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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은주 교수의 탈진을 긍정하라 18 <탈진 관점으로 본 선교사 이야기 5- 존 로스>

작성일 : 2025-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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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진을 인식하고, 긍정적인 결과를 바라보는 노력은 회복 탄력성을 갖는다

스트레스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스트레스는 긍정적인 반응과 부정적인 반응을 나타내는 심리적 기제로서 스트레스 대처반응에 따라 디스트레스(distress)와 유스트레스(eustress)를 유발한다. 스트레스 경험에 따라 박탈감과 탈진에 이르기도 하고, 반대로 매우 유쾌한 결과를 나타내기도 한다. 

존 로스(John Ross, 1842-1915)는 스코틀랜드에서 선교사로 파송 되어 거의 40년 동안 중국 만주와 한국 개신교 교회에 이바지 하였다. 그는 게일어를 모국어로 사용했지만, 영어와 다른 언어를 배우는데 남달랐다. 11개 언어를 구사했고, 성경번역과 주석에 업적을 남겼다. 특히 조선의 복음화를 위해 신양성경을 번역하고, 자립과 자기 전파와 자치에 중점을 두었으며, 선교 이론과 실천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필자는 로스의 탈진을 다음과 같이 발견한다. 첫째, 신체적 탈진이다. 그는 한글 신약성서 번역을 완성하기까지 10년이 걸렸다. 번역자 팀은 수년에 걸쳐 구성원이 바뀌었고, 우리가 아는 이름은 일부일 뿐이다. 다국어를 구사할 줄 아는 로스였지만, 한 사람이 제2외국어를 배우고 번역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둘째, 심리적 탈진이다. 로스는 스튜어트(M. A. Stewart)와 결혼하여 1872년 8월에 산둥반도 엔타이 선교지에 도착했다. 부인은 1873년 2월말에 아들 드러먼드(Drummond)를 낳고 얼마 후, 소천 했다. 아내를 잃고, 상심이 컸을 터이다. 다른 심리적 압박은 한글 신약성서 출판을 위한 재정 문제였다. 스코틀랜드 국립성서공회는 본문의 인쇄 활자를 만드는 비용만 제공했고, 실제적 비용은 기독교 자선가를 찾아 기부로 충당했다. 1874년은 만주에서 고려문을 방문했다가 파견된 스파이로 오해를 받았고, 1880년대 초에는 해외 선교위원회 및 모교회와 긴장 상태를 일으켰다. 그가 한글 성경번역과 학술연구로 인해 선교활동을 하지 않는 듯 여겨졌기 때문이다. 연합 장로교 신학관의 학생들로부터 받은 기부금을 사용하며, 특정 부동산을 구매한 것도 갈등의 문제였다. 비난을 받은 그는 사임을 고려할 정도였다.

셋째, 문화적 탈진이다. 당시 조선은 외국인과 교류를 금지하는 법률이 있었다. 조선인이외국인을 섬기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모든 친척이 감옥에 갇히고, 몇몇은 참수될 상황이었다. 극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조선인과 함께 성경을 번역하고 배부했던 것은 많은 어려움을 감수한 일이었다. 복음서가 배포되던 때, 조선의 수도에서 혁명이 일어나 많은 사람이 죽고, 감옥에 갇혔다. 개종자들은 심각한 박해를 받았다. 조선의 참담하고 암담한 상황이었다. 또한 조선의 겨울날씨는 2피트 눈이 쌓여 몹시 추웠고, 복음을 가지고 고개를 넘기에는 길이 너무 가파르고 좁고 거칠었으며, 여름은 습했다. 

로스의 탈진 회복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자신의 과도한 역량을 발휘한 뒤 새로운 충전을 위해 휴가를 떠났다. 그는 선교사역을 잠시 중단하고 1879년 3월에 스코틀랜드로 휴가를 떠났다. 휴가 중에도 한글 번역이 출판되도록 하는 노력과 역사서를 출판하기도 했지만, 쉼으로 새로운 충전과 도전이 되었을 터이다. 

둘째, 복음을 향한 불굴의 의지와 열정이다. 아내 사망의 슬픔에서 일어나 언어공부에 집중했고, 선교사업 계획을 세웠다. 그는 선교본부 편지에 조선의 쇄국정치는 무너질 것이고, 천성적으로 순수한 종교적 성향 때문에 기독교가 급속히 퍼져 나갈 것이며, 새 민족과 새 나라와 새 언어가 있다고 보고했다. 그는 일부 성경이 불태워지고, 나머지는 압록강에 던져졌을 때, 압록강을 마시는 조선인들은 생명수를 얻겠고, 불에 탄 성경재는 조선교회를 자라게 하는 거름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로스는 열악한 상황에도 복음의 소망을 놓치지 않았다.

셋째, 조선의 문화 충격을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살피고, 한글로 신약성경을 번역하며, 복음의 씨를 뿌렸다. 그 결과, 번역을 도와준 조선인과 수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고, 조선인 스스로 첫 교회를(소래교회) 세우는데 영향을 미쳤다. 

넷째, 한글 성경번역을 위해 여러 명의 조선인 동역자들을 만난 축복이다. 그는 목숨을 내놓고 믿는 조선인들이 번역에 동참하지 않았다면,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라고 고백했다. 번역은 1882년 한글 ‘예수셩교전서 누가복음’과 1887년 최초의 한글 신약전서인 ‘예수셩교젼서’를 발간하기에 이르렀다. 

다섯째, 화합의 영성이다. 1874년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선교부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을 때, 선교부를 하나로 통합하는 방안을 제시하여 에큐메니컬한 노력에 헌신했다. 

로스는 여러 스트레스와 탈진의 국면에서 유스트레스로 전환하여 탈진을 회복했다. 탈진을 경험했을지라도 탈진의 신호를 인식하고, 긍정적인 결과를 바라보는 노력은 회복 탄력성을 갖는다.


  • 김 은 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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