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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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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김병학 목사의 소통하는 교회 - 소통은 빛이다 크리스천헤럴드2025.07.07
    지난 6월 8일, 영국 플리머스 대학 연구진은 주목할 만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전 세계 해양의 약 21%가 지난 20년간 점점 어두워졌다는 것이다. 이른바 ‘오션 다크닝(Ocean Darkening)’이라 불리는 이 현상은 바다 표층의 변화로 인해 태양빛이 더 이상 바다 깊숙이 침투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이 영향은 해양 생물의 90%가 살아가는 ‘광달층’에 직격탄이 된다. 광합성이 가능한 이 층에서 플랑크톤이 자라지 못하면, 먹이 사슬이 붕괴되고 생물 다양성이 위협받는다. 생태계 전체가 흔들리는 것이다.이 뉴스를 읽으며 문득 오늘날 교회 생태계가 떠올랐다. 교회의 생태계의 변화가 한국과 미국의 대통령 선거의 과정에서 더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교회도 ‘처치 다크닝(Church Darkening)’이라는 비슷한 과정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닐까. 외형은 여전하지만, 신앙의 생명력이 스며들던 깊은 층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다. 말씀은 선포되지만 마음으로 흡수되지 않고, 공동체는 모이지만 서로를 잘 알지 못하며, 소통은 있지만 진심이 부족하다. 교회 내부에 빛이 닿지 않는 그늘이 생기고 있는 것이다.우리가 사는 사회는 지금 커다란 변곡점에 있다. 정치적 양극화는 한국과 미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사회적 신뢰를 약화시키고 있으며, 소셜미디어를 통해 강화되는 진영 논리는 공동체 구성원 간의 대화를 갈라놓는다. 이러한 흐름은 단지 바깥 세상 이야기로 그치지 않는다. 교회 안에도 이미 그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같은 설교를 듣고도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며, 동일한 사안을 두고 극단적으로 갈라지는 모습이 곳곳에서 나타난다. 목회자와 교인 사이, 교인과 교인 사이, 세대와 세대 사이의 균열은 점점 더 깊어지고 있다.이 모든 문제의 중심에는 ‘소통의 부재’가 있다. 교회는 서로 이야기하지 않게 되었고, 무엇보다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빛이 사라진 바다에 생명이 머물 수 없듯, 소통이 없는 교회에도 건강한 공동체는 존재할 수 없다. 생명의 빛이 닿지 않는 교회, 그것은 이름만 남은 조직일 뿐이다.오션 다크닝을 극복하려면 바다의 순환 구조, 조류, 온도를 바르게 조정해야 한다. 교회 생태계도 마찬가지다. 관계의 흐름을 복원하고, 서로의 온도를 느끼며, 방향을 바로 잡을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 그 중심에는 소통이 있다. 소통은 단순히 말을 주고받는 기술이 아니다.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나의 언어를 나누는 깊은 행위다.소통의 회복을 위해 교회가 우선해야 할 첫 번째 변화는 ‘듣는 리더십’이다. 이제는 설교만으로 통하지 않는 시대다. 목회자는 공동체 안의 다양한 목소리를 듣고, 다양한 삶의 자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교인은 신앙의 대상이자 사역의 동반자다. 그들의 이야기가 교회 정책과 방향 속에 반영되어야 진정한 ‘몸의 공동체’가 된다.둘째, 세대 간 대화가 절실하다.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단순히 재미없어서가 아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자신의 언어로 신앙을 표현할 기회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른 세대는 ‘우리가 하던 대로’만 고수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방식, 그들의 질문에 열린 마음으로 다가가야 한다. 어른들은 가르치려 하기보다 들으려는 태도를, 청년들은 비판보다 제안과 참여를 통해 다리를 놓을 수 있어야 한다.셋째, 디지털 시대에 걸맞은 소통 전략이 필요하다. 코로나19 이후 온라인 예배와 비대면 교제가 일반화되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관계를 피상적으로 만들었다는 반성도 있다. 그러나 디지털 소통은 피할 수 없는 흐름이다. 중요한 것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다.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그 안에 ‘진심’이 담겨야 한다. 교회는 온·오프라인을 연결하는 ‘디지털 융합 공동체’를 지향해야 한다.플랑크톤은 바다에서 산소를 만들고 먹이 사슬의 기초를 형성한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의 소통은 신앙의 산소이자 공동체의 기반이다. 듣고, 말하고, 함께 걷는 단순한 행위 안에 교회의 본질이 담겨 있다. 교회가 세상의 빛이라는 성경의 말씀이 의미 있으려면, 먼저 교회 안에서 그 빛이 살아야 한다.“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이 한마디가, 지금 이 시대 교회를 밝힐 수 있는 가장 실제적이고 강력한 빛이 될 것이다. 세대와 진영 논리에 치우친 침묵을 깨는 용기, 그것이 곧 회복의 시작이며, 소통은 그 가장 중요한 열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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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The letter 10 김광근 - 영원한 것을 바라보는 시선 크리스천헤럴드2025.07.0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잡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고린도후서 4장 17-18절 하루하루를 살아가다 보면, 몸은 지치고 계획은 어그러지며 때로 사람들의 기대와 현실 사이에서 마음이 소모되곤 합니다. 사도 바울도 같은 현실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걸사람'이 쇠하여 가는 대신 '속사람'이 날마다 새로워진다고 고백합니다. 시선을 현실적인 어려왔이 아닌,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에 고정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현실을 부정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현실 위에 놓인 더 큰 진리를 바라보는 능력입니다 고난은 결코 가볍지 않지만, 하나님은 그 무게를 헛되게 두지 않으십니다. 순간적인 환난은 결국 영원한 영광을 빚어 내는 재료가 됩니다. 우리는 눈앞의 손익 계산으 로는 해석할 수 없는, 하나님의 깊은 섭리 속에 초대된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각자의 자리에서 어려움이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때마다 마음의 렌즈를 바꾸어 보십시오 우리 삶의 현실속에 놓인 환경 너머를 바라볼 때 약해져 가는 것 같은 우리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은 조용히 영원한 영광을 심고 계십니다. 잠시의 환난이 빚어 낼 영원한 영광을 소망하며 . 오늘을 흔들리지 않는 담대함으로 걸어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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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99
    [오피니언] 최재홍 목사의 하루한장 말씀 - 핑계가 많은 사명자 크리스천헤럴드2025.07.07
    좋은 뜻으로 함께 모여서 한마음으로 열정적으로 일을 하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어긋나고 마음이 불편해지는 경우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런 경우에는 마음속 표현을 상대방에게 전달하기도 조심스럽습니다. 몇 번은 “사정이 있었겠지, 내가 이해해야지”, “그럴 사람이 아니지, 내가 더하면 되지” 하면서 상대방이 힘을 내고 초심으로 회복할 것을 기대해봅니다. 그런데 상대방은 여전히 내 마음과 다르게 행동합니다. 눈치없이 이번에는 핑계를 댑니다. 말도 함부로 하고 자신이 옳다고 합니다. 누구에게나 약속은 자신의 명예와 삶이 걸린 소중한 가치와 시간입니다. 핑계와 변명의 특징은 금방 들통이 난다는 것입니다. 핑계와 변명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열정을 약화시켜서 하나되기가 어렵습니다. 핑계하고 변명은 습관이 됩니다. 자기만 모르고 남들이 다 아는 습관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전을 찾아보니 핑계란 “내키지 아니하는 사태를 피하거나 사실을 감추려고 방패막이가 되는 다른 일을 내세움” 혹은 “잘못한 일에 대하여 이리저리 돌려 말하는 구차한 변명” (네이버사전) 이라고 정의합니다. 변명은 “어떤 잘못이나 실수에 대하여 구실을 대며 그 까닭을 말함”으로 정의합니다. 우리 인간의 핑계와 변명은 창세기의 하나님께서 천지창조하신 이후에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것이 우리 죄의 시작이 될 줄은 아담과 하와도 몰랐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살펴볼 때에 핑계와 변명은 거짓과 불의함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 결과들이 대부분 찝찝하고 우울하게 만들기도하고 마음을 불편해집니다. 선을 넘으니 결국 죄가 되었고 하나님과는 영원히 단절되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막중한 사명을 감당하면서도 핑계와 변명을 댑니다. 이래서 안되고 저래서 못하고, 이 사람은 맘에 안들고 저 사람은 나쁘고, 그렇게 말하다가 자기의 연약함과 약점도 변명거리가 됩니다. 모세가 그랬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연약함을 핑계로 대며 하나님께서 명령을 철회하시길 기대합니다. 언변에 능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말주변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어려서부터 애굽의 학문을 익혔고, 말과 행사에 능한 사람이라고 성경이 말씀합니다(행7:22). 결국 언변이 부족하다는 핑계는 애굽으로 가지 않으려는 핑계고 꼼수입니다. 하나님 뜻에 순종하지 않으려는 불순종과 거부입니다. 창조주 앞에서 자신은 ‘본래’ 말을 잘하지 못한다고 말하지만 아닙니다.출애굽기 4:10~17은 하나님과 모세의 대화입니다. ‘입’, ‘혀’, ‘말’이라는 단어가 무려 14번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설득하시는 장면입니다. 뭔가 주객이 전도된 느낌입니다. 사명은 사명을 받은 자의 조건에 의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명은 보내신 이의 능력에 의해서 이뤄집니다. 당연히 사명자는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야 옳습니다. 결국 모세의 핑계를 들으신 하나님은 ‘입’을 지으신 창조주이심을 천명하시고, 모세의 입과 함께 계셔서 모세가 할 말을 가르치겠다고 약속하십니다.오늘날 우리들의 이유를 들어보면, 노래를 못해서 성가대를 못하고, 가르치는 은사가 없어서 교사를 못합니다. 바빠서 교회에 못가고, 피곤해서 예배를 드릴 수 없다고 핑계를 댑니다. 정말로 몸이 약하고 병 중에 있어서 혹은 직업상 예배와 봉사 시간이 겹쳐서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핑계인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행사의 책임자이고 초청인임에도 불구하고 약속된 모임에 불참을 하고 핑계를 둘러대기도 합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어린아이들도 하지 않는 일을 부끄럼없이 저지릅니다. 핑계와 변명을 둘러대는 모습을 공동체에서 내 가족과 어린 자녀들이 보고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그럼에도 하나님께 쓰임받는 것은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고집과 연약함, 불순종하는 죄를 하나님이 끝까지 인내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모세의 불평과 핑계때문에 그를 포기하셨다면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무명의 양치기로 인생을 마쳤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대장정의 구원을 인도하는 역사의 주인공과 사명자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고집도 세고 성질도 못난 우리를 참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사명마다 핑계거리를 대고 변명구실을 찾는 우리를 설득하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새 길을 만드시며 일꾼으로 빚어가십니다. 이민생활 속에서 감당해야 할 사역이 어렵게 느껴지더라도 사명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충성스런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부터 이제라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더욱 정직한 말을 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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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98
    [오피니언] The letter 09 김광근 -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 크리스천헤럴드2025.06.14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로마서 12 장 1절 교회 생활은 종종 '내가 좋아하는 방식'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 사이에서의 선택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편안하고 즐거운 것을 추구하지만 믿음의 삶은 때로 그 본능을 거스르는 희생과 인내를 요구합니다. 로마서 12장 1절은 우리에게 예배의 본질을 상기시킵니다. 예배는 단지 찬양하고 말씀을 듣는 시간이 아니라, 자신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산 제물'이란 말은 살아 있으면서도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진 상태를 의미합니다.내가 원하는 것, 하고 싶은 것들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향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런 산 제물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우리는 나의 권리보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워야 하며, 하고 싶은 것보다 해야 할 일을 택해야 합니다.이러한 결단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희생과 순종을 통해 교회를 세우시고, 그 안에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삶을 원한다면 그 출발점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기꺼이 선택하는 데 있습니다. 교회는 그 순종을 통해 세상 속에 하나님의 영광을 비추는 등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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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김은주 교수의 탈진을 긍정하라 19 <탈진 관점으로 본 선교사 이야기 6 - 조세핀 캠벨> 크리스천헤럴드2025.06.14
    선교사는 전인적 건강 검진이 필요하다. 하워드 크라인벨(Howard Clinebell)은 신체적, 심리적, 정신적 종합증후군을 탈진이라고 하며, 전인적 건강을 추구하였다. 선교사는 자칫 영성관리만 하면 다 해결될 것처럼 자부하지만 그렇지 않다. 선교사도 한 인간으로서 통합적인 돌봄이 필요하다.조세핀 필 캠벨(Josephine P. Cambell)은 개척교회 목사 조세핀 캠벨(Joseph Campbell)과 결혼하여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둘째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이를 잃었고, 남편도 건강이 악화되어 사별을 하였다. 2년후 딸마저 성홍열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수년 내 가족 모두를 잃었으나, 신앙으로 승화시켰다. 그녀는 “일생을 다른 사람을 위하여 공헌하기로 결심”하고 간호사 교육을 받았다. 그후 청나라에 첫 파견되어 10여 년 간을 선교 활동을 하였고, 1897년 10월 미국 남감리회 해외여선교부에서 조선으로 파송 하는 최초의 여자 선교사가 되었다. 캠벨은 선교사업 뿐만 아니라 간호와 치료 및 진료를 병행했다. 윤치호의 도움을 받아 고가나무골에서 선교와 간호 활동을 시작하였다. 어느 날, 더럽고 무지한 소녀를 보며 여성학교의 필요성을 감지하고, 1898면 6명의 학생으로 자골학당(캐롤라이나 학당)을 기숙학교 형태로 운영하였다. 가난한 집 여자 아이들을 한문과 한글을 가르쳤다. 그후 수가 늘어나 성경, 산술, 독본, 생리학, 지리, 역사, 물리, 영어, 한국고전 등을 포함했고, 1903년 “여성을 아름답게 기르고, 꽃 피워 내는 배움의 터전”이라는 ‘배화학당’이 되었다. 1901년 배화학당 내에 예배당을 건축하여 ‘루이스 워커 기념 예베당’이라 했고, 전도부인 양성도 주력하여 신자 수가 급증했다. 예배당의 규모가 확장되면서, 훗날 종교교회와 자교교회의 모체가 되었다. 그녀는 간호, 교육, 예배 및 전도, 성경번역, 사회봉사 활동 등을 사역하다가 1919년 과로와 병세로 조선에서 별세했다.필자는 캠벨의 탈진을 발견하고자 한다. 첫째, 신체적 탈진이다. 그녀는 선교사, 간호사, 전도자로서 선교와 교육과 예배당을 헌당하며, 과도한 사역을 했다. 미국으로 안식년을 떠났을 때도 조선 선교를 위해 강연을 다니고, 후원자를 모집하며, 사역자를 모집하기를 강행했다. 특히 조선 여성들이 가난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며, 양계업과 양봉을 가르치는 것을 준비했다. 1918년 발목부상과 디프테리아로 심장이 약해졌다. 건강이 다 회복되지 않아 지인들이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조선을 위해 헌신하였으니, 죽어도 조선에 가서 죽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하며, 1920년 8월에 다시 조선으로 왔다. 둘째, 심리적 탈진이다. 윤치호와 리드 가족이 떠나면서 남송현의 선교사업이 침체 되었다. 교회 주일예배가 중단 위기에 처했고, 매일학교와 주일학교가 폐지되었다. 선교 사역의 위기로서 심적 부담이 심했을 것이다. 셋째, 영적 탈진이다. 갑자기 가족 모두를 잃고, 불행의 연속 가운데 미래가 보이지 않는 절망과 고통을 경험했다. 넷째, 문화적 탈진이다. 일제 강점기 조선은 무지하여 외국인을 편견과 무시와 모욕을 주었다. 의사소통의 어려움 뿐만 아니라 전통 문화와 충돌 및 불신이 따랐다.캠벨의 탈진회복 방법을 모색한다. 첫째, 신앙의 힘이다. 갑자기 가족을 모두 잃고, 절망과 고통 중에 믿음으로 승화시켰다. 그녀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와 큰 포부로 간호교육을 받고, 선교활동에 나섰다. 둘째, 영육 간의 휴식이다. 그녀는 선교활동을 하면서 3번의 휴가를 가졌다. 말년에는 안식을 온전히 취하지 못한 탓에 과로로 신병을 얻어 건강이 악화되었으나, 자신 보다 타인을 더 사랑하므로 선택한 자의적 헌신이었다. 우리는 자신의 신체적 역량에 맞는 사역을 감당하는 것도 필요하다. 셋째, 조선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그녀는 밤을 세워가며 한글을 익혔고, 1개월 만에 통역 없이 조선인들과 유창한 한글을 구사했다. 하나님의 마음을 담았기에 불결하고 무지한 여자 아이들과 여성들에게 사랑과 복음을 전했고, 무지에서 깨어나도록 교육과 여성의 지위향상에 기여했다. 선교활동의 비용부담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녀의 헌신은 조선인들에게 감동과 신뢰를 안겨주었다. 선교사역을 오랫동안 유지하려면, 먼저 스스로 자신의 신호를 인식하고 점검하며 문제의식, 원인 및 해결방안을 찾아 탈진을 통해 회복과 성장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또한 전인적 건강을 추구하여 신체적·심리적·영적 통합관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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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황순원의 10가지 감사노트 - 6월에 드리는 감사노트 크리스천헤럴드2025.06.14
    1 오늘의 암송구절은 출39:43 모세가 그 마친 모든 것을 본즉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되었으므로 모세가 그들에게 축복하였더라 입니다. 그동안 해온 모든 사역이 과연 하나님이 명령하신대로 되었는지 다시금 점검하는 시간주셔서 감사합니다.2 에스더가 나라를 위해 죽으면 죽으리라로 작정하고 금식을 선포 할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의지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왕에게 나아가기를 두려워하고 있을때 오빠인 모르드개의 권유로 작정하고 담대하게 왕의 앞에 나아갈수 있었으니 영적 멘토를 두는 자들의 받는 복이 얼마나 큰지 다시한번 살펴볼수 있어서 감사합니다.3 험악한 한 평생을 걸어오는 동안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때마다 나타나시는 맨토님들을 한분씩 머리에 떠올려 보니 이렇게 귀한 축복을 받게 해 주신 하나님게 새삼 뜨거운 감사를 드립니다.4 이런 큰 은혜를 갚을 길은 오로지 맨터링이 필요한 사모님들에게 정성을 다하여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다 주고 또 주는 일외에는 없음을 알고 나의 힘이 다하는 그날까지 이일을 하리라 결심하게 하심 감사합니다.5 욥의 친구들은 위로하러 왔지만 위로는 커녕 오히려 정죄만 하고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그때 욥은 친구들에게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애걸을 할 정도로 힘들고 어려웠습니다.우리도 때로는 상대방을 위로한답시고 내방식대로 내의견과 방법을 제시할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막상 어려움에 처한 자들은 의외로 다른 것을 필요로 할때가 있으니 욥기서가 주는 교훈을 받으며 다시금 위로의 방법을 생각하며 감사를 드립니다.6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하는 이유중 하나는 이미 응답해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믿지 못한채 계속해서 달라고만 할때가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구한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하신 말씀대로 아직 내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이루어진것으로 간주하고 누릴수 있는 믿음을 더 크게 가져야 할 필요를 느끼면서 감사를 드립니다.7 주의 재림이 임박한 요즘 땅에 것에 집중하던 눈을 올려서 위엣 것을 찾으라고 강조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오늘도 내 가슴을 칩니다. 구체적으로 묵상하며 없어질 땅에것에 시간을 빼앗기고 싶지 않아 위엣것에 대한 묵상으로 시간을 보낼수 있어서 감사합니다.8 큰일을 하는것보다 하루에 해야할 일과중 사소한것에 충실히 하며 하루에 한눈금씩만 크는것이 가장 효과있는 성장입니다. 겉사람은 후퇴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와 지는것이 나이 먹어가는 보람이요 완벽하기보다는 약점과 실수를 감싸주는 아량이 커지는 것이 오히려 실력이 되니 이것이 가장 큰 감사덩어리라 생각합니다9 개인주의가 극도로 강조되는 세상에서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작은 일 하나에도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하고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시대속에서 세례요한의 외침이 생각납니다. 그는 광야의 소리라고 스스로 소개합니다. 소리는 흔적이 없습니다. 바람처럼 지나가 버립니다. 그의 생애는 억울하게도 여인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지만 여인이 낳은 자중에 가장 큰자라고 소개합니다. 이 세례요한을 생각할때마다 많은 도전을 받게 되어 감사합니다.10 오늘은 평소보다 더 구체적인 축복기도를 할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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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정재영 칼럼 - 사회 통합을 위한 교회의 역할 크리스천헤럴드2025.06.14
    현대 한국 역사는 갈등의 역사라고 할 정도로 우리는 그야말로 갈등 속에서 보내 왔다.몇 년 전에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정치·경제·사회 분야 갈등 지수를 종합 분석한 결과, 한국의 갈등지수는 55.1점으로 3번째로 높아 갈등이 매우 심각한 국가로 나타난 바 있다. 한국의 갈등 관리 지수는 30개국 중 27번째(46점)로 매우 낮아, 갈등 관리가 잘 이뤄지지 않는 것으로 조사됐다. 곧 한국의 갈등 지수는 높은 반면, 그에 따른 관리 역량은 낮았는데, 이는 국가의 성숙과 사회의 건강성을 추구하는 데 장애 요인이 될 수 있다.우리 사회의 갈등 상황에 대해서는 개신교 신자들도 심각하게 느끼고 있다. 작년에 기독인문학연구원과 이음사회문화연구원이 조사해서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개신교 신자들의 89%가 우리 사회의 갈등이 심각하다고 응답했다. 그리고 10년 전 대비 우리 사회의 갈등 정도와 향후 사회 갈등 변화 예상에 관한 설문에는 70%가 ‘현재가 10년 전보다 심하다’고 응답했다. 특히 40대의 경우 사회 갈등이 ‘커질 것’이라 예상한 비율이 4명 중 3명(76%)에 달했다. 사회 집단별 갈등 문제에 대해서는 진보와 보수 간의 이념 갈등을 92%로 가장 심각하게 봤다. 조사 시점이 탄핵 정국 이전이었음에도 이런 결과가 나타난 것인데 만일 올해 초에 조사가 이뤄졌다면 이념 갈등에 대한 응답률은 더 올라갔을 것이다. 이렇듯 최근 우리 사회를 가장 혼란스럽게 만든 것은 무엇보다도 이념 갈등이다.2016년 국정농단 사태 때는 촛불 집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대통령 탄핵을 외쳤는데, 이후에는 탄핵으로 집권한 정부에 대한 성토가 이어졌다.최근에는 두 번째 탄핵 사태와 대통령 선거 동안 이러한 갈등이 극단으로 치닫는 경험을 했다. 특히 일부에서는 자신과 입장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종북좌파’라는 딱지를 붙여서 매도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어서 사회를 더욱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한동안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갈등 문제로 여겨졌던 지역 갈등은 크게 두드러지지 않고 이러한 이념 갈등이 더 부각되고 있는 게 요즘의 현실이다.갈등이 첨예화하는 현대 사회현대 사회에는 갈등이 내재화돼 있다. 사실 갈등이 없는 사회는 없다. 우리는 사회라고 하는 것을 막연하게 조화와 합의를 이뤄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며 균형, 발전을 이뤄나가는 것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다.그러나 인간 사회라는 것이 그렇게 기계의 부속품들처럼 질서정연하게 짜 맞춰져서 안정된 상태로만 운영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근본으로부터 자기 중심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 존재들이 어울려 사는 사회 공간에서 갈등은 항시 존재하기 마련이다. 특히 오늘날과 같은 탈현대 사회에서 갈등은 더 첨예화된다. 탈현대 사회는 개인을 존중한다는 긍정의 측면도 있지만, 개인들 사이에 합의에 도달할 절대 기준이 사라졌기 때문에 사회 갈등이 보다 첨예화할 가능성도 증가한다. 합법적이고 합리적인 기준에 따라서 갈등이 조정되지 못하게 되면, 사람들은 폭력과 같은 파괴적인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자신의 이익을 관철시키려는 경향까지도 나타내게 된다. 이것이 지난 탄핵 정국에서 우리가 직접 경험한 바이기도 하다. 이렇게 도처에 존재하는 갈등을 존재하지 않는 양 덮어둔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렇게 갈등이 극복될 수 있다면 사회는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다.사회 통합을 위한 교회의 역할이렇게 갈등을 조정하고 해소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피력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돼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인간 대 인간을 평등하지 못하게 하는 여러 가지 조건이 존재하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시하는 나이, 성별, 학식, 재산 등 다양한 조건들이 사람을 사람 자체로 대하지 않고 조건에 따라 대하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외형의 조건이 아니라 사람을 그 자체로 존중할 수 있는 사회 인식이 필요하다. 나와 다른 것이 틀린 것이 아니며 나와 마찬가지로 남도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이렇게 다양한 주체들이 참여해 대화와 토론을 통해 합의에 이르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전통 사회에서는 권력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의 의지에 따라 사회가 작동됐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모두 시민들이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참여하기 때문에 각각의 의견들을 어떻게 조정하고 맞춰가느냐가 사회를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데 매우 중요한 일이다. 특히 시민사회는 인간의 본래적인 사회성이 실현되는 공적인 영역으로 이 사회의 구성원인 인간을 단순한 시장행위자나 국가의 지배를 받는 존재가 아니라, 공적인 의무와 권리를 행사하는 자율적인 시민으로 이해한다. 결국 어떻게 개인들 사이의 결속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가 중요한데 여기서 개인의 자율성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이 바탕이 된다. 그리고 여기서 종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종교는 이기심을 자제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며 사회 약자를 보호하는 이타성의 규범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종교라면 단순히 종파적 또는 정파적 이해관계에 매몰되기보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권리가 인정되면서도 서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도록 중심을 잡고 균형을 이루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제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됐다. 새 대통령은 무엇보다도 국민 통합과 사회 발전을 강조했다.현대 정치에서 어떤 후보도 절대 다수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기는 어렵기 때문에 어떤 대통령이 선출되더라도 국민들의 상당수는 그를 선택하지 않은 상황에서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떠한 국민도 이념과 정파에 사로잡혀 판단해서는 안 된다.특히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새 정부가 바른 정치 철학을 바탕으로 국민 모두의 유익을 위해 일할 수 있도록 한편으로는 지원하고 한편으로는 감시하며 비판적 지지자 역할을 해야 한다. 그것이 불완전한 인간을 통해서라도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가 펼쳐지도록 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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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최재홍 목사의 하루한장 말씀 - 하나님은 이루시고 우리는 ★꿈꾸며 기도하고 크리스천헤럴드2025.06.14
    우리 대한민국은 세계 선교강국이 되었고 여러나라에서 많은 선교사님들이 헌신하고 계습니다. 선교용어 중에 하나인 창의적 접근지역(Creative Access Nations)은 정치적 혹은 종교적인 이유로 입국이 불가능하거나 대민접촉과 복음이 들어가기 어려운 지역을 말합니다. 복음을 전파해서도 안되고 선교사들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없는 지역입니다. 개인활동과 언론이 제한되고 신변의 안전이 요구되기 때문에 다른 경로로 우회하여 복음을 전하기 위한 장기적인 전략과 계획이 필요한 곳을 말합니다.   그런 나라들 중에 한 곳에서 제가 존경하는 K 목사님 내외분께서 일생을 헌신하셨습니다. 월남하여 결혼 후 도미하여 목사로 부름받아 오랜시간 충성하던 담임목회를 조기은퇴하고, 60세에 선교에 뛰어들어 무려 20년을 한결같이 달려오셨습니다. 그 시간을 회고하며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보물들을 책으로 엮어 한국어와 영문판으로 출간하셨습니다. 제목이 ‘하나님은 이루시고 우리는 꿈꾸며 기도하고’(His Story, Our Dreams and Prayers. 국민북스)’입니다. 80세를 기념하여 팔순잔치와 더불어 기념으로 발간하신 책인데, 책을 읽으며 그 내용과 제 마음이 하나가 되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해외사역을 시작하려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야 할 때와 감추어야 할 때가 있는데, 그 부분이 창의적 접근지역에서는 가장 긴장되는 부분입니다. 모든 사역은 대인관계에서부터 출발하는데 외부사정을 모르는 그들은 캐묻고 대답을 하는 정말 난처한 만남과 사귐을 이어가야 하기 때문에, 이 부분은 저의 관심분야이기도 했습니다.그 어려운 부분을 목사님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는 사역을 위해 00에 들어가면 다음 세 가지 사항을 늘 기억하고 지키기를 기도하며 힘썼다. 첫째, 나는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쓰시는 하나님의 교회의 목사이다. 둘째, 00 선교회는 이익을 추구하는 이익집단이 아니고 순수한 선교단체이다 셋째, 나는 미국 여권을 가지고 00에 들어온 미국시민이다. 이 세 가지를 기억하면 그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사역의 종류가 결정된다. 그 사역을 진행하는 방법도 이미 결정되어 있다. (중략). 어차피  진행되는 사역들 모두가 하나님의 일이니 우리가 현장에 가보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선하신 손길로 처리해 주실 것을 믿는 믿음이 있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현장에 가보는 것보다 더 선하고 풍성한 열매를 허락해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확실하게 제 마음에 와닿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하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종종 되물어 봐야 합니다. 특히 나의 주인이 누구신지, 내가 무슨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지를 날마다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야 첫출발부터 목표지점까지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정확한 방향으로 달려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최종목적지에 다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먼저 파티를 할 수도 없고 축배를 미리 마실 수도 없습니다. 우리 인생이 그러하듯 하나님의 사역도 창의적 접근지역 내에서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에 그 결과를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아실 뿐입니다. 우리 생애 가운데 작은 불씨의 역할을 하고, 벽돌 한장의 역할로 충분한 존재감과 가치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저희들도 온타리오의 뜨거운 여름 날, 어린 제이콥과 쟌을 데리고 더 비싼 음료를 사먹이면서 동네를 돌며 캔과 병을 수집해서 팔았습니다. 한 달에 30불이면 한 생명이 굶지 않고 하루 한 끼를 먹으며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찬송가에서 부르듯이 “멸시와 천대, 아무도 찾지 않는 아골골짜기 같은 빈들에, 이름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하는 가사의 고백처럼, 느보산에 올라 가나안을 바라보는 모세의 심정이 되셨을 K 목사님 내외분의 심정을 잠시나마 헤아려 봅니다.      구주 예수를 의지하는 믿음의 기도로, 자기를 드러낼 수 없는 그곳에서, 고독하고 외로운 20년의 떨리는 심장과 고단하고 지친 발걸음이, 희미한 기억을 넘어서 분명한 기록으로, 어둠을 뚫고 자유로운 세상으로, 처음나오게 된 것만으로도 그 가치는 충분합니다. 일생을 오직 예수님만 바라본 K목사님의 음성을 듣기만해도,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저희에게는 감사함이요 은혜가 넘칩니다. 목사님, 일 없습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루시고 우리는 꿈꾸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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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김병학 목사의 소통하는 교회 - 소통은 회복의 통로이다 크리스천헤럴드2025.06.01
    2025년 조기 대선을 앞둔 한국 사회는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분열 속에서 깊은 위기를 지나고 있다. 대통령 탄핵과 정치 지도자들의 사법 리스크, 여야의 극단적 대립은 단순한 정쟁을 넘어 국민들의 일상에 피로와 냉소를 퍼뜨렸다. 민주주의의 근간인 신뢰와 대화는 점점 사라지고, 사회는 진영 논리에 갇혀 상대를 ‘대화의 대상’이 아닌 ‘무너뜨려야 할 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혐오와 배제의 언어가 익숙해지는 시대, 우리는 어느새 ‘함께 살아가는 법’을 잃어가고 있다.이 시점에서 교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나? 교회도 한쪽의 입장과 함께해야 하나? 무엇을 해야 사회에 신뢰를 줄 수 있을까? 오늘의 교회는 더 이상 예전처럼 자동적으로 ‘도덕적 권위’를 인정받는 존재가 아니다. 많은 이들이 묻는다. “교회는 지금 사회의 고통을 진심으로 듣고 있는가?”라고. 이 물음 앞에 교회는 정직하게 서야 할 때다. 교회는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의 안전함보다, 공동체의 아픔과 함께 울고, 회복을 위한 걸음을 동행하는 일이 더 중요해졌다.소통은 단순한 언어의 교환이 아니다. 진정한 소통은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의 고통에 공감하려는 마음에서 출발한다. 한국 교회가 이 ‘소통의 감각’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복음은 아무리 외쳐도 세상의 마음에 닿지 않을 것이다. 세상이 교회의 말을 듣지 않는 이유는, 교회가 먼저 세상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지금처럼 혼란과 분열의 세상과 교회는 어떻게 소통을 해야 하나?첫째, 교회는 정치적 중립성과 진리의 균형을 회복해야 한다. 복음은 결코 특정 정당이나 이념에 종속된 메시지가 아니다.하나님의 말씀은 시대의 죄악을 꾸짖고 정의를 요구하지만, 동시에 어느 한 진영의 손을 들어주는 언어가 아니다. 그러나 일부 교회는 정치적 편향을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며, 복음을 세속 권력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해 왔다. 이러한 언행은 신앙의 본질을 흐리고, 교회의 신뢰도를 떨어뜨린다. 이제 교회는 정치적 중립을 지키면서도 시대적 불의를 분별할 수 있는 성숙한 신앙의 언어를 회복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첫 단추다.둘째, 공동체 안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포용하는 문화를 세워야 한다. 교회는 청년과 노년, 남성과 여성, 이주민과 장애인, 비기독교인까지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작은 사회다. 그러나 현실의 많은 교회는 아직도 획일적인 언어와 문화, 동일한 목소리만을 요구하며, ‘다름’을 불편해한다. 세상의 갈등을 치유하려면, 교회 안부터 다양한 목소리를 품고, 다름을 통해 더욱 풍성해지는 공동체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포용은 진리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진리를 더 깊이 적용하고 확장하는 능력이다. 서로를 이해하려는 태도, 낯선 생각에 대한 열린 마음이야말로 오늘날 교회가 가장 먼저 실천해야 할 ‘소통의 덕목’이다.셋째, 사회적 약자를 향한 섬김과 연대는 교회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언어다.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이 많다. 청년 실업자, 독거노인, 비정규직 노동자, 외국인 노동자, 탈북민 등 우리 주변의 이웃들은 점점 더 외로워지고 있다. 교회가 이들의 아픔을 듣고, 구체적인 지원과 돌봄을 실천할 때, 그 행위 자체가 세상과의 소통이 된다. 말보다 삶으로 전하는 복음, 그것이 진짜 소통이며, 회복의 씨앗이 된다.몇 번을 강조하지만, 이제는 교회가 말하기에 앞서 먼저 들어야 할 때다. 세상이 고통 속에서 내는 신음에 귀 기울일 때, 우리는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다시 들을 수 있다. 교회가 소통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소통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 정죄보다 공감으로, 배타보다 환대로, 주장보다 경청으로 나아가는 교회. 그럴 때 비로소 세상도 교회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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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황순원의 10가지 감사노트 - 5월을 보내며 드리는 감사 크리스천헤럴드2025.06.01
    1 오늘은 눈을 뜨자마자 '주님 어제 하지 못한 것 오늘 하겠습니다' 라는 고백을 하기가 바쁘게 감사가 이어지기 시작합니다. 어느때는 하루를 지내고 저녁에 감사문을 올리면서 오늘 하루에 있었던 사건들이나 깨달은 것으로 감사를 드리는데 오늘은 시작하기도 전에 감사가 끊이지 않을 때 이건 무슨 감사인가 생각하니 아무 이유도 없고 상황도 아직 일어나지 않은 감사가 쏟아져 나와 의아한 채로 하루를 시작하게 됨을 감사합니다.2 이른 아침 정기검사를 위해 강제 금식을 하고 병원으로 달려 갔습니다. 지금은 금식기도를 할때인데 당뇨핑계로 그냥 넘어가려 할 때 강제 금식에 동참케 하십니다. 검사후 집에 돌아와서 카톡방을 열어보니 리더의 재량으로 금식기도당번들의 이름이 올라와 금식에 동참하는 사모님들을 보고 하나님이 이방에서 드리는 금식기도에 응답해 주실것을 확신하며 감사를 드립니다.3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말씀을 다른 언어로 표현한다면 자존심의 꽃이 떨어져야 자존감의 열매를 맺을수 있습니다. 이 문장을 젊은 사모와 나누면서 서로 기억할것을 약속하며 현실적인 상황을 해석하는 시간 갖게 하심 감사합니다.4 다음달에 전할 말씀을 준비하기 위해 묵상하는 가운데 다니엘앞에 놓인 사자굴이 어떤 일을 하였는가를 생각하다가 내앞에 있는 현대판 사자굴은 무엇인가 곰곰히 생각하며 그동안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영역이 새롭게 펼쳐져서 어떻게 요리하여 사모님들께 전할것인가를 고민하며 하루를 감사로 마무리 합니다.5 그렇게도 간절히 기도한 내용들이 보기좋게 거절당할때는 쉽게 낙심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하나님은 일하기를 쉬지 않고 계심이 거절당한 기도안에 숨겨져 있다가 때가 되어 수십년이 흘러간 오늘 드디어 수면위로 드러나는 것을 볼때의 감격을 누군가에게 나누고 싶어 함께 마음이 통하는 분들과 실컷 나눌수 있어서 감사합니다.6 유머가 통하는 대화의 관계는 그렇지 않은 자들과의 대화보다 훨씬 폭이 넓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와 길이와 깊이가 바로 우리의 대화를 통해 나타나고 있는 것을 현실로 직감하면서 하나님은 유머의 달인이시며 유머의 창조자이심을 재인식하고 나니 마귀는 유머를 할 수 없음을 알고 유머의 달인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감사합니다.7 욥의 친구들은 율법의 틀로 프레임을 만들어 욥을 그 안에 넣고 판단하면서도 위로한다고 착각하고 있었지만 욥은 그 틀을 넘어 하나님의 세계를 알고 싶어 몸부림 치며 친구들과 항의를 했습니다. 이런 욥에게 마침내 아버지는 우주만물을 보여 주시며 당신의 세계속으로 초청하여 함께 시선을 같이 하면서 당신의 세계를 보여 주시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욥기서에서 단순한 욥의 인내를 묘사한 것이 아님을 알고나니 욥기서를 보는 눈이 열리게 되어 감사합니다.8 고난의 신비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고 좋아합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세계를 가장 빠른 속도로 가게 하는 직선도로입니다. 그동안 알수 없는 영역의 고난을 겪고난 후 내린 정의로 고난을 받아드릴때마다 새로운 장이 열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수 있어서 그때마다 행복의 깊이는 더욱 깊어져 갑니다 그래서 오늘을 시작할때 나왔던 감사는 상황을 뛰어넘는 감사, 상황과 상관없이 터져 나오는 감사입니다. 이 감사는 마치 고장난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과 같음을 하루를 마치고 감사문을 기록하면서 내려진 결론이기에 감사합니다.9 완벽하지 않은 지도자를 붙들고 일하시는 하나님, 못난것밖에 없는 나를 불러서 꿈에도 그려보지 못한 사명을 주시고 마침내 이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만이 내게서 나타나시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마음으로 감사를 드립니다.10 사람은 누구든지 인기를 얻고 싶어하고 훌륭해 지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정하는 훌륭한 사람은 이세상에 오래 두지 않으시고 빨리 불러 가십니다. 왜냐하면 정상에 오르고 나면 내려가야 할 일만 남기때문에 훌륭해진 그의 인격이 더러워지지 않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세상에 두지 않으십니다. 아직 세상에 두신 하나님은 나를 당신의 자녀다운 자로 멋있게 성장하게 하시려 함인 것을 알고 나니 더욱 감사가 넘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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