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7 페이지

본문 바로가기

뉴스

  • 248
    [오피니언] 김은주 교수의 탈진을 긍정하라 15 <탈진 관점으로 본 선교사 이야기 3- 로버트 토마스> 크리스천헤럴드2024.12.22
    선교사는 타문화 가운데 기하학적으로 복잡하고, 위험하여 스트레스가 높은 편이다. 토마스 홈즈와 마수수(Thomas Holmes and M. Masusu)는 다양한 스트레스를 측정했다. 측정지수를 보면, 배우자의 죽음 100, 결혼 50, 임신 40, 생활 환경의 변화 25, 거주지 이동 20, 식습관 변화 15로 나타났다. 선교사의 타문화 생활로 인한 스트레스는 일반 사람들 보다 매우 높은 편이다.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Robert Jermain Thomas: 최난헌 1840~1866)는 한국교회 최초의 순교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런던에서 신학을 마치고, 1863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해 7월 21일 런던선교회(LMS)에서 중국으로 파송을 받았다. 하지만 도착한 지 3개월 만에 아내와 사별했다.그는 다음과 같이 편지 했다. "제 사랑하는 아내 캐로라인(Caroline Godfrery)이 작년 3월 24일 사망했고, 이로 인해 저는 완전히 무력해졌습니다.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습니다. 자세한 내용을 살펴보면, 제 슬픔이 다시 터져 나옵니다…방금 시작한 고귀한 일에 그 어느 때보다 온전히 헌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지만, 지금은 깊은 슬픔에 짓눌려 있습니다. 여러분의 동정과 기도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아무리 심각한 시련이라도 이 영광스러운 대의에서 나를 떼어놓지 말고, 오히려 그녀의 평화롭고 고통 없는 종말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며, '주께서 주셨고, 주께서 거두셨으니, 주의 이름에 찬양이 있을지어다.” 그는 이렇게 마무리를 했지만, 슬픔과 절망이 아련했다. 12월의 중국 상하이는 매우 춥고, 비위생적인 환경이었다. 첫 아이를 임신한 아내를 위해 다른 숙박시설을 찾아 떠났다가 아내의 마지막 모습도 지켜보지 못한 채 비운을 접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으로 큰 충격을 받아 선교를 사임하고, 상하이에서 옌타이로 옮겼다. 그곳에 예상치 못한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 조선 천주교 신자 김자평과 그 동료들을 만나면서, 조선에 대한 새로운 선교 열정이 일어났고, 한국어를 공부하여 1865년 9월 백령도에 도착했다.  그후 2개월반 동안 황해도 연안에서 섬 주민들에게 성냥, 케이크, 성경을 나눠주며, 서양문물을 전하고, 복음을 전파했다. 그 당시 한인들은 목이 잘릴 위험을 감수하며, 성경을 받아들였다. 다시 북경으로 돌아간 토마스는 조선을 향한 열정으로 1866년 8월 16일, 중국어 성경을 갖고, 통역 겸 안내자로서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조선에 입국했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과 병인년 천주교 박해로 인해 군졸과 관민들은 미국 배를 공격하여 폭발했다. 토마스는 성경을 안고 헤엄쳐 탈출했지만, 칼을 겨눈 박춘권에게 성경을 주며, 찔려 죽게 되었다.토마스는 사별의 신체적, 심리적, 영적인 탈진을 순교로 승화시켰다. 탈진의 과정은 어떠한 요소로 원인을 제공하여 우울증과 탈진으로 나타나지만, 방향 변경 또는 개인 구조조정을 통해 해결방안을 모색할 수 있다. 회복한 방법을 레나르트 할스텐(Lennart Hallsten)의 탈진 과정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첫째, 몰입하는 헌신이다. 그는 17살에 첫 설교를 할 만큼 의욕적이며, 재능이 있었고, 그리스어, 라틴어, 프랑스어, 중국어, 한국어를 섭력하여 언어학자로서 선교현장에서 두각을 보였다. 또한 선교사들을 위해 6개월 동안 의학지식을 쌓았으며, 신학을 졸업하자마자 목사 안수를 받고, 선교사로 지원했다. 둘째, 좌절된 노력이다. 그는 아내의 사망소식으로 완전히 탈진했다. 셋째, 해결 방법은 방향 변경이었다. 깊은 슬픔을 겪은 후, 선교를 사임하고, 이직을 했다. 휴식하는 동안 심신의 안정을 찾았고, 하나님의 새로운 사명에 순종했다. 그는 선교의 열정을 다시 느끼고, 조선을 두 번 방문했다. 끝내 개신교 첫 번째 순교자로서 짧은 인생을 마감했지만, 그 생명의 열매는 끝이 아니었다. 박춘권은 안주 성공회교회의 장로가 되었고, 평양 대부흥과 복음화 물결을 낳았다. 그의 고귀한 피는 한국교회의 초석이 되었다. 토마스는 타문화에서 배우자의 사망으로 스트레스 지수 1위와 탈진을 경험했지만, 휴식과 새 소명으로 선교의 열정을 다시 일으켰고, 가장 고귀한 순교의 이름으로 복음의 길을 활짝 열었다. 
    Read More
  • 247
    [오피니언] 참된 리더의 길: 예수 그리스도의 리더십 크리스천헤럴드2024.12.22
    대통령은 국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국가의 최고 지도자다. 그의 말과 행동은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며, 국민의 안정과 직결된다. 한국의 최근 사태는 그 기대와는 정반대로 흘렀다. 정치적 위기에 몰린 대통령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외부의 적이 아닌 내부의 국민을 상대로 군사적 조치를 동원한 것은 국민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중대한 과오였다.국민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정치적 불안과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통령의 비상계엄령 선포는 국민의 불안을 공포로 바꾸어 놓았다. 자유를 억압하고 평화를 깨뜨리는 조치는 실망과 분노를 불러일으켰다.정치의 본질은 공동체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데 있다. 그러나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구하기 위해 국가의 근본 원칙을 무너뜨렸다. 결국 그를 지지하던 국민들마저 등을 돌렸고, 같은 당 국회의원들조차도 탄핵에 찬성했다. 국민의 분노는 국회를 움직였고, 탄핵 결정으로 이어졌다.기독교의 시각에서 볼 때, 지도자의 자리는 특권이 아니라 '섬김의 자리'다. 성경은 참된 리더십의 표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권한을 사람들을 억압하거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며 제자들과 백성을 끝까지 보호했다.예수님도 정치적 탄압을 받았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음모와 로마의 정치 권력 사이에서 불공정한 재판을 받았고, 그 결과 십자가에 못 박혔다. 하지만 그는 폭력으로 맞서지 않고 끝까지 고난을 감당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리더십은 희생과 사랑, 섬김으로 이뤄진다.예수님의 고난은 단순한 패배가 아니라 인류를 구원하는 승리의 길이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했고, 배신한 제자들조차도 용서하며 다시 품으셨다. 진정한 리더는 위기의 순간에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권력을 동원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내려놓고 백성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다.이제 교회는 이 사태를 바라보며 무엇을 배워야 할까? 교회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칠 것인가? 교회는 연약한 자와 실패한 자들을 품는 공동체로 보일 것인가, 아니면 명예와 권위를 지키기 위해 사람들을 외면하는 집단으로 보일 것인가? 그러나 안타깝게도 수 많은 통계와 수치가 교회의 기대와는 상당히 먼 결과를 보여준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객관적인 모습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리더십을 본받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길은 이상적인 모범이 아니라 현실적 지침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어려움에 처한 성도들을 지키는 피난처가 되어야 하며, 고통받는 자들, 낙담한 자들, 실패한 자들을 품고 그들의 회복을 위해 끝까지 함께 걸어가야 한다.그러나 현실은 종종 다르다. 교회가 권력과 명예를 지키는 데 몰두할 때, 사람들은 교회를 떠난다. 교회가 죄인들을 품기보다는 정죄의 자리가 될 때, 사람들은 교회에서 위로와 치유를 찾기보다는 심판과 비난의 목소리만 듣게 된다. 그러나 많은 교회들이 진영논리에 갇혀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해 자기들의 입장만 고수한 듯 보였다. 진정한 교회는 세상의 논리와 달라야 한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리더십의 길을 따르는 교회는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며 품어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던 것처럼, 교회도 성도들을 끝까지 사랑해야 한다.이번 대통령 탄핵 사태는 리더십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진정한 리더는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는 사람이 아니라, 권한을 내려놓고 국민을 섬기는 사람이다. 대통령의 비상계엄령은 그의 정치적 생명을 지키기 위한 궁여지책이었지만, 오히려 그를 파멸로 몰고 갔다. 국민들은 그의 변명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지지층과 국회의원들마저도 그를 외면했다.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리더십을 본받아야 한다. 예수님은 권한을 행사하여 사람들을 지배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며 사람들을 보호하셨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교회는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고 품어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권력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고통받는 자들과 함께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우리의 기도는 단순하다. "주님,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리더십을 따르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자신의 자리와 권한을 지키기 위해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게 하소서. 오히려 예수님처럼 끝까지 사람들을 품고 사랑하게 하소서."오늘의 교회는 지도자의 자리에서 군림하는 집단이 아니라, 예수님이 보여주신 길을 따르는 '섬기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이번 대통령 탄핵 사태는 교회가 어떤 리더십을 본받아야 하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자로서 사람들을 품고 그들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교회는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Read More
  • 246
    [오피니언] 최재홍 목사의 하루한장 말씀 - 죽을 쑤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크리스천헤럴드2024.11.26
    언제부터인가 저는 죽을 좋아하게 되었고 대심방 기간에도 된장찌게 아니면 죽을 자주 먹었습니다. 최근에도 죽을 먹자고 했더니 대접하시는 분이 난처한 표정을 짓기도 했습니다. 사실 일반 식사보다는 소화가 잘되고 속이 부담스럽지 않아서 편안함을 느낍니다. 죽을 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죽을 먹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죽을 끓이기까지 준비하는 과정과 정성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기본적인 재료를 씻고 썰고 볶고 풀어서 양념을 하고 약한 불로 천천히 저어 주어야 합니다. 마지막에는 간과 양념을 적당히 해야 합니다. 죽을 먹는 요령도 배워야 합니다. 죽을 먹는 것도 실력입니다. 죽은 조금씩 떠야 하고 위에서부터 자주 떠서 먹어야 합니다. 당연히 어느 정도 식어야 합니다. 무엇인가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소모되는 시간이 있어야 하고 누군가의 정성이 더해질 때 음식도 맛이 있고 풍미가 깊어지고 모양새가 나타납니다. 사실 우리는 죽에 대해서 너무 낮게 평가를 합니다. 아주 쉬운 것으로 표현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죽도 일품 요리 중에 하나입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는 아주 중요한 음식입니다. 아기들이 자라나서 처음 먹는 음식이 부드럽고 목넘김이 수월하게 만든 묽은 죽처럼 만든 이유식입니다. 몸이 아픈 환자가 아픔과 고통의 자리에서 벗어나는 첫번째 음식이 바로 죽입니다. 그리고 며칠 금식을 한 후에 제일 먼저 대하는 음식이 동치미와 죽입니다. 무엇을 의미하나요? 절대로 음식으로써의 죽은 쉽지도 않고 천하거나 흔하지 않습니다. 죽은 결코 쉬운 음식이 아닙니다. 죽은 생명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전하고 연장시키며 살리는 음식입니다. 그리고 누구나 우리들이 마지막에 먹어야 할 음식도 죽입니다. 죽을 잘 먹고 소화하면 부족한 새 힘을 얻고 생명의 자리로 회복되어 돌아옵니다. 그만큼 시간과 마음의 정성이 담겨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죽을 소화하고 잘 먹으면 활기를 찾고 살아나게 됩니다.저는 아내가 쉽게 만들어주는 음식으로 당연하게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아이들이 아프고, 때로는 아내가 몹시 아플 때에 먹고 싶다고해서, 죽 쑤는 요리 비법을 자세히 알려주었지만 눌어붙고 태우고 설익고 망쳐버렸습니다. 우리 중에는 죽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MZ세대의 젊은이들이 가장 먹기 싫어하는 음식 중에 하나가 죽이라고 합니다.  목사님이 설교를 못하면 ‘우리 목사님 오늘 설교 죽을 쑤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밥을 잘 준비해서 밥상을 차려놔도 먹는 사람이 맛있게 먹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한편에서 누구는 그런 죽을 너무 좋아합니다. 하지만 그 죽도 없어서 먹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배부른 소리일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나 자신만 배부르면 다른 사람을 생각해 주고 배려하는 안목이 사라져 버립니다. 추수감사절과 성탄절에만 불우 이웃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활절에만 새신자, 새가족 초청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늘상 우리주변에는 배고픈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원이 필요한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가장 근본이고 쉬운 것을 간과하며 살아갑니다. 가족과 이웃을 돌아보는 계절이 되시길 바랍니다. 내가 받은 사랑과 관심을 나누고 되돌려 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보시길 바랍니다. 따뜻한 밥상 한끼와 마음의 감사와 고마움을 나누어 주시길 바랍니다. 격려와 칭찬의 인사를 나누시길 바랍니다. 해피댕스기빙! 샬롬!      
    Read More
  • 245
    [오피니언] 조영석 목사의 생각하며 기도하며 - 고향 크리스천헤럴드2024.11.26
    가을이다. 아내가 장모님과 함께 한인 마트에 가서 빨간 고추를 한 가마니 가득 사왔다. 뒷마당 곳곳에 빨간 고추가 사방에 널려져 있다. 장모님께서 모두 말려서 태양초 고춧가루를 만드신다고 한다. 미국생활 처음으로 한국에서나 보았던 가정에서 직접 햇볕에 말린 태양초 고춧가루를 먹어 보게 되었다.그런데 이 고추들을 보고 있으니까 갑자기 한국이 너무 그리워 진다. 미국에 살고 있으니 한국음식이 그리워져서 그런 것은 아니다. 이제 미국 전역에 한인음식점들이 있고, 유명한 한식당에 가면 한국에 있는 어지간한 식당들 보다 더 맛있게 한국음식을 잘한다.한국사람이 그리워서도 아니다. 한국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곳이 그리우면 LA 한인타운에 가면 된다. 그곳은 외국 사람들 보다 더 많이 보인다. 어떤 곳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을 보기가 희귀할 정도이다.한국에 두고 온 가족이 그리워서 그런 것 또한 아니다. 미국으로 이민을 온지 오래되어서 이제 이곳에서 더 오래 살았다. 내 가족 대부분은 미국에서 살고 있다. 친구들도 이곳에 더 많다. 이제는 한국에 가면 오히려 갈 곳이 적고 낯설다.그럼 미국서 구하기 어려운, 꼭 한국에서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그리워서 그러냐 면 그 또한 아니다. 미국에서도 한국의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온다”는 가을 전어를 맛볼 수 있다. 전남 광양의 자연산 가을 전어를 이곳 모 한인 마켓에서 수입해 직송판매 한다고 한다. 또 전 날 제주도에서 갓 잡은 광어도 산채로 미국으로 가져와 그 다음날이면 이 곳 한인 마트에서 살수 있다고 한다. 낙엽이 떨어지는 덕수궁 돌담길이 그립기는 하지만 LA 근방에 있는 Pasadena 시에 가면 오래된 나무 사이로 제법 운치 있는 가로등이 있는 거리를 걸어볼 수 있다. 한국 시골 고향 가는 길 따라 붉게 물든 단풍잎이 보고싶기도 하지만 LA 근교로 조금 더 운전해 나가면 예쁘게 물든 낙엽이 떨어지는 꽤 낭만적인 거리에서 낙엽도 밟아볼 수 있고 오색 풍경도 볼 수 있다.그러면 여기 다 있는데 왜 한국이 그립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그곳이 바로 내 고향이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 나의 삶이 시작된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천국을 그리는 마음도 마찬가지 아닐까 싶다. 금은 보화로 장식된 화려한 궁정과 보석으로 수놓은 거리가 보고 싶어서 가 아니고, 부귀영화를 누리고 더 좋은 것을 갖고 싶어서 도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신 그곳이 바로 우리 영혼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시편 84:10-  
    Read More
  • 244
    [오피니언] 아모스 목사의 일터영성 - 바른 크리스찬의 기준 크리스천헤럴드2024.11.26
    성경은 분명히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크리스찬들이 이 성경말씀을 정말 바르게 이해하고 삶속에 적용하며 살고 있기는 한것일까?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라는 가르침은 어떤 것에 Value를 두어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이지, 이 말씀의 본질은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더라도 신경쓰지 말고 크리스찬들은 전통을 지키며 우리들만의 세상안에 머물러 있으라는 가르침은 결코 아닐것이다.한번 솔직하 따져보자. 어떤 크리스찬이 바른 크리스찬인가? 아마도 이 질문에 곧바로 떠올려지는 답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독자들 마다 제각각 순서는 다를지 몰라도 이런것들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어떤 일이 있어도 주일에 예배에 빠지지 않을것. 십일조, 즉 하나님의 것을 10분의 1 구분해서 매 달 드려야 하는 것이 성도의 가장 중요한 의무 중 하나임. 술 담배 안하기, 크리스찬 이라면 술이나 담배를 절대 하지 않아야 세상 풍조를 따르지 않는 직접적인 증거가 되어짐. 교회봉사, 크리스찬 이라면 교회에서 한가지 이상의 봉사는 해야 그것이 진정한 크리스찬의 소양임. 기도와 말씀읽기, 틈이 있는대로 기도생활 말씀생활에 열심을 내야 함. 전도,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대사명에 반드시 동참해야 함.그렇다. 이같은 기준은 필자가 초중고 시절 신앙생활 할때에도 강조되던 것들이고, 현재까지도 강조되고 있는 기준들이라 하겠다.아주 조심스러운 이야기 이지만 이제는 제발 이 기준들을 고이접어 어딘가에 넣어 두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된다. 바른 크리스찬이란, 그들이 하는 행동으로 결코 결정지어지지 않는다.무엇을 하고 하지 않고는 그 사람의 됨 보다 중요하지 않다. 아니 그런 정도가 아니라, 그 사람의 됨 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예수님의 가르침엔 분명히 무엇을 해야함도, 무엇을 하지 않아야 함도 포함되어 있지만, 예수님의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은 그것들을 넘어서는 됨에 관한 것 이었음을 간과해선 안된다.주일에 교회를 가고, 술 담배를 안하고, 십일조를 하고, 교회 봉사를 하고,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며 전도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이런 것들을 강조함 보다 더 중요하게, 더 강력하게 가르치고 권고해야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바른 크리스찬은 내 마음에 하나님의 마음을 담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삶으로 그 표본이 되어주셨다. 하나님의 마음의 핵심은 사랑이다.그렇다. 예수님은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내셨다. 그리고 마지막에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것도 다름아닌 너희는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라 하는 것 이었다.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감히 말한다. 감히 주장한다.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주일 성수 보다 더 중요하다.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술 담배 하지 않는 것 보다 더 중요하다.기도와 말씀, 전도, 교회봉사 보다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며 이것이 올바른 크리스찬의 삶에 가장 핵심이다.재미있는것은, 앞에 열거한 이제까지의 기준들을 잘 충족시킨다 하더라도 그 크리스찬이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할 확률은 거의 없지만,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가다 보면 누가 강조하거나 시키지 않아도 기존의 기준들은 자동으로 지키게 될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지금 세상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지금 세상에 필요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술 담배 안하는 사람이 필요한가? 주일성수, 교회봉사, 십일조 하는 사람들을 더 필요로 하는가?세상은 사랑에 목말라 있다. 그리고 세상은 예수님과 같은 사랑의 사람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사람이 바로 내가 되어야 함을 확신하는 순간 진정한 하나님과의 동행이 시작됨을 잊지말자.사랑의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누구든지 살리겠다 라고 결심하고 사는 사람이다. 사람을 수단으로 삼지않고 언제나 사람을 목적으로 삼겠다 라고 결심하고 사는 사람이다.나로인해 너의 삶이 좋아져야 한다 라고 결심하고 사는 사람이다. 준것에 생색을 내는 삶이 아닌, 더 주지 못한것에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다. 준것 받은것을 계산하며 공평성을 따지며 사는 사람이 아니다.이쯤되면 떠오르는 한 분, 그렇다 바로 예수님 처럼 살아가기로 결심하고 사는 사람이 사랑의 사람이다. 이제 곧 12월, 세상은 더 많은 돌봄과 관심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로 곳곳에 넘쳐날 것이다.사랑의 사람으로 12월을 살기로 결심해 보자. 하나님께서 우리의 손을 꼭 붙잡고 함께 가자 하시며 일으키시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돌봄과 도움, 관심과 사랑이 필요한 그들에게 기꺼이 다가가서 작은 예수로 멋지게 내 전부를 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지극히 작은자 하나에게 다가와 가진 모든것을 쏟아 부으시되, 그 귀한 보혈까지도, 생명까지도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그 지극히 작은자가 나 였음을 기억하자. 복 받으려고 예수믿는 것은 이제 제발 그만하자.이미 내가 받은것이 예수의 보혈이요 생명이었기에, 나는 예수의 생명을 가진자요, 하나님의 성품을 소유한 자, 즉 사랑의 사람인것을 잊지말자.
    Read More
  • 243
    [오피니언] 류응렬 컬럼 - 하나님과 친밀함 크리스천헤럴드2024.11.26
    아름다운 단풍으로 물들어가는 버지니아의 가을에 ‘하나님과 친밀함’이라는 주제로 강준민 목사를 모시고 교회 설립 51주년을 기념하는 부흥회를 가졌습니다. 주제말씀처럼 ‘친밀함’이란 참 소중하고도 애틋한 단어입니다. 하나님과 관계 뿐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 누구라도 친밀함을 원하지만 진정한 친밀함을 간직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강 목사는 설교에서 친밀함이란 익숙함이 아니라 ‘경외감’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시편에서 다윗은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다”고 노래합니다. 한 나라의 왕일지라도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진정한 경외감이 있을 때 곁에 계시는 하나님을 더 깊이 누릴 수 있었습니다. 친밀함이 경외감으로 나아가는 데는 사고의 전환과 생활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누군가와 오랜 시간을 보내고 깊이 대화할수록 우리는 더 익숙해지기 마련입니다. 진정한 친밀감이란 책임과 존중이 수반돼야 건강한 관계와 기쁨과 성숙의 열매를 맺습니다. 친구나 남편과 아내 혹은 성도 사이라 해도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친밀감이 존중과 배려라는 그릇에 담길 때 그 관계는 세월 따라 짙어가는 포도향처럼 깊은 맛을 더할 것입니다.하나님과 친밀함이란 말은 죄인 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닙니다. 우리의 아름다운 의를 다 모은다 해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는 누더기 같은 존재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과 친밀함의 시작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입니다. 죄인을 향해 자비와 긍휼의 손을 내미시는 하늘 아버지가 계시기에 허물과 죄악 속에서도 얼굴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모든 수고와 열정을 다 쏟는다 해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다리는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유일한 통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다리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해 따스한 미소를 지으시고 모든 것을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사랑만이 친밀한 관계의 시작이요 호흡이 끝나는 날까지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소망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함은 구원의 은혜를 입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하늘이 베푸는 최고의 선물입니다.하나님과 친밀함을 경험하고, 회복하고, 유지하기 위해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분주한 일상과 나름대로의 열심으로 하나님을 향한 방향을 상실하지는 않았는가, 외적인 친밀한 모습과 달리 깊은 내면을 바라보시는 하나님과 관계가 무너져 있지 않았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과 친밀함은 단순한 신앙생활이 아니라 호흡마다 주님과 관계를 이어가는 삶 자체입니다. 때로는 하나님과 친밀함을 위해 광야 같은 고독과 침묵의 자리로 나아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픈 상처를 감싸고 묵묵히 주님을 바라보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부서진 그 자리에서 진정한 부서짐을 경험한 주님의 아픔이 보일 때, 그때 십자가는 나를 치유하는 주님의 능력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올해 가을은 찬란한 색으로 물들어가는 단풍처럼 하나님과 친밀함의 자리로 나아가 영혼이 주님의 성품으로 물들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지켜보시는 하나님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흐를 때 우리 영혼은 지상에서 넘치는 기쁨을 경험할 것입니다.
    Read More
  • 242
    [오피니언] 이영훈 컬럼 - 절대 감사의 비결 크리스천헤럴드2024.11.26
    이 세상에 100% 만족스러운 삶은 없을 것이다. 사람이 살다 보면 최소한 어느 한 가지는 부족한 부분이 있다. 그러다 보니 세상 사람들 대부분은 감사보다 원망과 불평하는 것이 빠르다. “왜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냐. 사는 게 힘들어 죽겠다. 못 살겠다. 문제가 많다”라며 불만을 터트린다. 특히나 요즘처럼 SNS를 통해 다른 사람과의 비교가 빠른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너도나도 SNS를 통해 자신의 삶을 자랑하는 현시대에서 매일 감사의 삶을 살아가는 일은 쉽지 않아 보인다.그런데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에게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라고 권면했다. 범사, 즉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이다. 심지어 바울은 자신이 옥에 갇혀 고통 가운데 있는 상황에서도 오히려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라고 권면하기도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을까?고난 중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절대 감사의 비결은 바로 ‘절대 긍정’의 믿음에 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긍정’이라는 단어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먼저, 긍정은 어떤 대상이나 사상에 대해 옳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절대 긍정의 믿음은 하나님에 대해서 전적으로 옳다고 인정하는 신앙의 자세를 말한다. 또한 긍정은 어떤 대상이나 일에 대해 밝고 희망적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절대 긍정의 믿음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환경 속에서도 희망을 발견하는 신앙의 자세를 말한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절대 긍정의 믿음을 가지면 필연적으로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우리는 이 같은 신앙의 자세를 약 400년 전 영국 청교도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1620년에 102명의 영국 청교도는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인 미국으로 떠났다. 그들은 65일간의 항해를 마치고 미국 북동부 지역 플리머스에 도착했다.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리고 교회를 건축했다. 그런데 신대륙에서의 생활은 그들이 떠나기 전 기대하던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그들은 낯선 환경 속에서 질병과 굶주림으로 고통 받았고, 원주민과 야생 동물로부터 위협받았다. 이로 말미암아 그들이 도착한 첫해 겨울에 무려 절반가량이 사망했다. 눈앞에서 사랑하는 부모, 자녀, 이웃들을 주님 곁으로 떠나보내는 슬픔을 겪은 것이다.하지만 극한의 고난 속에서도 청교도들은 낙심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고 일했다. 신대륙에 정착하고 1년 후에 처음으로 수확했으나 결실이 많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힘들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자신들을 지켜주시고 수확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렸다. 또한 자신들에게 농사하는 법을 가르쳐 준 원주민들을 초대해 음식을 만들어 함께 식사를 나눴다. 이렇게 고난 중에 드린 감사가 미국 추수감사절의 기원이 됐다. 이들의 감사 정신은 오늘날 미국의 ‘Thank you’ 문화를 만들었다.우리의 인생에 늘 좋은 일만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갑작스럽게 질병이나 재정의 문제가 찾아올 때도 있고, 전쟁이나 재난으로 삶의 터전을 잃을 때도 있다. 때로는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을 주님 곁으로 떠나보낼 때도 있다. 지금 우리가 마주한 현실의 문제가 태산과도 같을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절대 긍정의 믿음으로 감사의 예배를 올려드리자. 그리하면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이 우리의 고난을 축복의 통로로 변화시켜 주실 것이다.
    Read More
  • 241
    [오피니언] 김병학 목사의 소통하는 교회 - 소통은 상처를 통한 공감이다 크리스천헤럴드2024.11.13
    대한민국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한강의 작품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것은 그의 문학이 보편적인 인간의 정서를 잘 반영하고 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는 것이 노벨상 위원회의 평가이다. 그의 작품 속에서 느껴지는 깊은 고통과 상처, 죄의식, 그리고 희미하지만 결코 꺼지지 않는 구원의 희망은 독자들에게 큰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작가의 작품들을 읽고, 작품의 평가를 읽으면서 이런 궁금함이 생겼다. 그렇다면 교회는 작품에 등장하는 이러한 정서를 가진 사람들과 어떻게 소통해야 할까?한강의 문학 속에서 묘사되는 인물들은 고통 속에서 방황하고, 자신의 상처에 갇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 이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 속에서 상처와 고통을 경험하며, 때로는 그 고통이 너무 커서 해결할 방법조차 찾지 못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회는 이들의 상처를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그 상처를 인정하고, 그 속에 담긴 아픔과 슬픔을 깊이 이해해야 한다.한강의 작품을 읽다 보면, 등장인물들이 겪는 고통과 상처는 단순한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 역사적 차원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교회가 개인의 고통뿐만 아니라, 사회적 구조 속에서 발생하는 상처에도 주목해야 함을 시사한다. 교회는 사회적 불의와 억압에 대해 침묵해서는 안 된다. 한강의 작품처럼, 인간의 상처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깊이 파악하고,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또한 한강의 작품 속 인물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고통을 혼자서 짊어진다. 그들은 고통 속에서 외로움을 느끼고,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는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야 한다. 교회는 고통을 나누고 함께 짊어질 수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한강의 문학이 고통 속에서 빛을 찾으려는 인간의 몸부림을 그려내듯이, 교회도 그들에게 빛을 비추고 희망을 전달해야 한다.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회가 단순히 해결책을 제시하는 위치에 서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한강의 작품 속 인물들이 경험하는 고통은 복잡하고 얽혀 있다. 단순한 구호나 도덕적 교훈으로는 그들의 상처를 온전히 치유할 수 없다. 교회는 그들의 고통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고통 속에서 그들과 함께 머무르고, 그들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경청해야 한다. 교회는 단순한 답변을 제시하기보다는 한강의 문학처럼 깊은 이해와 공감을 바탕으로 대화를 나눠야 한다.또한 한강의 문학 속에서 중요한 주제 중 하나는 '구원의 가능성'이다. 그의 작품은 때때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희미한 구원의 빛을 암시한다. 그러나 저자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작품 속 인물들은 그 빛을 찾지 못한다. 교회는 바로 이 점에서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 중요한 매개체가 될 수 있다. 교회는 고통 속에서도 희망이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희망은 단순히 기적처럼 쉽게 풀린다는 단순한 낙관론이 될 수 없다. 한강의 문학이 그렇듯이, 교회의 메시지도 고통과 상처를 그대로 인정하고, 그 속에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구원의 가능성을 제시해야 한다.교회는 또한 한강의 작품을 읽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을 법한 질문들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의 문학 속 인물들은 종종 인간 존재의 의미, 고통의 이유, 그리고 구원의 가능성에 대해 깊은 회의를 품는다. 교회는 이 질문들에 대해 가볍게 답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그 질문들을 함께 나누고, 신앙 속에서 어떻게 이러한 질문들에 답을 찾아갈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결국, 교회가 해야 할 일은 한강의 문학 속에서 반영되는 보편적인 정서를 가진 사람들을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고 그들과의 진정한 소통이다. 그들이 느끼는 상처와 고통을 인정하고, 그 속에서 구원의 희망을 함께 찾아가는 여정이 필요하다. 한강의 문학이 그러하듯, 교회도 그들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고, 그들이 진정으로 구원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해야 한다. 세상이 많이 아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교회도 많이 아프다. 아파하는 사람들과 함께 아파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Read More
  • 240
    [오피니언] 김은주 교수의 탈진을 긍정하라 14 <탈진 관점으로 본 선교사 이야기 2 – 알렌> 크리스천헤럴드2024.11.13
    선교사는 대부분 낯선 땅에 도착하여 이중문화 가운데 여러 가지 갈등을 경험한다. 히버트는 이중문화 그 자체가 스트레스를 유발한다고 주장하고, 존 폴 레더락(John Paul Lederach)은 갈등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정상 범위에서 지나치면 탈진이 된다. 선교사가 타 문화로 들어가 갈등을 겪는 것은 탈진의 요소다.호러스 알렌(Horace Newton Allen)은 한국 최초의 서양 선교사로 일컫는다. 미국 북장로교에서 파송 한 의료선교사역자로서 26세 때, 1884년 9월 14일 조선에 도착하여 21년 동안 사역했다. 그는 미국 공사관 공의 자격으로 입국하여 제중원을 설립하고 주로 의료와 학교, 외교사역을 하였으며, 선교사들의 입국을 돕는 통로역할을 했다.그가 고종의 큰 환대를 얻은 것은 갑신정변 때 조선의 권력자요, 보수파 민영익을 극적으로 치료한 사건이다. 민영익은 온 몸에 심한 자상과 여러 군데 동맥이 끊겼고, 머리 외 일곱 군데를 칼로 찔려 피투성이었다. 목숨이 위태롭건만, 당시 한의사들은 검은 송진으로 상처에 바르고 있었다. 이 때 알렌이 등장하여 외과 수술을 했다. 만약 수술 도중 실패했다면 미국의 이미지를 실추하고, 기독교를 전하지도 못한 채 칼로 사람을 죽인 것이 되어 그 또한 죽음을 면치 못할 상황이었다. 그는 죽음의 위기와 조선의 복음을 위해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고, 마침내 생명을 구하였다. 민영익의 후원과 고종의 시혜로 광혜원을 설립했다. 기독교가 금기 되던 때에 불안정하게 입국한 모든 선교사들을 그곳에서 사역하도록 동원하여 보호하였다. 그러나 증원하는 환자와 관리사들로 인해 병원의 예산이 부족하여 힘들었다. 또한 한국의 전통치료법은 종기에 암소 배설물을 바르고, 정신착란에 구더기를 사용하는 등 경악할 사건도 많았다. 그러나 그는 폄하하지 않고, 신중한 자세를 취했다.청국과 일본의 수백명의 군인을 치료하고, 하루에도 수백명의 사람들을 진료하느라 온전히 잠을 이루지 못하는 고된 날을 보냈다. 의약품 구입은 어려웠고,  키니네(학질특효약)를 만병통치약처럼 사용했다. 약이 없을 때는 논두렁의 흙을 상처에 발랐더니 묘약처럼 효과를 내어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예수박사라 불리우며, 희생적으로 봉사했다.그는 고종의 신임으로 왕실의 의사와 정치 고문이 되어 모든 내외국 고위인사들을 만나고, 그들의 역할과 공적들을 기록화 했다. 고종에게 종2품의 ‘가선대부’로 벼슬까지 받았지만, 동료 선교사들의 핀잔과 갈등, 독설과 불신으로 힘들었다.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는 방법 따른 마찰이었다. 알렌은 당시 선교사들이 조선의 법을 어기고 마구잡이로 전도하는 위험에 독단적이지 말라고 간곡히 호소했고, 비일비재하게 위험이 노출될 때마다 도와주었다. 그러나 다른 선교사들은 알렌이 선교하러 와서 병원 같은 것이나 세웠다고 맹비난하며, 정치와 종교가 얽히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알렌에게 파쟁과 갈등은 고통이었다.알렌의 탈진을 세가지로 간단히 요약한다. 첫째, 신체적 탈진이다. 그는 수백명의 환자를 치료하느라 사역의 과부하였다. 둘째, 심리적 탈진이다. 그가 민영익을 치료할 때 죽음을 감수하는 위기를 겪었다. 선교사들 간의 갈등은 불안과 고립을 의미했다. 고종이 미국에 한국공사관의 참찬관으로 임명했을 때 다른 선교들에게서 쫓겨가는 듯한 자괴감도 느꼈을 것이다. 셋째, 문화적 탈진이다. 벼룩과 모기, 더위와 추위, 불결한 위생, 이방나라에서 긴장, 한국전통치료법의 난해, 국가 정세의 불안정, 낙후한 문화 상태 등은 스트레스를 넘어 선 탈진 요소다.그는 일관된 헌신을 보여주므로, 의료, 교육, 외교, 문화적 근대화의 문을 열도록 공헌한 점은 기념할 만 하다. 때로는 과묵함으로 인내하고, 성실하게 사역하며, 한국의 자유와 주권을 지키도록 노력한 일관성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진지한 동정심과 친절한 감정’이었다. 믿음의 열정적인 사역과 갈등의 스트레스를 중립하려는 노력은 회복방법이었다.특히 이중문화 가운데 복음을 전하는 방법에 따른 마찰은 알렌에게 큰 과제였다. 박선기박사는 레더락의 갈등 전환의 변화로 그 자체를 초월하여 자신을 돌아보고, 타인을 품어주며, 더 성숙할 수 있는 기회라고 말하며, 화해의 영성을 추구한다. 과거에 일어났던 반복된 패턴과 현재의 갈등을 인식하고, 근본 원인을 찾아 다양한 해결 방식을 찾으며, 갈등의 고리를 끊는 방법이다. 더욱이 용서하고, 화해하며, 성숙한 삶으로 지향하는 것은 갈등으로 인한 탈진을 긍정적으로 재인식하게 만든다.
    Read More
  • 239
    [오피니언] 최재홍 목사의 하루한장 말씀 - 예배냐? vs 영혼구원이냐? 크리스천헤럴드2024.11.13
    간혹 세상에서 못되먹은 사람들이 행하듯이 교회 공동체와 가정에서도 함부로 대하고 무시하고 폭력적 언행으로, 보고 듣는 사람들을 실망케하고 시험에 들기도 합니다. 그렇게 신앙하는 것은 눈물로 세워가는 우리 공동체 모두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공동체를 멍들고 어둡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께 드리는 예배와 기도시간이 고통스럽고 힘든 기도, 어두운 기도, 슬픈 기도를 드리는 인생이 되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 시간 간절히 소망하고 바라기는 이민사회의 동시대에 허락하신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섬기는 공동체와 가정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즐거이 부르며 할렐루야를 힘차게 높여드리고 가슴 뛰는 벅찬 주일의 감격과 감사의 기도, 자녀를 향한 비전의 기도, 세상을 향한 기쁨의 기도, 영혼을 위한 구원의 기도를 드리는 공동체와 가정이 되기를 기원합니다.최근 2-3주 동안에 어느 이민교회 리더십 그룹과 목회 상담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작은 관계의 오해가 시작이 되어서 교회를 떠나겠다는 분들이 생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상담을 시작하면서 저의 첫 질문은 ‘주일 예배를 정시에 시작하지 못했습니다. 전도를 통해서 새가족들이 처음 방문하게 되어 안내하고 환영하느라 5분 정도 늦게 시작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새가족이 시간에 맞춰 도착하고 정시예배를 드리면 좋았겠지요, 하지만 그분들이 완전 새가족입니다. 어떤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이미 우리가 아는 정답은 이렇습니다. 은혜로운 공동체가 되려면 기존 성숙한 성도들이 숫자는 더 많겠지만 섬기는 마음으로 이해하고 소수의 새 가족을 따뜻하게 맞이해서 자리에 앉게하고 예배를 5 분 늦게 드리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습니다. 해외 선교현장에서 현지인들과 예배를 드리기로 했는데 ‘목사님 금방갑니다, 거의 도착했습니다(무쓰, 워먼 마샹 따올러!)’ 라고 말하던 사람이 1시간을 늦게 도착했습니다. 저는 솔직한 심정으로 화가나서 견딜수가 없었습니다. 제 마음 속에 지각한 새가족 때문에 주일의 은혜가 다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영성훈련이 안된 그들의 문화에서는 충분히 이해가 되는 상식적인 표현이었습니다.그때에 생각나는 말씀 한 구절, 한 단어가 흥분된 나를 바로 잡을 수 있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영접이라는 말씀이 빨간 글씨로 크게 각인이 되었습니다. 늦었지만 가족들을 데리고 땀을 흘리면서 들어오는 그들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저 보다도 더 일찍 출발했지만 여러 사정으로 늦은 것입니다. 저는 영접이라는 단어의 참 의미를 다시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고, 목사라는 사람이 얼마나 속이 좁고 몰인정하고 무자비함을 깨닫고 제 속마음이 화끈거리고 부끄러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말과 표정에서 나를 사랑해주고 존경하는지 금방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웃어 주고 기다려 주고 섬기고 나눠주는 삶이 우리 모두를 아름답고 풍성하게 합니다. 5분 늦게 드린 예배를 우리 하나님이 더 기쁘시게 받을 것입니다. 새가족만 이런 실수를 할까요? 우리 모두는 허물도 많고 약점과 실수투성이입니다. 실수를 실수로 인정하고 받아주면 오히려 그 사실을 알게 될 때에 깊고 진한 마음의 감동이 전달될 것입니다. 한 영혼의 값어치는 우리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으신 목숨 값과 비례합니다. 이 사실을 절대로 잊으면 안됩니다.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