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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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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김병학 목사의 소통하는 교회 - 소통은 유비무환(有備無患)이다 크리스천헤럴드2023.12.20
    과학의 굉장한 발전으로 우리 실제 생활에 많은 도움을 받게 되고 있는데 앞으로는 그 영향이 더 커질 것으로 누구나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며칠 전 한국은행 조사국 고용분석팀은 AI(Artificial intelligence인공지능) 기술로 대체될 가능성이 높은 직업들이 소개되었다. 이것은 막연한 추측이라고 할 수 없고 멀지 않아 현실로 이루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산업 기술의 발달로 로봇과 소프트웨어의 상용화가 단순 작업이나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하면서 오랜 시간 그 일들에 종사해 왔던 근로자들의 일자리를 대체해 온 증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AI의 발달이 이제는 고소득 전문직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연구 결과이다. 예를 들면, 의사, 한의사, 변호사, 회계사 등 한국 일자리의 12%에 해당하는 34만 개가 AI로 대체될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예측했다. 다만 성직자나 대학교수, 가수 등은 AI로 대체될 가능성이 매우 낮았다.  AI가 매우 편리해서 누군가는 많은 혜택을 받겠지만, 마치 작업의 로봇화로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던 것처럼 안타깝게도 누군가는 직업을 잃어버리게 된다.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세상은 어차피 변할 것이니 어쩔 수 없다며 그냥 내버려 둘 것인가? 교회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나?발표된 보고서에서 밝힌 것처럼 주요국에서는 이미 3개 기업 중 한 곳은 AI를 활용하고 있고, 42%의 기업이 앞으로 활용 계획을 하고 있기 때문에 조만간 매우 빠른 속도로 AI가 확산할 것이다. 그나마 이것은 예측이고 실제로는 더 빠른 속도로 더 많은 분야로 확산할 것이다.그렇다면 교회는 AI를 거부하거나 무시하지 말고 어떻게 어느 분야에 무엇을 잘 활용할 것인지를 연구하고 접목할 수 있도록 준비해 나가야 한다.  AI 때문에 인간성과 윤리가 새롭게 재정립될 때 신앙적인 기준들과 교인들의 교육에 필요한 지침서가 만들어져야 한다. 지금도 기업 이익을 위하여 무분별한 문어발식 확장을 계속하는 대기업들의 횡포가 더욱 심해질 것이고 그 영향이 어떤 형태로든 교회에도 미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AI 활용이 일반화되면 지금과는 다른 능력들이 근로자들에게 요구될 것으로 예측이 될 때, “사회적 기술, 팀워크 능력, 의사 소통능력과 같은 ‘소프트 스킬’이 앞으로 더 많은 보상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는 그것이 맞는다면, 교회는 교인들을 양육과 훈련의 방향을 미리 재설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까지 아무런 문제도 없이 해왔던 방식, 즉 일방적으로 목회자나 리더가 가르치거나, 또는 목회자가 만들거나 아니면 시중에서 구입한 교재로 모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참석자들이나 훈련생들이 주어진 내용이나 본문을 근거로 하여 스스로 문제를 만들고 답을 만들어 보는 것이 핵심이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만들어 온 문제로 다른 사람들과 서로 나누고 토론하는 성경 공부나 훈련의 과정이어야 한다. 이것이 성경적인 교육법이다. 왜냐하면 AI에서 중요한 것이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질문을 어떻게 잘 만드는가가 기본이기 때문이다. 너무나 급속하게 변화될 세상의 문화와 생활 형태의 핵심을 미리 파악하여 준비하는 것이 바로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교회는 미리 양육 받은 훈련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어떤 직업을 갖든 그들이 세상에서 흔들림 없이 시민으로 살아가는 준비를 갖추도록 만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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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0
    [오피니언] 조영석 목사의 생각하며 기도하며 - 특별한 선물 크리스천헤럴드2023.12.15
    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트리 밑에 둘 아이들 선물을 준비한다. 아이들이 평소에 갖고 싶었던 것들, 가격이 부담이 되어 평소에 주지 못하는 선물들도 이때만큼은 큰마음 먹고 준비를 한다. 성탄절날 아침에 일어나 포장해 놓은 선물을 신나서 풀어 볼 생각에, 아이들 못지않게 나의 마음도 부풀고 기대가 된다. 평소에 갖지 못하는 특별한 선물을 받게 되니 아이들 입장에서는 더 할 나위없이 기쁘고 좋은 것이 당연하다.그러나 아빠의 입장에서는 아이들에게 어쩌다 한번 진한 감동을 줄 수 있는 비싼 선물을 사주는 것보다, 조금도 감흥을 주지 못하는 아이들의 일상적 필요를 마련해주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 전혀 특별하지 않은 일상을 유지하는데 더 많은 돈과 시간, 노력과 희생이 요구된다. 날마다 먹는 밥, 매일 편하게 잘 수 있는 집, 계절에 따라 입을 옷 금방 헤어지는 운동화, 학원비, 병원비 등등,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일상적인 것을 마련하는 일은 사실 적지 않은 부담이다.언젠가 누군가 이 비용을 돈으로 환산한 통계를 보았는데 만18세까지, 즉 스스로의 쓸 것을 책임질 수 있는 최소한의 나이가 되기까지, 부모가 부담해야 하는 비용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 액수는 내가 모든 특별한 날마다 빼놓지 않고 아이들에게 큰 감동을 줄 선물을 준다 해도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큰 금액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기억하고, 고마워하는 것은 이처럼 어쩌다 한번 받게 되는 특별한 선물이다. 먹을 것, 입을 것, 잠잘 곳, 이 모든 것이 때때로 받는 선물하나 만도 못하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탓할 수 있으랴. 아이의 입장에서는 이런 일상의 필요가 채워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부모가 있는데 아이가 오늘 먹을 끼니를 걱정하고,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고, 오늘밤 잠잘 곳이 없어 불안해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부모로서 미안하고,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 같은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아이는 이런 일상의 필요는 부모에게 맡기고, 밝게 하루하루를 기쁘게 사는 모습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다. 그러니 아이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간혹 받는 선물이 더 특별하고, 기억날 수밖에 없다.그런데 이런 모습은 나와 내 자녀에게서만 아니라 나와 하나님아버지와의 관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때때로 내가 지금 누리고 살고 있는 일상을 특별한 축복으로 여기지 않고, 그보다는 남에게는 있는데 나에게는 없는 것을 아쉬워하며 하나님아버지께 나도 특별한 선물을 달라고 간청할 때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받게 되면 그제서야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에 감사하며 간증한다. 그러나 만약 내가 살아가는 이 일상이 무너져 버린다면 특별한 선물을 아무리 많이 받는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니 나 또한 하나님아버지께서 오늘 내게 일용할 양식을 주신 것과 나의 일상을 가능케 해 주신 것에 그 무엇보다 감사해야 한다.이처럼 아이러니 하게도 아이에게 특별한 선물을 마련해 주는 것은 쉽고, 조금도 특별하지 않은 평범한 일상을 마련해주는 것은 매우 어렵다. 또 특별한 선물은 아이를 위해서 못사줄 때보다 안 사줄 때가 더 많았다. 그러나 일상의 필요한 것들은 행여나 마련해주지 못할까 봐 염려로 잠을 못 이루던 밤도 있었고, 자존심을 버려야 한 적도 있었고, 새벽에 예배당에서 눈물로 기도한 적도 있었다. 부모로서 내게는 아이들의 일상을 마련해주는 것보다 더 치열하고 힘든 일은 없었다.그러니 아이들이 알아주던 말든, 아버지인 나로서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 중 그들의 일상을 마련해 주는 것보다 더 값지고 소중한 선물은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땅에서 하나님아버지께서 내게 허락하신 그 어떤 선물보다도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일상보다 더 값지고 특별한 선물은 없는 것이다.또 이 땅에서의 일상뿐만 아니라, 저 천국에서 예수님과 함께 살아갈 영원한 일상보다 더 소중한 선물은 없다. 이 선물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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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샘신칼럼 - '나'에게 여호야다 있습니까? 크리스천헤럴드2023.12.15
    역대하 24장은 요아스 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구약 성경의 모든 사건은 말세를 만난 경계와 교훈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주 경건한 마음으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약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읽어야만 합니다.역대하 24장에 등장하는 요아스는 어린 시절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려 전 가족이 몰살당하는 사건을 치르며 유일하게 혼자 살아남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의 중심에  아주 경건한 제사장 여호야다가 있었습니다.이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과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을 볼 수 있습니다.아달랴가 유다 집의 왕의 씨를 진멸하려고 했지만 요아스가 살아남은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의 결과였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그 일에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인 여호야다를 사용했습니다.여기서 다음과 같은 영적인 법칙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아달랴가 다윗의 후손들의 씨를 진멸하려고 하는 사건 속에서 사탄의 역사를 발견하게 되고, 여호야다를 통해 요아스를 보호하는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사람을 통해 역사하지만 사탄 역시 사람을 통해 역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요아스는 제사장 여호야다가 사는 날 동안은 하나님 앞에 참으로 선한 왕이었지만, 여호야다가 죽자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왕이 되고, 급기야는 성전에서 자기의 악함을 책망하는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인 스가랴를 돌로 쳐 죽이는 악까지 범합니다. 요아스는 그 일로 인해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되어 아람 왕의 침공을 받게 되고 나중에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받아야 할 교훈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는 각 자의 여호야다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역대하 22장부터 24장까지를 자세히 보면 요아스에게 있어서 여호야다는 참으로 은인 중 은인입니다. 여호야다가 없는 요아스는 생각해 볼 수 없습니다. 생명의 은인이요  부모를 대신하는 사람이요 영적인 영향력을 미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야다가 사는 날 동안, 요아스가  여호야로부터 영적인 영향을 받으며 사는 동안에는 하나님 앞에 선한 왕이었습니다.오늘날 용어로 표현하면  여호야다는 요아스의 멘토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야다가 죽자 요아스의 삶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요아스는 여호야다가 죽자 믿음없는 방백들의 말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타락했습니다.  사람들은 보고, 듣고, 읽고, 말하는 대로 되게 되었습니다.요아스는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한 사람의 영향력입니다. 자신을 한번 돌아보세요. 그리고 나의 여호야다는 누구인지를 찾아보세요.즉 내가 누구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는지를 점검해 보라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영향을 받고 살아갑니다. 다만 나에게 영향을 주는 사람이 누구인가가 중요합니다. 더 나아가 나도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고 있음도 기억해야합니다. 즉 우리는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이 말은 나의 여호야다가 있으며, 나도 누군가의 여호야다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아스는  여호야다가 죽자  믿음없는 방백들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요아스의 영적인 타락 속에서 아주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하나님께서는 요아스에게 선지자를 보냈습니다.(대하24:19) 요아스가하나님께서 보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자 제사장 스가랴를 통해 말씀하십니다.(대하24:20) 그러나 요아스는 스가랴를 성전에서 돌로 쳐 죽입니다. 요아스의 결정적인 실수였습니다.이제 요아스를 대하는 하나님의 방법이 달라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아람을 통해 요아스를 다루십니다. 요아스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도 우리에게 아주 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하나님께서는 적은 무리로(아람)  큰 무리를(요아스) 다루심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이 사건이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요 하나님의 손길임을 깨닫도록 배려하시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인간적인 시각이나 계산으로 보면  적은 무리는  큰 무리를 이길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법칙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일반적인 법칙이 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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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8
    [오피니언] 어리버리 서민수 목사의 낚시 전도법 - 태신자 리스트 크리스천헤럴드2023.12.15
    우리 주변에는 자동차 판매왕이나 보험왕의 이야기를 기록한 다큐멘터리가 많이 있다. 그들은 결코, 사무실 책상에 앉아서 자신의 고객을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판매왕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여러 가지의 방법을 동원해서 불특정 다수의 사람 중 미래의 고객으로 만든다. 그렇게 만들어진 자신의 고객 리스트를 꼼꼼하게 작성하고 그 리스트를 관리한다. 그들은 그들의 고객의 많은 정보와 내용을 자신들의 일마냥 잘 기억하고 있다. 그 정도의 부지런함과 성실함 없이 자신이 판매하는 상품을 소개할 수 없다. 전도도 많은 경우 다르지 않다. 우리는 복음이라는 최상품을 소개하는 책임과 의무를 갖고 있다. 이를 위해, 이 상품이 필요한 사람들의 이름과 정보를 잘 관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자동차를 파는 사람도 잠정 고객을 관리하면서 생일, 기념일, 직업, 성격, 가치관, 취미생활 등 엄청난 정보를 관리하는데, 하물며 태신자들을 대하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우리 주변에 사람들이 없는 게 아니고, 우리가 전도할 마음이 처음부터 없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닐까? 전도는 특정한 사람들만이 감당하는 것이고 적어도 나는 그 일과는 관계없는 사람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전도는 너무나 부담스럽고 불편한 일이라고 여기고 지레짐작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낚시하는 낚시꾼들을 상상해 보라. 그들은 낚시하겠다는 일념으로 바다나 호숫가로 달려 나간다. 싫어서 억지로 나가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낚시 전도법은 각자가 이런 낚시꾼들처럼 기쁨으로 즐겁게 뛰어 나갈 방법과 분야를 찾을 수 있도록 돕는 전도법이다. 남들이 이렇게 하니까 교회가 저렇게 하라고 하니까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주체가 되어, 당신 스스로가 동기부여가 되어 즐겁게 감사함으로 전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 전도법이다.위에서 소개한 방법 외에도 얼마든지 다른 방법이 존재할 수 있다. 각자의 형편과 달란트와 은사를 따라 사람들을 만나고 태신자들을 발굴할 수 있는 여러 모양의 방법이 존재한다. 각자의 형편에 맞게 여러분에게 맡기신 영혼들을 찾고 찾으면 반드시 만나게 된다. 한 영혼,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며 그들의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한다는 마음으로 각자의 리스트 북에 올릴 수 있기를 바란다. 실제 나는 이런 방법으로 태신자들을 80명 넘게 섬기고 있다. 이 태신자들이 다 교회 건물로 오는 것은 분명 아니다.그러나 몇 년이 걸려서라도 조금씩 그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각인시킬 수 있기에 감사함으로 울며 복음의 씨를 뿌리고 있다. 반드시 기쁨으로 거둘 영혼의 열매가 있음을 믿는다.조금 극단적인 이야기지만 지금 당신 마음에 영혼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태신자들의 리스트가 없다면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 만약, 당신이 목회자이거나 교회를 오래 다닌 신앙인이라면 반드시 살려야 할 영혼들의 이름이 있는 영혼 구원의 리스트가 있어야 한다. 이 영혼 구원의 리스트를 목회자와 성도들끼리 소그룹을 만들어 서로 나누며 함께 기도하는 것, 이 얼마나 우리 모두의 가슴을 뛰게 하겠는가? 부부가 서로의 영혼 구원 리스트를 놓고 함께 기도하며 기도의 씨를 뿌리는 것을 실천해 보라. 각 가정에서, 각 교회에서, 이러한 영혼 구원의 리스트를 품고 기도할 때 가정과 교회의 분위기가 달라질 것이다. 기도의 내용이 달라질 것이다. 기도의 온도가 달라질 것이다. 태신자 리스트야 말로 불특정 다수의 전도 대상자들을 특정 소수화시킨 결과물이다. 가슴에 품고 있는 태신자 리스트가 없는데 어찌 스스로를 예수님의 제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감히, 제자와 팬의 기준을 태신자 리스트의 유무에 있다고 말하면 지나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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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7
    [오피니언] 아모스 목사의 일터영성 - ‘자유함’ 크리스천헤럴드2023.12.15
    일터에서 많은 사람들을 보게 되고, 만나게 되고, 함께 일을 하게 된다. 어떤 분야에서든지 고수와 하수는 존재하기 마련이고, 식당이라는 일터에서도 고수와 하수는 분명히 구분되어 존재한다. 특별히 요리사의 경우, 고수와 하수의 차이는 무엇일까?  여러가지로 정리, 정의 될수 있겠지만, 이런 측면도 있다. 고수는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거나 허둥대는 법이 없다.오더가 갑자기 많아지는 경우가 생겨도, 경험이 많은 고수들은 절대로 허둥대지 않는다. 가만히 살펴보면, 고수들은 바쁠수록, 변수가 생길수록 더 기본에 충실해 지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어차피 본인이 감당해야 할 볼륨은 정해져 있기에, 여러가지를 한꺼번에 하려는 시도 보다는 오더가 들어온 순서에 집중을 한다. 그리고 웬만해서는 손놀림이 더 빨라지거나 하는 법도 없다. 사실 하수들과 비교되지 않을만큼 이미 빠른 속도가 몸에 익어 있기 때문인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하나씩 하나씩 오더가 제대로 준비가 되어 손님들에게 제공이 되는 것을 보게된다.반면 하수의 경우는 어떠한가? 변수가 생기거나 갑자기 감당하기 버거울 만큼의 오더가 들어오면, 처음 몇초, 몇분간은 오히려 아무것도 못하고 오더장만 멍하니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한 채. 그리고 나서는 뭔가 동작이 커지고 손놀림 발놀림이 바빠지는 것을 보게 되는데, 결과적으로는 오더가 순서대로도 나오지 못하고, 더 익혀서 못쓰게 되거나 넣어야 하는것 한두가지를 빼먹고 오더가 나가거가 하기가 일쑤다.바쁜시간이 지나고 나서의 고수와 하수의 행동에도 관찰되는 특징이 있다. 고수는 바쁜 시간이 다 지나고 나서도 별 얘기가 없이 평온한 반면, 하수는 바빴을때의 자신의 무용담(?)을 떠벌리는 것을 참지 못한다.신앙생활도 그렇다. 분명 이 분야에도 고수와 하수는 존재한다. 놀랍게도 식당에서 경험했던 부분들이 신앙생활 에서도 오버랩 되는 것을 자주 느낀다. 신앙의 고수들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닥쳤거나 혹은 예상했던 일에 결과가 좋지 않게 나왔더라도 당황하거나 허둥대지 않는다.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분명히 있음을 경험으로 알고 믿음으로 신뢰하기에, 어떤 상황이 닥쳐도, 자신의 본분을 지키며 조용히 묵묵하게 이 상황들을 받아들이고 차분히 해결하려 하는 것을 본다.반면 하수들은 어떠한가? Why Me? 를 외쳐대며, 평정심을 잃으며, 하나님을 원망하기 까지도 한다. 그러면서 그 상황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니 해결도 늦어지게 되고 원만한 생활도 하기 힘들어 지는 경우를 얼마나 많이 보는가.반대의 경우도 그렇다. 예상치 못한 좋은 일들이 펼쳐졌을때 고수의 반응은 어떤가? 시끄럽지 않다. 조용히 하나님께 감사하고,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며 누군가에게 자랑하거나 하는 일도 웬만하면 삼가한다. 반면 하수들은 시끄럽다. 동네방네 자랑하고 떠드느라 정신이 없고, 목사님께 부탁해서 간증한번 하겠다 하는 경우도 많이 봤다. 더 하고 싶은 얘기가 많지만 다 생략 하고, 오늘 칼럼에서 정말 말하고 싶고 나누고 싶은 단어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유함’ 이다. 모든 사람들이 자유 라는 단어를 좋아하고 자유함을 누리기 원하지만, 실제로 완전한 자유함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누리고 살아가는 인생고수들은 그리 많지 않다.믿음 좋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여러가지로 설명이 되겠지만, 필자는 믿음 좋은 사람의 기준 중 하나를, 그 사람이 얼만큼 자유함을 누리며 살아가는 지를 살핀다. 자유함을 누리는 신앙의 고수가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두가지를 명심하자. 먼저는, 하나님만 신뢰하자. 다른말로,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신뢰 하지도 말고, 하나님을 기대하는 것 이외에 다른 그 무엇, 그 어떤 사람에게도 기대를 갖지 말자.  기대를 갖지 않으면, 모든 기대치를 다 뽑아버리면, 그럼 어떤 일에도, 어떤 사람에게도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을 수 있다.다음으로는, 이미 필요한 것을 다 가졌음을 믿음으로 선포하자. 마인드컨트롤을 하라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우린 필요한 모든 것을 가졌다. 늘 내편이신 하나님이 내 아버지 이실 뿐 아니라, 성령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고 계시지 않은가?더 깊이 들어가면, 우리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대단한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면, 깨닫고 사는 사람이라면, 세상이 귀하다고 말하는 것들이 정말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것들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될것이다.다시한번 말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 한것에 대해서 (Doing) 영광을 받으시기 보다, 내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 (Being)임을 깨닫고, 그런 나 답게 살기로 결단하고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통해 더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심을 잊지말자. 진정한, 온전한 자유함을 누리며 사는 신앙의 고수, 인생의 고수로 살아간다는 것. 참 멋지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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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샘신칼럼 - 우리의 생명이 되시는 예수 (출애굽기 12:7-8) 크리스천헤럴드2023.11.10
    우리는 두 가지 이유로 구약 성경에 기록된 많은 이야기들을 깊게 묵상해야 합니다. 하나는 그 이야기들이 우리의 거울과 교훈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그리고 다른 하나는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이 그림자라면 신약은 그 실체입니다. 그러므로 구약과 신약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한 이야기입니다. 즉 범죄한 인간을 구하는 하나님의 구속사 입니다.유월절 날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죽은 그 흠 없는 어린 양은 바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시고 몸이 찢어진 예수님을 보여주는 그림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월절 사건은 애굽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이며 동시에 죄악 가운데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피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을 상징한다면 고기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찢기신 몸을 상징하기에 그렇습니다.주님은 제자들과 마지막을 보내며 포도주와 떡을 가지고 자신의 피와 몸임을 말씀하시며 우리에게 기억하고 전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예수님이 유월절 양이시라면 우리는 유월절 날 죽은 어린 양의 피와 고기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는가를 찾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유월절 어린 양의 피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발라졌습니다. 그러자 죽음의 사자가 그 집을  넘어갔습니다.죽음은 죄가 가져온 저주였습니다. 즉 그 피가 죄의 삯인 죽음의 저주를 넘어가게 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보혈로 인해 죄의 삯인 사망의 저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을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찢겨진 몸을 상징하는 그 고기는 무엇을 의미합니까?그들은 어린 양의 피를 문 설주와 인방에 바르자 죽음의 사자가 넘어갔지만 여전히 그들의 몸은 애굽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음의 사자가 지나가는 그 고기를 모든 식구가 먹으라고 합니다.그리고 그 다음날 그들은 일찍 애굽을 나오게 됩니다. 즉 그 밤에 먹은 그 고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오는 여행의 에너지, 능력, 활력이 되었던 것입니다.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 죽은 흠 없는 어린 양의 그 피를 바르고 그 고기를 먹고 애굽을 나오게 됩니다. 구약의 이야기가 우리의 거울이요 구약이 신약의 그림자라면, 그리고 그 유월절 날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피를 흘린 그 어린 양이 십자가에서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피와 몸은 무엇을 의미합니까?피도 고기도 그 양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즉 죽음의 사자가 넘어간 피,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나오는 여행의 활력을 주었던 그 고기도 바로 유월절 죽은 그 양입니다.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범하는 실수는 구원은 예수님의 피로 받고 사는 것은 자기 힘, 자기 능력, 자기 생각으로 살려고 하는 실수를 범한다는 것입니다. 즉 구원은 아는데 그 이후 어떻게 사는 것인가를 모른다는 점입니다. 즉 우리의 모든 행동의 근거가 예수님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에 근거하여 살아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으로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는 우리 생명의 떡입니다. 떡은 먹는 것입니다. 떡을 먹으면 그 떡은 우리의 활력이 되고 우리의 모든 움직임의 근거, 힘이 됩니다. 예수가 생명의 떡이라는 사실은 구원받은 우리는 예수로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내가 예수로 사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예수로 사는 사람은 많은 것을 소유하지는 않았지만 인생의 허기진 주림과 목마름이 없는 사람입니다. 누구보다 많은 것을 소유하지는 않았지만 왜 그런지 그들이 부럽지 않고 행복한 사람이라면 예수로 사는 사람입니다.예수는 우리 생명입니다. 이 말보다 더 기독교를 정확하게 표현한 말은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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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어리버리 서민수 목사의 낚시 전도법 - 잘 노는게 전도 크리스천헤럴드2023.11.10
    여러분을 즐겁게 만드는 취미활동, 혹은 운동을 통해서 얼마든지 태신자들과 만날 수 있는 접촉점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예를들어, 양초 만들기나 비누 만들기와 같은 취미활동을 한다고 하면, 같은 아파트 혹은 주변에 알고 지내는 사람들과 함께 양초를 만드는 그룹을 만들 수 있다.여러분의 취미나 재능을 이용해 얼마든지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그들을 통해 태신자들을 발굴할 수도 있다. 교회에서도 이런 재능이나 취미를 가진 분들을 중심으로 교회나 성도들의 가정에서 이런 이벤트를 만들어 갈 수 있다. 개척 교회인 우리 교회는 실제 공진단 만들기와 같은 이벤트를 통해 믿지 않는 분들을 초대하여 저렴한 가격에 공진단을 구매할 수 있게 했다. 실제 공진단을 만드는 기회도 얻고, 또 본인이 만든 공진단을 저렴한 가격으로 구매까지 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이런 이벤트는 굳이 교회 건물이 아니어도 가능하다. 오히려 친구나 이웃인 성도의 집으로 초대할 경우, 태신자의 입장에서는 부담감 없이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모든 행사를 교회에서 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 성도가 모이는 곳이면 그곳이 교회요, 함께 나누는 교제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이다.이벤트는 교회에서 할 수도 있고 평소 자신이 품고 있던 태신자들을 초대해서 자신의 가정에서 진행할 수도 있다. 목회자와 교회는 성도들이 자체적으로 이런 이벤트를 진행할 수 있도록 모든 면에서 지원할 수 있어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운동과 같은 취미 활동도 동호회를 조직하여, 비슷한 나이대의 사람들과 함께 운동하면서 그 가운데에서 태신자들을 발굴할 수도 있다. 그런데 만약 본인이 주도적으로 그룹을 만들고 무언가를 리더해야 하는 위치에 서는 것이 두렵고, 또 나설만한 특기가 없다고 여겨진다면, 오히려 교육이나 취미, 운동과 관련된 그룹을 찾아서 그 그룹에 가입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평소 자신이 관심 있어하는 취미나 운동을 할 수 있는 동호회를 찾아보면 우리 주변에서 너무나 많은 종류의 그룹을 찾을 수 있다.자기가 좋아하고 관심 있는 그룹을 찾아서 회원이 되기만 하면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만날 기회들이 생기게 된다. 그때부터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관계가 형성되고, 서로 알아가면서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할 기회들이 찾아오게 되는 것이다. 본인이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동시에 많은 사람과 만나고 관계를 형성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의 효과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교회는 성도들의 사회 활동이나 취미 활동을 적극적으로 권장할 필요가 있다. 왜? 전도를 위해서다.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교회가 성도들을 잡는다. 심지어 뺑뺑이를 돌려야 한다고 말하는 목회자도 있다. 교회 안에서 내보내지를 않는다. 성도들이 365일을, 52주를, 목사 눈앞에, 교회에 나와야 직성이 풀리는 목회자도 있다. 도대체 성도들은 언제 전도할 수 있을까? 믿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지도 관계 맺지도 못하는데, 언제 어떻게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을까?전도는 얼마든지 즐겁고 기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떠밀려서 억지로 내가 원하지도 않는 방법이 아닌, 자신의 기호와 취미, 특기를 고려해서 세팅하면 얼마든지 기쁜 마음으로 전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도 한 번은 집 근처에 있는 가죽 공예반에 등록하여 가죽 공예를 배우며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든 적이 있었다. 가죽 공예를 통해 다른 사람들(태신자)에게 선물할 수도 있고,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관계 형성할 수도 있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경험해 보았다. 하고자 하는 의지와 결단만 있다면 얼마든지 사람을 만날 수 있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바로 ‘낚시 전도법’이다.앞에서 설명한 여러 방법을 통해 아직 믿음이 없거나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발견했다면, 이제 그들의 이름을 리스트 업(list up) 해나가면 된다. 우리는 이것을 ‘태신자 리스트’라고 부른다. 낚시 전도법에서는 태신자들을 리스트화하는 과정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실제 전도를 하겠다고 작정하고 전도해야 할 사람들을 리스트화하지 않으면 작심삼일이 되거나 흐지부지 끝나게 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교회와 목회자들은 성도들이 이 태신자 리스트를 잘 관리할 수 있도록 돕고 기도하며 함께 관리해 주어야 한다. 태신자 리스트에 기본적으로 이름이 기록되었다면 무엇보다 그들의 이름을 보면서 매일 기도를 심어야 한다. 기도 없이 영혼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기도 없이 영혼 구원을 위한 능력은 일어나지 않는다. 사단 마귀도 우리만큼이나 태신자가 주님의 사이드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애쓰고 힘쓰고 있다. 더 나아가 우리는 태신자들의 정보와 그들의 근황을 일일이 적어, 어떻게 기도하며 섬겨 나갈 수 있을지를 꼼꼼하게 기록해 두어야 한다. 구체적인 영혼 구원을 위한 이름이 없는데 어떻게 기도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두리뭉실 묶어서 영혼 구원이라고 말하고 기도하지 말자. 지금 내가슴에 기도를 심고, 눈물로 복음의 씨를 뿌려야 할 이름이 없다면 지금 당장 이것부터 실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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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조영석 목사의 생각하며 기도하며- 열렬한 팬 크리스천헤럴드2023.11.10
    자녀들이 모두 대학으로 진학해서 집을 떠나서 살자 아이들의 짐도 조금씩 정리를 하게 되었다. 아이들이 남겨두고 간 것들 중 더 이상 쓸모가 없는 물건들은 남에게 주기도 하고, 처분하기도 했다. 짐 정리를 하다 보면 오래된 사진들도 다시 꺼내 보게 되는데, 아이들의 어렸을 때 모습들을 새록새록 떠오르게 한다. 모든 부모가 그렇듯 내 자식은 뭔가 다르고 특별해 보이고,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것처럼 부푼 기대를 갖고 바라보았던 그 때가 떠오른다.  처음 스케이트장에 데려갔던 날, 배운 적도 없는데 스케이트를 신고 빙판 위에 균형 잡고 혼자 잘 서있는 큰딸을 보며 특별한 재능이 있는 것처럼 보여 놀랐었다. 혹시 포스트 김연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기대에 부풀어서 어느새 큰딸이 올림픽 대회에 나가 금메달을 목에 거는 상상을 했다.커다란 마이크를 능숙하게 붙잡고 노래하는 둘째 딸을 보며 순간 군중둘의 환호성이 터지는 큰 무대에서 열창하는 모습을 떠올렸었다.태양계 행성들을 모두 외우고, 과학 채널에서 눈을 때지 못하는 막내 아들을 보며 NASA에서 근무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행복해했다.그랬었다.그러나 아이들이 커가면서 그 꿈들과는 조금씩 거리가 있어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여전히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의 미래는, 그들의 꿈과 나의 꿈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이 또한 시간이 흐르면 또 포기하고, 더 내려놓아야 할 것들이 생길 거란 걸 안다.그렇게 또 다시 세월이 흐르고, 무엇이든 가능했던 시기들이 하나 둘씩 지나가고, 기회 또한 하나 둘씩 사라지고 말 거란 것을 안다.그래서 추리고 또 추렸던 꿈들 마저도 거리가 멀어지는 날이 오게 될 것이고, 그저 무엇을 하던 행복하게 살기만을 바라는 날이 오게 될지도 모르고, 그 마저도 불안해져 어느 날 "얘가 밥은 먹고 살겠지?" 하며 모든 꿈을 접게 되는 날이 온다 할지라도, 나는 언제나 너의 열렬한 팬이란다.“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시 1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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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아모스 목사의 일터영성 -일하며 사역하는 모든 목회자들을 응원하며 크리스천헤럴드2023.11.10
    필자는 신학대학교에 입학을 했던 해에 처음으로 교회에서 전도사로서 사역을 하게 되었으며, 그것이 1989년도 였으니 올해로 사역자로 살아온 세월이 햇수로 35년째를 맞이한다.그때부터 지금까지 일터에서 일을 하지 않고, 흔히 말하는 전임사역, 풀타임 사역을 한 기간을 계산해 보니 포모나의 어느 교회에서 부목사로 재임한 4년이 전임사역의 전부였다.나머지 30여년의 사역기간동안, 교회 사역을 물론 쉬어본적은 거의 없었고 사역과 동시에 세상직업을 가지고 일을 해 오고 있다.참 많은 일들을 했다. 청소는 기본이고, 식당에서 닭을 자르는 일, 웨이터, 한글학교 교사, 쉐프, 웨어하우스 물품정리, 피아노 렛슨, 성악 렛슨, 대학원 조교, 운전, 공연 출연 등등 가끔씩 이런 생각을 해본다. 내가 과연 세상 일들을 하지 않고 전적으로 교회 사역만을 해 왔다면, 내 인생이 많이 달라졌을까? 보다 더 효과적으로 사역의 결과물들이 나왔을까?그에대한 대답이 그때마다 달랐지만, 지금 이 순간에 다시금 내 스스로에게 묻는다면 내 대답은 아니올씨다 이다첫째로는, 내가 선택해서 세상일을 병행한것 같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가운데 이 모든 일들이 이루어져 왔음을 믿는다.둘째로는, 무엇이 정말 중요한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대다수의 목회자들은 일을 따로 하지 않아도 생활이 될 만큼의 사례비를 보장받고 풀타임 사역을 하는 것이 목회자의 가장 바른 모습이라고들 믿는다.묻고싶다. 그게 뭐가 바른 모습이냐고 그러면 이런 답들을 내 놓는다. 말씀을 깊이 묵상할 충분한 시간을 보장 받아야 사역에 힘을 낼수있다고.그리고 가장 중요한 목회자의 사명인 말씀준비에 최소한 3-4일은 준비시간이 필요하다고. 이들의 전제는 사실 맹점이 있다.목회자들이 사역을 펼쳐야 하는 주된 장소가 교회여야 한다는 생각이다. 맞기도 하지만 틀리기도 하다.목회자가 교회에서만 사역을 한다면, 그야말로 세상에 영향력을 끼칠 찬스가 아예 막혔다는소리가 아닌가?목회자가 목회하는 대상이 누구인가? 성도들이다. 성도들에게 뭘 가르치는가?세상속에서 하나님의 선한 영향력을 아낌없이 발휘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는가?그런데 교회 문화권 안에만 갖혀 지내는 목회자가 세상에 대해 뭘 안다고 세상에서 승리하는 비결을 온전히 가르친다는 말인가? 일하는 목회자들에겐 정말 유익이 많다. 성도들의 삶에 더 많이 공감할 수 있다.무엇때문에 그들이 힘들어 하는지, 무엇때문에 그들이 아파하는지 자신들의 경험을 토대로 쉽게 공감할수 있다. 쉽게말해 눈높이가 같아진다는 말이다.목회자 들에게 감히 고한다. 설교가 다가 아니다. 아니, 설교는 사실 어떤면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니다.목회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설교가 아니라, 목회자 본인이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오늘날의 기독교, 말로 배워 말로 가르치고, 말을 배워 말만 할줄아는 교인들만 가득하다.진짜 목회자라면, 말이 아닌 삶으로 성도들을 가르쳐야 한다.3-4일 준비해서 주일에 40분 설교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회자의 사명이라고 지금도 믿고 있다면, 한번쯤 생각해 보시라, 정말 그런지를 필자는 일하는 목회자 이기도 하지만, 일하는 목회자들과 교제할때에 참 많은 감동을 받는다.그들은 말로 배워 말로 가르치는 사람들이 아니기에 그렇다.일터에서 세밀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들을 한다. 그 이야기 들엔 언제나 최고의 은혜와 넘치는 긍휼함의 이야기들이 묻어있다.좀 투박한 얘기들 일지는 모르겠지만, 그 이야기들을 듣게 될 그들의 성도들을 떠올려 본다. 주석이나 참고문헌 뒤적여 가며 지식과 교양을 자랑하는 듯한 유창한 설교와 과연 비교가 될까? 략하고, 일하시는 목회자분들께 한말씀 올립니다. 힘내세요, 낙심하지 마세요, 기죽지 마세요,그리고 여러분들이 지금 하고 계시는 일이 그 어떤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부르신 성직임을 조금도 의심하지 마세요!비록 설교를 준비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게 느낄수 있겠지만, 하나님은 여러분들의 일터에서 말씀 전할 준비를 충분히 시키시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기에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 그 세상의 한 가운데에 두 발을 딛고 서 계시는 모든 일하는 목회자 분들을, 제가 할수 있는 가장 큰 축복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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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신선묵 교수의 교수칼럼 - 경청과 공감 크리스천헤럴드2023.10.26
    인간 관계와 지도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하나 고르라고 하면은 소통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데일반적으로 소통이라고 하면 말을 잘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가장 효과적인 소통은 말이 아니라 표정이나 행동들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경청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래서 “마음의 지혜를 얻는 경청”라는 책에서 조신영은 “말하는 것은 지식의 영역이고 듣는 것은 지혜의 영역이다.”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경청을 위한 노력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첫째, 경청하는 습관을 들이기 위하여 아주 간단하게 훈련하는 방법이 있다. 앞으로 몇 일 동안 친구와 가족과의 대화 중에 약 30초 정도 끼어듬없이 들으려고 노력해보라. 그냥 무조건 30초를 말을 하지 않고 참으라는 것이 아니라 대화 중에 다른 때 같으면 내가 끼어들기를 하거나 상대방의 대화를 듣지 않는 순간이 될 때 그 순간에 30초만 참고 더 들어보아라. 학교에서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이 숙제를 주는데 학생들이 놀라운 경험을 하고는 한다. 그래서 내가 “30초의 기적 프로잭트”라고 이름하였다.   둘째, 간단한 대화의 규칙으로 경청하는 대화를 할 수가 있다. 아주 오래 전에 새들백 교회에서 있었던 부부세미나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그때 이틀 동안 많은 내용을 들었지만 기억에 특별히 남고 내가 삶 가운데 실행하려고 노력하였던 것은 “맥도날드식 대화”하는 것이다. 우리가 맥도날드에 가서 Drive Through 에서 음식을 시킬 때에 스피커에  대고 음식을 주문한다. 그러면 그 스피커를 통하여 종업원이 다시 내가 시킨 것을 반복하고 이것이 맞느냐고 확인을 한다. 일반적으로 대화를 할 때에 듣지 않고 나의 이야기만 지속적으로 하기 때문에 그리고 듣는 순간에도 남의 말을 정확히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다음에 내가 할말을 준비하는 경향이 있기에 소통이 되지않고 평행선을 달린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듣는 훈련이 필요하다. 상대방이 정말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듣고 내가 정확히 들었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내가 들은 것이 맞는지 확인하는 작업을 통하여 소통을 정확하게 할 뿐만 아니라 상대방은 내가 정말로 듣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고 상대방도 나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셋째,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되 그 사람의 감정을 공감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오늘날 지도력 연구에서 EQ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삶에서 이성과 논리와 윤리가 중요하지만 사실상 정서적인 측면도 중요하다. “우리가 어디로 갈 때에 발로 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가는 것”이라는 표현이 있다. 마음이 움직여야 행동이 따라 나올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관계와 지도력에서 마음의 차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소통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진정한 의미의 소통은 논리를 넘어서 마음의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경청도 사실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서 마음의 차원에서 경청해야 한다. “사랑과 원칙이 있는 자녀교육”라는 책을 감동적으로 읽은 적이있다. “자녀 교육에서는 원칙과 사랑이 있는 교육을 해야한다. 원칙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사랑으로 먼저 공감해 주어라. 그리고 원칙을 가르쳐 주어라” 라는 것이었다. 자녀를 교육하면서 사랑만 있고 원칙이 없으면 아이들이 스포일되기 쉽고 원칙만 있고 사랑이 없으면 아이들이 질식하게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결국 원칙을 가르치되 사랑으로 가르쳐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아이들과 우선 사랑의 관계를 세운 다음에 그 속에서 원칙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들과 사랑의 관계를 세워 나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에게 가르치기 이전에 아이들의 느낌을 존중해주고 공감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아이들도 하나의 인격체이기 때문에 그들의 감정과 느낌을 존중해야 한다. 그 느낌을 인정하고 또 공감해 주지 않으면서 바른 원칙만을 가르치고 강요하면 자신의 느낌을 신뢰하지 못하는 정서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자녀가 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일단은 아이들이 느끼는 감정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충분히 존중해 주고 아이들 자신이 스스로 객관화할 수 있는 정서적인 힘이 있을 때에 일의 옳고 그름을 가르쳐야 한다. 그런데 사실은 이런 것은 어린 아이들을 대할 때에 중요하지만 모든 인간 관계에서 중요한 것이다. 사람들의 느낌을 존중해주고 정죄하지 않고 공감해 줄 때에 비로서 사랑의 권고를 해줄 수 있는 권위가 생기는 것이다. 사랑으로 말을 들어줌도 감정에 대한 존중도 없이 주는 말은 아무리 좋은 말이라고 하여도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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