국론이 분열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 사마리아 사람처럼 연약한 자를 배려하고 불쌍히 여기며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 우리 앞에 놓여 있어도 우리가 엎드려 기도하면 절망의 땅에서도 기적은 일어날 것이다.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는 느헤미야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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