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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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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아모스 목사의 일터영성 - ‘사랑이 넘칠 때 모든 장벽은 무너집니다’ 크리스천헤럴드2024.02.10
    선한 일을 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선한 일을 찾아서 그 일들만 하기에 선한 일들을 해내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들이 이미 선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이 하는 모든 행위가 선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이 맞다.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 간다는 것은 두가지 결심을 선행할 때에 가능해 진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겠다’는 결심이 그 첫번째 이고, 두번째는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 가겠다’는 결심이 선행 되어야 한다. 사실 이 두 가지는 결국 같은 말이다. 예수님은 사랑 그 자체 이시자 그 근본이 사랑 이시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닮겠다는 결심이 곧 나는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가겠다 라는 결심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 믿음을 강조한다. 아니, 믿음만 강조한다. 믿음을 이야기 하면서 항상 따라오는 단어들은 성도들에게 상당한 부담으로 다가오는 말들 뿐이다. 헌신, 희생, 섬김, 충성, 봉사, 출석, 참여, 협력, 헌금 등등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성도들의 속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채, 앵무새가 뜻도 모르고 같은 말들을 되풀이 하듯, 강단에서는 학교에서 수업 강의를 하듯 믿음 이라는 단어만 반복적으로 쏱아 내고 있지 않은가?믿음으로 주일에 가게 문을 닫으세요. 믿음으로 힘들어도 십일조 하세요. 믿음으로 교회일에 충성 하세요. 그 말에 순종했다 치자, 주일에 출석하는 성도의 숫자가 조금 더 늘어날테고, 더 모여지는 헌금으로 교회 사역이 보다 원활하게 돌아갈수 있게 될 것이고, 교회에 일꾼들이 부족해 지지 않을 것 이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여기에 성도들이 ‘사랑’ 받고 있다 라는 요소를 발견할 수가 없다. 사랑은 목적이다, 결코 수단 일수가 없다. 교회 사역의 목표, 목적도 궁극적으로는 성도 여야 하는데 오늘날 교회들은 성도들을 교회 유지, 성장, 부흥의 수단으로 여기고 있음을 과연 부정할 수 있겠는가? 주님이 행하신 일들을 생각해 보라. 단 한번도 제자들과 따르는 이들을 예수님의 사역의 수단으로 이용하신 적이 없으시다. 정녕 그렇다. 단 한번도 없다. 예수님은 언제나 사람이 목적이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 아낌없이 사랑을 부어주셨고,  결과적으로 주님의 사역이 사랑을 통과하지 않은 것은 단 한번도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예수님을 닮아가겠다는 결심은, 바로 나도 모든 일을 사랑을 통해 하겠다 라는 결심인 것을 잊지 말자. 내가 앞으로 만나는 사람, 그 누구라도 난 사랑하겠다 라는 결심이, 위대해 보일순 있어도, 실제로는 실현 가능할까 싶은 어려운 일이다. 그 결심 보다는 앞에서 언급한 두가지 결심, 예수를 닮아가겠다,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가겠다 이 결심에 주목하며 살아가 보자. 내가 사랑의 불로 활활 타고 있는 사람이라면, 내 앞에 그 누가 다가온다 할지라도 분명히 이미 불타고 있는 나의 사랑의 불에 그도 불이 붙을 수 밖에 없다. 주중 일하는 식당 주방에, 지난주에 후안 이라는 히스패닉 젊은 친구가 새로 일을 시작했다. 그 친구 3일째 일하는 날에 나와 함께 일을 하게 되었는데, 어찌나 긴장을 하던지 하는 일들마다 실수 연발이다. 돼지고기 동파육을 EVENLY 잘라서 튀겨내어 오더를 나가야 하는데, 칼질이 서툴러서 동파육 한덩어리가 다 뭉게져서 쓸수 없게 되었다.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동작과 표정이 굳은채로 내 눈치만 살핀다. 아마도 내가 호통을 치며 화를 낼 것 같았나 보다. 나는 누구에게나 늘 하던 대로 씨익 웃음한번 보이고, 입에 손가락을 대고 너랑 나랑만 아는 비밀로 하자는 표시를 해주고 잘못 자른 고기를 쓰레기통에 넣어버리고, 새 동파육을 꺼내서 칼질을 보여주며 찬찬히 가르쳐 주었다. 긴장했던 모습에서 점점 여유를 찾기 시작하더니, 그 다음날 일 할때는 한결 밝은 표정으로 일에 잘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일터에서 만나는 히스패닉 아미고들이 나를 싫어하지 않음을 넘어서서 아주 좋은 관계를 이어간다. 나는 한번도 누군가 처음 왔을때 저 친구를 사랑으로 보듬겠다 라는 결심을 한적이 없다. 하지만 일터에 도착해서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리기 전에 언제나 두가지 결심을 먼저 하고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나로 인해 가게가 어떻게 해서든 좋아져야 한다는 결심과, 누구와 일하던지 나로 인해 그들의 삶이 좋아져야 한다는 심플한 결심이 그 두가지 이다. 이 결심이 결국, 사랑의 사람으로 오늘을 살겠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겠다 라는 결심과 다르지 않은 같은 결심인 것을 잊지말자. 우리는 오늘을 살아가면서 많은 문제들을 직면하게 되는데, 무엇보다 힘든 문제는 다름아닌 관계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너와 나 사이에 있는 그 어떤 장벽을 어떻게 해야 무너뜨릴 수 있을까?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우리의 삶에 사랑이 흘러 넘치면 모든 장벽이 무너진다. 장벽을 무너뜨리는 것은 힘으로만 되지 않는다. 기술로만 되지 않는다. 믿음으로만 되지 않는다. 기도로만 되지 않는다. 갈라디아서 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를 받거나 안 받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 사랑을 통하여 일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사랑을 통하지 않고서는 믿음은 힘이 없다. 힘만 들고 결국은 공허해 진다. 믿음이 사랑을 통과할때, 믿음이 사랑을 통해 일할때엔 어떤 장벽이던 무너뜨리지 못할 장벽이 없음을 기억하자.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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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어리버리 서민수 목사의 낚시 전도법 - 전도는 홍보다! 크리스천헤럴드2024.02.10
    일반적으로, 상업적인 상품을 소개하는 것을 광고라고 한다.오늘날 상품 하나가 세상에 알려지고 많은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텍스트와 소셜 미디어를 통해 소개되는 일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비즈니스에서는 상품을 70%, 마케팅을 30%라고 말한다. 상품 본연의 역할이 상당히 크지만, 그 상품을 효과적으로 알리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노력과 기술 그리고 전략이 필요하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날 교회와 목회자, 성도들이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저절로 전도가 되겠지 생각하는 것은 시대 흐름을 이해하지 못한 안타까운 일이다. 전도를 하려면 먼저 커머셜에서 말하는 마켓팅의 단계가 필요한데, 이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품(복음)을 소개하려고 하는 여러분 자신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복음을 전달하는 메신저(messenger), 딜리버(deliver), 스피커(speaker)가 가장 중요하다는 말이다.사실이다.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메신저 된 여러분 각자가 너무나 중요하다. 낚시 전도법에서는 이 메신저와 스피커의 역할을 바로 구원받은 성도, 구원의 확신이 있는 성도, 그리고 제자 된 성도가 감당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전도의 시작과 끝은 사람이다.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 복음을 전하는 메신저가 중요하고, 그 메신저를 통해 구원받아야 할 태신자가 너무나 중요하다. 결단코, 구원의 경험이 없고, 감격이 없는 사람은 복음의 메신저가 될 수 없다. 복음을 방해만 하지 않아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구원의 확신이 없는 성도, 진실로 복음으로 회복되지 않은 성도는 결코 복음의 스피커가 될 수 없다.구원받은 우리가 복음으로 회복된 우리가 바로 전도를 위한 가장 기본적이고 효율적인 상품이고, 도구임을 깨닫고 믿어야한다. 늘 그렇지만 복음이라는 상품을 소개하는 사람(전도자)과 상품을 소개받는 사람(태신자)의 관계가 너무나 중요하다. 이들의 관계는 복음서에서도 잘 나타난다.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어 예수님께로 나아오고,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제자가 되었다. 그들 가운데에는 이미 혈연관계거나 친한 친구 혹은 같은 업종에 일하는 동료라는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요한복음 1:40-42)우리가 잘 아는 사도 베드로는 동생 안드레와 함께 어부로 살아가고 있었다. 둘은 형제였고 경제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동생 요한도 형 야고보를 예수님께로 인도했다. 빌립은 베드로와 안드레와 한동네에 살았다. 그는 베드로 형제와 동종 업계에 일하던 사람이었다. 이처럼 이들의 관계는 친밀했고 실타래처럼 얽혀 있었다. 같은 직종에 있던 베드로와 안드레로부터 예수님에 대해 전해 들었던 빌립은 어떻게 전도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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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샘신칼럼 - “감사는 쉬운 일이 아니다” 크리스천헤럴드2024.02.10
    누가복음 17장 11-19절 말씀을 보면 문둥병자 10 명이 예수님 때문에 병이 나았습니다. 그런데 9 명은 자기의 병을 고쳐 준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치 않고 각기 자기들의 길을 갔습니다. 반면에 사마리아 사람 1 명은 자기의 몸이 나은 것을 확인하자 바로 예수님께로 돌아와 엎드려 사례했다는 내용입니다. 10 명의 문둥병자가 다 나음을 입었지만 돌아온 사람은 한 명이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감사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10 명의 문둥병자들이 다 나았습니다. 그러나 돌아와 예수님께 감사를 표현한 사람은 1 명 뿐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감사가 생 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문둥병이라는 무서운 병이 나았으니 당연히 감사할 것 같지만 9 명은 예수님께 오지 않고 1 명만 왔습니다. 9 명은 감사가 없었고 1 명만이 감사가 있었습니다. 10 명 중 1 명이니까 10 %입니다. 문둥병이 나은 9 명은 틀림없이 감사할 조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감사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흔히들 생각하기를 감사의 조건이 있다면 누구나 감사할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감사의 조건이 너무나도 분명하지만 9 명은 감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 서 배울수있는 교훈은 감사의 조건이 있다고 다 감사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 있다면 우리 모두는 감사의 조건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모두가 다 감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감사는 실력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적다는 것은 예배자가 적다는 말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감사와 예배의 의미가 같기 때문입니다. 감사의 조건이 있음에도 감사하지 못한다는 것은 감사하는 실력이 부족한 것입니다. 감사에 대한 훈련이 되어 있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예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드리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예배 역시 훈련입니다. 그럼 돌아온 한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엎드리어 사례했다고 했는데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문둥병이 나은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님께 나아와 엎드렸습니다. 그것은 정확하게 예배에 대한 그림입니다. 예배는 인간이 하나님을 만났을 때 나타나는 반응이요. 하나님의 능력과 속성에 대한 응답입니다. 지금 그는 예수님의 능력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문둥병을 고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자 그는 인간이 취할 수 있는 합당한 반응인 예배를 예수님께 드립니다. 가장 겸손한 자세로 엎드려 사례하여 예수님께 감사를 표현합니다. 그럼 오늘 말씀에서 발견하게 되는 예배의 정의는 무엇입니까? 예배 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깨닫지 못하면 감사가 없고, 감사가 없다는 것은 예배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배의 성패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느냐 깨닫지 못 하느냐 에 달려 있습니다. 은혜의 분량은 감사의 분량입니다. 또한 감사의 분량은 예배의 분량이기도 합니다. 우리모두가 범사에 감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우리의 삶이 감사하는 예배자가 다 되시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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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
    [오피니언] 조영석 목사의 생각하며 기도하며 - 관 심 크리스천헤럴드2024.02.10
    교회를 가면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젊은 부부들을 보게 된다. 교회마다 젊은이들이 줄어서 인지 더더욱 눈에 띈다. 예배 후 친교실에서 만나면 아이들을 챙기느라 엄마 아빠는 밥이 눈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정신이 없어 보인다. 우리 부부도 그런 시절이 있었으니 그때의 삶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다. 집으로 돌아갈 때도 아기 용품들을 챙겨 유모차에 태우고 바쁘게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며 당시의 경험들이 떠오른다. 아이들이 생기면 어른들의 삶에도 여러 변화가 생긴다. 그 중 하나는 이전에 관심을 갖지 않았던 아기 용품들이다. 무엇이 있는지 알고는 있지만 필요치 않았으니까 잘 모르고, 관심밖에 일이었으니 보았어도 생각없이 지나치게 된다. 우리의 경우는 유모차였다.첫 아이를 출산하고 나서 유모차에 난생처음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아이를 갖기 전에는 관심이 전혀 없던 것이어서 자주 본적도 없고 아는 것도 별로 없어서 어떤 유모차들이 있는지, 어떤 것을 구입해야 하는지 알아보기 시작했다.온라인으로 찾아보고, 아기용품점에 가서 직접보고, 브랜드도 알아보고 가격비교도 해보고 하면서 조금씩 알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 다음날부터 갑자기 이상한 현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잘 보이지 않았던 유모차가 갑자기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어디를 가도 유모차가 보였다.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눈에 밟힐 정도로 많이 보였다.좌로 봐도, 우로 봐도, 어디를 보아도 시선을 두는 곳마다 유모차가 보였다. 심지어 가다가 혹시 하며 위를 보아도 건물 위층에 유모차가 보였다. 설마 여기는 없겠지 하며 쳐다보면, 어김없이 그 곳에도 유모차가 있었다. 심지어 유모차 주차장까지 보였다.온 세상이 유모차로 가득했다! 두발 달린 유모차, 세발 달린 유모차, 네발 달린 유모차, 모양과 종류도 셀 수 없이 많고 다양한 유모차들이 가는 곳마다 가득했다. 세상천지에 이렇게 많은 유모차가 있었는지 그때 처음 알았다. 그런데 갑자기 그 많은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 듯 한꺼번에 아이들을 낳아서 유모차가 많아졌을 리는 없고 다만 내가 관심을 갖게 되니 그제서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관심을 갖아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우리가 영적인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이다. 반대로 관심을 버려야 하는 것들도 있다. 내 마음에 이미 가득한 것들이다. 내가 욕심내는 것들, 나도 모르게 내 시선이 가는 것들, 내 육이 갈망하는 것들은 이미 충분히 나의 관심안에 있다. 이것들은 내 본성이 알아서 자연스럽게 찾는 것들이다. 오히려 관심이 지나쳐 실수를 하고, 잘못된 선택을 할 때도 있다. 관심을 낮춰야 할 것들이란 뜻이다.새해다. 내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정하는 때이다. 내 영이 간구해야 할 것들에 관심이 없어 가까이 있음에도 잊고 살 때가 있다. 옆에 있어도 보지 못하고, 스쳐 지나가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영적으로 무뎌져서 관심 갖지 않고 살 때가 있다. 우리에게 많은 필요가 있지만 그 무엇보다 나의 영을 건강케 하고 생명을 얻게 하는 영적인 것에 가장 관심을 두어야 한다. 그것이 가장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이 나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두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잠언 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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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
    [오피니언] 최재홍 목사의 하루한장 말씀 - 하늘, 비 오는 날의 기도 크리스천헤럴드2024.02.10
    지난 2월 첫 주말부터 쉬지않고 쏱아지는 장대비는 흡사 하늘에 구멍이 났다는 표현을 해도 될만큼 많은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Southern California 에 집중호우와 홍수경보가 계속해서 발령되고 게빈 뉴섬(Gavin Newsom) 주지사는 특별재난 지역으로 선포했습니다. 코리아 타운은 정전으로 신호등마저 작동이 되지 않고 있다는 뉴스를 봅니다. 저는 며칠 전 눈부신 하늘을 바라보며 처마 밑 물받이와 배수로를 청소했지만, 오늘은 물받이 중간부분에 틈새가 벌어져  폭포처럼 물이 흐르고, 현관 마당은 물이 넘쳐서 계속 쓸어내야 했습니다. 바로 하늘에서 내린 비 때문에 생긴 일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천둥과 번개가 소리와 장마철 폭우를 만나면 무서웠습니다. 당연히 거대한 자연의 위력과 기후에 압도당한 두려움도 있었지만 사실은 누군가 저에게 알려준 이상한(?) 정보 때문이었습니다. 그 정보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이 세상에 사는 나쁜 인간들 때문에 화가 나셨고 그래서 진노하는 증거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창조과학회 이재만 교수는 하늘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늘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는 수많은 별들을 담고 있는 우주 공간의 밤하늘과 새가 날아다니는 대기권이다. 대기권에는 질소 78%, 산소 21%, 기타 1%의 기체가 일정한 비율로 혼합되어있다. 이 혼합비율은 지표면으로부터 지상 80Km까지 거의 그대로 유지된다. 대기권의 기체가운데 산소는 생물의 호흡에 절대적이다. 산소의 비율이 더 높으면 생물이 살기에 더 유리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대기 중에 산소 함량이 1% 높아지면 산불이 일어날 확률이 70%가 높아진다. 반대로 산소의 비율이 조금만 낮아지면 불을 붙이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당장 숨쉬기도 힘들어진다. 대기 중에 가장 많은 질소는 모든 식물에게 필요한 영양소다. 비 온 후에 식물들이 눈에 띄게 성장하는 것은 비가 대기 중에 있던 질소를 공급해 주기 때문이다. 질소는 토양에서 얻은 양분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기 때문에 가뭄이 오래 지속될 경우 물 부족만큼이나 질소부족으로 인한 문제가 심각해진다. 또한 다량의 질소는 가연성 기체인 불안정한 산소 사이에서 대기를 안정화하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대기 중에 있는 미량의 오존은 태양에서 오는 자외선을 막아주는 여과기(오존층) 역할을 하며, 이산화탄소는 지표에서 발사되는 빛의 일부를 흡수해 지구에 따뜻한 온도를 유지시켜 준다. 대기를 구성하는 이들 기체들은 완벽한 성질로서 서로 조화를 이루며 존재하고, 사람과 생물들이 살 수 있는 적절한 환경을 제공한다’고 설명합니다.성경 창세기에서 하늘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는 첫 순간부터 등장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둘째 날에는 궁창으로 물을 나누며 대기권을 만드시고, 이 공간에서 다섯 째 날에 새들이 날도록 창조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후에 매번마다 ‘그대로 되니라’는 종결어를 사용하신 것을 성경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저 높고 푸른 하늘과 이 세상의 모든 만물들을 삼위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만드시고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그분은 영원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아침 중보기도 시간에 집중호우 때문에 불편함을 겪는 이웃들을 위해서 합심해서 기도드렸습니다. 내 삶이 조금 힘들고 불편하다고 해서 하나님이 안계신 것은 아닙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잘 안된다고 해서 하나님이 안계신 것도 아닙니다. 자연재해와 환경때문에 혹은 삶의 관계와 질병으로 고통을 겪는 이웃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산 자들이 이만큼, 이렇게 보호와 인도함을 받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삶 가운데에 기쁨의 순간이 오면 그 상황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때로 숨이 멎는 어려운 순간에도, 그 환경에서 변함없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성도의 신앙생활입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으십시오. 끝없이 펼쳐지는 저 하늘을 바라보며 우리는 완전하고 한 치의 오차도 없고 시간에 제한을 받지 않으시는 전지전능하신 창조자 하나님을 찬양할 뿐입니다(사43:21). 최근 존경하는 데이빗 강 장로님께서 카톡으로 ‘비 오는 날의 기도’(양광모 시인) 라는 시를 보내주셨는데 제 마음에 감동과 은혜가 되었습니다. <비에 젖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소서/ 때로는 비를 맞으며 혼자 걸어가야 하는 것이/ 인생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소서/ 사랑과 용서는 폭우처럼 쏟아지게 하시고/ 미움과 분노는 소나기처럼 지나가게 하소서// 천둥과 번개 소리가 아니라/ 영혼과 양심의 소리에 떨게 하시고/ 메마르고 가문 곳에도 주저 없이 내려/ 그 땅에 꽃과 열매를 풍요로이 맺게 하소서. // 언제나 생명을 피워내는 봄비처럼 살게 하시고/ 누구에게나 기쁨을 가져다주는 단비 같은 사람이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나 이 세상 떠나는 날/ 하늘 높이 무지개로 다시 태어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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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김병학 목사의 소통하는 교회 - 소통은 ‘다움’을 회복해야 한다 크리스천헤럴드2024.01.26
    한국의 영화 한 편이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고 계속 상영 중이며, 미주 지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관람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영화는 ‘서울의 봄’으로, 1979년 12월 12일에 한국에서의 실제 역사를 기반으로 만든 영화이다. 그 영화를 보면서 분노의 게이지가 얼마나 올라갔고, 심박수가 올라가는 경험을 하였다는 영화 관람 후기가 관심을 끌기도 했다. 왜 이런 일이 역사에서 일어났을까? 자기 자리를 지키지 않은 사람들 때문에 일어난 아픔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군인이 군인으로서의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가든, 교회든, 아니면 가정 또는 회사든지 자기 자리를 지키지 않은 사람들 때문에 어려움이 생긴다. 그 사람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얻고, 그 혜택을 누리며 살 수 있겠지만, 그들과 함께하지 않고 자기 자리를 지킨 주변의 사람들은 생각하지도 못한 큰 고통을 겪을 수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얻은 것 때문에 기쁨의 노래를 부르고 환호성을 지를 수 있겠지만, 그들과 함께하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은 피눈물을 흘리게 된다. 교회도 과거 역사에서 자리를 지키지 않고, 정치나 세상 경영에 개입하면서 세속화가 되었고 타락한 것이 드러나기도 하였다. 교회가 국가에 영향을 끼치고, 교회의 지도자들이 되는 것은 세상에서도 크게 성공한 것으로 인정하던 때가 있었다. 그런 역사를 바로잡으려고 종교개혁이 일어났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개혁의 정신은 약해졌고, 몇몇 대형 교회들이 생기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수는 많이 줄었다는 통계이다. 이제는 교회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에 대한 여러 방안을 모색하고 있지만, 사실 모든 사람이 공감할 만한 뚜렷하게 내세울 만한 것은 없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지금처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각 교회가 움직인다고 말하면 과한 것일까. 이럴 때일수록 교회는 자기 자리를 지켜야 한다. 이 의미는 교회는 교회다움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목회자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을 가르치는 것에 집중해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를 삼는 일에 헌신해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자기의 직업과 가정에서 온전한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 있도록 세워야 한다. 교회의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서 오히려 더 좋은 기회로 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지금까지 위기를 통과하며 오히려 더 순수해졌고, 그때 교회는 비로소 교회다워졌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을 한다. 지금은 교회의 위기이다. 교회의 존립이 위협받을 정도의 위기이다. 이때 교회는 순수함을 회복해야 한다. 바라기는, 목회자들의 기도 자리가 눈물로 젖고, 한 영혼을 품고 양육하고 세워가는 일에 땀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결코 더디 가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가는 것임을 확신해야 한다.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조급함이다. 그러면 자꾸 자리를 벗어나서 더 좋은 방법들을 찾으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은 교회다움을 무너지게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더 좋은 방법을 찾을 때가 아니라, 교회다움을 회복할 때이다. 교회는 교회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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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송경화 교수 칼럼 - 삶과 행동을 통한 신앙의 전수 크리스천헤럴드2024.01.26
    파울러는 아이들이 언어를 익히고 상징체계를 알게 되고 서서히 인간관계를 넒혀 가는 3-7세에 직관적-투사적 신앙(Intuitive-Projective faith)으로 발달한다고 하였다.  이 시기는 언어가 발달하기는 하지만 아직 정교한 교리를 설명할 만한 수준은 아니고, 감각과 이미지, 스토리텔링 등을 통해 신앙적인 내용을 받아들이는 시기이며, 주변의 어른들의 신앙 행위를 보고 배우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상상력과 환상이 아주 중요한 매체가 되기 때문에 아이들의 상상력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신앙 교육이 효과적이다. 하지만 상상력이 그만큼 강력하기 때문에 무섭고 공포스러운 이미지가 그 상상력을 장악하게 되면 그 영향력도 아주 크다. 즉, 인간에게 나쁜 짓을 하는 사탄이나 분노하는 하나님의 이미지, 끔찍한 지옥의 이미지 등은 이 시기 아이들의 뇌리에 각인되어 신앙에 있어서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또한 도덕적, 교리적 금지 사항이나 의무 사항을 강조하기 위해 이 시기 아이들의 상상력을 지나치게 사용하게 될 때 아이들은 평생동안 벗어나기 힘든 짐을 떠안게 될 수 있다. 초등학교를 다니는 시기는 신화적-문자적 신앙(Mythic-Literal faith)의 단계로서 이 때의 아이들은 소속된 공동체의 신앙 체계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신앙이 발달한다. 이와 같은 이 시기 아이들의 인지 발달 수준을 고려할 때, 유치원 단계의 아이들은 그림이나 동화 구연의 방법으로 신앙에 대한 교육을 할 수 있고 초등학교 단계의 아이들부터는 본격적인 교리 교육이나 성경공부가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시기 아이들의 신앙교육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부모를 포함한 공동체 성인들의 신앙의 모습이다. 이 시기 아이들은 추상적으로 사고하거나 객관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이 아직 발달하지 않았고, 신앙 공동체의 어른들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삶을 보면서 신앙을 배운다. 그러므로 롤 모델이 되어 본을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아이들은 배우는 것과 보는 것에 괴리를 느낄 때 보는 것에 더 신뢰를 주고, 이 괴리가 커질 수록 결과적으로 배우는 것의 영향력은 감소할 수밖에 없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대로 삶을 살지 않는 부모를 볼 때 아이들은 부모의 이중적인 삶을 신앙생활의 기준으로 받아들인다. 또한 교회 안에서의 모습과 교회 밖에서의 모습이 크게 다를 때, 아이들은 교회 안에서의 모습을 가식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이는 결과적으로 신앙을 전수해 주는 부모에 대한 불신과, 그 부모를 통해 전수되는 신앙 자체에 대한 불신과도 연결이 된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아이들에게 그림과 동화와 교육을 통해 신앙 전수를 위해 노력하는 것과 동시에 부모와 어른들의 삶을 통해 그 신앙이 어떻게 일상에서 구현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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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
    [오피니언] 신선묵 교수의 교수칼럼 - 코칭과 경청 크리스천헤럴드2024.01.26
    오늘날 코칭이라는 분야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다. 코칭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삶 가운데 이런 변화와 성숙을 이루도록 돕는 역할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변화를 도우려고 할 때에 많은 경우에 우리의 분석력으로 가르치고 잘못을 지적하고 결정을 해주려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코칭은 기본적으로 변화를 실행하는 본인이 변화의 필요성을 깨닫고 변화의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위한 방안들을 살펴보고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세워서 나아가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코치는 질문과 경청 그리고 격려를 통하여 스스로 변화를 잘 해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작업이다. 코칭을 실행해 보면서 가장 처음 마주친 어려움은 내가 답을 줄 수 없고 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코치를 받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문제에 대하여 해줄 수 있는 말들이 너무 많은데 내가 그것을 절제하고 본인 스스로가 답을 찾아 나아가도록 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것은 그 만큼 평소에 우리가 상대방이 스스로 변화를 계획하고 실행하도록 하지 않고 우리가 답을 주고 결정해주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것이 결국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스스로 변화하고자 하는 의욕을 꺽고 의존적 존재로 만들고 그리고 변화를 위하여 생각을 넓혀가도록 돕지 못했던 것이다.한번은 직장 동료에게 코칭을 실행하였다. 코칭을 마친 다음에 피드백을 받아보았다.  그분의 말씀이 나와의 대화에서 늘 가르침을 받고 지적받는 느낌이었는데 처음으로 내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리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다고 믿어주는 모습이었다고 하였다. 평소에도 나름대로 경청하고 격려한다고 생각하였는데 코칭을 실행해 보면서 상대방이 그전에는 그렇게 느끼지 않았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나도 코칭을 실행해보니까 이전과 다른 점이 있었다. 이전에는 내가 머리를 짜내어서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데 따라와 주지 않아서 좌절된 마음이 들었었다. 그러나 코치를 하면 나의 목적이 바뀐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좀 답답하였지만 내가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한다는 선한 부담감으로부터 자유스러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면서도 코칭을 마쳤을 때에 상대방에게는 실제적인 도움이 되는 것을 경험하였다.  경청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관계와 공동체 속에서 어떻게 실행할 것인가를 잘 보여주는 사람 중에 하나는 파커 팔머가 있다. 그의 인간의 영혼에 대한 이해가 우리로 하여금 더 깊은 경청으로 이끌어 준다.“인간의 영혼은 해결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자신의 말을 하고자 한다” 이 문장이 나오는 배경은 파커가 서로간의 어려움을 나누고 도움을 주고 받는 소그룹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어렵게 꺼내놓는 순간에 그 문제에 대하여 너무 쉽게 답해 버리면 그 말하던 사람이 자신의 어려움이 쉽게 다루어지는 것을 보고서 도리어 더 이상 대화를 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말하면서이다. 그가 워크숍에서 채택한 토론 방식은 퀘이커 교도들의 “정화위원회 (Clearness committee)” 라는 것인데 이것은 개인의 영혼을 지켜주면서 개인의 문제점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는 아주 오래된 과정인 것이다. 그런데 여러가지 종류의 소그룹에서 혹은 코칭이나 대화에서 도움을 주는 중요한 통찰이다. 그는 영혼을 야생 동물과 같다고 비유하였다. “우리가 숲속을 달려가며 도와줄테니 어서 나오라고 영혼에게 소리친다면 영혼은 더욱 꼭꼭 숨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조용히 앉아서 침착하게 기다린다면 영혼은 저절로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문제를 조용하고 침착한 방식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의 영혼이 바깥으로 나오게 하는 대화의 기본 규칙을 필요로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그 사람에게 어떤 일이 알맞다고 재단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의 영혼이 알맞은 수준과 속도를 유지하면서 스스로 대답을 찾도록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퀘이커 교도들은 역설적인 신념을 가지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인간은 진리의 중재자인 내면적 교사를 갖고 있으며, 그 내면적 교사의 발언을 듣기 위해서는 서로 주고받는 커뮤니티를 형성해야 한다.”  그래서 이 모델은 개인이 내면에서 나오는 목소리를 듣게 도와주는 커뮤니티를 제공하는 한편, 그 커뮤니티가 외부적인 논지와 조언으로써 개인의 내면성을 침해하지 않도록 하는 기본 규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우리가 많은 경우 사람들과 맺고 있는 관계에서 또 그 대화 속에서 적용할 수 있는 진리인 것이다. 코치나 상담가의 역할이 대화에서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들어주는 것이라는 점도 이런 통찰과 맥을 같이한다. 사람들은 결국 자신들이 깨달아가는 것이고 코치나 상담가 혹은 소그룹에서 다른 구성원들은 사람들이 스스로 그런 작업을 해 나아가도록 함께해주되 듣고 기다려주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사람은 나를 가르쳐 줄 사람이 아니라 나의 이야기를 정죄하지 않고 들어줄 사람, 그래서 나로 하여금 내 내면의 소리를 듣고 답을 찾아 갈수있도록 도움을 주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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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샘신칼럼 - 우리가 싸우는 이유 (The reason we fight) 크리스천헤럴드2024.01.26
    바울과 바나바는 1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안디옥 교회에서 며칠을 머물다가 2차 전도 여행을 계획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2차 전도 여행에 마가를 데리가는 문제로 인해 바울과 바나바가 충돌을 합니다. 바나바의 생각은 마가를 데리고 가는 것이었고, 반면에 바울의 생각은 마가를 데리고 갈 수 없는 것이 었습니다. 결국 바울과 바나바는 그 일로 인해 크게 다투고 헤어지게 됩니다.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행 15:39)  바울과 바나바가 크게 다투고 헤어졌다는 사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에서 함께 사역했던 동역자요. 목숨을 걸고 선교사로서 1 차 전도 여행을 함께 한 사람들이었음에도 불 구하고 그들은 싸웠던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과 바나바가 싸운 사건을 통해 사람들이 싸우는 이유를 찾아보길 원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어떻게 하면 싸우지 않고 함께 할 수 있는지를 확인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다툰 것은 그들의 기질이나 성격이나, 은사의 차이가 아니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기질이나 성격이나 은사적인 측면에서 분명히 달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안디옥 교회에서 함께 사역을 했고, 1 차 전도여행도 문제없이 다녀온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마가에 대한 생각의 차이였습니다. 바나바는 마가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자고 생각했지만, 마가에 대한 바울의 생각은 단호했습니다. 즉 생각의 차이로 인해 그들은 다투었고 갈라섰던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다툰 것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생각이 달라서 다투었고, 계속 다투다가 결국은 헤어집니다. 이것을 반대로 말하면 그들이 헤어진 이유는 다투었기에, 그리고 그들이 다툰 이유는 생각이 달라서입니다. 결국 모든 싸움이란 생각이 다르기에 생기는 결과입니다. 싸운 것을 후회하고 다시는 싸우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할지라도 두 사람의 생각이 같지 않으면  그 싸움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주 안에서 같은 생각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뜻이 하나가 되지 아니하면 같은 길을 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과 다투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다투는 사람은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의 생각을 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에 굴복시켜야 됨에도 불구하고 버티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완고하다고 말합니다. 내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에 굴복시키는 것을 순종이라고 말하며, 그것을 자기 부인이라고도 말합니다.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에 굴복시키는 것이 순종이라면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 지배를 받는 사람입니다. 싸움이란 다른 말로 하면 전쟁입니다. 전쟁에는 엄청난 대가가 지불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생각을 거역하며, 하나님과 전쟁을 치룬다면 그 대가는 실로 엄청날 것입니다. 이길 수 없는 승산이 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전쟁의 반대가 평화, 평안이라면 그것은 순종의 열매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내 생각이 하나일 때 우리는 그것을 평화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내적 평화는 우리가 자기 생각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생각 인 말씀을 지지했을 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보너스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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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최재홍 목사의 하루한장 말씀 - 시대와 문화의 옷을 입은 복음이 필요한 때입니다 크리스천헤럴드2024.01.26
    펜데믹 이후에  목회사역 중에 우리가 다시 준비해야 할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를 늘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지금 이 시대는 복음의 옷을 잘 입혀야 할 때라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데이빗 킨나만의 표현으로는 “코로나 펜데믹은 다음 세대 신앙 전수 현장의 날씨가 아니라 아예 기후를 바꾸어버렸다”라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곳이 어떤 기후인가에 따라서 우리도 변화해야 합니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을 연구해야 합니다. 먹는 음식도 달라져야 합니다. 살아가는 방식도 차이가 드러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연히 사람과 사람들의 생각도 달라질 것입니다. 당연히 기후에 따라서 입고 살아가는 패션과 복장도 달라져야 합니다.얼마전 주일 예배시간이었습니다. 바쁘게 사역중인 목사님이 동부에서 오셔서 말씀을 전하는데 자신을 소개하는 이력과 경력이 주보 한면을 가득채웠습니다. 박사학위도 여러개, 정부기관에서 받은 표창장과 감사편지 목록도 기록했습니다. 여러분들이 호기심/기대감을 가지고 참석했습니다. 정리해드리면, 잠깐 전하기로 약속된 시간을 한참 지나서 결국 다음 순서를 진행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 자랑과 반말과 욕설도 하고, 담임목회자를 이름만 부르기도 헤서 당황스러웠습니다. 강단과 마이크가 필요없는 비매너/무매너와 유행가를 부르고, 찬양팀 기타도 치다가, 중간중간에 소리를 지릅니다. 연세드신 분들이 움찔하며 놀랍니다. 짝기도를 하자고 손을 잡는데 입고 온 제복과 흰 셔츠가 때와 땀으로 반들반들했습니다. 물론 제복을 자신이 열심히 흘린 땀의 흔적으로 시골 농부의 옷처럼 소중하게 여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수십년 이민 목회자로서 처음 겪는 일이라서 충격이었습니다. 영성과 지성으로 존경을 받아야 할 외길 인생 복음의 열정이 안타깝게 느껴졌습니다. 주께 충성하고 사랑한 헌신이 부러울 정도인데 아쉬움이 큰 예배를 드려야만 했습니다. 성경연구도 중요하지만 우리 생활이 연결되지 못한 복음의 답답함과 거북함을 느끼게 된 순간이었습니다.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그렇게 부탁을 하셨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복음을 전하려는 자도 준비가 되어야 하고, 복음을 듣는 대상자에 대해서도 충분히 심사숙고해야 함을 다시 배웠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언어와 열정도 중요하지만 말의 습관과 절제와 열정을 관리하는 것도 은혜인 것을 배웠습니다. 신학교에서 배운 설교학에서는 설교가 목회의 종합예술이라고 정장복 교수님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목회현장에서 충무교회의 박종렬 원로목사님은 설교는 자신의 삶을 통해서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신신당부 하셨습니다. 목회데이터 연구소 2019년 조사에 의하면 ‘청소년의 신앙 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이 누구인가?라는 설문에 1위 어머니 53%, 2위 목회자 33%, 3위 아버지 30%였습니다. 그런데 2021년 조사에서는 목회자와 아버지의 순위가 바뀌었습니다. 아버지 33%가 목회자 25%를 앞지르고 2위를 차지했습니다. 데이빗 킨나만의 Un Christian에서 미국교회에서 청소년이 교육부서를 졸업한 이후에 교회를 떠나는 비율이 86%라고 합니다.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로 기독교 인들이 말과 행위가 일치하지 않는 위선적 존재라는 인식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사랑하는 사역자와 성도여러분, 우리가 사는 이 세상과 시대가 분초마다 다양하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시대가 바뀌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지식과 정보가 힘이되는 인공지능 AI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포스트모던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십자가의 대속으로 용서함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우리 시대에 맞게 복음이 문화의 옷을 입고 전달되었던 것입니다. 이 복음을 전달하기 위해서 인종과 나라와 기후와 환경을 초월한 사랑의 옷을 입고 바다를 건너서 복음에 빛진 자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시대와 문화의 옷을 만들기 위해서 큰 희생(순교)도 감수했습니다. 우리도 시대에 걸맞는 복음의 옷을 입고 준비해야 합니다. 이 시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고, 행동양식과 그들의 생각을 상상해보고 해석하고, 무시로 성령께 의지하고 기도하며 복음의 옷을 지어야 할 때입니다. 땅끝까지, 마지막 한 영혼에게 복음이 전달될 때까지, 예수님이 다시오실 종말을 살아가는 지혜로운 사역자와 성도가 필요한 때입니다. 복음이 이 세대를 관통할 문화의 옷들로 아름답게 지어서 예수이름으로 전달되는 그날을 비전으로 삼고 기대합니다. 그날, 이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게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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