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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소통은 존재를 존중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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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성취 이전에 존재를 바라보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당신의 아이가 더 똑똑해질 수 있다면, 선택하시겠습니까?”
이 질문은 이제 공상과학의 영역이 아니다. 최근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확산되고 있는 ‘배아 유전자 선택’ 서비스는, 부모들이 시험관 아기 단계에서 여러 배아의 IQ를 예측해 가장 높은 지능을 가질 가능성이 있는 배아를 선택하게 한다는 뉴스의 내용이다. 비용은 최대 5만 달러에 이르지만, 그럼에도 수요는 꾸준히 늘고 있다고 한다.
부모들은 왜 이런 선택을 하게 되는가?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실리콘밸리 부모들은 자신들이 ‘성공’한 이유를 똑똑함과 노력, 그리고 좋은 유전자 덕분이라고 여긴다.
그런 혜택을 누린 부모들은 자녀에게도 ‘같은 조건’을 주고 싶어 한다. IQ 예측 기술이 이런 혜택을 가능하게 한다면,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논리다.
이런 부모들의 심리 상태는 단순하지 않다. 자녀의 미래를 위한 사랑과 열망이 있지만, 그 밑바닥에는 강박에 가까운 불안과 통제 욕구가 자리잡고 있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성공을 유지하려는 엘리트 계층의 계층 재생산 욕망도 배제할 수 없다. 유전자까지 설계하려는 시도는, 인간이 ‘하나님 흉내’를 내려는 태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기술의 문제점은 결코 가볍지 않다. 첫째, 예측 모델을 개발한 교수의 말에 의하면, 예측 정확도가 낮다. 최대 3~4점의 IQ 차이밖에 기대할 수 없다고 한다. 오히려 높은 IQ를 가진 배아가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질 위험도 더 높다고 전문가들은 경고한다. 둘째, 더 생각해 볼 문제가 있다. 윤리 문제다. 생명을 선택하고 버리는 행위, 인간의 가치를 숫자로 판단하는 사고방식은 생명의 존엄성을 해친다. 셋째, 계층 불평등 심화다. 부자들만이 ‘우월한 유전자’를 선택하게 되면, 사회는 유전적 차별까지 불러올 수 있다. 생명의 시작 단계부터 ‘우열’을 따지는 구조는 결국, 인간 사회의 근본을 흔들게 된다.
우리는 이 기술을 보고 고개를 흔들지만, 이와 비슷한 사고방식이 교회 안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은 간과하기 쉽다. 신앙이 깊은 가정, 아이가 잘 자란 집, 소위 ‘성공한 가정’은 교회에서 본보기가 되지만 때로는 암묵적인 기준이 되기도 한다. 신앙조차 ‘잘 키워야 하는 프로젝트’가 되어버린 시대, 교회는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교회는 성취 이전에 존재를 바라보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기에 유전적 조건, 학벌, 성과로 평가받을 수 없다. 또한 바울이 고백했듯, 약함 속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온전해진다(고린도후서 12:9). 부모의 사랑은 자녀의 성취를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의 여정을 함께 인내하며 걸어가는 것이다.
교회는 이러한 가치관을 회복해야 한다. 교회에서 자주 열리는 자녀 교육 세미나는 ‘잘 키우는 법’보다 ‘함께 살아가는 법’을 나누는 자리여야 한다. 성도 간의 대화는 성공담보다 연약함을 나누는 진솔함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가장 연약한 이들을 품으셨듯, 교회는 ‘가장 작고 연약한 이들’을 중심에 두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신앙의 깊이는 성공의 척도가 아니라, 사랑의 밀도로 측정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교회는 사람을 ‘결과로 판단하지 않는 언어’를 회복해야 한다. “그 가정은 자녀 교육을 잘했다”, “그 아이는 신앙이 참 바르다”는 말은 칭찬처럼 들릴 수 있지만, 동시에 다른 부모와 자녀들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부담과 비교를 불러일으킨다. 말에는 힘이 있다. 교회가 신앙의 여정을 격려하려면, 비교가 아닌 공감의 언어, 경쟁이 아닌 동행의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또한 교회는 부모들에게 ‘자녀를 통제하려는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를 신뢰하는 믿음’을 심어주어야 한다. 하나님은 각 사람을 독특하게 만드셨으며, 그 다양성 속에서 공동체는 더욱 풍성해진다. 자녀가 부모의 기대를 채우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 신앙 교육의 본질이다. 교회는 그 과정을 단순한 지도나 교육이 아닌, 공동체 전체의 동반 성장의 장으로 바꾸어야 한다.
이 시대는 무엇이든 선택하고 조정할 수 있다고 믿는 시대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이 주신 ‘선택 불가능한 선물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사랑할 것인가를 가르쳐야 한다. 배아를 고르듯 교인을 고르고, 신앙 유형을 고르고, 사역 스타일을 고르는 시대 속에서 교회는 다름과 한계를 끌어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세상과 다른 교회, 은혜가 말이 아니라 삶이 되는 교회의 모습이다.
믿음의 공동체가 다시 한 번 ‘생명은 선물이다’라는 진리를 소통할 수 있다면, 교회는 세상의 통제 열망을 넘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증언하는 공간이 될 수 있다.
- 다음글후회와 회개 25.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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