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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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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최재홍 목사의 하루한장 말씀 - “마지막처럼 사랑하세요” 크리스천헤럴드2023.07.15
    우리는 사랑을 찾아 목말라하며 살아갑니다. 누구든지 충분한 사랑을 느끼고 주고받으면 힘이솟아나고 성별과 나이를 불문하고 그의 삶이 청춘이 됩니다. 이것이 놀라운 사랑의 힘입니다. 사랑의 힘은 위대합니다. 이런 사랑의 힘으로 인생이 천차만별 변화무쌍하기도 하고, 마음으로 받고 느낀  사랑의 힘으로 형편과 감정을 이기고 마지막을 아름답게 마무리 짓기도 합니다. 보이지 않아도 믿을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게 사랑의 힘입니다.누구나 사람들은 늘 첫사랑을 마음에 담고 그리워합니다. 마음속 깊이 간직한 첫사랑의 힘의 영향력은 지대합니다. 뭔가 마음을 작정하고 새출발을 할 때에 혹은 결단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할 때에는 항상 처음으로 되돌려서 초심유복을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래서 첫 사랑은 언제나 우리 기억속에 순수하고 좋은 감정으로 마음에 새겨져 있습니다. 새롭게 출발하는 상쾌함과 설레임이 첫사랑에 담겨있습니다. 첫사랑은 서툴기는 하지만 기대와 소망을 품고 이루어가는 사랑입니다. 첫 사랑은 함께하는 기쁨과 마음이 하나되어 시작하는 즐거움이 생깁니다. 첫사랑은 미래에 대한 꿈도 꾸고 우리 마음을 넓고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그러나 사실 사랑은 그대로입니다. 처음이든 마지막이든지 한결같습니다. 원래 사랑은 변함 없었습니다. 처음 사랑이 고귀하다면 역시 마지막 사랑도 고귀합니다. 오히려 마지막 사랑이 더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마지막 사랑은 지금 보여주는 모습이 마지막이라서 진지합니다. 마지막 말은 일생의 유언같아서 속임수가 없습니다. 마지막 말에는 그 마음이 고스란히 진하게 묻어 나옵니다.그래서 감정의 밀도가 더 높아져서 호흡 한번도, 미세한 표정 하나도 다 기억에 남습니다. 마지막이기때문입니다. 그래서 함부로 말하지도 않고 무례하지도 않습니다. 아무렇게나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그의 말은 마지막 남길 그의 진실, 진심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사랑은 서툶이 사라지고 완성도가 있고 결연하고 애잔하기도 합니다.이렇게 첫사랑도 귀하지만 마지막 사랑처럼, 우리가 다른 사람을 존경하고 마음을 다해서 상대를배려하고 관계를 맺는다면 분명히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맞습니다. 자꾸만 기억속에서 생각난다면 사랑하는 사이가 맞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더 생각해서 내 가슴이 뛰고 아프다면 그것은 분명한 사랑앓이, 가슴앓이를 하는 것입니다.우리 크리스쳔들의 삶은 사랑앓이로 신음해야 합니다. 가슴앓이로 잠을 설쳐야 합니다. 그 이유는우리에게는 신실하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고지순하다 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사랑에 견주어 볼 때에 야박한 듯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신 예수님의 대속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영생구원이 임했습니다. 우리 각자가 사는 방법과 환경이 다르지만 변함없는 사랑으로 인도해 주시는 압도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모진 세월 속에서 우리를 지금까지 견디게 하셨습니다. 더 사랑하지 못한 것이 생각나고, 미안했던 순간들이 회고되고, 간절하지 못했던 기억들이 채로 걸러지듯이 하나님의 손 길에 잘 추스려져서 복된 인생 마무리가 되어야 합니다.오늘이 나의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가십시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예배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주일 예배를 준비하고 드리십시오. 오늘이 내가 드리는 마지막 기도라고 생각하면 우리의 기도는 분명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 기도에 능력이 나타나고 복음의 역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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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샘신 칼럼 - 사막과 물가... 무엇을 선택하시렵니까? 크리스천헤럴드2023.06.15
    하나님의 은혜로 5년 동안 한국에서 목사로서 교회를 섬겼던 적이 있습니다. 한번은 울산 고속도로를 달렸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미국으로 온 후 처음으로 한국의 싱그러운 산과 들을 눈에 직접 담을 수 있었는데,  그 경치는 정말로 이전까지 전혀 느껴보지 못한 아름다움이었습니다.수십년을 캘리포니아 사막 위에 세워진 도시에서만 살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는 비가 자주 내리지 않고, 푸른 식물이 희극적으로 부족합니다. 그래서 한국의 산과 나무가 비를 맞으며 푸르름을 뽐내는 모습이 정말로 신기하고 감동적이었습니다.예레미야 17장 말씀을 보면 두 단어가 비교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막과 물가입니다. 즉 어떤 사람의 인생길은  사막에 심겨진 나무같은 인생이 있고, 어떤 사람은 물가에 심겨진 나무같은 인생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사실은 두 인생 길이 단순히 소유의 문제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어떤 사람은 많은 것을 소유했으면서도 사막에 심겨진 나무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어떤 사람은 가난하지만 물가에 심기운 나무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물가에 심기운 나무도  더위가 찾아오고 가뭄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물가에 심겨졌기에 더위와 가난이 그 사람을 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막과 물가가 소유에 대한 것이 아니라면  무엇을 의미할까요? 마음입니다.다른 사람은  잘 모른다 할지라도 스스로는 자신의 마음이 사막인지 아니면 물가인지 알 것입니다.아니 이어지는 마음에 대한 말씀을 보면  스스로에게 속을 수도 있습니다.이제 우리는 가던 길을 멈추고 스스로를 정직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과연 내 인생은 사막이었던가, 아니면  물가이었던가를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정직한 자기(Reflection)성찰이 없는 한  우리는 속고 살 수 밖에 없습니다.그러면 무엇이 우리의 인생길을  사막과 물가로 나누는 것일까요? 성경은 사막 같은 인생을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사람”(렘17:5)이라고 표현하며 물가인생은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사람”(렘17:7)이라고 표현합니다.즉 우리의 인생이 사막인가 아니면 물가인가는 마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이 사실은 아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사막과 물가의 문제가 마음의 문제임을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마음의 문제라는 것은 누구를, 혹은 무엇을 사랑 하느냐의 문제입니다.신약적인 표현으로 말하면 하나님인가 아니면 물질인가를 의미합니다.주님은 산상수훈에서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며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 이어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마6:24) 는 말씀을 하십니다.또한  공급에 관한 문제입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만이 나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는 분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공급이 없이는 살 수 없음을 알고 하나님을 철저히 의존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본질입니다.하나님이 공급자라면 나는 받는 자입니다.  그리고 받는 자에게 나타나는 태도는 감사와 겸손입니다. 즉 우리가 진정한 신앙생활을 한다면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감사와 겸손이 더 커진다는 것입니다.반대로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감사와 겸손이 사라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영적으로 무엇인가 문제가 있음을 스스로 보여주는 것이 됩니다.성경이 말하는 죄란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고 공급처를 하나님 아닌 다른데서 찾는 것이 죄의 본질입니다.더 나아가 예배에 대한 것입니다. 모든 인생을 예배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예배자로 창조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누구 혹은 무엇을 예배하느냐의 문제입니다.우리의 인생길이 사막인가 물가인가는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성공하느냐 실패 하느냐 에 달려 있습니다.우리 모두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와 같은 인생을 살고 싶은 소원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진정한 공급처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존중할 때 우리의 인생은 물가에 심기운 나무와 같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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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송경화 교수 칼럼 - 상처를 이겨낼 수 있는 세 가지의 힘3: 경계선 크리스천헤럴드2023.07.15
    어린 시절에 부모님이 충분하게 채워 줘야 하는 세 가지의 자원이 있다. 그 중 사랑과 안전감에 대해서는 지난 달에 다뤘고, 이번에는 세번째인 경계선에 대해 함께 나눠보고자 한다. 경계선이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영역과 그럴 수 없는 영역 사이의 경계를 말한다. 아이가 어렸을 때 부모님이 허용해 주는 범위가 첫 경계선이 된다. 여기까지는 네 마음대로 해도 돼, 라는 자유와 허용을 경험하는 아이는 명확한 자기의 영역 안에서 자유롭게 놀 수 있고 편안하게 쉴 수 있다. 이렇게 자신만의 영역을 누리면서 자란 아이는 자신감이 넘치고 자존감이 높은 아이로 자란다. 반면, 어린 시절에 부모님이 허용하는 자유의 영역이 너무 좁거나 아예 없었던 아이는 스스로 뭔가를 하지 못하고 늘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위축된 성격을 형성한다. 경계선 안의 영역의 크기도 중요하지만 경계선 자체의 안정감과 유연성도 중요하다. 어떤 부모는 경계선을 희미하게 만들어서 수시로 아이의 경계선을 침범하곤 한다. 어린 아이가 뭘 알겠어, 하는 마음으로 아이가 싫어하고 불편해 하는 데도 불쑥 불쑥 아이의 경계선을 침범한다. 이렇게 부모가 자기의 경계선을 존중하지 않는 경험을 많이 하면서 자란 아이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경계선을 잘 유지하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함부로 해도 그걸 막아내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는다. 경계선을 제대로 만들어주지 못하는 부모는 이런 식이다. 아이의 장난감을 다른 아이가 갖고 싶어할 때 아이에게 뺏어서 다른 아이에게 준다거나, 아이에게 “친구랑 사이좋게 함께 놀아야지” 하면서 경계선을 침범한다. 아이의 것은 분명 아이의 것이기 때문에 아이가 장난감을 공유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안전하게 보호해 줘야 하는데 경계선을 무너뜨리고 마는 부모이다. 또, 아이를 아프게 하는 부모, 아이에게 손찌검을 하거나, 소리를 지르는 부모 역시 경계선을 만들어주지 못하는 부모이다. 아이의 몸은 아이의 것이므로 아이가 불편하게 느끼거나 싫어하는 스킨쉽은 절대로 해서는 안된다. 그게 경계선을 지켜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아이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고 거기에 대해 전혀 잘못되었다는 의식이 없는 부모들이 경계선이 없는 부모이다. 아이가 자기만의 영역에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마음껏 누려보고 통제력을 키워 나갈 때, 아이에게는 정신적인 힘이 솟아나게 된다. 이런 정신적인 힘, 자신감은 인생을 살면서 험난한 일들을 겪을 때 그 충격에 대한 완충작용을 해 주고 거뜬하게 장애물들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네 것은 네 것, 내 것은 내 것 이라는 명확한 구별, 그리고 내가 좋은 것은 허용하지만 내가 불편하고 싫은 것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NO 할 수 있는 자신감은 이기적인 게 아니라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힘이 있다는 증거가 된다. 그리고 이런 자신감은 어린 시절 부모가 얼마나 경계선을 충분하게 존중해 주고 보호해 주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사랑, 안전, 경계선의 필요가 충분히 잘 채워지면 그 아이는 이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감이 넘치며 정신적인 에너지가 충분한 아이로 자란다. 그러면 어떤 상처를 받거나 실패를 해도 크게 쓰러지지 않는다. 이것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경험하게 되는 여러가지 상처를 이겨낼 수 있는 세 가지의 힘이다. 요즈음 트라우마라는 말이 자주 회자되고 있다. 사실 이전에는 성폭행이나 전쟁, 혹은 지진이나 사고 등을 당한 경우를 트라우마라고 했지만, 최근에는 한 개인이 겪는 충격스러운 일이나 큰 상처를 트라우마라고 많이들 말하고 있다. 그렇게 본다면 트라우마 경험이 없는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인생에 몇 번쯤은 트라우마와 비슷한 상황을 겪게 된다. 그런데 트라우마를 겪는다고 해서 모두가 그 트라우마 때문에 인생이 허물어지거나 오랫동안 힘든 증상들에 시달리지는 않는다. 트라우마를 겪어도 잠시 힘들어 하다가 서서히 회복되는 사람들은 어린 시절에 사랑, 안전감, 경계선을 충분히 채움받았던 사람들이다. 한 개인의 인생을 생각할 때 부모들이 아이의 어린 시절에 사랑, 안전감, 경계선을 충분히 채워 주는 것이 큰 재산을 물려주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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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조영석 목사의 생각하며 기도하며- 준 비 크리스천헤럴드2023.06.30
    집으로 손님이 찾아온다. 중요한 손님인 만큼 아내는 정성을 다해 손님 맞을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제일 먼저 집안을 정리한다. 손님이 오기 일주일 전부터 아내가 부지런히 집을 치운다.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구석까지 신경을 써서 청소를 한다. 진공청소기가 온 집안을 다니며 먼지를 빨아들인다.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청소는 도움을 받아서라도 해결한다. 초인종 소리에 문을 열어보니 유니폼을 입은 두 남자가 서있다. 카펫 샴푸하러 왔단다. 나는 그 길로 집에서 쫓겨나 두어 시간 동안 밖에서 보내야 했다. 아이들이 이번 주 많이 혼났다. 평소에 예쁘고 상냥했던 엄마는 어디로 갔는지, 갑자기 신경이 곤두서서 아이들을 노려보며 왜 이렇게 방이 지저분하냐며 야단친다. 내가 보기엔 늘 그랬는데 아내는 마치 오늘 처음 알게 된 것처럼 기가 막혀 한다. 나도 이번 주 많이 혼났다. 세수를 하는데 왜 그렇게 물을 여기저기 다 튀면서 하냐며 잔소리를 들었다. 결혼생활 25년 동안 한 번도 세수하는 방법을 바꾼 적이 없는데 이날은 특별히 사방에 물을 많이 튀게 한 것으로 오해 받았다. 이런 얘기를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아이들이 맞았다. 저녁에 집에 돌아왔을 때 집안에 감도는 살벌한 분위기를 미리 감지하고 내게도 불똥이 튈까 조용히 내 방으로 들어갔다. 아이들이 혼난 이유를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방 정돈 상태와 연관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또 뭐더라..아..그러고 보니 나도 맞았다. 내 서재와 연관이 있었던 것 같다. 손님 맞기 하루 전, 집안이 눈부시게 깨끗해 졌다. 솔직히 고백하는 건데 조금 낯설었다. 평소에 이렇게 깨끗하게 치워가며 살고 있지는 않는다. 아이들이 셋에 애완견 하나까지, 사실 그것이 가능하지도 않다. 그런데 오늘은 구석 구석 어디를 보아도 정리 정돈 되어있지 않은 곳이 없다. 평소와 너무 다른 모습에 익숙하지 않아서 소파에 앉을 때 쿠션이 흐트러질 까봐 부담스럽기까지 했다. 나와 아이들이 달라진 집안 환경에 적응하기 어려워하고 있을 때 아내가 한마디 한다. “이제야 사람 사는 집 같네” 손님 맞을 준비는 모두 끝났다. 일주일 전부터 준비하며 기다렸던 손님들도 드디어 도착했다. 그 중 한 분이 집안을 잠깐 둘러보더니 이내 아내 칭찬을 한다. 주일날 교회에서 보는 모습처럼 집도 깔끔하리라 예상하였었는데 과연 그렇다는 것이다. 아내는 아니라고 웃으면서도 칭찬을 받아들이는 듯 겸연쩍게 웃는다.   즐거운 시간을 마치고 밤이 되어 손님들은 모두 떠났고, 손님맞이는 그렇게 잘 마쳤다. 아내도 결과에 만족해 한다. 나와 아이들도 엄마가 정상으로 돌아온 것 같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참으로 다행이다. 가족모두 고생은 좀 되었지만 그래도 손님 오시는 날을 미리 알아서 이렇게 준비를 잘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주님 오시는 날은 우리가 알 수 없으니 우리의 마음의 집은 어떻게 준비해야 해야 하는가. 늘 깨어 있어 긴장을 놓지 않고 항상 준비하며 사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2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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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최재홍 목사의 하루한장 말씀 - “확신으로 드리는 기도” 크리스천헤럴드2023.06.30
    그 중에도 말씀과 기도는 일생동안 우리 신앙을 대변해주는 단어와도 같습니다. 디모데후서4:5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고 증거합니다. 거룩한 말씀이 우리 영혼의양식이고 간절한 기도는 성도의 영적 호흡이기 때문입니다. 한 영혼이 거룩함으로 강건케되기위해서는 영혼의 양식과 호흡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강조하고 언급해도 지나치지 않을 말씀과 기도는 우리 신앙의 양대산맥과 같습니다.이 세상을 이기는 힘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확신에서 시작됩니다. 참 중요한 부분입니다. 마찬가지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으려면 확신으로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확신을 가진 성도는 하나님의신실하심과 사랑을 믿습니다. 그리고 확신하는 사람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의심도 하지 않고불안해 하지도 않습니다.그러면 우리가 불안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내일에 대한 걱정과 염려 때문입니다. 부모와 함께 있는 어린아이는 걱정이 없습니다. 웃고 평안하고 얼굴이 밝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안 보일 때 아이는놀지도 못하고 잠도 못 자고 불안해 하고 울음보가 터집니다. 장난감이나 놀이는 잠깐의 임시방편일뿐입니다. 근본적인 문제해결 방법이 못됩니다. 부모의 모습이나 음성을 듣기 전에는 울고 있는어린아이를 달랠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가 되시면 내 앞에 놓인문제가 어렵고 처한 상황이 힘들어도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확신이 있다면, 무슨 일이든 감당하고 이겨낼 수 있습니다. 견뎌낼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확신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믿음의 표현입니다.하나님은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무도 도와주는 이 없이 홀로 던져져외롭고 처참한 인생같다고 한탄하는 사람도 사랑의 하나님이 거두어 주시고 지켜 주십니다. 결코 빈손들고 주저 앉아서 울게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눈을 떼지 않으시고 살펴보시는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사랑과 은혜를 부어주시고 영원한 목자가 되어 주십니다.우리 미래를 예정과 섭리가운데 인도해 주십니다. 혹 내가 불안하고 두렵다면, 그래서 기도를 드리지못한다면 나는 지금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신뢰가 부족한 상태입니다. 우리 마음이 불안하고조급해지거나 혹은 의심이 가득하면 기도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티켓팅을하고 시간에 맞춰서 자리에 앉으면 내가 원하는 목적지에 예정된 시간에 도착하게 됩니다. 이것은너무나 당연하기에 의심할 수도 없습니다.우리의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구세주이십니다.성령님은 우리 기도를 듣고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드리며 흘리는 눈물과 간절함을 아십니다. 우리의 모든 형편과 사정을 아시고 다가와 주시고 우리의 이름과 생각과 눈물과 고통을 아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가득차면 확신에 찬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확신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 믿음의 표현입니다.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십시오. 이제까지는 매일 눈물로,불안함으로, 억지 떼를 쓰는 기도를 드렸다면, 이제부터는 감사와 기쁨으로 드리는 기도, 담대함으로확신에 찬 기도를 드리십시오. 아버지 하나님께 칭찬듣고 모두 응답받는 생애가 되시길 바랍니다. 샬롬!“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사도행전 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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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신선묵 교수의 교수칼럼 - 독특성과 영성 유형 (1) 크리스천헤럴드2023.06.30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지으실 때에 한사람 한사람을 독특하게 지어주셨다. 이것처럼 놀랍고도 귀중한 사실은 없다. 우리의 독특성은 우리 삶의 전반에 걸쳐서 나타난다. 그래서 우리의 독특성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독특성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의 삶과 사역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오늘날 사람들의 개성에 대한 연구가 많이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그 개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 자신을 보호하고 개발하고 또 다른 사람들과 팀으로 일할 때에 차이를 알고 존중함을 통하여 효과적인 팀워크를 가질 수가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도자로 일할 때에도 사람들의 개성을 볼 수 있고 그것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일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가정에서는 자녀 교육을 할 때에도 바른 가치를 가르쳐야하지만 동시에 자녀들의 개성을 존중하고 보호하고 개발시켜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삶의 전반적인 부분에서 개성을 이해하기 위한 여러가지 틀들이있다. MBTI, DISC, 애니어그램, 기질론, Strengthquest 등 많이 사용하는 도구들이다. 어떤 하나의 도구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고 각각의 도구들이 가지고 있는 장점들이 있다. 이런 것을 통하여 우리 각자의 독특성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상당히 많은 도움을 받을 수가 있다.빌 하이벨 목사는 The Leader’s Pathway 라는 설교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에서 다른 어떤 사람의 모습의 기준치로 자신을 평가하지 않고 자기 자신이 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7가지 유형의 영성을 제시하였다. 첫째는 관계적인 길이다. 몇몇 사람들은 혼자하려고 해보지만 되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길은 관계적인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영성 계획을 세울 때에 “관계적인 필요”를 고려해야 한다. 둘째는 지적인 길이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일이 발생하기 이전에 마음이 완전히 활동해야 한다. 분석적으로 도전받아야 한다. 그들의 마음과 의지는 그들이 확신하기 이전에 움직이지 않는다. 일단 확신이 되면 마음과 의지는 따라온다.  예를 들면 루터, 칼빈, 바울과 같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영성 형성 계획을 세울 때에 그들의 “지적인 필요”가 고려되어져야 한다. 셋째는 섬기는 길이다. 조용히 일관성있게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일을 한다. 그들은 하나님께 친밀함을 느낄 때에 행동한다. 그들은 섬김을 할 때에 하나님께 가까이 있다는 느낌을 갖는다고 말한다. 이런 사람들이 영성 훈련 계획을 세울 때에는 그들의 “섬김의 필요”를 고려해야 한다. 넷째는 묵상의 길이다. 교회 역사를 통하여 어떤 사람들은 다른 드럼 소리에 따라 움직였다. 묵상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홀로하는 시간을 지키고 사람들과 활동들은 그들을 고갈시키는 경향이 있다. 성경, 서적, 시,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머물기 등을 좋아하고 홀로 기도하고 찬양하기 등으로 시간을 보내고 하나님으로부터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하나님과 신비적으로 함께 할 수 있다. 그들은 종종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있으며 주로 모든 사람의 양심으로 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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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샘신칼럼- 베드로와 십자가 크리스천헤럴드2023.06.30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대한 오해와 무지는 곧 기독교에 대한 오해, 무지임을 알아야만 한다. 현대 변질된 복음은 십자가에 대한 오해와 무지에서 나온 결과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대한 오해와 무지는 기독교에서 십자가를 사라지게 했다. 즉 십자가가 없는 기독교가 된 것이다. 십자가가 없는 기독교는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가 아니다. 십자가 없는 기독교는 예수 없는 기독교를 만들어냈다. 그러면 예수 없는 기독교란 무엇인가? 예수님의 자리에 스스로 앉아있는 기독교다. 그 사실을 베드로를 통해 확인할 수 있겠다. 베드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주님의 질문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마16:15-16) 대답을 함으로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들었다.  그리고 주님은 이어서 주님이 고난을 받고 부활할 것을 말씀하셨다. 그때 베드로는 “주여 그리마옵소서”라고 항변한다.  그러자 주님은 베드로를 책망하시는 말씀이 나온다.  본문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몇가지 사실을 생각하게 한다.사탄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통해 우리를 넘어지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를 향한 사탄의 소원이 있다면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 사탄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사용한다. 이 사탄의 전략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란 가장 소중한 사람이며 그들의 제안을 거절하기 어렵고 매우 인간적인 호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넘어진다”는 표현을 사용하시는데 주님이 생각하는 넘어짐은 무엇일까?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주님이 생각하는 넘어짐이다.  흔히 믿는 사람이 간음을 하면 넘어졌다고 말한다.  문제는 간음만 넘어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못하면 그것 역시 넘어진 것이다.분명히 하나님의 뜻임을 알면서도 순종하지 못했다면 그 일이 어떤 일이든 넘어진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넘어뜨리는 것이 믿는 우리를 향한 사탄의 뜻이다. 기가막힐 신앙고백이 있었지만 베드로는 자기를 부인하지 못했다.  베드로는 주님으로부터 극찬을 듣는 신앙고백 후에 주님을 넘어뜨리는 일에 사탄의 도구가 되고 말았다. 칭찬과 책망이 바로 이웃에 있었고 성공과 실패가 바로 함께 나타났다.  우리는 칭찬, 성공 옆에 책망과 실패가 있음을 망각함으로 칭찬들을 때, 성공할 때 넘어니다.  칭찬들을 때 책망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성공할 때 실패를 생각하지 않는다. 베드로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아는 것과 그것을 삶에 적용하는 것은 같은 이야기가 아님을 보여준다.  그러면 베드로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베드로에게 자기 부인이 없었고 십자가가 없었다는 것이다. 우리 역시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기 부인이 없고 십자가가 없다면 베드로처럼 머리로는 알고 입술로는 신앙고백을 하지만 그것이 삶에 열매로 나타나지 않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훗날 베드로는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4:12-14)라고 고백한다. 베드로가 이렇게 달라졌다면 우리 역시 달라질 수 있다. 그리고 마땅히 달라져야만 한다. 고난을 참으라는 수준이 아니라 베드로는 고난을 즐거워하라고 권면한다. 참는다는 것은 억울하고 손해라는 생각이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반면에 즐거워하는 것은 나에게 유익이라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을 때 나타나는 감정이다. 참된 신앙이란 참는 것이 아니라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러면 참는 신앙에서 즐거워하는 신앙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생각에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지식이 달라져야 한다. 우리의 지각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참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고 참는 신앙생활은 기쁨을 상실한 금욕주의자 되게 할 뿐이다.우리 안에 오신 성령님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 인도하심으로 참는 신앙생활에서 즐거워하는 신앙생활로 변화시켜 주시는 분이시다. 자기를 부인하지 못했던 베드로였지만 이제 베드로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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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어리버리 서목사의 낚시 전도법 - 불특정 다수에서 특정 소수로 크리스천헤럴드2023.06.30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마태복음 22:9-10)내 주변에 있는 사람을 찾는 일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우선 몇 가지의 카테고리(category)를 정해 놓고, 그 카테고리를 통해 주변의 사람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낚시 전도법에서는 우리 주변에서 사람을 찾는 방법을 4가지 방법으로 제안한다. 이 네 가지의 카테고리의 방법에 복합적인 메트릭스적인 방법을 더하면, 더 많은 전도 대상자들을 찾을 수 있다. 우선, 일차적인 차원에서 자신의 삶을 평면적으로 펼치고 그다음 4가지 카테고리를 확장 시켜보자.1) 직업이라는 카테고리일반적으로 자신의 직업을 아무렇게나 선택하는 사람은 없다. 물론, 자신의 전공과 관계없는 직업을 선택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관심이 없거나 소질이 없거나 잘할 수 없는 일을 선택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대개 자신의 첫 번째 전공에 맞는 직업은 못 잡더라도 두 번째, 세 번째 옵션을 가지고 그나마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나 회사에 취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직장에 들어가면 그 직장에서 만나는 여러 사람이 있다. 직장 동료야말로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는 사람일 것이다. 많은 경우 가족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한다.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며 소통하는 관계이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그 사랑으로 섬길 기회가 다른 누구보다도 많을 것이다.전도는 내가 다니는 교회로 사람을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당신을 통해 하나님은 그의 사랑을 흘려보내시기를 원하신다. 당신의 따뜻한 말 한마디와 겸손한 섬김은 분명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확실하고도 분명한 메시지가 될 것이다. 직장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뿐만 아니라, 일을 통해 만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거래처와 같은 곳에서 만나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당신의 복음과 섬김이 필요한 사람들은 반드시 존재한다. 기도하며 관심을 가지고 눈을 씻고 찾기 시작하면 분명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당신의 직장 동료 가운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에 노출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의 어려움과 아픔, 고통을 진심으로 들어줄 수 있다면 이것이 전도가 아니겠는가?2) 취미생활 혹은 좋아하는 운동이라는 카테고리요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웬만하면 취미 혹은 좋아하는 운동이 하나쯤은 다 있다. 사실 혼자서 하는 취미 활동이나 운동도 있을 수 있으나, 웬만하면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서 하게 마련이다. 내가 사는 미국에도 많은 사람이 여러 가지 취미 활동과 운동을 한다. 골프는 이미 대중화 되어 있다. 골프는 적어도 4명 이상이 함께 즐기는 운동이다. 다 아는 사이끼리 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얼마든지 전도와 복음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우리 교회 집사님의 태신자 가운데에는 골프를 좋아하는 분이있다. 그 부부는 매주 집에서 가까운 골프장에서 골프를 친다고한다. 이 부부를 태신자로 품고 있는 교회 집사님과 나는 조만간 골프 연습장에서 골프를 배워 볼 생각이다. 이처럼 사이클과 같은 운동도 혼자 하는 운동이지만, 많은 경우 여러 사람과 함께 라이딩을 나간다. 이런 취미생활 혹은 운동은 사람들을 만나고, 찾는 것에 참으로 유용하다.요즘은 살면서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기면 취미활동, 운동을 하면서 산다. 믿는 성도라면 즐겁게 여가를 즐기면서도, 여가 활동을 통해 사람을 찾는 훈련을 해야 한다. 좋아하는 운동과 취미 활동을 하면서 덤으로 전도와 복음을 나눌 수 있다면 금상첨화 아니겠는가? 이렇게 쉽게 즐거움과 기쁨으로 할 수 있는 전도를 왜 마다하겠는가? 문제는 여전히 내 교회 건물에 데리고 올 생각에 사로잡히니 그때부터 머리가 아프고 전도가 힘들다고 하는 것 아니겠는가?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어느 도시에 어느 건물에 그 사람을 등록시키는가와 당신을 통해 그의 사랑을 전하고 섬기는 일 중 어느 것을 더 기뻐하고 관심 가지시겠는가? 전도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을 때는 무엇을 하던 사람에 대해 관심이 없다. 그저 자기가 하는 운동과 취미활동에 목숨을 걸고 자기만족을 위해 열심히 하고 열정을 다하지만, 하나님이 보이고 하나님의 소원이 가슴에 꽃피기 시작하면, 내가 하는 즐거운 운동과 취미 활동을 통해서 얼마든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내가 관심이 없는 것이지 결코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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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김병학 목사의 소통하는 교회- 소통은 적(敵)을 아는 것이다 크리스천헤럴드2023.06.30
    ‘나이키의 적은 닌텐도이다’라는 말이 있다. 운동화 나이키의 적은 다른 운동화 회사가 아니라 운동하지 않고 집에서만 머물게 만드는 게임기라는 해석일 것이다. 운동화 나이키는 이미 독보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다른 회사 운동화는 경쟁 상대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이키를 만드는 운동화 회사는 다른 운동화 회사를 경쟁 상대로 해서 서로 힘 빼지 않아야 하고 운동하지 않고 집에서 게임만 하게 만드는 게임기를 상대로 하여 집에서 움직이지 않고 게임만 하는 것보다 더 재밌는 것을 개발해 내야 한다.그렇다면 닌텐도의 적도 다른 게임기 회사가 아니라 자기를 적으로 삼은 나이키 운동화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적군이 누구인지 모르면 자기 편이고 협력할 대상을 적으로 삼아 서로 공멸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나이키는 적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파악했다고 볼 수 있다.그러면 교회의 적(敵)은 누구인가?작은 교회의 적은 그나마 얼마 되지 않는 교인들이 옮겨 가는 대형 교회인가? 대형 교회의 적은 근처에 있는 다른 대형 교회인가? 이렇게 자신의 적이 누구인지 잘못 파악을 하면 엉뚱한 것에 마음과 재정을 빼앗긴다. 그래서 작은 교회는 대형 교회가 자기 교인들을 빼앗아 가는 것 같은 마음에 대형 교회를 향한 원망과 분노를 감추지 않고, 대형 교회는 다른 대형 교회에 지지 않기 위하여 멀쩡한 교회 건물을 새롭게 건축하고 온갖 좋은 시설을 만들어 내는 것에 빚을 지고 헌금을 작정해서라도 진행하려 한다. 우리 교회는 저 교회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프로젝트를 개발하고 좀 더 사람들에게 잘 보여서 자기 교회로 끌어들이려고 한다. 건물뿐인가! 할 수만 있다면 선교도 이용하고 예배의 형식도 얼마든지 바꿀 수 있으며 교회 조직, 직분, 프로그램도 바꿀 수 있다. 이렇게 해서 교인들을 더 모을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안타까운 일이다.교회는 교회의 같은 편과 적군을 잘 파악해야 한다. 교회의 가장 큰 적은 누구인가? 교회를 교회답게 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들이다. 교회가 교회로서 해야 할 일들을 가로막는 것들이다. 그중에서 교회의 가장 확실한 적은 바로 ‘세속화’이다. 세속화는 교회가 예배는 드리게 하고 기도도 하고 다 하지만 기준을 변하게 만든다. 기준이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상황, 조건, 사람들의 반응 등으로 변하게 만드는 것이 세속화이다.교회가 세속화가 되면 예배나 기도나 선교 등 모든 것들이 세상의 기준으로 계획을 세우고 평가하여 결과를 얻으려고 한다. 그러면 정말 싸워야 할 적이 아니라 협력해야 해야 할, 같은 편과 싸우고 같은 편을 이기기 위하여 에너지를 쏟고 낭비하게 될 것이다.교회는 공중 권세 잡은 자의 전략을 파악하고 교회는 같은 편과 협력하고 연합하여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세력과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교회는 주변의 연약한 교회를 돌아보고 도와줘야 하며 그 교회가 제대로 설 수 있을 때 교회는 더 효과적으로 적과 싸울 수 있을 것이다.이 땅의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이다. 그리고 이 싸움에서 승리해야 한다. 김병학목사 / 주님의교회kim040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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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아모스 목사의 일터영성 - "공평 보다는 사랑을 택하라" 크리스천헤럴드2023.06.15
    성경을 읽다보면 비교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도 그렇고, 사울과 다윗의 이야기도 그렇다.  그리고 비교의 결과는 항상 비극으로 치닫게 되는 것을 보게된다.그렇다. 비교는 결코 삶이 좋아지게 하는 것에 좋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거룩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살게 되면, 누가 누구를 비교 한다는 자체가 말이 안되는 일 임을 알게된다.장미와 튜울립을 비교할수 있는가? 너와 나를 비교할수 있는가?하나님의 위대하심은 모든 분야에 걸쳐 나타나고 증명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위대하신 능력은, 단 한번도 똑같은 것을 창조하신 적이 없으시다는 사실이다. ‘나’ 라는 존재는, 이전에도 이 후에도 없을, 지금, 이 순간을 살고있는 내가 유일한 ‘나’ 인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나를 걸작품 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는가.마태복음에 나오는 포도원 일꾼의 비유를 보자. 일찍부터 일한 일꾼이  가장 나중에 합류해서 일한 일꾼과 동일한 품삯을 받게 되자 그 불공평함에 항의를 한다.약속한 대로 정확한 임금을 지불 받았음에도 그들은 불공평 함을 호소하고 있다. 비교했기 때문이다. 부부사이에도 이런 불공평의 문제들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것을 많이 보게 된다. ‘Fairness’ (공평) 이라는 단어는 깨끗하고 예쁜 단어이다.하지만 부부 사이에 이 Fairness 를 너무 따지다 보면, 부부사이가 결코 좋아질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결국 공평함을 따지는 것이 비교함과 같은 행위하는 것을 잊지말자나는 나가서 죽어라 일을 하는데, 어떻게 배우자인 너는 이렇게 편한대로만 행동하는가? 물론 이런 생각이 들수 있지만, 부부간에 가져야 하는 정서는 Fairness 가 아니라 사랑 이어야 한다.사랑은 절대 공정하지 않다. 모든것을 다 주고라도, 모든 것을 다 희생하고라고 내 사랑의 대상의 삶이 좋아진다면 뭐든지 할수 있는 것이 사랑의 관계 아닌가.사랑과 Fairness 는 결코 공존할수 없는 단어임을 명심하자. 사랑을 끝까지 붙잡겠다고 결심했다면 Fairness는 버리자. 그래야 관계가 회복되고 사랑이 더 자라나게 된다.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나’는 대단한 ‘나’ 이다. 비교불가한 존재이다.그것이 정말 깨달아진 사람은, 내가 그렇듯 너도 대단한 존재임을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나면 당연히 누구와도 비교함을, 비교됨을 거부하게 된다.당신 자신을 타인과 비교하지 말아라. 그것은 결국 당신 자신을 모욕하는 것이다. 대신에 예수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묵상하고 성찰함이 필요하다.잊지말자. 비교는 마귀가 교묘하게 우리를 파멸로 이끌어 가기 위해 거짓말과 더불어 가장 즐겨 사용하는 도구라는 사실을.열등감을 버리라. 우월감도 버리라. 오로지 내 안에 있는 복음으로 인해 감격하고 기뻐하라. 그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시요,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이시다.  복음이 능력이 된다는 말은, 내가 예수님 처럼 산다는 말이며, 내가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갈때에만 능력이 나타나게 됨을 명심하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의 사람이 되라고 부르셨다.사랑의 사람은 결코 자신을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는다. 누구를 만나도 그 사람의 위대함에 박수를 쳐 주는 사람이 사랑의 사람이다.잊지말자. 모든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나의 나된것도, 너의 너 된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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