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민석 칼럼 - 절대적 믿음이 부르는 폭력성: 공공신학의 시선으로 본 오늘의 한국교회
크리스천헤럴드2025.04.13
필자는 공공신학자다. 공공신학이란 신앙이 개인의 내면에만 머무르지 않고 사회와 공공의 삶 속에서도 의미를 발휘해야 한다고 믿는 신학이다.그래서 필자는 늘 기독교인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방식, 사회와 소통하는 태도에 관심을 가져왔다. 그러나 요즘 한국교회의 정치 참여를 바라보면서, 차라리 신앙이 공적인 영역으로 나오지 말고 조용히 기도와 예배에만 머물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곤한다.오늘날 기독교는 마치 우리나라가 기독교 국가인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다원주의를 기반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국가이며, 다양한 신념과 종교가 공존하는 사회다.따라서 기독교는 자신과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들과도 평화롭게 살아가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다양한 인종, 문화, 신념이 함께 공존하는 사회 속에서, 기독교는 어떻게 평화와 공공선을 위해 기여할 수 있을지를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생각해보라. 기독교, 천주교, 불교, 이슬람교 등 다양한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공존하는 사회에서 만약 모든 종교 집단이 각자의 신념을 고수하겠다며 사회적 힘겨루기에 나선다면 어떻게 될까? 그건 평화가 아니라 혼돈이고, 결국 지옥 같은 세상일 수 있다. 우리는 그런 세상을 자녀들에게 물려주고 싶은가?물론 이것은 기독교 신념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성경에 근거한 확고한 신념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 신념이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중한 태도와 합리적인 대화를 통해 표현되고 설득돼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믿는 진리는 강압이나 혐오가 아닌, 이해와 설득을 통해 전해질 수 있다.그런데 요즘 현실은 그와는 정반대다. 믿음이 절대적일수록, 즉 내 행동에 대한 신앙적 근거가 확고할수록 혐오와 배제를 정당화하고, 마침내는 폭력적인 언어와 태도까지 보인다. 우리가 그토록 비판하던, 테러를 수단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실현하려는 극단적 이슬람 무장단체와 같은 모습이다. 절대적 종교적 신념이 극단주의 정치와 만나면, 상대는 대화 파트너가 아닌 ‘악마’로 간주한다. 그러니 그 악마를 무찌르기 위해서 종종 폭력, 혐오, 전쟁을 용인하게 된다. 이쯤 되면 묻게 된다. “오늘날 믿음이 좋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생각해보자. 오늘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갈등은 정말 ‘이단’이나 ‘사이비’ 때문인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들 때문인가? 오히려 그런 경우는 관심조차 주지 않는 듯하다. 정작 더 극단적인 갈등과 혐오가 발생하는 지점은,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끼리다. 같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정치적 견해가 다르면 서로를 향해 “진짜 기독교인이 아니다”라며 정죄하고, 마치 적군을 대하듯 싸우려 든다.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정말 내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인가? 성경이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은 이슈들에 대해서도, 나의 해석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믿음이란 언제나 인간의 해석과 이해를 수반한다. 우리는 과거, 너무나도 확고한 믿음으로 인해 했던 행동이, 시간이 지나 내 안에서 생각이 바뀌면서 과거의 믿음을 철회한 경험이 많다. 그렇다면 진리가 변한 것인가? 아니면 그 진리를 해석한 나의 생각이 변한 것인가?오늘 한국교회 안에서는 “내가 옳고, 너는 틀리다”는 이분법이 너무 쉽게 통용된다. 특히 교회 안에서 정치적 의견이 다르면 더 이상 형제가 아닌 듯이 행동한다. 정치가 진리 위에 있는 듯 하다. 기독교가 강도나 창녀와도 함께 하신 예수님을 따른다면, 정치적 다름은 왜 함께할 수 없는 것일까?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을 보라. 양국의 기독교인 군인들이 서로 ‘이 전쟁은 하나님이 우리 편을 드시기 위한 성스러운 전쟁’이라고 믿는다. 똑같은 성경을 읽고, 똑같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서로를 죽이고 있다.하나님은 과연 누구의 편일까? 우리는 이 질문 앞에서 머뭇거릴 줄 알아야 한다. 둘 다 맞을 수도 있고, 둘 다 틀릴 수도 있다. 그 가능성을 열어두는 겸손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의 시작이 아닐까?더 걱정스러운 것은, 우리의 자녀들이 이런 어른들의 모습을 보며 자란다는 것이다. 부모가 신앙을 지킨다는 이유로 혐오와 폭력을 정당화하는 모습을 본다면, 아이들은 신앙이란 곧 ‘자신과 다른 이를 공격해도 되는 면허’라고 받아들이지 않을까? 더욱이 자신의 신앙이 오류가 없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는다면, 자신을 절대선으로 여기는 위험한 존재가 될 수도 있다. 나는 내 자녀가 그런 폭력적인 사람으로 자라기를 결코 바라지 않는다. 이 모든 이유 때문에 나는 다시 공공신학을 이야기한다. 공공신학은 기독교인의 정치 참여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특정 정당이나 정치세력을 노골적으로 지지하지 않으며, 정치가 신앙의 모든 답이라는 환상도 갖고 있지 않다.오히려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간접적으로 선한 영향력을 끼치기를 바란다. 그래서 공공신학은 공적 광장에서 종교적 언어를 남발하지 않고, 이웃과 소통 가능한 언어로 말하고 행동한다.오늘 한국교회는 공공신학이 던지는 이 질문에 귀 기울여야 한다. “당신의 믿음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그리고 “그 믿음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얼굴로 다가가고 있습니까?” 만약 그 믿음이 상대를 악마로 만들고, 혐오하고, 공격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게 만든다면, 그건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 있다.이제는 믿음을 말하기 전에, 믿음이 낳는 태도를 먼저 돌아봐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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