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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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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샘신 칼럼 -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마음이라” 크리스천헤럴드2023.06.15
    주님께서 산상수훈의 말씀을 마쳤을 때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한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7:28-29)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서기관들의 가르침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마치 어떤 음식점에 가서 식사를 하는데 그곳 음식이 다른 음식점과 차이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맛이 있다”라고 표현하는 것 처럼 사람들은 그 차이를 금방 알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서기관의 가르침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1-22) “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5:27-28)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3-44) “너희가 들었으나…”라는 표현과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지금 예수님 앞에 있는 청중들은 서기관들로부터 구약 성경을 이미 오랫동안 들어온 사람들이다. 서기관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 너희가 들었으나…” 부분이다. 그런데 이제 주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바로 그 부분이다. 즉 본문은 같았지만 해석이 다른 것이다.  해석이 다르니 적용 또한 다르게 나타날 수 밖에 없다. 그러면 결정적인 차이가 무엇일까?서기관들이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행위를 다루었다면 예수님은 행위가 아닌 그 행위를 만들어내는 마음을 다루었던 것이다. 서기관들은 간음이라는 행위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 간음을 만들어내는 음욕을 다루었다.  간음이 행위요 열매요 결과라면 음욕을 뿌리요 원인이요 마음이었던 것이다. 만일 우리가 자녀를 바라봄에 있어 겉으로 나타나는 행위만을 보고 평가한다면(그것이 칭찬이든 책망이든 상관없이) 서기관과 같은 가르침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바리새인과 같은 속과  겉이 다른 사람을 만들어 낼 뿐이고 말이다. 행위라는 기준으로 보면 세리나 창기는 바리새인들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마음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 평가가 전혀 다르게 된다. 그 당시 모든 사람들은 행위라는 관점에서 사람들을 판단했다.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주님은 전혀 다른 기준으로 보셨다. 그러자 전혀 다른 평가가 나왔고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행위보다 마음을 보아야 할 이유를 설명하신다. 모든 행위는 마음에서 나온 열매라는 것이다. 주님은 그것을 나무에 비유해 말씀하신다. 소나무는 사과라는 열매를 맺을 수 없으며  그 누구도 소나무에게서 사과를 기대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의 삶에서는 이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다.마치 소나무가 사과를 맺을 수 있는 것처럼 스스로와 다른 사람들을 대하고 있다. 불가능한 일을 계속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인간관계 속에서 마음을 보고 다루면 상대방을 이해하게 되고 감사하게 되며 불쌍히 여기게 된다.상대방은 그렇게 보아주는 사람이 너무나 고마울 것이다. 마음을 보지 않고 행위만을 보면 비난하게 되고 통제하려고 하며 상대방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마음을 얻을 수 없다면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다. 반면에 마음을 얻었다면 그 사람의 전부를 얻은 것이다. 이제 이 말씀을 ‘마음’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결국 인생은 우리의 마음에 이 시대의 유행을 담을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담을 것인가의 싸움이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이 시대의 가치관과 유행으로 가득차 있으면 그런 열매를 맺을 것이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뜻, 즉 말씀이 가득차 있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열매를 맺을것이다. 결국 마음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의 싸움이다. 이 싸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이 싸움의 승패는 우리 스스로의 선택에 달려 있다.그것이 우리의 매 순간 순간 선택의 문제이기에 그 결과 역시 우리 책임이다.그래서 주님은 지금도 칭찬도 하시며 책망도 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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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송경화 교수 칼럼 - 상처를 이겨낼 수 있는 세 가지의 힘2: 안전 크리스천헤럴드2023.06.18
    우리 모두는 꼭 채워져야 하는 세 가지의 정서적 필요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아주 어릴 때부터 양육자(부모님)를 통해 충분히 채워져야 한다. 이 필요가 채워지지 않으면 성인이 되어서도 상처에 취약해지고 자신감이 없는 모습을 가지게 된다. 이 세 가지 필요의 두번째는 바로 안전감이다.우리는 어디에 있든지 나 자신을 위협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마음 편하게 쉴 수 있어야한다. 그런데 이 필요가 충분히 채워지지 않은 경우 뭔가 나쁜 일이 생길 것만 같아서 늘 불안하고조심하며 작은 일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곤 한다.안전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물리적, 생리적인 안전이다. 먹을 것과 거주할 장소, 입을 옷 등이 충분하게 공급되어야 우리는 신체적으로 안전하다. 또한 나를 공격하거나 상해를 입힐 어떤 것들도 주변에 없어야 안전하다. 추운 거리에 옷과 먹을 것이 없는 상태로 떠돌아 다닌다거나, 사나운 개가 나를 향해 달려든다면, 나는 신체적으로 안전감을 느낄 수 없다. 내가 연약한 상태에 있는데 누군가 나를 보호해 주는 사람이 옆에 없다면 이 역시 안전감을 느낄 수 없는 상황이다.반대로, 편안하고 잘 정리된 방의 푹신한 침대에서 누워서 음악을 들으며 평화를 누리고 있다면 신체적인 안전감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부모가 자녀를 양육할 때 이와 같은 신체/생리적 안전을 반드시 보장해 주는 것은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두번쨰의 안전은 정서적 안전이다. 이것은 나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존중받고 인정받고 공감받는다는 느낌을 말한다. 누가 나를 미워하거나 무관심하거나 욕하거나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도 정서적 안전감에 동반된다. 부모가 아이를 양육하는 과정에서 아이에게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하고, 아이를 공감하고 수용해 주며 존중을 표현해 준다면, 그리고 어떤 조건을 다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 아이 자체로 인해 사랑해 준다면, 그 아이는 자라면서 정서적 안전감을 충만하게 느낄 수 있다.하지만 많은 경우, 정서적 안전감이 결핍되어 성장하기도 한다. 너무 바쁘거나 이혼 혹은 별거 등의 부부 문제로 인한 부모의 부재, 조건적인 부모의 사랑과 인정, 무표정, 우울, 불안, 짜증, 분노 등이 가득한 부모의 표정, 부모의 학대나 방임 등은 정서적인 안전감을 위협한다. 정서적인 안전감이 결핍된 아이들은 특히 인간관계에서의 불안이 크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많이 살피고 혹시라도 남들의 미움을 받을까 봐 전전긍긍하게 된다. 또한 큰 문제가 없는 상황에서도 왠지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불안에 노심초사해 한다.안전감은 살면서 겪을 수밖에 없는 어떤 모진 풍파에도 견뎌낼 수 있는 내적인 힘을 만드는 기초가 된다. 안전감을 충분히 경험하며 자란 사람은 용기와 끈기로 흔들림 없이 전진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안전감은 생애 초기에 부모나 양육자로부터 충분히 공급되어야 한다.그러나 모든 부모가 완벽하게 안전감을 주지는 못한다. 부모들도 인간이기에 약점과 한계가 있고 자신의 정서적인 문제들로 씨름하면서 자녀들에게 충분한 안전감을 주기 어려울 때가 많다.사실 사람이란 안전감을 담보하기에는 너무도 신뢰하기 어려운 존재이다. 연약함과 죄성 때문이다. 진정한 안전 지대는 흔들림 없고 든든하여 믿을만한 존재여야 한다. 그런 부모를 가진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혜택에 감사하면 된다. 그런 부모를 갖지 못한 사람은 한탄과 원망을 할 게 아니라 더 든든한 안전 기지를 찾으면 된다.성경의 시편 기자는 이런 고백을 한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시 4:8)비록 부모가 연약해서 충분한 안전감을 형성해 주지 못했다 해도, 하나님께 의지하여 믿음을 드린다면 결핍되었던 안전감을 충분하게 채워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안전감은 어떤 시련이 와도 잘 극복해낼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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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조영석 목사 칼럼 - 추억 만들기 크리스천헤럴드2023.06.15
    졸업시즌이다. 어딜가든 졸업 이야기와 포스팅한 사진들로 가득하다. 특히 첫아이 졸업식을 맞는 부모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생각이 많아 보인다. 어린 자녀가 인생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처음 경험하며 심정이 복잡해 보인다. 나도 그랬기에 이맘때쯤이면 큰딸이 졸업했을 때가 떠오른다. 특히 큰딸을 위해 준비했던 졸업 여행이 기억이 난다.그해에 내게는 가장 기억에 남는 가족여행을 다녀왔다. 이유는 특별한 목적이 있었던 여행이어서였다. 이민생활이라 바쁘고, 빠듯하니 가족여행이라 해봐야 가까운 곳으로 며칠 다녀오는 게 전부였는데 당시 큰맘 먹고 멀리 동부로 일주일 동안 다녀왔다. 식구 다섯명의 항공비용과 오래 집을 비우는 것도 부담이었지만 큰 맘 먹고 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커가는 아이들과 얼마 있으면 시작될 이별을 준비하는 ‘추억 만들기’ 여행이어서 그랬다. 그 첫 시작은 큰딸을 위한 졸업여행이었다.큰딸이 고3이 되자 이제 대학에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품 안의 자식인줄 알았는데 어느새 커서 한집에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이별 아닌 이별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문득 아이가 가지고 있는 아빠의 기억은 어떤 것일까 생각해 보았다.자녀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가장 소중한 선물이라 말했지만 나의 행동은 일치하지 않았다. 돌아보니 잘해준 적보다 못해준 적이 더 많았고, 상처 준 일들도 적지 않았다. 첫아이라 엄하게 키웠고, 참을성 없는 아빠의 모난 성격 때문에 많이 혼나며 컸다. 예뻐했지만 잘못 키우면 안된다는 불안감에 지나치게 아이를 잡은 적이 많았다. 그래서 간혹 딸의 얼굴에서 그늘이 보일 때면 마음이 아팠다.이제 와서 지난 상처들을 꺼내어 일일이 사과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아무 노력도 하지않고 보낼 수도 없었다. 머지않아 완전히 자립할 아이와 가깝게 보낼 수 있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들을 그냥 지나가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지금부터라도 부지런히 좋은 추억을 만들어줘야겠다는 생각에, 뒤늦은 노력을 하기 시작했다. 나쁜 기억들은 어쩔 수 없어도, 좋은 추억들을 많이 만들어주어, 그 기억들이 오래 남기를 바랐다. 그래서 살다가 힘든 날을 만나면 무섭게 화내는 아빠가 아니라, 마음을 열 수 있는 아빠가 생각나 언제든 집으로 찾아올 수 있기를 원했다.다 큰 숙녀에게 어렸을 때처럼 스킨십을 할 수는 없고, 현실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주말, 가족과 함께 가까운 쇼핑몰에 가서 외식도 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고 집을 나섰다. 그런데 큰딸의 반응이 시큰둥했다. 꾹 참고 다른데 가고 싶으면 그렇게 하자며, 점심도 먹고 싶은 데로 가자며 좋게 설득했지만, 이런 아빠의 노력을 고마워 하기는커녕 되레 짜증을 내는 딸을 보며 결국 내가 터져버렸다. 그 동안 쌓였던 게 한꺼번에 터지면서 차 안에서 온갖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고, 아이들은 겁에 질려 아무 말도 못하고, 분위기는 최악이 되었다. 길가에 차를 세워 큰딸에게 밖으로 나오라고 소리 질렀고, 아이는 잔뜩 긴장하며 차에서 내렸다. 아내가 말렸지만 나는 이미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딸에게 무엇을 잘못했는지 말해보라고 윽박지르자 딸은 "I'm sorry for disrespecting you" 라고 무표정한 얼굴로 또박또박 말하며 틀에 박힌 사과를 했다. 화가 치밀어 오른 그 순간, 딸에게 고작 몇 번 잘해줬다고 이렇게 또다시 상처를 주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며, 그리고 그 동안 이런 식으로 딸에게 상처 주었던 일들이 떠오르며, 순간 미안함과 후회가 밀려왔다. 나도 모르게 딸을 끌어안고, "I'm sorry. I am so sorry" 를 계속 반복하며 한없이 눈물이 흘렀다. 어리둥절했던 딸도 같이 울며 자기가 잘못했다며 진심으로 사과했고, 그렇게 둘이 한참을 끌어안고 울었다. 차 안에서 엄마와 동생들도 같이 울며 우리가족은 길가에서 눈물 바다가 되었다. 이 일은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서 큰딸이 내게 마음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아빠의 마음을 확인하는 기회가 된 것 같다.아이들과 ‘추억 만들기’ 프로젝트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마지막 날 밤 큰딸이 "I'm so happy" 라고 혼잣말 하는 것을 들었다. 비록 맛있는 시카고 피자를 먹으면서 신이 나서 한 말이지만 내게는 충분한 보상이었다. 아이들을 키우며 나를 바라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도 조금은 알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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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최재홍 목사의 카톡큐티 - “부활절이 부활해야 합니다!” 크리스천헤럴드2023.04.28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할렐루야! 부활절의 행복했던 추억들이 누구나 마음속에 남아있다. 가족들과 나누던 시간, 교회 공동체에서 준비하던 즐거움들이 지금은 신앙 속에 지켜지지 못하고 잊혀져 가는 애석함이 마음 한 켠에 자리한다. 나의 부활절에 대한 영적 분위기는 솟아오르는 태양의 찬란한 빛처럼 밝고 힘찬 새아침을 맞이하는 것처럼 신선하고 새롭게 느껴졌었다. 부활절의 상징처럼 인식되고 있는 달걀, 토끼, 백합 등은 각각 새로운 삶, 풍요, 순수함, 정결함을 의미한다. 유럽 중부나 동부지역에서는 어린 양을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이라고 해서 양고기를 부활절의 중요한 음식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또한 부활절의 복장으로 흰 옷은 새로운 생명을 나타낸다고 하여 부활절에는 흰색 계통의 옷을 널리 입는 유래가 되었다. 그리고 야외 행사로는 Easter Egg Hunting 이 다양한 방법으로 진행된다.교회학교에서 매해마다 장식하고 준비하는 부활절 달걀은 독일 이민자들이 미국에 오면서 전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마트나 매장에서 상품화된 부활절 토끼는 달걀, 사탕, 초콜릿 등을 착한 아이들에게 가져다 준다고 믿는 믿음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각 나라마다 부활절 달걀 찾기, 달걀 굴리기, 부활절 퍼레이드, 부활절 축하메시지 보내기, 카드 교환 등, 다양한 형태의 부활절 풍습이 전해져 오고있다. 미국에서도 부활절이면 관공서와 정부의 빌딩에 Happy Easter 플랭카드를 내걸고 부활절을 크게 축하했었다. 그리고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부활절 마시멜로는 핍(Peep)이라고 부르는데 부모들과 어린이들의 야외활동 시간에 자주 행하기도했다.이렇게 세상 속에서 문화의 흐름과 함께 자리잡은 부활절의 모습은 바로 우리 신앙의 모습이며 추억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삶 속에 부활절에 대한 신앙 추억들이 사라지고 있다. 나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어려서부터 부활절 새벽 연합예배를 드리려고 새벽 잠을 깨워 부모님과 함께 길을 따라나섰던 부활절 새벽에 대한 기억이다. 그곳에서 학교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나고난 후에 서로가 크리스쳔인 것을 알고 학교생활을 하는 동안 동질감, 연대감을 갖게 되었고 그 후로 평생친구가 되기도 했다. 우리 신앙생활의 시작은 에수님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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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신선묵 교수 칼럼 [72] 영성과 멘토링 크리스천헤럴드2023.04.28
       영성과 멘토링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면서 꼭 권하는 말이있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지도자를 선택하여 한 사람을 깊이 연구하라고 권한다. 학교에서는 학문으로 공부하기 때문에 가능하면 분야를 나누고 각 분야를 정확하고 세밀하게 공부하도록 한다. 가능하면 분야를 나누고 각 분야를 깊이 연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과 사역은 그렇게 나누어서 살 수가 없다. 그 나누어서 공부한 것들을 총체적으로 모아서 하나의 전체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 사람의 삶과 사역 속에 모든 것들이 종합하여 실제 상황 속에서 그 각 분야의 지식이 어떻게 실제적으로 나타나는가를 볼 수가 있는 것이다. 하나의 실제 지도자의 삶과 사역을 보면 각 분야로 나누어서 연구된 신학이 하나로 통합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신학 사상을 깊이 연구하면 그 속에 각 분야로 나누어졌던 신학들이 통합되어 하나의 전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위대한 신학자를 선택하여 그의 신학을 깊이 연구하면 그 속에 모든 신학 분야들이 통합되어 나오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필요한 신학은 각 분야로 나누어진 신학이 아니라 그것이 통합되어 하나의 전체로 나타난 바로 그 신학이 중요한 것이다. 그것을 잘하기 위하여 각 분야로 나누어서 연구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신학을 공부할 때에 하나의 위대한 신학자를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비단 신학뿐이 아니라 영성도 사역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각 분야로 나누어서 공부하고 배우지만 실제 한 지도자의 삶 속에서 이 모든 것이 통합되어 그의 독특한 영성과 사역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가 각 분야로 나누어진 연구도 중요하지만 한 모범적인 실제 사역자의 삶과 사역을 연구하여서 그 모든 것이 통합된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의 영적 지도자로서 성장하고 발전해 가는데 있어서 물론 신학교에서 각 분야로 나누어진 학문을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모든 것이 모아져서 통합되어서 나타나는 좋은 지도자를 만나서 그에게서 통합된 하나의 실제를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의 삶에서 그리고 우리의 사역에서 우리는 누구를 만나는 가가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사람을 통하여 받은 영향이 가장 크기 때문이다.  풀러신학교에서 지도자학을 가르쳤던 로버트 클린톤 교수는 멘토링이라는 개념을 강조하였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지도자로 성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우리의 삶 가운데 사람을 보내주셔서 그 사람을 통하여 우리를 만들어 가신다는 개념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영향력이 있는 지도자들은 그들의 삶 가운데 10명 이상의 의미있는 멘토를 만난다고 하였다. 우리가 멘토링이라고 하면 어떤 유명한 사역자가 따로 시간을 내어서 나에게 조언을 해주고 가르쳐줄 것을 기대한다. 그런 기회가 있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예외적인 경우이다. 여기에서 취할 수 있는 우리의 태도가 두가지이다. 첫번째는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 주위에 좋은 멘토들을 많이 보내주셨다는 것이다. 유명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마음을 열고 다가서면 우리를 여러가지 면에서 가르쳐주고 조언을 주고 격려해주고 모범이 되어주는 멘토들이 많이 있다. 우리가 멘토라는 개념을 좀 더 다양하고 넓게 생각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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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샘신 목사 칼럼 - 빚진 자 크리스천헤럴드2023.04.28
      하나님의 대표적인 속성 중 하나가 바로 ‘공의’입니다.성경은 하나님의 공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6절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7절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살후1:6-7)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7) 하나님은 반드시 갚아주십니다.성경은 그것을 하나님의 공의라고 합니다.그러므로 하나님은 빚을 지고는 못 사시는 분이십니다.우리도 하나님의 그러한 부분을 닮았습니다.우리가 이 부분을 이해하고 본문을 대하면 말씀이 더욱 실감나게 다가옴을 볼 수 있습니다.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바울이 자신을 향하여 스스로 빚진 자라고 표현했다는 것입니다.즉 바울은 상대방을 향하여 “너는 빚진 자”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우리가 이 설교를 듣고 스스로를 향하여 “그래 나도 바울과 마찬가지로 빚진 자야”라고 말한다면 문제가 없습니다.그러나 설교자가 청중을 향하여 “당신은 빚진 자입니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복음이 기쁜 소식이라는 개념에 위배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바울은 누구에게 빚진 자였습니까?바울은 14절에서 그 대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라는 표현은 결국 ‘모두에게’라는 의미입니다.만약 바울이 자신을 ‘하나님께 빚을 진 자’ 혹은 ‘마게도냐 교회에 빚을 진 자’라고 말했다면 이해가 쉬웠을 것입니다.그런데 바울은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빚을 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이 고백은 깊은 묵상을 필요로 합니다.오래 전에 저는 신학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성도들을 공부 시키면서 무엇인가 나는그들을 위해 하고 있다고 생각했읍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제 마음 속에 놀라운 생각 하나가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그것은 ‘내가 그들을 도운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나를 도왔던 것이었구나!’라는 생각이었습니다.그러자 제 마음 속에 바울처럼 빚진 자의 마음이 생기게 되었습니다.제가 빚을 갚아야 할 대상은 오래 전부터 저에게 배움을 가진 학생들과 성도님들 이었다는 것 입니다.제가 준 것보다 받은 것이 오히려 더 많았습니다.만일 그 분들이 없었면 오늘의 나도 없었음을 본 것입니다.그러자 이제 남은 생애는 그분들에게 받은 것을 돌려주며 살아야 된다는 생각이 찾아왔습니다.바울은 하나님을 대적했던 사람입니다.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특별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바울은 복음으로 인한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에게 넘쳤음을 경험했습니다.그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음으로 인한 행복함이 바울로 하여금 ‘복음에 빚진 자’의 마음을 가지게 하였던 것입니다.선교사들이 왜 그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면서까지 자기와는 아무 상관없는 선교지에 가서 자신의 일생을 헌신합니까?바로 바울과 같은 복음에 빚진 자의 마음 때문입니다.자신이 하나님의 은혜와 복음으로 인해 엄청난 복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이 영적인 채무의식이 되어 아내와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선교지에 그 빚을 갚으러 가는 것입니다.선교지에서 당하는 모든 불편함과 고난을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빚진 자의 마음으로 감당하는 것입니다.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의 빚을 진 자들입니다.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을 하십니다.이 질문은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라는 베드로를 향한 주님의 고백인 동시에 “나를 사랑해 달라”는 요구이며 더 나아가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랑을 갚아 달라는 부탁이기도 합니다.‘복음과 사랑의 빚진 자’가 되려면 먼저 우리 자신이 복음과 사랑으로 인해 행복하고 감격해야 합니다.만일 우리에게 그러한 마음이 없다면 아직 복음과 사랑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복음과 사랑,하나님으로 인한 감사가 없다면 빚진 자의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 어리석게 보일 뿐입니다.‘복음과 사랑의 빚진 자’의 마음은 복음으로 인한 고난,사랑으로 인한 희생을 능히 감당하도록 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바울의 삶을 보면 참으로 인간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험난한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본인이 다른 선택만 하면 얼마든지 고난을 피할 수도 있었고 인간적으로 더 나은 편안한 삶을 살 수도 있었지만 바울은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갔습니다.무엇이 바울로 하여금 그러한 삶을 살게 하였나요?그것이 바로 본문에 등장하는 빚진 자의 마음입니다.바울은 행복한 빚진 자였습니다.샘신 목사 SAM Community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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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김병학 목사 칼럼 - 소통은 현실직시이다 크리스천헤럴드2023.04.28
        코로나의 상황이 완전히 끝났다고 말할 수 없는 어정쩡한 가운데 교회는 여러모로 교회의 생존을 위하여 큰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런데 마치 방향을 잃어버린 것처럼 우왕좌왕하고 있다.   만일 ‘오늘 당신의 교회가 건강 검진을 받는다면 어떤 진단이 나올 것 같은가?’라고 질문한다면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톰 레이너, 죽은 교회를 부검하다, 두란노, 2022) 교회는 정직하게 교회를 건강 검진받는 것처럼 검진받아야 한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교회가 무엇이고,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기본부터 살피고 너무나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을 대비하여 철저하게 준비해야 한다.   만일 다시 코비드 같은 상황이 된다면, 이번에는 마스크 쓰고 소독 철저하게 하여 대면 예배를 강행하겠다는 것이 교회가 할 수 있는 준비의 전부가 될 수 없다.   지금 교회는 새로운 세대에 대한 준비를 전혀하지 못하고 있다. 교회가 대부분 기성세대로 구성되어 있는데 MZ세대라는 다음 세대에 대한 준비가 없다. 이미 방송이나 매체에서 그리고 회사들은 직접 이 세대를 경험하고 있고 대안 마련에 힘쓰고 있다.   이렇게 중요하고 시급한 것을 교단에서나 어느 단체에서 준비할 수 있다고 보기 어렵다. 이것이 지금의 교회 현실이다. 그렇다고 각 교회가 준비하기는 더 어렵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교회들은 크게 두 가지를 해야 할 것을 제안한다. 먼저, 목회자들의 설교가 변해야 한다. 너무나 뻔한 내용과 구성으로는 다음 세대에게 들려질 리가 없다. 성경을 연구하여 하나님이 전하시고자 하는 의도를 찾아내야 하고 말씀을 처음 들었던 청중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중들을 연구해야 한다. 그러려면 목회자들은 문화와 사회를 연구해야 한다. 두 번째는 기존 성도들이 많이 양보해야 한다. 지금까지 목회자가 돌봐주고 양육하던 직접적 대상에서 한발 뒤로 물러나 목회자들이 다음 세대에 집중할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한다. 교회의 조직과 구조를 변경하고 프로그램과 운영 방식을 바꿔야 한다.   그리고 하나 더 바람이 있다면 대형 교회들은 경제적으로 부담을 해서 지역 교회 중 몇 교회의 목회자들과 팀을 구성하여 다음 세대 준비를 위한 프로젝트팀을 운영하기를 제안한다. 내 입맛에 맞는 사람 몇 사람을 모아서 형식적으로 하지 말고 교회의 미래와 사활이 걸려있다는 심정으로 팀을 구성하고 운영해야 한다. 이런 제안은 최소한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매우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일은 빠를수록 좋다. 이 일을 준비해야 교회가 살고 예배가 살고 선교가 살아날 것이라고 확신한다.   교회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지금 교회의 구조는 외부의 누가 무슨 말을 해줄 수 없다. 교회 내부적으로도 그리고 외부적으로도 교회에 어떤 제안을 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그래서 각 교회는 무던히 시행착오를 경험했다. 그러나 이제는 교회가 정확히 무엇을 할 줄 알고 준비해야 할 때가 되었다.     김병학목사 / 주님의교회kim040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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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서민수 목사의 피시전도법 - 운동화 끈을 다시 한 번 조여 매면서 크리스천헤럴드2023.04.28
     왜 전도하라고 말하는가? 아마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목사님들로부터, 교회로부터 전도하라는 도전을 엄청나게 받았을 것이다. 우리는 전도해야 할 이유가 단순히 교회의 빠른 부흥과 성장 그리고 그 혜택으로 좋은 건물, 넓은 주차장, 풀타임 사례비에 있지 않음을 천명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전도해야 하는가? 이 명제가 분명해야 지치지 않는다. 이 명제가 확실해져야 끝까지 달려갈 수 있다. 우리가 전도해야 할 이유는 전도가 바로 이 땅에 존재하는 일 중에 가장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떠나시면서 가치 없는 일을 부탁하셨겠는가?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이기에 도우시는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신다고 말씀 하셨겠는가?하나님이 세상에 존재하는 피조물 중에 가장 사랑하시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사람이고 영혼이다. 천하보다 귀한 영혼이다. 이 영혼의 무게와 귀중함이야 말로 전도의 시작과 끝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되 당신의 이미지를 따라 사람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사람의 타락을 아파하셨고, 타락한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 구원의 대업을 완성하신 주님께서 이제 제자들을 통해 한 영혼, 한 영혼을 구원의 방주로 인도하길 원하신다. 이 아름답고, 가치 있는 일에 모든 성도들과 제자들, 교회들을 당신의 파트너로 부르셨다. 이같은 귀한 일을 맡기시면서 맨입으로 말씀하시지 않으셨다.“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8:18-20)가장 가치 있는 중요한 일은 마지막 순간에 부탁하고, 맡기는 것이다. 지금 당장 헤어지는데 그냥 일상적인 일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다. 당장 죽게 되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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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송경화 교수 칼럼 - 치유의 여정 크리스천헤럴드2023.04.03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롬3:10-18) 상담실에서 내담자들을 만나다 보면, 하나같이 문제와 고통을 가지고 온다.  어린 시절에 경험한 상처와 결핍, 현재 고통스러워 하는 우울이나 불안의 문제, 종종 찾아오는 공황 반응, 인간 관계에서의 갈등과 상처, 가족 관계에서의 어려움, 낮은 자존감과 열등감, 패배의식, 죄책감, 만성 통증과 피로감, 소화 장애와 불면증 등… 끝없이 나열되는 다양한 고통을 상담실에서 만나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나에게 문득 찾아온 하나의 질문은, “상담실에 오는 분들만 이런 걸까?”였다. 상담실을 찾지 않는 많은 사람들은 그럼 이런 문제들과 고통으로부터 자유한 걸까?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어떤 심리적 불편감도 없는 사람들, 그래서 현재에 만족하고 미래를 낙관하는 사람들이 과연 이 세상에 얼마나 존재할까? 어느 심리학파에서는 인간이란 자기 문제를 잘 알고 해결할 수 있는 방법과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실현을 할 수 있는 존재로 믿는다. 자기 안에 답을 가지고 있고, 스스로 삶을 개척해 나가고 현재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모든 능력과 자원을 자기 안에 가지고 있다고 본다. 정말 인간이란 그런 존재일까?  묵상과 성찰, 그리고 연구를 통해 나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점점 발견하고 있다. 아픔과 고통이 없는 사람이란 없다. 우리는 모두 삶을 살아가는 동안 언제든, 어떤 모습으로든 상처와 좌절과 결핍을 경험하고 고통을 마주한다.  그것을 생생하게 느끼고 인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거의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이유는 여러가지이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우리의 의식 체계에서 억압되어 그 고통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경우도 있다. 자기의 상처와 결핍을 기억하지는 못하더라도, 그것들은 종종 삶에서 여러가지 문제를 일으키면서 존재감을 나타낸다. 억압된 상처와 고통은 우울, 불안, 강박, 공황 등의 정신적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고, 중독에 빠지게 하기도 하며, 혼외 관계를 통해 결핍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불건전한 행동을 유발하기도 한다. 만성적인 공허감과 낮은 자존감으로 고통받지만, 도대체 왜 이런 건지 이해하기 어렵다고 호소하기도 한다. 원인에 대한 아무런 단서를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인지하든 억압하든, 모든 사람에게는 상처와 결핍의 고통이 존재한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다양하다. 그 고통이 크지 않아 그럭저럭 감당해낼 수 있는가 하면, 어떤 경우에는 고통이 압도적으로 강렬할 수도 있다. 혹은, 고통이 있지만 적절한 도움을 받거나, 지지적인 관계가 그 상처를 치유할 만큼 강력한 경우에는 시간이 지나면서 고통의 정도가 경감되기도 한다. 우리 모두에게 상처와 결핍의 고통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건 바로 우리 모두에게 공통으로 해당되는 죄 때문이다. 우리는 죄 가운데 태어나 유전적으로도 죄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뼛속까지 죄인이고, 살아가면서도 크고 작은 죄를 계속 범하는 유한하고 연약한 존재이다. 그런 죄인들이 모여서 만든 사회 구조와 문화 역시 죄로 물들어 있다.  죄인인 우리는 자기의 안전과 유익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서로 사랑하고 무조건적으로 수용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런 사랑과 수용을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말로, 행동으로 상처를 주고, 또 그것 때문에 괴로워한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안전과 생존을 위해 분투하지만, 그 과정에서 상처받고 상처를 준다. 이런 상처들은 세대를 따라 대물림 되고, 우리의 마음은 점점 더 피폐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사람은 도움을 받고자 상담실을 찾지만, 어떤 사람들은 상담실을 찾을 힘도 없고 용기도 없고 심지어는 상담실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정보조차 얻지 못한다.  상담실을 찾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큰 차이는 없다. 우리는 모두 마음의 짐을 지고 있고,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으며, 상처와 결핍으로 멍든 가슴을 안고 있다. 겉으로는 웃고 있고, 아무 문제 없는 것처럼 보이며, 그럭저럭 잘 기능하고 있지만, 그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울고 있는 크고 작은 상처가 있다. 신앙생활을 통해 해결되는 마음의 문제도 있지만, 신앙으로도 해결되지 않아 여전히 씨름해야 하는 문제도 또한 존재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모든 사람이 다 가지고 있지만 숨기고 있는 이 결핍과 상처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치유의 여정으로 갈 수 있는 지도가 있을까? 주님과 함께 용감하게 치유의 여정을 시작하고자 하는 이가 있다면, 그 길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시작한다.  치유의 여정에는 먼저 결핍과 상처를 알아보고 인지하는 것이 첫 걸음이고, 그것들의 원인과 영향력을 이해하는 것이 그 다음이며, 주님과 동행하며 일반 은총인 치유의 방법들을 적용하여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내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다. 앞으로의 글에서는 이런 치유의 여정을 하나씩 하나씩 그려보고자 한다. 송경화 교수월드미션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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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최재홍 목사의 카톡큐티 - “처음처럼 마지막까지 주님만을!” 크리스천헤럴드2023.04.03
     지난 주일 오후에 우리교회를 위해서 늘 기도해 주시는 남가주 프라미스교회 창립 12주년 기념주일에 있었던 목사 안수식에 성도님들을 대신해서 장로님 내외분과 함께 참석하였다. 이번에 안수받은 오 명진 목사는 주경야독하며 10년이 넘도록 신학교 수업을 받았다고 한다. 처음 헌신하게 사역지에서 11년 동안 찬양사역을 감당하며, 사역중에는 한번도 ‘아니오(NO)!’ 라는 대답을 하지 않았던 신실한 동역자라고 담임 목사님과 성도들이 이구동성으로 말씀해주실 때에 임직받는 목사님은 성품과 실력과 은혜가 준비된 사역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개인적으로 선배의 조언을 부탁하셨기에 고심하다가 이렇게 말씀을 드렸다. “저도 부족한데 한가지 말씀을 드리면, 목회는 내가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하십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눈치를 잘 살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드셔야 좋은 목회자가 될 수 있습니다.”라고 전해드렸다. 물론 나에게 가장 필요하고 원하고 바라는 부분이기도 하였기에 나의 마음을 그대로 전해드렸던 것이다.  교단 안수위원 목사님의 말씀 중에 내 마음에 ‘초심유지’라는 말씀이 와닿았다. 그리고 지난 시간 내 인생의 첫 순간들을 기억해 보게되었다. 연동교회에서 목사 안수 받던 순간, 성경공부 시간에 아내를 만난 순간, 딸 리베카가 태어난 순간, 수술을 마치고 의식을 되찾은 대니얼을 만난 순간, 미국에 도착한 날, 목회를 시작하던 첫 주일예배 등등, 내 인생의 소중한 순간들을 생각하니 부끄러움과 죄송함이 담긴 아쉬움으로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뛰었다. 목적을 가지고 마지막까지 달리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래서 힘을 보태주려고 “시작이 반이다” 라고 격려하는가 보다. 주일 아침 LA 마라톤 대회에 최 주은 집사의 아들 브라이언 형제가 참가하고 있었다. 마라톤의 특성상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려면 오랜 시간 준비했을 것이다. 우리는 엄두도 내지 못하는 26.2 miles 를 내달렸다. 엄마의 사랑을 가슴에 담고 완주를 꿈꾸며 힘든 순간을 견디고 자신과의 싸움을 이겨내며 우리 교회 모퉁이를 돌아서 힘차게 달렸을 것이다. 완주메달을 받았다는 기쁜 소식을 듣고 그 심정을 잘 알기에 무척 반가웠다. 나도 마지막을 바라보며 최후 승리를 위해서 끝까지 달리는 사역자가 되기로 다짐을 해본다. 처음의 마음과 자세를 세월이 지나도, 관계하는 상대와 환경이 바뀌어도 변함없이 이어가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다.  성경의 인물들 처럼, 환란과 핍박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방주를 지은 노아처럼, 포로로 잡혀가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생명을 건 다니엘의 변하지 않는 믿음처럼, 가족들에게 미움받고 구덩이에 던져진 형통의 사람 요셉의 인생처럼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처럼 말이다. 처음처럼 마지막까지 주님만을 바라보며 산다는 것은 하루하루를 초심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거룩한 초심을 품고 그 마음으로 우리 모든 크리스챤들이 천국문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님께 간구드린다. 샬롬!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욘 4:10)최재홍 목사쉴만한 물가교회joshchoi0331@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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