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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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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조영석 목사의 생각하며 기도하며- 준 비 크리스천헤럴드2023.06.30
    집으로 손님이 찾아온다. 중요한 손님인 만큼 아내는 정성을 다해 손님 맞을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제일 먼저 집안을 정리한다. 손님이 오기 일주일 전부터 아내가 부지런히 집을 치운다.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구석까지 신경을 써서 청소를 한다. 진공청소기가 온 집안을 다니며 먼지를 빨아들인다.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청소는 도움을 받아서라도 해결한다. 초인종 소리에 문을 열어보니 유니폼을 입은 두 남자가 서있다. 카펫 샴푸하러 왔단다. 나는 그 길로 집에서 쫓겨나 두어 시간 동안 밖에서 보내야 했다. 아이들이 이번 주 많이 혼났다. 평소에 예쁘고 상냥했던 엄마는 어디로 갔는지, 갑자기 신경이 곤두서서 아이들을 노려보며 왜 이렇게 방이 지저분하냐며 야단친다. 내가 보기엔 늘 그랬는데 아내는 마치 오늘 처음 알게 된 것처럼 기가 막혀 한다. 나도 이번 주 많이 혼났다. 세수를 하는데 왜 그렇게 물을 여기저기 다 튀면서 하냐며 잔소리를 들었다. 결혼생활 25년 동안 한 번도 세수하는 방법을 바꾼 적이 없는데 이날은 특별히 사방에 물을 많이 튀게 한 것으로 오해 받았다. 이런 얘기를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아이들이 맞았다. 저녁에 집에 돌아왔을 때 집안에 감도는 살벌한 분위기를 미리 감지하고 내게도 불똥이 튈까 조용히 내 방으로 들어갔다. 아이들이 혼난 이유를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방 정돈 상태와 연관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또 뭐더라..아..그러고 보니 나도 맞았다. 내 서재와 연관이 있었던 것 같다. 손님 맞기 하루 전, 집안이 눈부시게 깨끗해 졌다. 솔직히 고백하는 건데 조금 낯설었다. 평소에 이렇게 깨끗하게 치워가며 살고 있지는 않는다. 아이들이 셋에 애완견 하나까지, 사실 그것이 가능하지도 않다. 그런데 오늘은 구석 구석 어디를 보아도 정리 정돈 되어있지 않은 곳이 없다. 평소와 너무 다른 모습에 익숙하지 않아서 소파에 앉을 때 쿠션이 흐트러질 까봐 부담스럽기까지 했다. 나와 아이들이 달라진 집안 환경에 적응하기 어려워하고 있을 때 아내가 한마디 한다. “이제야 사람 사는 집 같네” 손님 맞을 준비는 모두 끝났다. 일주일 전부터 준비하며 기다렸던 손님들도 드디어 도착했다. 그 중 한 분이 집안을 잠깐 둘러보더니 이내 아내 칭찬을 한다. 주일날 교회에서 보는 모습처럼 집도 깔끔하리라 예상하였었는데 과연 그렇다는 것이다. 아내는 아니라고 웃으면서도 칭찬을 받아들이는 듯 겸연쩍게 웃는다.   즐거운 시간을 마치고 밤이 되어 손님들은 모두 떠났고, 손님맞이는 그렇게 잘 마쳤다. 아내도 결과에 만족해 한다. 나와 아이들도 엄마가 정상으로 돌아온 것 같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참으로 다행이다. 가족모두 고생은 좀 되었지만 그래도 손님 오시는 날을 미리 알아서 이렇게 준비를 잘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주님 오시는 날은 우리가 알 수 없으니 우리의 마음의 집은 어떻게 준비해야 해야 하는가. 늘 깨어 있어 긴장을 놓지 않고 항상 준비하며 사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2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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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최재홍 목사의 하루한장 말씀 - “확신으로 드리는 기도” 크리스천헤럴드2023.06.30
    그 중에도 말씀과 기도는 일생동안 우리 신앙을 대변해주는 단어와도 같습니다. 디모데후서4:5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고 증거합니다. 거룩한 말씀이 우리 영혼의양식이고 간절한 기도는 성도의 영적 호흡이기 때문입니다. 한 영혼이 거룩함으로 강건케되기위해서는 영혼의 양식과 호흡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강조하고 언급해도 지나치지 않을 말씀과 기도는 우리 신앙의 양대산맥과 같습니다.이 세상을 이기는 힘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확신에서 시작됩니다. 참 중요한 부분입니다. 마찬가지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으려면 확신으로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확신을 가진 성도는 하나님의신실하심과 사랑을 믿습니다. 그리고 확신하는 사람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의심도 하지 않고불안해 하지도 않습니다.그러면 우리가 불안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내일에 대한 걱정과 염려 때문입니다. 부모와 함께 있는 어린아이는 걱정이 없습니다. 웃고 평안하고 얼굴이 밝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안 보일 때 아이는놀지도 못하고 잠도 못 자고 불안해 하고 울음보가 터집니다. 장난감이나 놀이는 잠깐의 임시방편일뿐입니다. 근본적인 문제해결 방법이 못됩니다. 부모의 모습이나 음성을 듣기 전에는 울고 있는어린아이를 달랠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가 되시면 내 앞에 놓인문제가 어렵고 처한 상황이 힘들어도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확신이 있다면, 무슨 일이든 감당하고 이겨낼 수 있습니다. 견뎌낼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확신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믿음의 표현입니다.하나님은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무도 도와주는 이 없이 홀로 던져져외롭고 처참한 인생같다고 한탄하는 사람도 사랑의 하나님이 거두어 주시고 지켜 주십니다. 결코 빈손들고 주저 앉아서 울게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눈을 떼지 않으시고 살펴보시는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사랑과 은혜를 부어주시고 영원한 목자가 되어 주십니다.우리 미래를 예정과 섭리가운데 인도해 주십니다. 혹 내가 불안하고 두렵다면, 그래서 기도를 드리지못한다면 나는 지금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신뢰가 부족한 상태입니다. 우리 마음이 불안하고조급해지거나 혹은 의심이 가득하면 기도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티켓팅을하고 시간에 맞춰서 자리에 앉으면 내가 원하는 목적지에 예정된 시간에 도착하게 됩니다. 이것은너무나 당연하기에 의심할 수도 없습니다.우리의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구세주이십니다.성령님은 우리 기도를 듣고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드리며 흘리는 눈물과 간절함을 아십니다. 우리의 모든 형편과 사정을 아시고 다가와 주시고 우리의 이름과 생각과 눈물과 고통을 아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가득차면 확신에 찬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확신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 믿음의 표현입니다.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십시오. 이제까지는 매일 눈물로,불안함으로, 억지 떼를 쓰는 기도를 드렸다면, 이제부터는 감사와 기쁨으로 드리는 기도, 담대함으로확신에 찬 기도를 드리십시오. 아버지 하나님께 칭찬듣고 모두 응답받는 생애가 되시길 바랍니다. 샬롬!“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사도행전 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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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신선묵 교수의 교수칼럼 - 독특성과 영성 유형 (1) 크리스천헤럴드2023.06.30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지으실 때에 한사람 한사람을 독특하게 지어주셨다. 이것처럼 놀랍고도 귀중한 사실은 없다. 우리의 독특성은 우리 삶의 전반에 걸쳐서 나타난다. 그래서 우리의 독특성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독특성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의 삶과 사역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오늘날 사람들의 개성에 대한 연구가 많이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그 개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 자신을 보호하고 개발하고 또 다른 사람들과 팀으로 일할 때에 차이를 알고 존중함을 통하여 효과적인 팀워크를 가질 수가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도자로 일할 때에도 사람들의 개성을 볼 수 있고 그것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일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가정에서는 자녀 교육을 할 때에도 바른 가치를 가르쳐야하지만 동시에 자녀들의 개성을 존중하고 보호하고 개발시켜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삶의 전반적인 부분에서 개성을 이해하기 위한 여러가지 틀들이있다. MBTI, DISC, 애니어그램, 기질론, Strengthquest 등 많이 사용하는 도구들이다. 어떤 하나의 도구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고 각각의 도구들이 가지고 있는 장점들이 있다. 이런 것을 통하여 우리 각자의 독특성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상당히 많은 도움을 받을 수가 있다.빌 하이벨 목사는 The Leader’s Pathway 라는 설교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에서 다른 어떤 사람의 모습의 기준치로 자신을 평가하지 않고 자기 자신이 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7가지 유형의 영성을 제시하였다. 첫째는 관계적인 길이다. 몇몇 사람들은 혼자하려고 해보지만 되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길은 관계적인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영성 계획을 세울 때에 “관계적인 필요”를 고려해야 한다. 둘째는 지적인 길이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일이 발생하기 이전에 마음이 완전히 활동해야 한다. 분석적으로 도전받아야 한다. 그들의 마음과 의지는 그들이 확신하기 이전에 움직이지 않는다. 일단 확신이 되면 마음과 의지는 따라온다.  예를 들면 루터, 칼빈, 바울과 같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영성 형성 계획을 세울 때에 그들의 “지적인 필요”가 고려되어져야 한다. 셋째는 섬기는 길이다. 조용히 일관성있게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일을 한다. 그들은 하나님께 친밀함을 느낄 때에 행동한다. 그들은 섬김을 할 때에 하나님께 가까이 있다는 느낌을 갖는다고 말한다. 이런 사람들이 영성 훈련 계획을 세울 때에는 그들의 “섬김의 필요”를 고려해야 한다. 넷째는 묵상의 길이다. 교회 역사를 통하여 어떤 사람들은 다른 드럼 소리에 따라 움직였다. 묵상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홀로하는 시간을 지키고 사람들과 활동들은 그들을 고갈시키는 경향이 있다. 성경, 서적, 시,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머물기 등을 좋아하고 홀로 기도하고 찬양하기 등으로 시간을 보내고 하나님으로부터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하나님과 신비적으로 함께 할 수 있다. 그들은 종종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있으며 주로 모든 사람의 양심으로 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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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샘신칼럼- 베드로와 십자가 크리스천헤럴드2023.06.30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대한 오해와 무지는 곧 기독교에 대한 오해, 무지임을 알아야만 한다. 현대 변질된 복음은 십자가에 대한 오해와 무지에서 나온 결과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대한 오해와 무지는 기독교에서 십자가를 사라지게 했다. 즉 십자가가 없는 기독교가 된 것이다. 십자가가 없는 기독교는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가 아니다. 십자가 없는 기독교는 예수 없는 기독교를 만들어냈다. 그러면 예수 없는 기독교란 무엇인가? 예수님의 자리에 스스로 앉아있는 기독교다. 그 사실을 베드로를 통해 확인할 수 있겠다. 베드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주님의 질문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마16:15-16) 대답을 함으로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들었다.  그리고 주님은 이어서 주님이 고난을 받고 부활할 것을 말씀하셨다. 그때 베드로는 “주여 그리마옵소서”라고 항변한다.  그러자 주님은 베드로를 책망하시는 말씀이 나온다.  본문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몇가지 사실을 생각하게 한다.사탄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통해 우리를 넘어지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를 향한 사탄의 소원이 있다면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 사탄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사용한다. 이 사탄의 전략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란 가장 소중한 사람이며 그들의 제안을 거절하기 어렵고 매우 인간적인 호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넘어진다”는 표현을 사용하시는데 주님이 생각하는 넘어짐은 무엇일까?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주님이 생각하는 넘어짐이다.  흔히 믿는 사람이 간음을 하면 넘어졌다고 말한다.  문제는 간음만 넘어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못하면 그것 역시 넘어진 것이다.분명히 하나님의 뜻임을 알면서도 순종하지 못했다면 그 일이 어떤 일이든 넘어진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넘어뜨리는 것이 믿는 우리를 향한 사탄의 뜻이다. 기가막힐 신앙고백이 있었지만 베드로는 자기를 부인하지 못했다.  베드로는 주님으로부터 극찬을 듣는 신앙고백 후에 주님을 넘어뜨리는 일에 사탄의 도구가 되고 말았다. 칭찬과 책망이 바로 이웃에 있었고 성공과 실패가 바로 함께 나타났다.  우리는 칭찬, 성공 옆에 책망과 실패가 있음을 망각함으로 칭찬들을 때, 성공할 때 넘어니다.  칭찬들을 때 책망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성공할 때 실패를 생각하지 않는다. 베드로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아는 것과 그것을 삶에 적용하는 것은 같은 이야기가 아님을 보여준다.  그러면 베드로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베드로에게 자기 부인이 없었고 십자가가 없었다는 것이다. 우리 역시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기 부인이 없고 십자가가 없다면 베드로처럼 머리로는 알고 입술로는 신앙고백을 하지만 그것이 삶에 열매로 나타나지 않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훗날 베드로는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4:12-14)라고 고백한다. 베드로가 이렇게 달라졌다면 우리 역시 달라질 수 있다. 그리고 마땅히 달라져야만 한다. 고난을 참으라는 수준이 아니라 베드로는 고난을 즐거워하라고 권면한다. 참는다는 것은 억울하고 손해라는 생각이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반면에 즐거워하는 것은 나에게 유익이라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을 때 나타나는 감정이다. 참된 신앙이란 참는 것이 아니라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러면 참는 신앙에서 즐거워하는 신앙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생각에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지식이 달라져야 한다. 우리의 지각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참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고 참는 신앙생활은 기쁨을 상실한 금욕주의자 되게 할 뿐이다.우리 안에 오신 성령님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 인도하심으로 참는 신앙생활에서 즐거워하는 신앙생활로 변화시켜 주시는 분이시다. 자기를 부인하지 못했던 베드로였지만 이제 베드로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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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어리버리 서목사의 낚시 전도법 - 불특정 다수에서 특정 소수로 크리스천헤럴드2023.06.30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마태복음 22:9-10)내 주변에 있는 사람을 찾는 일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우선 몇 가지의 카테고리(category)를 정해 놓고, 그 카테고리를 통해 주변의 사람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낚시 전도법에서는 우리 주변에서 사람을 찾는 방법을 4가지 방법으로 제안한다. 이 네 가지의 카테고리의 방법에 복합적인 메트릭스적인 방법을 더하면, 더 많은 전도 대상자들을 찾을 수 있다. 우선, 일차적인 차원에서 자신의 삶을 평면적으로 펼치고 그다음 4가지 카테고리를 확장 시켜보자.1) 직업이라는 카테고리일반적으로 자신의 직업을 아무렇게나 선택하는 사람은 없다. 물론, 자신의 전공과 관계없는 직업을 선택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관심이 없거나 소질이 없거나 잘할 수 없는 일을 선택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대개 자신의 첫 번째 전공에 맞는 직업은 못 잡더라도 두 번째, 세 번째 옵션을 가지고 그나마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나 회사에 취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직장에 들어가면 그 직장에서 만나는 여러 사람이 있다. 직장 동료야말로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는 사람일 것이다. 많은 경우 가족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한다.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며 소통하는 관계이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그 사랑으로 섬길 기회가 다른 누구보다도 많을 것이다.전도는 내가 다니는 교회로 사람을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당신을 통해 하나님은 그의 사랑을 흘려보내시기를 원하신다. 당신의 따뜻한 말 한마디와 겸손한 섬김은 분명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확실하고도 분명한 메시지가 될 것이다. 직장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뿐만 아니라, 일을 통해 만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거래처와 같은 곳에서 만나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당신의 복음과 섬김이 필요한 사람들은 반드시 존재한다. 기도하며 관심을 가지고 눈을 씻고 찾기 시작하면 분명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당신의 직장 동료 가운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에 노출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의 어려움과 아픔, 고통을 진심으로 들어줄 수 있다면 이것이 전도가 아니겠는가?2) 취미생활 혹은 좋아하는 운동이라는 카테고리요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웬만하면 취미 혹은 좋아하는 운동이 하나쯤은 다 있다. 사실 혼자서 하는 취미 활동이나 운동도 있을 수 있으나, 웬만하면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서 하게 마련이다. 내가 사는 미국에도 많은 사람이 여러 가지 취미 활동과 운동을 한다. 골프는 이미 대중화 되어 있다. 골프는 적어도 4명 이상이 함께 즐기는 운동이다. 다 아는 사이끼리 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얼마든지 전도와 복음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우리 교회 집사님의 태신자 가운데에는 골프를 좋아하는 분이있다. 그 부부는 매주 집에서 가까운 골프장에서 골프를 친다고한다. 이 부부를 태신자로 품고 있는 교회 집사님과 나는 조만간 골프 연습장에서 골프를 배워 볼 생각이다. 이처럼 사이클과 같은 운동도 혼자 하는 운동이지만, 많은 경우 여러 사람과 함께 라이딩을 나간다. 이런 취미생활 혹은 운동은 사람들을 만나고, 찾는 것에 참으로 유용하다.요즘은 살면서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기면 취미활동, 운동을 하면서 산다. 믿는 성도라면 즐겁게 여가를 즐기면서도, 여가 활동을 통해 사람을 찾는 훈련을 해야 한다. 좋아하는 운동과 취미 활동을 하면서 덤으로 전도와 복음을 나눌 수 있다면 금상첨화 아니겠는가? 이렇게 쉽게 즐거움과 기쁨으로 할 수 있는 전도를 왜 마다하겠는가? 문제는 여전히 내 교회 건물에 데리고 올 생각에 사로잡히니 그때부터 머리가 아프고 전도가 힘들다고 하는 것 아니겠는가?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어느 도시에 어느 건물에 그 사람을 등록시키는가와 당신을 통해 그의 사랑을 전하고 섬기는 일 중 어느 것을 더 기뻐하고 관심 가지시겠는가? 전도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을 때는 무엇을 하던 사람에 대해 관심이 없다. 그저 자기가 하는 운동과 취미활동에 목숨을 걸고 자기만족을 위해 열심히 하고 열정을 다하지만, 하나님이 보이고 하나님의 소원이 가슴에 꽃피기 시작하면, 내가 하는 즐거운 운동과 취미 활동을 통해서 얼마든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내가 관심이 없는 것이지 결코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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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김병학 목사의 소통하는 교회- 소통은 적(敵)을 아는 것이다 크리스천헤럴드2023.06.30
    ‘나이키의 적은 닌텐도이다’라는 말이 있다. 운동화 나이키의 적은 다른 운동화 회사가 아니라 운동하지 않고 집에서만 머물게 만드는 게임기라는 해석일 것이다. 운동화 나이키는 이미 독보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다른 회사 운동화는 경쟁 상대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이키를 만드는 운동화 회사는 다른 운동화 회사를 경쟁 상대로 해서 서로 힘 빼지 않아야 하고 운동하지 않고 집에서 게임만 하게 만드는 게임기를 상대로 하여 집에서 움직이지 않고 게임만 하는 것보다 더 재밌는 것을 개발해 내야 한다.그렇다면 닌텐도의 적도 다른 게임기 회사가 아니라 자기를 적으로 삼은 나이키 운동화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적군이 누구인지 모르면 자기 편이고 협력할 대상을 적으로 삼아 서로 공멸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나이키는 적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파악했다고 볼 수 있다.그러면 교회의 적(敵)은 누구인가?작은 교회의 적은 그나마 얼마 되지 않는 교인들이 옮겨 가는 대형 교회인가? 대형 교회의 적은 근처에 있는 다른 대형 교회인가? 이렇게 자신의 적이 누구인지 잘못 파악을 하면 엉뚱한 것에 마음과 재정을 빼앗긴다. 그래서 작은 교회는 대형 교회가 자기 교인들을 빼앗아 가는 것 같은 마음에 대형 교회를 향한 원망과 분노를 감추지 않고, 대형 교회는 다른 대형 교회에 지지 않기 위하여 멀쩡한 교회 건물을 새롭게 건축하고 온갖 좋은 시설을 만들어 내는 것에 빚을 지고 헌금을 작정해서라도 진행하려 한다. 우리 교회는 저 교회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프로젝트를 개발하고 좀 더 사람들에게 잘 보여서 자기 교회로 끌어들이려고 한다. 건물뿐인가! 할 수만 있다면 선교도 이용하고 예배의 형식도 얼마든지 바꿀 수 있으며 교회 조직, 직분, 프로그램도 바꿀 수 있다. 이렇게 해서 교인들을 더 모을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안타까운 일이다.교회는 교회의 같은 편과 적군을 잘 파악해야 한다. 교회의 가장 큰 적은 누구인가? 교회를 교회답게 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들이다. 교회가 교회로서 해야 할 일들을 가로막는 것들이다. 그중에서 교회의 가장 확실한 적은 바로 ‘세속화’이다. 세속화는 교회가 예배는 드리게 하고 기도도 하고 다 하지만 기준을 변하게 만든다. 기준이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상황, 조건, 사람들의 반응 등으로 변하게 만드는 것이 세속화이다.교회가 세속화가 되면 예배나 기도나 선교 등 모든 것들이 세상의 기준으로 계획을 세우고 평가하여 결과를 얻으려고 한다. 그러면 정말 싸워야 할 적이 아니라 협력해야 해야 할, 같은 편과 싸우고 같은 편을 이기기 위하여 에너지를 쏟고 낭비하게 될 것이다.교회는 공중 권세 잡은 자의 전략을 파악하고 교회는 같은 편과 협력하고 연합하여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세력과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교회는 주변의 연약한 교회를 돌아보고 도와줘야 하며 그 교회가 제대로 설 수 있을 때 교회는 더 효과적으로 적과 싸울 수 있을 것이다.이 땅의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이다. 그리고 이 싸움에서 승리해야 한다. 김병학목사 / 주님의교회kim040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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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아모스 목사의 일터영성 - "공평 보다는 사랑을 택하라" 크리스천헤럴드2023.06.15
    성경을 읽다보면 비교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도 그렇고, 사울과 다윗의 이야기도 그렇다.  그리고 비교의 결과는 항상 비극으로 치닫게 되는 것을 보게된다.그렇다. 비교는 결코 삶이 좋아지게 하는 것에 좋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거룩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살게 되면, 누가 누구를 비교 한다는 자체가 말이 안되는 일 임을 알게된다.장미와 튜울립을 비교할수 있는가? 너와 나를 비교할수 있는가?하나님의 위대하심은 모든 분야에 걸쳐 나타나고 증명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위대하신 능력은, 단 한번도 똑같은 것을 창조하신 적이 없으시다는 사실이다. ‘나’ 라는 존재는, 이전에도 이 후에도 없을, 지금, 이 순간을 살고있는 내가 유일한 ‘나’ 인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나를 걸작품 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는가.마태복음에 나오는 포도원 일꾼의 비유를 보자. 일찍부터 일한 일꾼이  가장 나중에 합류해서 일한 일꾼과 동일한 품삯을 받게 되자 그 불공평함에 항의를 한다.약속한 대로 정확한 임금을 지불 받았음에도 그들은 불공평 함을 호소하고 있다. 비교했기 때문이다. 부부사이에도 이런 불공평의 문제들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것을 많이 보게 된다. ‘Fairness’ (공평) 이라는 단어는 깨끗하고 예쁜 단어이다.하지만 부부 사이에 이 Fairness 를 너무 따지다 보면, 부부사이가 결코 좋아질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결국 공평함을 따지는 것이 비교함과 같은 행위하는 것을 잊지말자나는 나가서 죽어라 일을 하는데, 어떻게 배우자인 너는 이렇게 편한대로만 행동하는가? 물론 이런 생각이 들수 있지만, 부부간에 가져야 하는 정서는 Fairness 가 아니라 사랑 이어야 한다.사랑은 절대 공정하지 않다. 모든것을 다 주고라도, 모든 것을 다 희생하고라고 내 사랑의 대상의 삶이 좋아진다면 뭐든지 할수 있는 것이 사랑의 관계 아닌가.사랑과 Fairness 는 결코 공존할수 없는 단어임을 명심하자. 사랑을 끝까지 붙잡겠다고 결심했다면 Fairness는 버리자. 그래야 관계가 회복되고 사랑이 더 자라나게 된다.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나’는 대단한 ‘나’ 이다. 비교불가한 존재이다.그것이 정말 깨달아진 사람은, 내가 그렇듯 너도 대단한 존재임을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나면 당연히 누구와도 비교함을, 비교됨을 거부하게 된다.당신 자신을 타인과 비교하지 말아라. 그것은 결국 당신 자신을 모욕하는 것이다. 대신에 예수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묵상하고 성찰함이 필요하다.잊지말자. 비교는 마귀가 교묘하게 우리를 파멸로 이끌어 가기 위해 거짓말과 더불어 가장 즐겨 사용하는 도구라는 사실을.열등감을 버리라. 우월감도 버리라. 오로지 내 안에 있는 복음으로 인해 감격하고 기뻐하라. 그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시요,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이시다.  복음이 능력이 된다는 말은, 내가 예수님 처럼 산다는 말이며, 내가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갈때에만 능력이 나타나게 됨을 명심하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의 사람이 되라고 부르셨다.사랑의 사람은 결코 자신을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는다. 누구를 만나도 그 사람의 위대함에 박수를 쳐 주는 사람이 사랑의 사람이다.잊지말자. 모든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나의 나된것도, 너의 너 된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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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샘신 칼럼 -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마음이라” 크리스천헤럴드2023.06.15
    주님께서 산상수훈의 말씀을 마쳤을 때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한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7:28-29)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서기관들의 가르침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마치 어떤 음식점에 가서 식사를 하는데 그곳 음식이 다른 음식점과 차이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맛이 있다”라고 표현하는 것 처럼 사람들은 그 차이를 금방 알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서기관의 가르침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1-22) “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5:27-28)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3-44) “너희가 들었으나…”라는 표현과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지금 예수님 앞에 있는 청중들은 서기관들로부터 구약 성경을 이미 오랫동안 들어온 사람들이다. 서기관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 너희가 들었으나…” 부분이다. 그런데 이제 주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바로 그 부분이다. 즉 본문은 같았지만 해석이 다른 것이다.  해석이 다르니 적용 또한 다르게 나타날 수 밖에 없다. 그러면 결정적인 차이가 무엇일까?서기관들이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행위를 다루었다면 예수님은 행위가 아닌 그 행위를 만들어내는 마음을 다루었던 것이다. 서기관들은 간음이라는 행위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 간음을 만들어내는 음욕을 다루었다.  간음이 행위요 열매요 결과라면 음욕을 뿌리요 원인이요 마음이었던 것이다. 만일 우리가 자녀를 바라봄에 있어 겉으로 나타나는 행위만을 보고 평가한다면(그것이 칭찬이든 책망이든 상관없이) 서기관과 같은 가르침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바리새인과 같은 속과  겉이 다른 사람을 만들어 낼 뿐이고 말이다. 행위라는 기준으로 보면 세리나 창기는 바리새인들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마음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 평가가 전혀 다르게 된다. 그 당시 모든 사람들은 행위라는 관점에서 사람들을 판단했다.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주님은 전혀 다른 기준으로 보셨다. 그러자 전혀 다른 평가가 나왔고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행위보다 마음을 보아야 할 이유를 설명하신다. 모든 행위는 마음에서 나온 열매라는 것이다. 주님은 그것을 나무에 비유해 말씀하신다. 소나무는 사과라는 열매를 맺을 수 없으며  그 누구도 소나무에게서 사과를 기대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의 삶에서는 이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다.마치 소나무가 사과를 맺을 수 있는 것처럼 스스로와 다른 사람들을 대하고 있다. 불가능한 일을 계속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인간관계 속에서 마음을 보고 다루면 상대방을 이해하게 되고 감사하게 되며 불쌍히 여기게 된다.상대방은 그렇게 보아주는 사람이 너무나 고마울 것이다. 마음을 보지 않고 행위만을 보면 비난하게 되고 통제하려고 하며 상대방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마음을 얻을 수 없다면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다. 반면에 마음을 얻었다면 그 사람의 전부를 얻은 것이다. 이제 이 말씀을 ‘마음’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결국 인생은 우리의 마음에 이 시대의 유행을 담을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담을 것인가의 싸움이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이 시대의 가치관과 유행으로 가득차 있으면 그런 열매를 맺을 것이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뜻, 즉 말씀이 가득차 있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열매를 맺을것이다. 결국 마음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의 싸움이다. 이 싸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이 싸움의 승패는 우리 스스로의 선택에 달려 있다.그것이 우리의 매 순간 순간 선택의 문제이기에 그 결과 역시 우리 책임이다.그래서 주님은 지금도 칭찬도 하시며 책망도 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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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송경화 교수 칼럼 - 상처를 이겨낼 수 있는 세 가지의 힘2: 안전 크리스천헤럴드2023.06.18
    우리 모두는 꼭 채워져야 하는 세 가지의 정서적 필요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아주 어릴 때부터 양육자(부모님)를 통해 충분히 채워져야 한다. 이 필요가 채워지지 않으면 성인이 되어서도 상처에 취약해지고 자신감이 없는 모습을 가지게 된다. 이 세 가지 필요의 두번째는 바로 안전감이다.우리는 어디에 있든지 나 자신을 위협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마음 편하게 쉴 수 있어야한다. 그런데 이 필요가 충분히 채워지지 않은 경우 뭔가 나쁜 일이 생길 것만 같아서 늘 불안하고조심하며 작은 일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곤 한다.안전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물리적, 생리적인 안전이다. 먹을 것과 거주할 장소, 입을 옷 등이 충분하게 공급되어야 우리는 신체적으로 안전하다. 또한 나를 공격하거나 상해를 입힐 어떤 것들도 주변에 없어야 안전하다. 추운 거리에 옷과 먹을 것이 없는 상태로 떠돌아 다닌다거나, 사나운 개가 나를 향해 달려든다면, 나는 신체적으로 안전감을 느낄 수 없다. 내가 연약한 상태에 있는데 누군가 나를 보호해 주는 사람이 옆에 없다면 이 역시 안전감을 느낄 수 없는 상황이다.반대로, 편안하고 잘 정리된 방의 푹신한 침대에서 누워서 음악을 들으며 평화를 누리고 있다면 신체적인 안전감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부모가 자녀를 양육할 때 이와 같은 신체/생리적 안전을 반드시 보장해 주는 것은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두번쨰의 안전은 정서적 안전이다. 이것은 나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존중받고 인정받고 공감받는다는 느낌을 말한다. 누가 나를 미워하거나 무관심하거나 욕하거나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도 정서적 안전감에 동반된다. 부모가 아이를 양육하는 과정에서 아이에게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하고, 아이를 공감하고 수용해 주며 존중을 표현해 준다면, 그리고 어떤 조건을 다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 아이 자체로 인해 사랑해 준다면, 그 아이는 자라면서 정서적 안전감을 충만하게 느낄 수 있다.하지만 많은 경우, 정서적 안전감이 결핍되어 성장하기도 한다. 너무 바쁘거나 이혼 혹은 별거 등의 부부 문제로 인한 부모의 부재, 조건적인 부모의 사랑과 인정, 무표정, 우울, 불안, 짜증, 분노 등이 가득한 부모의 표정, 부모의 학대나 방임 등은 정서적인 안전감을 위협한다. 정서적인 안전감이 결핍된 아이들은 특히 인간관계에서의 불안이 크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많이 살피고 혹시라도 남들의 미움을 받을까 봐 전전긍긍하게 된다. 또한 큰 문제가 없는 상황에서도 왠지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불안에 노심초사해 한다.안전감은 살면서 겪을 수밖에 없는 어떤 모진 풍파에도 견뎌낼 수 있는 내적인 힘을 만드는 기초가 된다. 안전감을 충분히 경험하며 자란 사람은 용기와 끈기로 흔들림 없이 전진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안전감은 생애 초기에 부모나 양육자로부터 충분히 공급되어야 한다.그러나 모든 부모가 완벽하게 안전감을 주지는 못한다. 부모들도 인간이기에 약점과 한계가 있고 자신의 정서적인 문제들로 씨름하면서 자녀들에게 충분한 안전감을 주기 어려울 때가 많다.사실 사람이란 안전감을 담보하기에는 너무도 신뢰하기 어려운 존재이다. 연약함과 죄성 때문이다. 진정한 안전 지대는 흔들림 없고 든든하여 믿을만한 존재여야 한다. 그런 부모를 가진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혜택에 감사하면 된다. 그런 부모를 갖지 못한 사람은 한탄과 원망을 할 게 아니라 더 든든한 안전 기지를 찾으면 된다.성경의 시편 기자는 이런 고백을 한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시 4:8)비록 부모가 연약해서 충분한 안전감을 형성해 주지 못했다 해도, 하나님께 의지하여 믿음을 드린다면 결핍되었던 안전감을 충분하게 채워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안전감은 어떤 시련이 와도 잘 극복해낼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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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조영석 목사 칼럼 - 추억 만들기 크리스천헤럴드2023.06.15
    졸업시즌이다. 어딜가든 졸업 이야기와 포스팅한 사진들로 가득하다. 특히 첫아이 졸업식을 맞는 부모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생각이 많아 보인다. 어린 자녀가 인생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처음 경험하며 심정이 복잡해 보인다. 나도 그랬기에 이맘때쯤이면 큰딸이 졸업했을 때가 떠오른다. 특히 큰딸을 위해 준비했던 졸업 여행이 기억이 난다.그해에 내게는 가장 기억에 남는 가족여행을 다녀왔다. 이유는 특별한 목적이 있었던 여행이어서였다. 이민생활이라 바쁘고, 빠듯하니 가족여행이라 해봐야 가까운 곳으로 며칠 다녀오는 게 전부였는데 당시 큰맘 먹고 멀리 동부로 일주일 동안 다녀왔다. 식구 다섯명의 항공비용과 오래 집을 비우는 것도 부담이었지만 큰 맘 먹고 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커가는 아이들과 얼마 있으면 시작될 이별을 준비하는 ‘추억 만들기’ 여행이어서 그랬다. 그 첫 시작은 큰딸을 위한 졸업여행이었다.큰딸이 고3이 되자 이제 대학에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품 안의 자식인줄 알았는데 어느새 커서 한집에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이별 아닌 이별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문득 아이가 가지고 있는 아빠의 기억은 어떤 것일까 생각해 보았다.자녀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가장 소중한 선물이라 말했지만 나의 행동은 일치하지 않았다. 돌아보니 잘해준 적보다 못해준 적이 더 많았고, 상처 준 일들도 적지 않았다. 첫아이라 엄하게 키웠고, 참을성 없는 아빠의 모난 성격 때문에 많이 혼나며 컸다. 예뻐했지만 잘못 키우면 안된다는 불안감에 지나치게 아이를 잡은 적이 많았다. 그래서 간혹 딸의 얼굴에서 그늘이 보일 때면 마음이 아팠다.이제 와서 지난 상처들을 꺼내어 일일이 사과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아무 노력도 하지않고 보낼 수도 없었다. 머지않아 완전히 자립할 아이와 가깝게 보낼 수 있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들을 그냥 지나가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지금부터라도 부지런히 좋은 추억을 만들어줘야겠다는 생각에, 뒤늦은 노력을 하기 시작했다. 나쁜 기억들은 어쩔 수 없어도, 좋은 추억들을 많이 만들어주어, 그 기억들이 오래 남기를 바랐다. 그래서 살다가 힘든 날을 만나면 무섭게 화내는 아빠가 아니라, 마음을 열 수 있는 아빠가 생각나 언제든 집으로 찾아올 수 있기를 원했다.다 큰 숙녀에게 어렸을 때처럼 스킨십을 할 수는 없고, 현실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주말, 가족과 함께 가까운 쇼핑몰에 가서 외식도 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고 집을 나섰다. 그런데 큰딸의 반응이 시큰둥했다. 꾹 참고 다른데 가고 싶으면 그렇게 하자며, 점심도 먹고 싶은 데로 가자며 좋게 설득했지만, 이런 아빠의 노력을 고마워 하기는커녕 되레 짜증을 내는 딸을 보며 결국 내가 터져버렸다. 그 동안 쌓였던 게 한꺼번에 터지면서 차 안에서 온갖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고, 아이들은 겁에 질려 아무 말도 못하고, 분위기는 최악이 되었다. 길가에 차를 세워 큰딸에게 밖으로 나오라고 소리 질렀고, 아이는 잔뜩 긴장하며 차에서 내렸다. 아내가 말렸지만 나는 이미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딸에게 무엇을 잘못했는지 말해보라고 윽박지르자 딸은 "I'm sorry for disrespecting you" 라고 무표정한 얼굴로 또박또박 말하며 틀에 박힌 사과를 했다. 화가 치밀어 오른 그 순간, 딸에게 고작 몇 번 잘해줬다고 이렇게 또다시 상처를 주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며, 그리고 그 동안 이런 식으로 딸에게 상처 주었던 일들이 떠오르며, 순간 미안함과 후회가 밀려왔다. 나도 모르게 딸을 끌어안고, "I'm sorry. I am so sorry" 를 계속 반복하며 한없이 눈물이 흘렀다. 어리둥절했던 딸도 같이 울며 자기가 잘못했다며 진심으로 사과했고, 그렇게 둘이 한참을 끌어안고 울었다. 차 안에서 엄마와 동생들도 같이 울며 우리가족은 길가에서 눈물 바다가 되었다. 이 일은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서 큰딸이 내게 마음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아빠의 마음을 확인하는 기회가 된 것 같다.아이들과 ‘추억 만들기’ 프로젝트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마지막 날 밤 큰딸이 "I'm so happy" 라고 혼잣말 하는 것을 들었다. 비록 맛있는 시카고 피자를 먹으면서 신이 나서 한 말이지만 내게는 충분한 보상이었다. 아이들을 키우며 나를 바라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도 조금은 알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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