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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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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조영석 목사의 생각하며 기도하며- 징 계 크리스천헤럴드2023.10.14
    아이들을 키우면서 하나님의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될 때가 많다. 우리를 자녀 삼아 주시고 아빠 아버지로 부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섭리를, 부모와 자녀의 관계속에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참 사랑은 애정만 아니라 징계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큰 아이가 어렸을 때다. 실수가 아닌 잘못을 했다. 그냥 넘어가면 안될 것 같아 따끔하게 혼을 내고 벌을 세웠다. 이제 말귀를 알아듣는 다 큰 자녀에게 매를 들 수는 없고 딸이 가장 시간을 많이 보내고 애지중지하는 스마트폰을 압수하고 일주일동안 사용금지를 했다. 사실 그것도 많이 봐준 것이다. 당시 마음 같아서는 더 오랫동안 돌려주고 싶지 않았다.그런데 이 마음이 하루를 넘기지 못했다. 그날 밤이 되자 화가 가라앉고 마음이 누그러지자 딸에게 너무했나 싶어 마음이 쓰였다. 핸드폰 없이 많이 불편할 텐데 적당히 하고 돌려줄까 망설였다. 내 책상위에 보관중인 큰딸의 전화로 계속해서 전화와 문자가 오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모르는 딸의 친구들이 연락이 안되니 계속 문자를 보내고 전화를 거는 것 같았다.   그러나 딸아이를 훈계할 목적으로 전화를 빼앗은 건데 마음이 누그러졌다고 해서 없던 일로 한다면 아니 한만 못한 일이 되고 말 것 같았다. 징계를 중단하고 전화를 돌려준다면 결국 아이를 벌한 것이 화풀이한 것밖에는 되지 않겠다는 생각에 핸드폰을 돌려주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다.둘째 날이 되자 아이가 측은해 보이기 시작했고, 내가 좀 심한 것은 아닌가 싶어 다시 또 돌려주고 싶은 마음에 두 번째 고비가 찾아왔다. 셋째 날이 되자 이젠 오히려 내가 안달하며 돌려줄 명분을 찾기 시작했다. 딸아이는 핸드폰 없이도 잘 지내고 익숙해져 괜찮아 보이는데 오히려 내가 견디기 힘들었다. 아이를 볼때마다 안쓰러워 징계를 하는 내가 벌을 서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바로 그 무렵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늘 핸드폰을 쥐고 살던 딸아이 손이 어느 순간 책을 들고 있는 것이었다. 방학때라서 집에서 마땅히 할 일도 없고, 핸드폰도 없고, TV 도 볼만하게 없어 심심하니까 다시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이다.원래 책을 좋아하고 잘 읽던 아이였는데 컴퓨터와 스마트폰이 생기고 나서부터 필요에 의한 게 아니면 예전처럼 책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그런데 핸드폰이 없어지자 이전에 좋아했던 책으로 다시 눈을 돌린 것이었다. 그제서야 나는 핸드폰을 돌려주지 않은 것이 잘한 일임을 깨닫게 되었다. 일주일 후에 전화기를 돌려줄 때 딸아이에게서 아무런 섭섭한 감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나와 딸 둘 다 이 과정을 잘 넘긴 것에 대견한 마음까지 들었다. 딸에게 스마트폰을 돌려줄 때 진심으로 축하해 줬고, 아내도 딸에게 징계기간을 잘 견디고 핸드폰을 돌려받은 것을 칭찬해 주었다. 우리 가족은 마치 무슨 작은 경사라도 생긴 듯 축하를 건네고 함께 결과에 기뻐했다. 딸아이도 아무런 원망없이 밝은 모습으로 핸드폰을 돌려받고 좋아했고, 오히려 이 일로 인해 서로에 대한 신뢰가 생긴 것 같았다. 이 과정을 지나며 우리와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도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때론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우리가 가장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에서 마음과 생각이 멀어지면 그 방해하는 것을 빼앗으실 때가 있다. 하나님은 늘 우리의 우선이 되어야 하는데 그 순서가 바뀔 때 다시 순서를 바로 하시기 위해 잠시 빼앗아 놓기도 하신다.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만약 나에게서 어떤 소중한 것을 취하실 때가 생기면 내가 그것을 하나님보다 먼저 두었던 것은 아닌지, 혹 그랬던 것은 없는지 살펴보아야 한다.“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 (잠언 3:11-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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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5
    [오피니언] 아모스 목사의 일터영성 - '천국은 어떤곳이라고 생각해?' 크리스천헤럴드2023.10.14
    필자가 주중 세상 일터에 나가 일을 하는 가장 큰 목적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현 하기 위함이다. 경험해 본 바로는, 가장 효과적인 사랑의 실현은 상대방의 아픔에 함께 아파해 주는 것 이다. 오늘 칼럼은 10여년 전쯤 개인 SNS 에 올린 짧은 글로 대신해 보려한다. '천국은 어떤곳이라고 생각해?' 달라스 큰형네 방문했을때 어느날 저녁 큰 형님이 내게 한 질문이다. 얼른 생각난 것이 아담스의 '거룩한 성' 노래가사였다. '유리바다, 황금길, 보석으로 꾸며진 방들, 찬란한 곳, 슬픔도 없고 눈물도 없는 곳, 또 뭐가 있더라....'듣고있던 형이 씨익 한번 웃으시더니만 "난 그런건 필요없고, 원배와 둘이 마주보고 앉아서 서로 하고 싶은 말 하면서, 서로 알아들을 수 있고, 서로 웃을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해.." 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원배.. 큰형수님이 결혼 후 10년만에,그것도, 3번 유산후에 4번째 임신만에 낳은 큰 조카..남들보다 똑똑하게 자라던 아이가 돌 지나서 얼마 후에 자폐 진단을 받았다. 지금 현재 형님 부부의 간절한 소원은 이런 것들이다. '날 엄마라고 한번만 불러 줬으면…'아빠 사랑해,  라고 하며 한번만 안아줄순 없니..' 그런 것들인 것이다.사람들은 저마다 아픔을 안고 산다. 죽을때 까지 해결되지 않는 아픔이 누구에게나 있다. 그래서 천국이 필요함에도 조그마한 천국이 되어야 하는 교회임에도 상처있는 사람들, 아픔있는 환자들이 모이는 곳이 분명함에도 그 상처를 부여잡고 함께 울어주기는 커녕 서로 '바보들' 이라며 손가락질 하고 있다.상급이 어쩌니 축복이 어쩌니 응답이 어쩌니 하면서 말이다. 눈물, 상처, 아픔 따위의 문제들엔 관심가질 시간이 도무지 없는 듯 하다. 교회가 병원이기를 포기한 그 순간 더이상 그곳은 교회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 울고있다. 말끔한 찬양팀 단복입고 멋진 소리의 찬양을 들려주는 것으로는 그들의 눈물을 닦아줄 수 없다.허공에 외쳐대는 '받은 복을 먼저 세어보아라'는 설교로도 그들의 상처를 싸매줄 수 없다. 죽을때 까지 아파할 그 아픔을 함께 아파해 주는 것만이 유일한 치료의 방법이다.오늘 따라 큰형님 생각이난다.형! 천국은 형이 생각하는 정말 그런 모습일꺼야.  형! 미안해, 이제껏 같이 울어주지 못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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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4
    [오피니언] 샘신칼럼 - 아! 바람… (마 14:28-30) 크리스천헤럴드2023.10.14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내용입니다.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배를 타고 풍랑을 만나 고생을 하고 그 와중에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고, 물속에 빠졌고, 주님의 도우심으로 물속에서 건져냄을 받은 사건입니다.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배를 타고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람이 찾아왔습니다. 흔히 우리는 순종하면 바람이 없고 순탄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인생길에 바람을 만나면 당황하게 됩니다.  예상치 못한 바람이기에 더욱 그러합니다.또한 주님은 바람이 불지 않도록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에게, 아니 우리의 인생길에서 바람을 만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람을 만날때 제일 먼저 가져야 할 태도는 이 바람이 우연이 아니라 뜻이 있는 바람이요 하나님의 허락하심 속에서 찾아오는 바림임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바람은 제자들을 힘들게도 했지만 그 바람은 주님의 영광을 보게도 했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보면 구원을 받고 주님을 닮아갑니다. 그들은 바람으로 인해 주님을 더 깊게 아는 계기가 되었습니다.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람을 허락하신 것은 제자들에게 당신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려 주고 싶었던 까닭입니다. 즉 제자들은 바람을 겪으며 주님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주님의 영광을 보았고 그 결과 주님께 경배하는 예배자가 됩니다.본문 30절에 “바람을 보고...”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말은  헬라어 “현재 분사”입니다. 그 말은 계속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의 마음에 두려움이 찾아왔고 결국 물속에 빠지고 맙니다.이어 그는  주님으로부터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14:31)라는 책망을 듣게 됩니다.우리는 여기서 두려움과 의심은 믿음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다줌을 봅니다. 만일 우리의 마음속에 두려움과 의심을 있다면 우리는 큰 믿음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그 두려움과 의심을 허락한 것은 바람이 아닙니다. 바람에 대한 나의 생각과 태도입니다.우리의 인생에 바람은 항상 존재합니다. 문제는 그 바람을 계속 보고 있으면 그 바람이 나에게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받아들이는 순간 두려움, 의심이 찾아옵니다. 해결책은 주님을 다시 보는 것입니다. 주님께  집중함으로 베드로는 거기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베드로는  전무후무한 물위를 걷는 체험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복음서에는 이 사건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마가복음은 마가가 베드로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기록한 말씀인데도 마가복음에 이 사건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우리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우리는 바울의 다음 고백을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고후12:1)  바울은 자신이 14년 전에 체험한 삼층 천에 다녀온 이야기를 하면서  서론으로 말하는 내용입니다. 환상과 계시를 말하는데 무익하고, 부득불, 자랑이라고 합니다. 그 체험을 통해 무엇인가를 알고 보았고 깨달았으면 우리는 체험을 말할 것이 아니라 알고 보고 깨달은 것을 말해야 합니다. 영적인 시각, 믿음의 눈으로 보면 기적이 아닌 일이 없습니다. 기적이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일이 영적인 체험이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체험을 위해 바람을 구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바람을 통해 주님의 영광을 보게 하였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인생길에 뜻하지 않게 찾아오는 바람들이 있습니다. 본문 속에 등장하는 바람은 제자들로 하여금 힘들게도 했고, 물에 빠지게도 했고, 주님의 영광을 보게도 했습니다. 베드로는 바람을 보고 빠졌다가 예수를 보고 물속에서 나옵니다. 바람을 보았을 때는 물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보았을 때는 물위에 있었습니다.문제는 바람을 볼 것인가, 아니면 예수를 볼 것인가를 내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지금 당신은 물속에 있습니까? 아니면 물위에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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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3
    [오피니언] 최재홍 목사의 하루한장 말씀 - 쌓인 설거지와 밀린 중보기도 크리스천헤럴드2023.10.14
    우리 삶에서 예정된 일을 미리 계획하고 준비하는 것은 일할 때에도 즐겁고 대체적으로 유익합니다. 그리고 미리미리 준비하며 맡은 일을 하는 습관이 몸에 밴 사람은 마음에 여유와 넉넉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차일피일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루고 떠밀려서 버티다가 마감시간에 임박해서 일을 하는 사람은 그렇지 못합니다. 불안정하고 조급하고 긴장된 순간의 연속일 뿐입니다. 마땅히 해야할 일을 뒤로 미루면 수정이나 교정을 할 수가 없습니다. 반복이나 보충할 시간이 없습니다. 아쉽고 안타까운 점을 발견했을지라도 기회와 시간을 상실했기에 불리함/불편함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중에라도 전문가의 탁월한 조언이나 지혜를 첨부하고 포함시킬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신앙생활을 하는 중에 서로 약속된 큐티나 부탁을 받은 기도제목을 뒤로 미루셨던 경험을 해보셨나요? 특히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지내보신 적은 없으신가요? 저는 얼마전 저희 집 앞에 전기배선 작업때문엔 시멘트 블럭을 깨고 파헤치는 큰 공사를 진행하느라 이틀동안 단수와 정전이 되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습니다. 냉장고에 음식은 녹아내리고, 전자제품들 충전을 못했습니다. 낮에는 덥고 밤은 캄캄해서 아무일도 못했습니다. 조금씩 집안 일들이 밀리고 식사하고 남은 설거지가 수북하게 싱크대에 쌓여만 갑니다. 저는 깨달았습니다. 주일 설교시간 만큼 신기하게도 다음 밥 때가 이렇게 빨리 다가오는 줄 처음 알았습니다. 그래서 설거지는 절대로 뒤로 미루면 안된다는 주방에서의 삶도 함께 터득했습니다. 맛있고 배부르게 먹었던 그릇들과 음식을 치우는 설거지가 금방 산더미가 되듯이 우리 삶 속에서 기도제목이 뒤로 밀리는 것도 비슷합니다. 바빠서, 귀찮아서 나중으로 미루고 또 미루다가 보면 어느새 싱크대가 차고 넘쳐서 설거지할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때에 당장 팔을 걷고 수세미를 들고 시작해야 합니다. 그 시간을 놓치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정리하려면 더 많은 수고를 해야합니다.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가 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기도할게요’라고 말만하고 기도하지 않는 분들을 많이봅니다. 당연히 습관적으로 ‘기도합시다’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에게도 ‘기도할게’ 라고 말하고 지키지 못하는 때가 있습니다. 우린 연약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사실이라면 이제는 기도한다는 말을 더욱 신중히하고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하지 않을까요? 설거지는 말로만 할 수가 없습니다. 깨끗하게 치우는데는 시간과 헌신과 노력이 필요하듯이 기도 역시 온 맘과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평안하고 시간될 때에, 간절한 기도는 우리 영혼의 힘과 능력과 활력소가 됩니다. 영적 피노키오가 되지 마십시오. 기도를 뒤로 미루지 마십시오. 지금 생각나는 영혼들을 품고 기도하십시오. 주께서 우리를 통해서 이루실 시대적 사명의 기도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기도의 자리로 나아오십시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대로 살아계신 주께서 베푸실 기도의 역사를 경험하십시오. 샬롬!“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예레미야 29:12~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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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2
    [오피니언] 신선묵 교수의 교수칼럼 - 선교적 영성 (2) 크리스천헤럴드2023.09.29
    하나님의 대한 이해 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에 대한 이해에서도 우리가 전통적으로 인간의 영과 육체를 나누고 영이 육체보다 본질적이고 중요하며 육체는 단지 영을 담고 있는 그릇 혹은 부산물 혹은 일시적인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런 이원론적인 태도에 반하여 영과 육을 단지 다른 두부분으로 본다. 그리고 육을 통하여 구체화된 영이 실제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가지를 보되 육의 관점에서 영을 이해하는 것이다. 육으로 표현되지 않은 영은 추상적인 개념에 머무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영을 중요하지 않게보거나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직도 영성을 말하면서 육화(Incarnate)되지 않은 영성을 많이 보게 된다. 오늘날 일상 영성은 육화된 영성의 관점에서 관심을 갖는 것이다.세상에 대한 이해에서도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관계에서 텍스트의 중요성을 볼 수 있다. 전통적으로 컨텍스트를 텍스트가 펼쳐지는 현장이라는 관점에서만 접근하였다. 고정된 텍스트가 있고 컨텍스트 (세상)에 맞게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해석학의 발전으로 점점 더 텍스트의 의미는 컨텍스트가 결정하게 된다는 것을 보게된다. 텍스트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텍스트는 따로 어떤 절대적인 의미나 고정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컨텍스트가 텍스트의 의미를 결정하게 된다. 그러므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컨텍스트이다.  컨텍스트 속에서 텍스트는 비로소 하나의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 영성은 세상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세상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영성이어야한다. 세상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들어가서 그 세상의 이슈에 대하여 창조적이고 비판적인 관점을 가지고 긍정하는 것이다. 선교적 교회, 공적 영성 등이 이런 면에서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지향해야하는 영성은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영성, 인간의 영과 육이 통합된 전인적인 영성, 세상을 적극적으로 비판적으로 그러나 긍정하는 모습, 하나로 통합하여 말한다면 선교적 영성이다. 그러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것이 필요하다. 첫째, 우리가 신학을 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선교”의 관점에서 신학을 한다. 하나님은 선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어떤 추상적인 본질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활동을 이해하고 그 하나님의 활동에 우리가 참예하는 관점에서 우리의 신학을 한다.  둘째, 성경을 선교적인 관점에서 이해한다. 성경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존재와 본질에 대한 개념적인 정의를 내리는 책이 아니다. 하나님에 세상을 어떻게 창조하시고 주관하시고 그 속에서 일하셨는지를 기록한 하나님의 선교를 기록한 책이다. 선교는 성경의 몇몇 구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명령이나 관심인 것이 아니라 성경은 기본적으로 선교에 관한 책이고 하나님의 선교 그리고 우리의 선교라는 해석학의 틀을 가지고 이해될 때에 바로 이해될 수 있는 책이다.  세째, 기독교 영성은 본질적으로 선교의 영성이다. 존재론적인 영성이 따로 있고 그것의 표현으로 선교가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영성은 선교의 틀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선교라는 틀 안에서 존재의 여러 측면들이 이해되고 강조되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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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1
    [오피니언] 샘신칼럼 - 기억 크리스천헤럴드2023.09.29
    기억은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어쩌면 이 기억으로 인해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하며  관계가 형성됨을 봅니다.기억에 문제가 생기는 병이 바로 치매입니다. 비록 40년을 함께 산 부부라도, 그래서 40년 동안 많은 사연, 아름다운 기억들이 있었지만  치매가 오면 그 기억들이 사라집니다.그러면 어떤 결과가 찾아오나요? 관계가 사라집니다. 감사나 용서는 기억을 잘 관리하는 것입니다.감사는 좋은 일을 기억하는 것이라면 용서는 좋지 않은 기억을 바꾸는 것입니다.미움과 쓴 뿌리도 기억과 연관된 것입니다. 미움과 쓴 뿌리는 나쁜 기억입니다. 미움과 쓴 뿌리가 마음에 생기면 관계는 병들게 됩니다.성령님은 감사와 용서하는 사람을 통해 역사합니다. 마귀는 미움과 쓴 뿌리를 가진 사람을 통해 역사합니다. 그러니 기억을 잘 관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하신 다음에 광야로 인도하여 40년 동안 그들을 돌보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광야 40년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고 했습니다.그렇다면 40년 광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억거리는 만들어 주려고 인도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그들은 마치 치매 걸린 사람처럼  잊었다는 것입니다.더 큰 문제는 그들의 모습이 곧 우리의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을 비처 주는 거울이라고 말합니다.우리은 기억을 잘 관리하고 있나요? 감사하고 용서하며 살면  잘 관리하시는 것입니다.그러나 미워하고 원망하면 영적 치매가 온 것입니다. 영적 치매를 치료하는 길이 있습니다.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 입니다.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이 바로 생각나게 하시는 일입니다.얼마전에 이런글을 읽었습니다. 어디에 새기고 있습니까?두 사람이 사막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여행 중에 문제가 생겨  서로 다투게 되었습니다.한사람이 다른 사람의 뺨을 때렸습니다. 뺨을 맞은 사람은 기분이 나빴지만 아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래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오늘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나의 빰을 때렸다”그들은 오아시스가 나올 때까지 말없이 걸었습니다. 마침내 오아시스에 도착한 두 친구는 그곳에서 목욕을 하기로 했습니다.뺨을 맞았던 사람이  목욕을 하러 들어가다 늪에 빠지게 되었는데 그때 뺨을 때렸던 친구가 그를 구해주었습니다.  늪에서 빠져 나왔을 때 이번에는 돌에 이렇게 썼습니다.“오늘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나의 생명을 구해주었다” 그를 때렸고 또한 구해준 친구가 의아해서  물었습니다. “내가 너를 때렸을 때는 모래에다가 적었는데, 왜  너를 구해준 후에는 돌에다가 적었지?”친구는  대답했습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괴롭혔을 때 우리는   모래에 그 사실을 적어야 해 용서의 바람이 불어와 그것을 지워버릴 수 있도록. 그러나 누군가가 우리에게 좋은 일을 하였을 때 우리는 그 사실을 돌에 기록해야 해... 그래야 바람이 불어와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테니까.우리 속담에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만 생각해보면 맞는 말인데 돌아보면 우리는 그것을 거꾸로 할 때가 많습니다.잊어서는 안될 소중한 은혜는 물에 새겨 금방 잊어버리고 마음에서 버려야 할 원수는 돌에 새겨 두고두고 기억하는 것이지요.은혜를 마음에 새기면 고마움이 마음에 남아 누구를 만나도  무슨 일을 만나도 즐겁기 마련입니다.하지만 마음에 원수를 새기고 나면 그것은 괴로움이 되어 마음속에 쓴 뿌리를 깊이 내리게 됩니다.우리의 마음은 하나여서 은혜를 새기든 원수를 새기든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한번 내 마음을 조용히 돌아봅시다. 지금 내 마음 속에 새겨져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돌아봅시다.내 마음 가득히 원수를 새기고 쓴 뿌리를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은혜를 새기고 늘 감사하며 살아가는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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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송경화 교수 칼럼 - 상처와 생존 크리스천헤럴드2023.09.29
    아기는 이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태어난다. 이 아기가 성장하면서 겪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 아기는 이 세상을 알아간다. 아이는 많은 좋은 것들을 가지고 태어난다. 즐거움, 여유, 환희, 창조성, 친밀성, 열린 마음, 베푸는 마음, 재롱, 희망, 아름다움, 여러가지 재능 등 정말 많은 좋은 것들의 보고이다. 그런데 이런 좋은 것들을 아무런 방어 없이 이 세상에서 표현하며 살다가 어느 순간 주변 사람들에게 그것이 거절되고, 무시당하고, 비난을 받으면 그 순간 이 좋은 것들을 숨겨버리게 된다. 예를 들어, 유치원에서 처음 만난 친구에게 손을 내밀어 친밀감을 표현했는데 그 친구가 무슨 이유에선지 그 손을 밀어버렸다면, 아이는 놀라고 당황하고 수치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전까지는 아무 거리낌없이 편안하게 표현할 수 있었던 “친밀감”을 감춘다. 그 친밀감을 표현한 것 때문에 친구로부터 상처를 받은 경험이 아프기 때문이다. 아이는 이 세상은 친밀감을 마음껏 표현하면 안되는구나 하는 것을 상처의 경험으로 배운다. 그리고 친밀감을 더이상 표현하지 않는다. 친밀감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눈치를 봐야 하고 조심해야 한다. 차라리 아무에게도 친밀감을 표현하지 않는 게 상처받을 위험이 없으니 안전하다. 그렇게 아이는 자라면서 크고 작은 상처들을 받는 과정을 통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많은 좋은 것들을 하나씩 숨긴다. 이렇게 숨겨진 좋은 것들은 내면 세계에서 억압되어 버린다. 그래서 어느새 나에게 그런 게 있었는지조차 모르게 된다. 하지만 그것들은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단지 억압되어 의식되지 않을 뿐이다. 여전히 내 안의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 살아가면서 무방비 상태에서 나의 선의와 호의가 거절당하고 나의 존재 자체가 부인당하고, 상당히 조건적으로만 관심과 인정을 받았던 적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가 살고 있는 가정과 사회는 연약하고 이기적인 죄인들이 만든 집단이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크고 작은 많은 상처를 주고 받게 된다. 그러니 우리는 나이를 먹을 수록 정도의 개인차는 있겠지만 이런 저런 상처를 받고 그 결과로 우리의 많은 좋은 것들을 억압해 나가며 살아간다.풍부한 좋은 것들을 다 억압시키면서 우리의 마음은 아름답고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기 보다는 그저 상처받기 쉬운 이 험한 세상에서 최대한 상처받지 않고 살 수 있기 위한 생존 모드로 전환된다. 생존만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위험한 것은 피하고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살아간다. 그러다 보니 삶이 메마르고 단조롭고 피곤해진다. 점점 무기력감을 느끼고 지치고 삶이 재미도 없고 의미도 찾을 수 없게 된다. 하나님께서 주신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엡1:3)들을 다 억압해 버리고 그저 하루하루 안전하게 지나가기만 바라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지금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한번 스스로에게 자문해 보라. 지금 나는 얼마나 정신적으로 풍요롭고 충만한 삶을 살고 있는가? 내가 잃어버린 나의 좋은 성품과 재능들은 어떤 것들인가?위에도 언급했듯, 그것들은 아주 사라진 게 아니라 내 안 어딘가에 숨겨진 채로 억압되어 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다시 찾을 수 있게 해 주신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주님이 약속한 풍성한 삶은 우리가 원래 가지고 있었던 모든 좋은 성품과 재능들을 다시 회복하고 일상의 삶에서 충분히 누리며 살 수 있는 삶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우리가 이 안전하지 못한 세상에서 상처를 받아 억압한 그것들을 이제 주님 안에서 완전한 안전감을 누리면서 다시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치유의 능력은 바로 하나님 안에 있는 예수님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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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김병학 목사의 소통하는 교회- 소통은 전인적이다 크리스천헤럴드2023.09.29
    한국과 미국에서 심각한 것은 자살이다. 한국에서 10대 청소년들의 2023년 자살률이 작년에 비하여 벌써 18%나 높은데 연령에 맞는 예방 대책이 없다는 뉴스가 충격이다. 미주 한인들의 자살률도 연 200명 이상으로 14%가 증가하였다는 뉴스도 역시 충격이다. 그런데 공통의 이유가 코로나 펜데믹의 영향이라는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세계 모든 사람들이 겪었던 펜데믹이 누군가에게는 스스로 생명을 끊는 결과를 만들어 냈다. 펜데믹 기간에 대부분 뉴스는 경제적인 상황에 맞춰져 있었다. 그래서 정부나 기관들은 경제적인 지원을 하는데 집중하였고 다양한 방법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을 진행하였다. 그런데 심지어 교회들조차 경제적인 지원을 주로 하였고 그때는 그것이 최선이었다.그런데 펜데믹이 끝나면서 사회 어느 곳에서는 생명과 직결된 안타깝고 슬픈 일들이 증가하고 있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정도의 고통과 외로움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이제 펜데믹이 끝나고 엔데믹이 되는데 지난 펜데믹의 후유증이 너무나 큰 상황에서 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나? 펜데믹 기간 어려움을 당했던 교회들은 이제 그 보상을 받으려는 듯, 아니면 속히 예전처럼 복구하는 것에만 노력하는 듯 보이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교인 중에도 분명히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은 사람들도 있을 것인데 교회는 얼마나 파악하고 그들을 돕기 위하여 어떤 노력들을 하고 있나. 펜데믹 이전과는 너무나 다른 상황이라는 것은 모두 공감하지만,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고 그렇게 달라진 것들에 대하여 교회는 어떤 대응과 준비를 할 것인지에 대하여서는 누구도 쉽게 말할 수 없다. 정부, 기업, 학교, 단체 등 사회 각 분야에서 자기들 나름대로 방안을 마련하기에 골몰하고 있고 시행하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펜데믹 이전보다 더 높은 성장을 하고 실적도 만들어 내고 있다. 이후로 교회도 할 일들이 더 많아졌다. 몇몇 교회들은 펜데믹 이전보다 더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으며 유명한 대형 교회 목사들을 강사로 부흥회를 하고, 그동안 진행하지 못한 단기 선교팀들을 세계 여러 곳으로 보내고 있다. 또한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시작하여 교인들을 여러 훈련 과정에 참여하게 하고 있다.다 중요하고 필요하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은 교인들을 위하여 전문가들의 세미나와 상담이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 교회에서 의료 봉사를 하는 것처럼 정신적인 도움도 줄 수 있어야 한다. 어설프게 전문가도 아닌 교역자들이 형식적으로 떼우듯 하지 않아야 한다. 각 연령층에게 맞는 맞춤형 접근이 필요하고 상담이 진행되어야 한다. 모든 교회가 다 이렇게 준비할 수 없기 때문에 전문 기독교 기관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대형 교회들은 이런 기관에 후원금을 많이 보내 기관을 활성화하고 전문가들을 더 많이 양성해야 한다. 전문가들을 파송 선교사처럼 후원해야 한다. 앞으로 교회들이 교인들의 비극적인 아픔과 슬픔을 겪지 않으려면 이 일을 최대한 빨리 진행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면 교회는 영혼뿐 아니라 마음도 강건해지는 전인적인 은혜를 누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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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최재홍 목사의 하루한장 말씀 -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크리스천헤럴드2023.09.29
    일상을 벗어나서 여유를 찾고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은 무척 중요하다. 쉼을 통해서 새로운 충전과 힘을 얻고 삶을 재정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바쁘고 힘든 이민 사회속에서 우리가 구분해야 할 것은 때를 아는 것이다. 때를 아는 것은 지혜이다. 쉬어야 할 때와 일을 해야할 때를 아는 것이다. 주중의 삶과 주일의 거룩함을 구분하는 것이 지혜이다. 구약 성경의 전도서에서도 인생의 중요한 때를 아는 것이 지혜라고 강조한다. 이 구분이 명확하지 않으면 개인 스스로의 삶이 흐트러지고 함께하는 공동체의 거룩한 에너지가 소모되고 방향이 흔들리기도 한다.그래서 목표와 목적이 분명한 집중하는 삶이 되어야 한 걸음 더 성취와 승리로 다가서게 만들어 준다.책에서 읽은 내용중에 조련사들이 사자를 길들이고 훈련하는 방법을 소개한 것을 읽었다. 사자를 조련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포효하며 살기등등한 사자앞에서 조련사는 다리 4개인 의자를 흔들어서 보여 준다. 그러면 사자의 눈 앞에 4개의 다리가 흔들거리고 나타나면 사자는 당황하는데 그 이유는 사자는 한 가지 목표(다리 하나)를 바라보고 바람같이 달려가 먹이를 물어뜯는 습성이 있는데, 갑자기 바라봐야 할 목표가 4개가 되었기 때문에 집중을 못하고 혼란스럽게 된다고 한다. 그러면 사자는 목표물이 여러개가 되어서 급기야 목표물을 상실하고 온순해 진다고 한다. 한 가지만 생각하고 본능을 깨우며 살아온 사자에게 목표물이 4개가 된 것은 목표물의 상실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래서 의자 조련방법을 통해서 조련하면 바라봐야 할 목표가 많으면 사자에게 있는 맹수의 야성이 사라지게 된다고 한다. 사자의 습관을 길들이는 방법을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할 부분도 있다.나는 우리의 신앙생활도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여러가지를 다 잘 할수가 없다.여러가지 일들을 동시에 감당할 능력도 없다. 환경이나 시간 여건이 조성되는 것도 쉽지 않다. 우리가 한 곳을 집중해서 바라볼 수 없도록 수시로 유혹과 시험도 다가온다. 우리 신앙생활에 영적도전이 점점 세찬 파도처럼 다가온다. 나 홀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삶의 요소들이 발목을 잡고 멈춰세운다.많은 것을 생각하고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사자를 조련하는 조련사처럼 성경 히브리서 기자는 인생 길을 달려가는 우리에게 한 가지를 바라보자고 권면한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2)’고 말씀한다.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버지 하나님만 바라보면 항상 함께 동행하시고 인도해 주셨다. 출애굽 여정중에 광야에서는 놋뱀을 바라보는 자들만 죽음에서 건져 주셨고 생명을 얻고 살아났다. 어둔 죄악 길에서 살았을지라도 십자가의 예수님만 바라보고 믿으면 구원을 얻게 하셨다. 우리보다 앞서간 신앙의 선배들도 오직 한 길, 그 길, 예수님이 가신 생명의 길을 따라갔다. 예수님 한분을 생각하며 “눈을 들어 주를 보라 너의 도움 어디서 오나 천지를 지으신 나를 만드신 여호와께 있다”고 찬양하게 하신다.우리 예수님만 바라보면 힘이 생긴다.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면 골치아프다. 해결할 힘도 능력도 없는 자기 문제에 빠져서 본질을 잃어버리고 삶은 지치고 신앙의 정상궤도를 벗어나게 만든다. 나는 우리에게도 다리 4개를 번갈아 보다가 무기력해지고 힘이 빠지는 맹수의 제왕 사자의 욕심이 많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제는 우리 인생을 돌아보고 정리할 때가 되었다. 어려움 속에서도 성경말씀을 그대로 믿으면 환난날에 그 말씀이 나를 지켜주고 보호해 주신다. 말씀이 능력이 된다. 우리의 눈이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한 분 예수님만 바라본다면 예수님이 주시는 만족이 우리 안에 충만케 될 것을 나는 믿는다. “예수는 나의 힘이요 내 생명되시니~~ 귀한 열매 주시는 이~~, 우리 주 예수님이다.” 샬롬!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브리서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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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샘신칼럼 - 당신은 성경 선생님입니까? (마15:10) 크리스천헤럴드2023.09.14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이 말씀은 주님께서 무리들에게 어떤 말씀을 하시기 전에 하신 말씀이다. 들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어떤 사람들은 분노했다. 반면에 제자들도 주님의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베드로는 주님께 나아가 이 비유를 설명해 달라고 주님께 부탁했다.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는 곳에는 반드시 두 종류의 사람이 있음을 발견한다. 그 말씀을 듣는 사람, 이해하는 사람이 있고 반면에 그 말씀을 듣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베드로를 향해 주님은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마15:16)고 되물으셨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배울 수 있겠다. 듣는다고 다 듣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듣지만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한다. 누군가가 그 말씀을 설명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하나님의 말씀을 이해시키기 위해 설명하는 사람을 성경은 교사, 그런 일을 혹은 가르치는 일이라고 표현한다. 즉 설교란 본문을 다시 한번 더 쉽게 설명하는 것이겠다. 오늘날 기독교의 문제 중 하나가 그 설명(가르침)을 생략한 채 정답만 제시한다. 압축된 정답만을 이야기하다보니 그 정답은 외워서 알지만 그 의미는 모르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무지만이 아니라 오해를 하고 더 심각한 것은 정답을 외워 알기에 무지나 오해 쯤은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그렇다. 성경을 가르치는 목사, 교사는 정답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 정답을 설명할 줄 아는 사람이다. 성경 교사는 가르침이 필요한 사람들이 정답만 외우게 하지 말고 그 정답을 이해하도록 가르쳐야 할 일이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복을 받는다”라는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성경이 말하는 순종과 복에 대한 개념을 우선 알아야한다.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왕으로, 주인으로 인정하는 행위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눅6:46)결국 “하나님께 순종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라”는 말씀이다.고대 사회의 왕은 백성들을 위해서 그들의 안전을 책임졌다. 또한 백성들의 필요를 채웠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여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안전과 필요를 공급을 책임지신다. 하나님께서 안전을 책임져 주시기에 두려울 일이 없고 공급을 책임져 주시기에 염려할 필요가 없다.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 되어 왕으로써 하실 일을 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순종하는 사람의 안전과 공급을 책임져 주시기에 순종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평안이 찾아온다.  성경은 그 평안을 복이라고 말한다.“나는 성경을 이해하고 있는가? 아니면 정답만을 외우고 있는가?”를 정직하게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이 질문의 답은 아주 간단하게 확인할 수 있다. 내가 누군가에게 성경을 설명할 수 있으면 이해한 사람이다. 그러나 설명할 수 없다면 아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때가 오래되었으므로 마땅히 선생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반드시 스스로에게 물어볼 질문이다.  나는 성경 선생님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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