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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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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The letter 07 김광근 -두려움 없는 사랑의 방향 크리스천헤럴드2025.04.29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형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사도행전 2장 2-4절오순절의 아침, 그날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은 이전과 전혀 다른 공간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조심스럽게 모여 있었고, 그들의 마음속엔 아직 완전하지 않은 확신과 방향 없는 열정이 남아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령의 바람은 인간의 준비 여부를 묻지 않고, 하늘로부터 갑자기 불어왔습니다강한 바람 같은 소리' 성령은 조용한 속삭임이 아니라, 때로 질서를 흔들고, 닫힌 문을 열고, 주저함을 밀어내는 강한 힘으로 임하셨습니다. 그날 제자들의 언어는 달라졌고, 그들의 시선은 더 이상 자신을 향해 있지 않았습니다.성령은 단지 힘' 이상의 존재입니다.그분은 하나님 자신의 임재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된 동반자입니다. 우리를 움직이게 하고, 말하게 하고, 나아가게 하는 바람 단지 숨 쉬는 존재로 머물러 있던 교회를, 드디어 세상을 향해 걸어가게 만든 분이었습니다오늘날 우리 안에 주어진 성령도 여전히 바람처럼 불고 계십니다. 우리가 닫아 둔 마음의 문과 움츠린 사명의 자리를 흔들며, 지금도 교회를 세상 가운데로 밀어내고 계십니다.그 바람 앞에 우리는 질문받습니다. 머물 것인가, 나아갈 것인가. 두려움에 붙잡힐 것인가, 아니면 순종의 바람에 실려보낼 것인가.오늘, 당신은 성령의 바람을 느끼고 계십니까?그것은 두려움 없는 사랑의 방향으로 우리를 이끄는 하나님 자신의 호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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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87
    [오피니언] 조영석 목사의 생각하며 기도하며 - 한 달란트의 위용 크리스천헤럴드2025.04.29
    유대인의 화폐 단위였던 달란트는 오늘 날 재능이나 타고난 자질을 말할 때 사용한다. 만든 적든 우리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고, 이것을 이용해서 무엇을 해낼 수 있는 능력과 같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자신의 재능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있지만 재능이 없는 사람은 없다. 많고 적음의 차이는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재능 즉 달란트를 주셨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를 보면 그렇다. 주인은 세 종에게 각각 그 재능대로 금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주고, 받은 것을 활용해서 수익을 내도록 맡겼다. 이 중 두 사람은 재능을 활용해서 성과를 내었다. 그러나 한 사람은 받은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어 아무런 결실을 만들지 못했다. 이 비유의 초점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게으른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의 태도에 집중한다. 금 한 달란트도 적은 돈이 아닌데 왜 어떤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까?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과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노력해서 두배의 결실을 거뒀는데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왜 작은 결실이라도 내지 못했을까? 의심이 가는 이유가 하나 있다. 바로 동기부여이다. 이 비유에서 간과하기 어려운 사실이 더 받은 사람과 덜 받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필이면 문제가 된 종은 그 중 가장 적게 받은 사람이었다. 혹시 적게 받아서 자신이 받은 것을 소중히 여기지 못한 것은 아닐까? 기왕이면 많이 받아 많은 결실을 내어 주위에 인정받고 싶은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적게 받은 사람의 열심이 많이 받은 사람과 같기 어려울 수 있다. 노력해 봤자, 더 가진 두 사람의 결과에 비교할 수 없을 테니 가진 것을 귀하게 여기지 못하고 시도조차 하지 않을 수 있다.여기에 우리가 조심해야 할 함정이 있다. 한 달란트도 결실을 만들 수 있는 중요한 재능이지만 더 가진 사람과 비교하면 하찮아 보여 열심을 낼 의욕을 상실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작은 재능으로 큰 일을 이룰 수 없다 여기니 그것을 위해 수고할 가치를 찾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우리들은 모두 다 한 달란트를 받은 작은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다. 뛰어나고 큰 능력을 가진 소수보다 작은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훨씬 많다. 문제는 한 달란트 가진 사람들이 많고 흔해서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시선은 자연스레 많은 능력을 가진 몇 사람을 향하게 된다.어쩌면 한 달란트를 받은 많은 사람들이 이런 소심한 생각에 빠질 수 있다. 내가 만들 수 있는 변화가 적다 해서, 내가 일으킬 수 있는 차이가 적다 해서 스스로 도전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능력 있는 몇 사람을 바라보며 그들의 몫이라 생각하고 관중이 되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구경만 하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한 달란트를 가진 사람은 많고 열 달란트를 가진 사람은 적다. 한 달란트를 가진 사람이 열명을 모이면 열 달란트가 된다. 한 달란트를 가진 사람들을 모두 모으면 열 달란트를 가진 사람들보다 입도적으로 많아서 더 크고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다는 뜻이다. 거대한 힘은 이 작은 힘들이 모여 연합해서 일으키는 것인데 그것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한 사람이 소유한 힘과는 비교도 안 될 막강한 힘이다. 진정한 변화는 이 한 달란트를 가진 사람들이 모였을 때 비로소 일어난다.한 달란트를 가진 이들의 재능을 작고 쓸모없는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 막대한 일꾼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오합지졸이 되어 버린다. 오늘날 교회가 약해지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일 지도 모른다. 스스로를 특별하지 않은 평범한 존재들이라 생각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력해져 교회가 힘을 잃었을 지도 모른다.달란트의 비유는 많은 것을 가진 특별한 능력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한 달란트를 가진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의 불충성을 호되게 나무라신다. 주신 재능을 하찮게 여기고 맡기신 일을 소홀이 여기는 태도를 나무라시는 것이다.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버린 종의 모습이 나의 모습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내가 가진 것이 비록 작고 대단한 능력이 아닐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주님의 교회를 위해 사용하라고 내게 주셨고, 나를 부르셨다. 우리는 작은 일에 충실하고 부르신 곳에서 순종하며 살아가는 한 달란트의 청지기가 되어야 한다.“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눅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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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86
    [오피니언] 김병학 목사의 소통하는 교회 - 소통은 신뢰를 회복한다(2) 크리스천헤럴드2025.04.29
    최근 미국 에너지부가 한국을 '민감 국가'(Sensitive Country)로 지정한 결정이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 조치는 한국이 미국의 첨단 기술과 연구 협력에서 일정 부분 제한을 받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단순히 외교적 갈등을 넘어 국가 간 신뢰와 소통의 부재라는 더 근본적인 문제를 시사한다.발표된 기사나 매체를 분석할 때, 미국의 결정은 단순한 기술적 고려만이 아니라, 국가 간 소통과 신뢰 부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과거 한국과 미국은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해왔지만, 최근 한국의 정치적인 불안과 정책의 변화 그리고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각국은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시하며 상대국을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기술 패권 경쟁이 심화되면서, 미국은 반도체, 인공지능(AI), 바이오 등의 첨단 기술을 전략적 자산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접근을 제한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한국이 이러한 제재 대상이 된 것은 경제적·기술적 측면뿐만 아니라 정치적·외교적 차원에서도 신뢰를 다시 쌓아야 한다는 경고일 수 있다.또한, 신뢰 부족은 단순히 경제 협력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한미 동맹의 근본적인 관계에도 균열을 초래할 수 있다. 기술 보호 문제로 시작된 조치가 정치·군사적 협력 관계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그렇다면, 이 문제를 국가 간 관계에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과 공동체, 그리고 교회의 역할과 연결해볼 수 있을까?신뢰가 무너진 곳에서는 갈등이 깊어지고, 결국 관계가 단절되기 쉽다. 이것은 국가 간 관계뿐만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 교회 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이념과 세대, 계층 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교회 역시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내부적으로는 정치에 대한 편협한 판단이 세대의 분열과 교인 간 갈등이 발생하고 있으며, 외부적으로는 사회와의 소통이 부족해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교회는 본질적으로 ‘소통’과 ‘화해’를 위한 공동체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며 하나 되기를 강조하셨다. 하지만 교회가 신뢰를 잃고 사회와의 소통이 단절된다면,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기 어려워진다.그러면 교회가 실천해야 할 ‘소통의 원칙’은 무엇인가?1. 정직한 대화: 국가 간 신뢰가 무너진 이유 중 하나는 솔직한 소통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내부적으로는 교인들 간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외부적으로는 사회와의 소통을 원활히 하기 위해 정직하고 열린 대화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 이는 단순한 대화뿐만 아니라, 서로의 입장을 경청하고 존중하는 태도를 포함한다.2. 신뢰 회복을 위한 행동: 말뿐만 아니라 행동이 중요하다. 신뢰는 단기간에 쌓이지 않는다. 작은 약속을 지키고, 책임감 있는 행동을 보여줄 때 신뢰가 형성된다. 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약자를 돌보며, 공정성과 윤리를 지켜나갈 때 사회적 신뢰도 회복될 수 있다. 또한, 교회가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는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할 때 더욱 신뢰받을 수 있다.3. 다양성과 포용성 인정: 국제사회에서 한 국가가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상대국의 입장을 존중하고 협력하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내부적으로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고, 세상과도 열린 태도로 소통해야 한다. 시대의 변화 속에서 교회가 세상의 아픔과 고민을 함께 나누고 포용하는 자세를 가질 때, 다시금 소통의 다리를 놓을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교회는 사회적 가교 역할을 수행하며, 갈등을 중재하는 역할을 맡을 수 있다.미국의 ‘민감 국가’ 지정은 단순한 경제적 조치가 아니라, 우리가 신뢰를 다시 쌓아야 한다는 경고일 수 있다. 이 문제를 국가 간 외교적 문제로만 볼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서의 신뢰와 소통의 문제로 확장해 볼 필요가 있다. 교회가 소통과 화해의 장이 될 때, 사회와 국가 간에도 신뢰가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신뢰가 무너질 때, 그 회복을 위한 첫걸음은 소통에서 시작된다. 교회는 먼저 소통을 실천하고 신뢰를 쌓으며, 사회 전체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끄는 역할을 해야 한다. 신뢰를 잃은 시대에 교회가 먼저 소통을 실천하며 신뢰를 회복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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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85
    [오피니언] 황순원의 10가지 감사노트 - 4월, 부활주일에 드리는 감사 크리스천헤럴드2025.04.29
    1 오늘도 새로운 날을 주셔서 오늘에 주실 은혜와 축복을 기대하며 하루를 시작하게 하심 감사합니다.2 사모데이에 전할 말씀을 준비하면서 문득 미국땅에 처음 도착하자 맞이했던 인생의 밤이 생각났습니다. 그때 찾아왔던 절망감은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실패의 밤에 찾아와서 속삭이신 주님의 말씀은 지금도 잊을 수 없고 오히려 지금까지 견딜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어주어서 감격하며 원고를 써내려 가게 하신 은혜 감사를 드립니다.3 죽음을 이기고 승리의 부활주로 다시 다가오실 주님은 어떤 끔직한 고통보다 위에 계신 분으로서 고통을 점령하신 승리의 주님께 오늘도 찬양 올려 드리며 감사를 외쳐 봅니다.4 부활절 퍼레이드의 행진을 보면서 선교 140년을 맞이한 한국땅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했던 아펜셀러 선교사님의 5대손과 언더우드 선교사님의 4대손이 함께 참여하여 감격의 메시지를 전하는 모습에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5대,6대손 자녀들을 가진 나로서 하나님의 복음이 이들을 통해 어떻게 전달될지 궁금한 가운데 희망을 갖고 감사를 드립니다.5 한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자연원리는 수천년의 역사속에 아직도 진리로 남아 있으니 사모사역속에 감추인 고난의 씨앗은 수많은 사모들을 살리는 생명력을 품고 있음을 상기할때마다 고난의 의미는 또 하나의 신비임을 철저히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6 하나님의 사랑은 베드로의 실패의 자리까지 따라오셔서 기어코 그를 회복시키고 새사명을 주신 이유는 사명보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관계임을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질문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는 주님이 베드로의 사랑을 받고 싶어서가 아니라 "내가 이렇게 사랑하는데 반응을 좀 보여 주렴" 하는 주님의 간절한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오늘도 나에게 질문해 오시는 주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확인시키고 싶어하시는 마음을 알고 주님께 고백하면서 감사를 드립니다.7 불평을 품은 자들은 매 사건속에서 불평만을 선택합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어떤 사건과 환경속에서 감사만을 찾아서 고백합니다. 마치 철이 지남철에 가까이 하면 들어 붙듯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붙는 것이 다릅니다. 내안에 계신 주님으로 가득 채우기만 하면 어떤 상황도 부활의 능력으로 승리할 수 있어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8 디모데처럼 거짓이 없는 믿음만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역경을 지나는 동안에도 그분을 더 깊이 알수 있는 축복을 주실 것을 믿으니 새롭게 감사하는 마음이 솟아 오릅니다.9 인생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푼푼초초 우리를 단련하시어서 마침내 영광스러운 존재로 누리게 하시는지 생각할수록 알 수 없습니다. 욥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끝이 보이지 않은 고난의 터널을 지나가던 날들을 잊을수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지내온길 주의 크신 은혜라" 라고 고백하며 눈물의 감사를 드려봅니다.10 나를 위로하시고 다시 일으켜 세워서 당신의 계획을 이루어 나가시는 하나님이 이번 사모데이에 참여하시는 모든 사모님들을 만나 주시어 다시 일으켜 세우사 창공을 날으는 독수리처럼 모두 날게 하옵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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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84
    [오피니언] 최재홍 목사의 하루한장 말씀 - 생명의 말씀을 품은 크리스쳔 크리스천헤럴드2025.04.29
    요즘 저는 매일 아침 방송으로 요한계시록을 한 장씩 묵상하며 큰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그 중에 제 마음에 와닿는 말씀은 환란이 다가오고 종말의 때에도 우리를 끝까지 지키고 보호해 주는 유일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영원토록 변함없으신 생명의 말씀이 우리를 최후의 승리로 이끌어 주신다는 계시록의 내용입니다.어떤 사람들은 부적을 몸 속에 지니고 다니거나 차 내에 혹은 집안에 보관하면 나쁜 일이 생기지 않고 생명을 안전하게 보호해 준다고 믿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거금을 들여서 구입합니다. 우리가 아는 탁월한 지성인들마저도 이렇게 살아가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부적은 실제로 어떤 힘도 능력도 발휘할 수 없는 종이일 뿐입니다. 그런데 꼭 세상 사람들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부 크리스쳔도 동일한 생각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예를 들면 성경 책을 부적처럼 생각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렇게 적용하기도 합니다. 집에 보관하고 몸에 지니고 목에 십자가를 걸고 혹은 차에 달고 다니면 그것이 나를 지켜주고 안전하게 보호해 준다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어느 부분으로는 심리적 안정을 누릴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가 읽고 듣고 전하고 지킬 때에 생동감이 있고 능력이 나타납니다. 성경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증거할 때에 더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저자인 사도 요한은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고 말씀합니다. 크리스쳔의 제일 원칙은 말씀을 입에서 떠나지 않게하며 주야로 묵상하고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수1:8). 성도인 우리들의 삶을 바라보며 불신자들과 비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대로 살아가야 합니다.이 땅의 모든 크리스쳔은 하나님 나라를 대표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대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처신과 행동에 따라서 하나님 나라와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칭송을 듣게 됩니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우리는 천국의 외교관입니다. 하늘나라의 대사입니다. 외교관의 역할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본국을 대표합니다. 명예를 지키고 본국에 대한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 주재국의 관련 정보사항을 수집해야 합니다. 공개된 정보와  감추인 정보를 찾아내고 지역정세를 잘 살펴야 합니다. 셋째는 본국을 홍보하고 주재국과 관련된 본국의 입장을 설명하고 설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대사도 이와 유사한 역할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내리신 지상명령(마28:18~20)은,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등극한 후 사신들을 보내어 자신이 다스리는 세상에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라는 명령입니다. 왕에게 부름받고 훈련받고 파송된 사신, 대사의 역할이 바로 지상명령으로 부여된 전도의 사명입니다. 우리들 각자가 모두 하나님 나라의 대표입니다.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사도바울이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고 편지가 되어야 한다고 한 말은 하나님 나라의 대사로서의 역할을 잘하라는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대사는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그 나라의 왕되신 예수님이 세상을 위해서 하신 일을 증거하고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크리스쳔으로 살아간다는 의미는 예수님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혼들을 섬긴다는 것은 예수님을 전하고 친밀하게 교제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로 회복되고 돌아오도록 권하는 것입니다. 내 삶의 모습이 예수님을 드러내는 광고판입니다. 나의 표정과 행동이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나의 나눔과 섬김이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모두 다 그리스도로 옷을 입게 되는 그날을 꿈꾸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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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김병학 목사의 소통하는 교회 - 소통은 화해의 시작이다 크리스천헤럴드2025.04.13
    한국 대통령이 탄핵되었다. 한국 사회는 대통령 탄핵이라는 정치적 격변기를 겪으며 양극화와 분열을 경험했다. 이러한 정치적 갈등 속에서 종교, 특히 한국 사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독교의 역할과 소통 방식에 대해 새롭게 고찰할 필요가 있다. 탄핵이라는 대한민국 헌정 사상 중대한 결정 과정에서 기독교 공동체는 어떤 방식으로 소통했으며, 앞으로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대통령 탄핵 과정에서 한국 기독교계는 크게 두 진영으로 나뉘었다. 한쪽은 탄핵을 지지하는 진보적 기독교인들이었고, 다른 한쪽은 탄핵을 반대하는 보수적 기독교인들이었다. 이러한 분열은 단순한 정치적 견해 차이를 넘어, 성경 해석과 신앙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 차이를 드러냈다.보수 기독교계는 주로 대형 교회를 중심으로 국가 권위에 대한 순종과 기존 질서 수호를 강조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들은 로마서 13장의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는 구절을 근거로 정부 비판에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반면 진보 기독교계는 예언자적 비판 정신과 사회 정의 실현을 강조하며, 예수의 가르침에 기반한 사회 개혁을 주장했다.이러한 갈등은 결국 교회 내부의 분열로 이어졌고, 교인들 간의 소통 단절과 상호 비방으로 기독교의 사회적 신뢰도는 크게 하락했다.탄핵 과정에서 기독교 공동체의 소통 실패는 여러 원인에서 비롯되었다. 첫째, 정치적 이슈에 대한 종교적 해석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배타성이다. 자신의 정치적 견해만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하며 다른 의견을 가진 신앙인들을 배척하는 현상이 만연했다.둘째, SNS와 같은 디지털 미디어 환경에서 발생하는 에코 챔버(Echo Chamber) 현상이다.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들끼리만 소통하면서 자신의 견해가 강화되고, 다른 의견에 대한 이해와 존중은 점점 사라졌다. 이는 교회 내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다.셋째, 교회 지도자들의 정치적 발언이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문제가 있었다. 일부 목회자들은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마치 신의 뜻인 것처럼 표현하며 교인들에게 특정 입장을 강요했다.이러한 소통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기독교 공동체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첫째, '경청의 윤리'를 회복해야 한다. 야고보서 1장 19절은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가르친다.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의 이야기를 먼저 경청하고, 그들의 관점에서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둘째, '공론장'으로서의 교회 기능을 회복해야 한다. 교회는 다양한 정치적 견해가 공존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교회 내에서 정치적 이슈에 대한 토론회나 대화의 장을 마련하고, 서로 다른 입장을 존중하며 소통하는 문화를 형성해야 한다.셋째, 정치적 이슈를 다룰 때 '공동선'을 추구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특정 정파나 이념의 승리보다는 사회 전체의 공동선을 위한 관점에서 정치적 사안을 판단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이는 기독교의 핵심 가치인 이웃 사랑과 정의 실현에 부합하는 접근 방식이다.넷째, 디지털 미디어 시대에 맞는 '디지털 제자도'를 실천해야 한다. 소셜미디어(SNS)에서의 발언과 공유 행위에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책임과 윤리를 적용하며, 가짜 뉴스나 혐오 표현을 확산시키지 않는 미디어 리터러시를 함양해야 한다.탄핵 이후의 사회에서 기독교는 분열을 조장하는 세력이 아닌, 화해와 치유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이를 위해 기독교인들은 정치적 견해가 달라도 기본적인 인간 존엄성을 인정하고, 차이를 존중하는 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 또한 개인의 죄악에 대한 판단과 단죄를 넘어, 사회 구조적 불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개혁적 실천을 병행해야 한다.특히 탄핵 과정에서 깊어진 사회적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교회는 화해의 의례와 실천을 적극적으로 도입할 필요가 있다.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을 가진 교인들이 함께 예배하고 봉사하며, 공동의 신앙 고백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일치를 경험하도록 돕는 것이다.대통령 탄핵은 한국 사회와 기독교계에 깊은 상처와 분열을 남겼지만, 동시에 새로운 소통과 화합의 기회를 제공했다고 생각한다. 이제 기독교 공동체는 과거의 갈등을 반성하고, 보다 성숙한 신앙적 대화와 정치적 참여의 모델을 개발해야 한다.이를 위해서는 특정 정치 세력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나 반대를 넘어, 성경의 가르침과 그리스도의 사랑에 기초한 비판적 참여가 필요하다. 또한 교회는 다양한 목소리가 공존하는 가운데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다양성 속의 일치'를 추구해야 한다.대통령 탄핵이라는 정치적 위기는 역설적으로 한국 기독교가 자신의 정체성과 사회적 역할을 재정립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분열과 갈등의 시대에 기독교는 사랑과 화해의 메시지를 실천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치유와 통합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첫걸음은 서로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진 그리스도인들 간의 진정한 대화와 소통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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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The letter 06 김광근 -예수님의 눈물 위에 놓인 구원의 길 크리스천헤럴드2025.04.13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종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 누가복음 19장 41-42절 -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발걸음은 환영받는 입성이자 동시에 깊은 슬픔의 여정이었습니다. 군중의 외침은 열정으로 가득했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습니다. 그 눈물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향해 품으신 애끓는 사랑이었습니다.예수님은 그들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평화를 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아파하셨습니다. 그들은 기적과 권세는 보았지만, 십자가를 통한 구속의 계획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분의 눈물은 단지 당시 예루살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진리보다 기대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향한 것이기도 합니다.하나님의 평화는 세상이 주는 안정과는 다릅니다.그것은 십자가를 통해 가능해진, 하나님과의 깊은 화해이며 진정한 회복의 시작입니다. 종려주일은 단지 환호의 날이 아니라. 예수님의 눈물 위에 놓인 구원의 길을 다시 바라보는 시간입니다.오늘, 우리는 어떤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까?그분의 마음을 오해한 채 환호만 외치는 무리에 속해 있는 것은 아닐까요?눈물 흘리신 주님의 마음을 깊이 묵상하며, 참된 평화의 길로 나아가는 종려주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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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김민석 칼럼 - 절대적 믿음이 부르는 폭력성: 공공신학의 시선으로 본 오늘의 한국교회 크리스천헤럴드2025.04.13
    필자는 공공신학자다. 공공신학이란 신앙이 개인의 내면에만 머무르지 않고 사회와 공공의 삶 속에서도 의미를 발휘해야 한다고 믿는 신학이다.그래서 필자는 늘 기독교인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방식, 사회와 소통하는 태도에 관심을 가져왔다. 그러나 요즘 한국교회의 정치 참여를 바라보면서, 차라리 신앙이 공적인 영역으로 나오지 말고 조용히 기도와 예배에만 머물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곤한다.오늘날 기독교는 마치 우리나라가 기독교 국가인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다원주의를 기반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국가이며, 다양한 신념과 종교가 공존하는 사회다.따라서 기독교는 자신과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들과도 평화롭게 살아가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다양한 인종, 문화, 신념이 함께 공존하는 사회 속에서, 기독교는 어떻게 평화와 공공선을 위해 기여할 수 있을지를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생각해보라. 기독교, 천주교, 불교, 이슬람교 등 다양한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공존하는 사회에서 만약 모든 종교 집단이 각자의 신념을 고수하겠다며 사회적 힘겨루기에 나선다면 어떻게 될까? 그건 평화가 아니라 혼돈이고, 결국 지옥 같은 세상일 수 있다. 우리는 그런 세상을 자녀들에게 물려주고 싶은가?물론 이것은 기독교 신념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성경에 근거한 확고한 신념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 신념이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중한 태도와 합리적인 대화를 통해 표현되고 설득돼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믿는 진리는 강압이나 혐오가 아닌, 이해와 설득을 통해 전해질 수 있다.그런데 요즘 현실은 그와는 정반대다. 믿음이 절대적일수록, 즉 내 행동에 대한 신앙적 근거가 확고할수록 혐오와 배제를 정당화하고, 마침내는 폭력적인 언어와 태도까지 보인다. 우리가 그토록 비판하던, 테러를 수단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실현하려는 극단적 이슬람 무장단체와 같은 모습이다. 절대적 종교적 신념이 극단주의 정치와 만나면, 상대는 대화 파트너가 아닌 ‘악마’로 간주한다. 그러니 그 악마를 무찌르기 위해서 종종 폭력, 혐오, 전쟁을 용인하게 된다. 이쯤 되면 묻게 된다. “오늘날 믿음이 좋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생각해보자. 오늘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갈등은 정말 ‘이단’이나 ‘사이비’ 때문인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들 때문인가? 오히려 그런 경우는 관심조차 주지 않는 듯하다. 정작 더 극단적인 갈등과 혐오가 발생하는 지점은,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끼리다. 같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정치적 견해가 다르면 서로를 향해 “진짜 기독교인이 아니다”라며 정죄하고, 마치 적군을 대하듯 싸우려 든다.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정말 내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인가? 성경이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은 이슈들에 대해서도, 나의 해석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믿음이란 언제나 인간의 해석과 이해를 수반한다. 우리는 과거, 너무나도 확고한 믿음으로 인해 했던 행동이, 시간이 지나 내 안에서 생각이 바뀌면서 과거의 믿음을 철회한 경험이 많다. 그렇다면 진리가 변한 것인가? 아니면 그 진리를 해석한 나의 생각이 변한 것인가?오늘 한국교회 안에서는 “내가 옳고, 너는 틀리다”는 이분법이 너무 쉽게 통용된다. 특히 교회 안에서 정치적 의견이 다르면 더 이상 형제가 아닌 듯이 행동한다. 정치가 진리 위에 있는 듯 하다. 기독교가 강도나 창녀와도 함께 하신 예수님을 따른다면, 정치적 다름은 왜 함께할 수 없는 것일까?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을 보라. 양국의 기독교인 군인들이 서로 ‘이 전쟁은 하나님이 우리 편을 드시기 위한 성스러운 전쟁’이라고 믿는다. 똑같은 성경을 읽고, 똑같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서로를 죽이고 있다.하나님은 과연 누구의 편일까? 우리는 이 질문 앞에서 머뭇거릴 줄 알아야 한다. 둘 다 맞을 수도 있고, 둘 다 틀릴 수도 있다. 그 가능성을 열어두는 겸손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의 시작이 아닐까?더 걱정스러운 것은, 우리의 자녀들이 이런 어른들의 모습을 보며 자란다는 것이다. 부모가 신앙을 지킨다는 이유로 혐오와 폭력을 정당화하는 모습을 본다면, 아이들은 신앙이란 곧 ‘자신과 다른 이를 공격해도 되는 면허’라고 받아들이지 않을까? 더욱이 자신의 신앙이 오류가 없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는다면, 자신을 절대선으로 여기는 위험한 존재가 될 수도 있다. 나는 내 자녀가 그런 폭력적인 사람으로 자라기를 결코 바라지 않는다. 이 모든 이유 때문에 나는 다시 공공신학을 이야기한다. 공공신학은 기독교인의 정치 참여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특정 정당이나 정치세력을 노골적으로 지지하지 않으며, 정치가 신앙의 모든 답이라는 환상도 갖고 있지 않다.오히려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간접적으로 선한 영향력을 끼치기를 바란다. 그래서 공공신학은 공적 광장에서 종교적 언어를 남발하지 않고, 이웃과 소통 가능한 언어로 말하고 행동한다.오늘 한국교회는 공공신학이 던지는 이 질문에 귀 기울여야 한다. “당신의 믿음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그리고 “그 믿음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얼굴로 다가가고 있습니까?” 만약 그 믿음이 상대를 악마로 만들고, 혐오하고, 공격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게 만든다면, 그건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 있다.이제는 믿음을 말하기 전에, 믿음이 낳는 태도를 먼저 돌아봐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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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황순원의 10가지 감사노트 - 발을 씻기며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낮아짐에 감사 크리스천헤럴드2025.04.13
    1 오늘도 새날을 주시고 내일을 준비하며 설교하실 목사님들을 위해 중보기도하는 시간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2 사모님들로부터 기쁜 소식과 함께 기도의 응답의 내용들을 들으니 기쁨이 더욱 배가 됩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다시 입증하는 시간을 주셔서 감사하면서 기도응답보다 더 소중한 예수님의 이름이 주는 권세와 능력을 찬양하며 감사를 드립니다.3 한국 사모데이 마지막 준비팀들의 모임에서 최선을 다하여 준비하는 모습을 보면서 조장님들의 충성스러운 섬김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날뿐아니라 이미 이 땅에서 섬김의 행복을 누리는 사모님들의 얼굴이 환하게 빛이 나는 것을 보면서 이번에 주실 은혜가 소낙비같이 내려질 것을 기대하며 감사를 드립니다.4 주님은 십자가가 지시기 전에 사람을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시어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겨 주셨습니다. 상대의 발을 씻기기 위해서는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낮은 자리로 내려가야 합니다. 세족식에서는 자연스럽게 무릎을 꾾을수 있는데 가정에서 남편들에게는 낮은 자리로 내려가기가 그리도 어려운 일인지 가정 사역자로서 순간순간 고민하면서 주님께 질문을 던지면서도 감사를 드립니다.5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이 "내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는 고백은 의지와 감정까지도 포기하는 고백이 들어 있습니다. 수없이 같은 고백을 하곤 하면서도 막상 나의 감정을 향해 도전해 오는 어떤 사연들 앞에서는 가차없이 기승을 부리곤 하니 언제나 주님의 고백을 나의 고백으로 토해낼 수 있을까 고민하며 오늘 저녁에 동부에이레네 방 기도회를 준비하며 감사를 드립니다.6 예수님의 성육신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사건중에 가장 위대한 사건입니다. 한국에 직접 가는 대신 영상으로 사모님들을 섬길때마다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피부로 느낍니다. 시간대가 다르고 기온도 다르고 문화조차도 다른 것을 피부로 느끼면서도 이런 방법으로도 사역을 할 수 있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창조의 힘에 다시금 감탄섞인 감사를 드립니다.7 눅 21:27 "그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늘 것을 보리라" 이 말씀은 여느때와 달리 전세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한번에 볼 수 있을 것을 상상할때마다 신비함을 느끼며 그날이 속히 오기를 학수고대하면서 감사를 드립니다.8 해마다 사모데이를 준비할때면 변함없이 내게 찾아오사 간절히 요구하시는 주님의 간청을 듣게 됩니다. 이번에는 특별히 농촌교회를 섬기시는 사모님들이 문화의 혜택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고달프게 사역하는 사모님들을 향한 주님의 뜨거운 눈물을 흘리게 하십니다. 갈수록 목회가 쉽지 않아 신학교 입학생이 줄어들고 있는 이 때에 농촌에는 그 누구도 가려하지 않습니다. 이런 안타까운 소식을 접할때마다 어떻게 그들을 섬기고 위로해야 하는지 묻고 또 물으며 준비하게 하심 감사합니다.9 소외되고 힘겨워하는 사모님들을 주님 섬기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낮은 자리에서 그들의 아픔을 같이 아파하는 이번 사모데이가 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을 가질때마다 하나님의 미소를 볼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10 설교준비를 할때마다 항상 자신에게 질문하는 것이 있습니다. 설교는 너의 말이 아니고 너의 삶자체이다. 이 말만 떠오르면 준비를 하다가도 멈추게 됩니다. 과연 전하는 말씀대로 살아가고 있을까 점검하면서 떨리는 마음으로 다시 책상앞에 앉을 수 있게 하심에 다시금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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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최재홍 목사의 하루한장 말씀 - 사순절 나의 말과 행동이 예수님을 나타냅니다 크리스천헤럴드2025.04.13
    최근 사순절 말씀묵상은 민수기서입니다. 성경을 읽다가 ‘중앙’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Center, the midst이라고 하는 단어 말입니다. ‘중앙’이라는 의미는 사방의 중심이 되는 한 가운데, 양쪽 끝에서 같은 거리에 있는 지점 혹은 중심이되는 중요한 곳을 의미합니다. 최근에는 ‘중앙/가운데’의 의미가 퇴색되었다는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예배와 행사에서 기록사진을 많이 찍게 되었는데, 서로 맨 앞줄 가운데 자리를 앉으려는 분들을 보게 됩니다. 심지어 담당순서가 없는데도 꼭 가운데를 고집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행사 전, 출입 동선을 설명해도 들은 척도 안하고 강대상 중앙으로 펄쩍뛰어 올라가는 무례하고 몰상식한, 해괴망측한 실력을 과시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하고 존귀하게 여기고 마음으로 새기려는 행사의 분위기와 의미를 퇴색케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행사에 늦게와서 자기 순서를 주장하는 분도 있습니다. 사명자 의식도 결여된 자기중심적 작은 행동들로 오히려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중앙/가운데 라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성경에서도 중앙/가운데라는 의미가 창세기 2장에 기록된 에덴 동산(히브리어: גַּן עֵדֶן)의 ‘중앙’에 심겨진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라고 기록이 등장합니다. 에덴이라는 단어는‘헤덴(Heden)’에서 유래한 히브리어로 ‘환희의 동산’, ‘태고의 정원’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관계를 설정하고 함께하심을 보여주는 공간적 개념이 에덴동산이고 그 중심부에 하나님과우리 영혼을 이어주는 생명나무와 선악과의 위치가 설명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은 광야시대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열두 지파가 세 지파씩 네 그룹을 나누어서, 성막을 중앙에 두고 사방에 자리잡게 합니다. 그리고 행진을 할 때에도 성막을 중앙에 두고 선두에 앞서가는 하나님의 법궤와 구름기둥을, 사방의 네 그룹이 나란히 따라갑니다. 언제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중심에는 성막이 위치하고 있습니다.다시 확인해도 성경에서는 중앙, 중심, 가운데라는 의미가 중요한 것을 알게 됩니다. 왜? 성막은 이스라엘 진영의 중심에 배치가 되었을까요? 성전의 기본개념은 그곳이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소라는 뜻입니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이 곧 하나님의 성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으시는 장소는 다양했습니다. 족장시대에는 상수리 나무, 돌베개를 베고 잔 장소와 같은 곳에서, 하나님을 만난 장소에 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모세는 나이 80세에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한 체험을 하였고 시내산 자체가 하나님이 임재하신 거대한 성소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직접 출애굽기 25:8에서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지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성막이 하나님께서 백성 중에 거하시는 장소임을 말해줍니다. 또한 성막이 단순히 하나님이 거하시는 공간일 뿐더러, 친히 백성을 만나시고 그들과 소통하시며, 백성들이 신령과 진리로 준비한 예배를 받으시고 복과 은혜를 베푸시는 거룩한 공간임을 뜻합니다.그런 이유로 성막(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제사와 율법을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의 삶이 성막(성전)과 연결되어 있었기에 일상의 측면에서도 성막은 삶의 심장부요 원동력과 같은 장소입니다. 중심입니다우리 크리스쳔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전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이 세운 몸 된 교회는 사람 성전입니다. 성도의 모임인 교회가 참된 성전으로 우리 삶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거기서 하나님이 예배를 받으시고, 우리와 소통하시며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에게 축복하시며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의 중심에는 무엇이 자리잡고 있습니까? 우리 마음에도 중심이 있습니다. 지금 내 마음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입니까? 내 영성의 현주소입니다. 눈에 보이는 중심이 교회, 성전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좌정하셔야 합니다. 나의 말과 행동이 곧 예수님이고 성전이 됨을 기억하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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