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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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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김은주 교수의 탈진을 긍정하라 <탈진의 긍정 바이러스> 크리스천헤럴드2024.06.16
    리처드 브로디(Richard Brodie )는 희망의 마인드 바이러스를 펼쳤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세계를 강타하며 두려움과 위기를 몰고왔지만 마인드 바이러스는 긍정적인 밈(meme) 하나가 세상을 희망으로 바꿀 것 이라고 전파한다. 밈은 그리스어 ‘모방’(mimeme)이라는 용어에서 만들어냈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은 밈에 의해 전달된다. 마인드 바이러스는 새로운 밈에 의해 프로그래밍하고 명령을 전달하며 행동하도록 만든다. 즉, 사고방식과 행동이 마음을 통해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긍정심리학은 마인드 바이러스를 희망으로 만든다. 부정적인 탈진까지도 긍정하도록 희망을 실어준다. 탈진을 극복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좋은 영향력을 전달한다. 만약 자신이 삶의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고 희망과 지혜와 사랑을 노래하며 보다 번창하는 삶을 누릴 수 있다면 긍정심리의 변화를 추구하지 않겠는가! 긍정심리학은 탈진을 인생역전의 기회에 도전하라고 격려한다.대표적인 ‘행복의 공식’은 ‘H=S+C+V’이다. 행복(H)은 유전의 설정값(S)과 삶의 조건 환경(C)과 자발적인 행동(V)으로 결정된다. 유전 요소 50%와 환경적 행복의 조건을 제외한 자발적인 노력만으로도 40%의 행복을 만든다. 도전할 수 있는 여지가 다분하다. 부정적인 상황에서 긍정적인 경험을 되살려 심리적 안정을 찾고 두려움과 불안을 완화하는 기술은 행복으로 가는 낙관성 학습이다. 삶을 즐겁게 전환하는 기술은 무엇보다 마음 속의 거울로 들여다보고 스스로의 사태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비관하는 뿌리가 무엇인지 인지하고 삶을 파괴하는 믿음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 탈피하려는 노력이다.한국인은 행복을 다분히 추구하면서도 행복지수가 낮다. 유엔 산하 자문기구인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SDSN)는 '2022 세계 행복보고서'(2021 World Happiness Report)를 공개했다. 한국은 146개국 중 59위를 차지했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운데 최하위권에 속했다. 한국이 지난 30년 동안 하위권에 머무는 것은 부정적 신념이 크게 작용했다. 한국인이 선호하는 조건식 행복은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뤘음에도 행복하지 않는 기이한 결과를 자아냈다. 저변의 뿌리 깊은 부정적 정서가 만족과 감사를 하기 보다 비교의식의 상대적 박탈감이 역성한 연고이다. 한국의 전통적 뿌리가 문화와 결부하여 탈진을 초래하기도 한다.과연 한국인은 부정적 관념의 탈진을 긍정할 수 있을까? 각자 자신의 탈진 요인에 긍정 바이러스를 주입해 보길 바란다. 첫째, 탈진 요인에 갈등전환의 밈을 대입한다. 밈의 전파는 마인드 전환을 가져온다. 관점의 변화가 생기고 넓은 시야를 갖으며 성찰과 성장의 기회를 경험한다. 둘째, 긍정 도구를 적용한다. 긍정의 바이러스는 스트레스를 잘 대처하고 회복 탄력성을 높이며 건강과 행복의 삶의 질을 향상시킨다. 긍정심리학이 발표한 긍정 도구는 33가지를 제안한다. 행복 워밍업, 긍정소개, 재미와 베풂, 꿀과 식초, 좋은 하루 만들기, 감사일기, 감사방문, 최선을 다한 나, 용서하기, 음미하기, 자신감 키우기, 부정정서 낮추기, 몰입 경험하기, 성격 강점 찾기, 대표 강점 적용하기, 대표 강점을 새로운 방식으로 활용하기, 마음 챙김 명상, 시간의 선물, 적극적이며 건설적인 반응 기술, 확신에 찬 의사소통 방식, 부부관계를 한층 더 발전시키는 방법, 무기력 극복하기, 외상 후 성장, 회복력 키우기, 최대자와 만족자, 긍정유산 남기기, 사명 선언서, 그릿 기르는 방법, 최상의 자기, 행복의 집 만들기, 긍정심리치료이다. 필자는 최우선으로 감사일기 쓰는 것을 추천한다. 불평과 불만의 상황에서 감사를 찾으면 마음의 여유를 느끼고 소망을 발견한다. 다음은 부정적 정서를 낮추는 방법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부정적 생각을 반추하여 가장 많이 유발하는 지뢰를 제거한다. 비합리적 생각을 논박하는 것은 합리적인 생각을 갖게 만든다. 심지어 희망을 노래한다.영국의 조각가 조지 프레드릭 왓츠(George Frederic Watts)는 시각장애 소녀가 한 가닥의 줄로 하프 연주하는 모습을 둥근 지구 위에 아름답게 그렸다. 그림 제목은 ‘희망’이었다. 그 당시 미국 남북 전쟁하는 사람들에게 큰 힘이 되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선사했다.지금 탈진 요인에 긍정의 밈을 심어보자. 긍정 바이러스는 삶의 어두운 그림자에서 벗어나 빛으로 살게 하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희망을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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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조영석 목사의 생각하며 기도하며 - 내가 섰다고 생각할 때 크리스천헤럴드2024.06.16
    새벽기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기도를 열심히 하고 예배를 열심히 드리며, 나름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고 있을 때였다. 나의 믿음이 좀 성장했다고 자부할 때였다. 그때 마음속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 제가 조금 강해진 것 같으니 이제 긴장을 풀고 조금은 자유로워져도 되겠지요?" 그렇게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속삭였을 때 바로 주셨던 깨달음이 있다. 그것은 나는 내가 가장 약했을 때라고 느꼈던 그때와 지금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내가 강하다고 느꼈던 이유는 사실 다른데 있었다.내가 강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안에 있어 강해 보이는 것뿐이었다. 주님안에 거할 때 그분의 온전함과 완전함이 나를 감싸고 있어, 그 힘으로 강해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마치 나의 능력인 것처럼 착각한 것이다. 실상은 주님 없이는 쉽게 흔들리고 무너질 수 있는 연약한 존재인 것이 나의 본 모습이다. 주님을 붙들던 손을 놓고 이제 혼자 설 수 있다고 생각할 때 나는 다시 가장 약했을 때로 돌아가게 된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상태로 돌아간다. 그래서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할 때가 실은 가장 약할 때이다. 내가 선 줄로 생각할 때가 가장 넘어지기 쉬운 때다.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내 힘으로 해보려고 하기 때문이다.이런 우리의 모습은 성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예수님과 함께 믿음으로 물위를 걸었던 베드로도 잠깐 주님께 눈을 때고 시선을 돌리자 두려움에 빠지고 물에 빠졌다. 하나님 한분만을 의지하며 혼자서 850명의 바알과 이세라의 선지자와 맞서 싸워 이긴 엘리야도 승리에 도취해 있을 때 이세라가 보낸 사신의 말한마디에 두려움에 휩싸여 온 힘을 다해 도망쳤다. 불과 얼마전 거대한 집단과 홀로 맞서 용맹하게 싸우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무력한 모습으로 자신은 살 가치가 없은 인간이라며 하나님께 죽여달라고 했다. 모두 한순간 주님을 붙들던 손을 놓자 일어난 일이다. 스스로 강해졌다고 생각했을 때 일어난 일이다. 우리가 얼마나 약하고 환경에 요동치는 인간인지를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그러니 우리는 한순간도 주님을 떠나서 살수 없다. 나의 연약함과 작음을 알고 주의 크신 이름과 능력을 의지해야 한다. 주님안에 거할 때 우리를 완벽하게 채워 주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경험하게 된다. 내가 약할 때 강함이 되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의 능력에 사로잡혀 위대한 일을 한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처럼 내 힘으로 도저히 할 수 없는 큰일을 약한 나를 통해서 이루시는 기적을 경험하게 된다. 여호와의 능력이 내게 임할 때 비로소 우리는 세상을 이기는 사람이 된다.“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전 10:12-“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 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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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9
    [오피니언] 김병학 목사의 소통하는 교회 - 소통은 현실에 충실해야 한다 크리스천헤럴드2024.05.03
    현대 사회에서 소통의 중요성은 더욱 강조되고 있다. 국가, 단체, 회사 등 어느 그룹에서나 소통은 매우 중요한 평가와 판단의 기준이 되고 있다. 특히, 신앙 공동체인 교회에서의 소통은 그 의미가 매우 크다. 교회는 처음부터 소통이 중요했고, 소통을 핵심으로 삼았다. 그러나 만일 교회가 과거의 전통에만 매몰되거나, 반대로 지나치게 미래 지향적인 비전만을 추구할 때, 현재 교인들이 자기들이 매일 겪고 있는 현실과 동떨어진 메시지를 전달할 위험이 있다. 이것은 교회와 교인 간에 동떨어진 상황을 만들어내며, 결국 공동체의 단합과 성장을 방해할 수 있다.예를 들면, 어느 한 교회에서는 전통적인 찬송가만을 고집하여 젊은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현대적 찬양을 도입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리고 조금 낯선 찬양이 나오면 몇몇 어른들은 못마땅한 표정과 행동으로 거부하였다. 이러한 결정과 태도는 자기 나름대로 과거의 소중한 가치를 지킨다는 긍정적인 면이 있을 수 있으나, 동시에 젊은이들이 교회에 느끼는 거리감을 키우는 요인이 되었다. 진리가 아니고 성경적인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이 아닌데,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 것처럼 주장을 하며 오로지 그 부분만을 부각시켜서 많은 사람에게 의견을 펼칠 때, 교회는 상당한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것은 소통의 부재에서 비롯된 문제이며, 교회가 현실에 충실하지 못한 결과라 할 수 있다.교회는 이러한 문제에 직면하여 실질적인 대응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현실적인 문제에 기초하여 소통 방법을 고민함으로써, 교회 내외의 다양한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예를 들어, 세대 간, 문화 간의 간격을 좁힐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전통과 현대성을 조화롭게 결합한 예배 방식을 시도하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시행하려면, 어른 세대의 양보와 인내가 필요하지만, 이를 통해 교회는 더욱 넓은 범위의 교인들과 의미 있는 소통을 이루어낼 수 있다.또한, 교회의 결단이 요구된다. 교회 리더십은 현재 교인들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현안에 대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수렴하고 반영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과거에 얽매이거나 미래만을 바라보는 교회가 아닌, 현실에 기반을 둔 실천적인 신앙 공동체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려면 교회 리더십은 젊은 세대와 인내를 가지고, 편견을 버리고 꾸준히 대화하고 소통해야 한다. 이것은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는 과정이지만, 틀림없이 교회가 현대 사회에서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모든 세대가 공감하고 참여할 수 있는 신앙의 장을 마련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교회 리더십의 결단과 지속적인 노력 이후, 교회의 소통 방식은 점차 변화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 변화는 단순히 젊은 세대와의 대화를 넘어서, 모든 세대가 각자의 경험과 시각을 교회 내에서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각 세대의 특성을 이해하고 그들의 필요를 반영하는 것은 교회가 더욱 풍부하고 다양한 계층을 품는 공동체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될 것이다.이러한 환경 속에서, 교회는 과거의 가치를 존중하면서도 현재의 필요에 부응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방향을 설정할 수 있다. 이는 모든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프로그램과 활동을 통해 실현될 수 있으며,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에 현대적인 해석을 더 하여 더 넓은 교인들에게 다가갈 수 있게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전통적인 성경 공부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 문제에 대한 워크숍이나 토론을 진행함으로써, 신앙이 일상에서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를 탐색하는 기회를 제공한다.이러한 접근은 교회가 단순히 교리를 전파하는 장소를 넘어서, 각 개인이 자신의 신앙을 표현하고 성찰할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나게 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소통의 진정성이다. 교회가 진정으로 교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생각과 감정을 이해하려 노력할 때, 신앙 공동체는 더욱 견고해지고 활기를 띠게 될 것이다.이렇게 교회가 현실에 충실한 소통을 통해 변화와 성장을 이루어가는 모습은, 교인들이 자신들의 삶 속에서 신앙을 더 깊이 있게 체험하고, 공동체 전체의 유대를 강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게 된다. 이것이 교회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소통의 모습이며, 교회와 교인이 함께 성장해 나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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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8
    [오피니언] 송경화 교수 칼럼 - 신앙전수를 위한 자녀양육-공유하는 삶과 강요되는 신앙(2) 크리스천헤럴드2024.05.03
    청년기 아이들이 형성하는 신앙의 모습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왜냐하면 이 신앙은 아이들이 스스로 형성한 자주적 신앙의 모습이며, 그래서 그 이후 아이의 삶에 평생동안 유지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 시기 자녀들이 신앙을 버리지 않고 안정적으로 신앙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 부모는 이 시기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부모-자녀 관계의 질의 향상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고 신앙을 강요하는 경직된 방법이 아니라 자녀와 함께 공유하는 모습으로 가르치는 게 도움이 된다. 즉, 신앙은 온 가족이 함께 공유하는 하나의 문화가 되어야 하며, 특정 날에 특정 예식으로만 표현되는 게 아니라 일상에서의 삶을 통해 구현되는 것으로 자녀들이 경험해야 한다. 특히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거치면서 자녀들은 신앙에 대한 많은 의문을 갖고 탐구하기 시작하는데, 이를 반항이나 의심으로 치부해서 부정적으로 반응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녀의 신앙적 성찰을 함께 공유한다는 관점으로 적극적으로 함께 토론하고 고민해 보면서 이 과정에 동참해 주는 것이 신앙을 잘 전수하는 부모의 역할이다.한 개인이 평생에 걸쳐 몸, 인지 능력, 인간관계 방식, 성격이 발달해 나가듯이 신앙 역시평생에 걸쳐 질적으로 다른 수준을 통과하며 발달한다. 자녀에게 신앙을 잘 전수하고자 하는 교회와 부모들은 주먹구구식으로 교리나 예식을 주입하고 강요하기 보다는 이런 자녀들의 신앙 발달의 단계를 잘 이해해서 각 단계에 맞는 적절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보다 더 효율적이다.신앙의 발달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자녀와 부모와의 관계의 질이다. 자녀의 신앙발달은 오랜 기간 동안 서서히 이루어지며 그 기간 동안 부모와의 관계가 자녀의 신앙과 하나님 이미지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아기를 처음 품에 안은 그 때부터 부모는 아이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을 늘 기억하며, 아이를 하나님이 그러하듯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주고 존중하고 수용해 주어야 한다. 이런 부모의 무조건적 사랑은 마음만 있다고 되는 게 아니다. 그것은 따뜻하고 친절한 표정과 말투, 신체 접촉과 공급 등을 통해 구체적으로 아이에게 소통되어야 유효하다. 또한 아이들이 신앙에 대해 자연스럽게 수용할 수 있도록 적절한 방법을 사용해서 교육해야 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가정에서의 신앙의 모습을 통해 아이들이 보고 배울 수 있는 신앙의 실천을 꾸준히 지속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이들은 듣고 배워서 신앙을 얻는 게 아니라, 보고 경험해서 신앙을 습득한다. 그리고, 보고 경험하는 일차적인 대상은 바로 가정에서 마주치는 부모들이다. 자녀에게 어려서부터 마땅히 행할 바를 가르치면 아이들이 자라도 그것을 떠나지 않을 것이므로 신앙의 전수는 어릴 때부터, 사실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은 바로 부모와의 관계를 통해 시작된다. 자녀에게 마땅히 행할 바를 가르치는 부모와 교회가 그 가르침이 말로만이 아니라 삶과 관계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기억하여, 교육의 방식 뿐 아니라 삶과 관계의 방식에도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인다면 신앙의 m효율적인 전수에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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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7
    [오피니언] 최재홍 목사의 하루한장 말씀 - 인생의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려는가? 크리스천헤럴드2024.05.03
    교회에 출석하시던 은퇴 선교사님께서 갑자기 몸이 아프셔서 몇 주간 출석을 못하고 계셔서 심방을 갔습니다. 급성좌골신경통으로 발병한지 11일 되셨는데 다행히 얼굴은 소년처럼 환하게 웃고 맞아 주셔서 안심이 되어 주께 간구할 수 있었습니다.대화 가운데 선교사님은 자신의 남은 시간, 나의 생애를 어떻게 보내야 할까?, 묵상하고  기도하셨다고 말씀해 주셔서 큰 공감을 받았습니다.우리의 남은 노년의 때를 다 태우고 남은 흰 연탄재로 겨울철 길 가에 버려지는 존재로 마감할 것인지 혹은 더 갈고 닦아서 누구나 아끼고 존귀하게 여기는 빛나는 다이아몬드로 쓰임받을 것인지는 결국 본인의 생각과 마음의 결단에 달렸다는 비유를 들은 기억이 납니다.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하면서 일생을 살아온 것도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더욱 중요한 것은 앞으로의 남은 시간입니다. 다가올 시간, 살아가야 할 시간을 말합니다. 아무리 중요한 과거의 시간과 추억이 있었다고 해도 앞으로 살아갈 시간을 건강하고 기쁘게 맞이하지 못한다면, 지금까지 지켜온 시간들이 무의미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자녀들에게 영적유언을 남겨야하고 신신당부를 해야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실수와 실패를 안할 수는 없지만 경험을 얻기 위해서 일부러 아프고 병들고, 실패하고 낭패를 봐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건강한 사회는 그러한 위험요소를 줄여가며 보호하는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합리화를 위해서 실수/실패를 통해서 인생레슨을 받았다는 말은 좋지만 사실 그 고통과 마음의 아픔은 수치로 산정할 수 없습니다. 말과 현실이 다르기 때문이고, 생각과 행동은 삶으로 드러내야 하기 때문입니다.그리고 우리는 복음을 영접한 성도이기 때문에 남은 생애를 대충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기때문에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제 고생할 만큼 했으니 쉬고 놀아도 됩니다. 편히 쉬어도 누가 뭐라하지 않습니다.일생의 고달픔을 모두들 인정합니다. 여건이 된다면 그 동안 못한 일들을 하면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성도로서 못다한 일은 없는가 생각해 보시길 권합니다. 이민생활의 바쁨에 쫓겨 마땅히 성도로서 행해야 할 일을 못한 부분이 없었는지, 사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감당했어야 할 일,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마음은 간절했지만 못 해주었던 일들을 돌아보면 메모지에 가득히 채워질 것입니다. 그 기록만으로도 우리의 시간이 더욱 보람되고 행복한 삶을 이루어가는데 요긴하리라 생각합니다. 무리한 것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과 시간이 허락하는 정도로 내 주변을 돌아보는 삶을 사는 것은 결국 나의 남은 생애를 준비하기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시간만 감당하려 해도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분주할 것입니다.솔로몬은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고 말합니다(전3:1-2a). 한 인생으로서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습니다. 은퇴 이후의 삶은 아무래도 겨울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겨울이라고 해서 반드시 춥고 부정적인 계절인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겨울은 겨울로서의 아름다움과 정취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계절적으로 겨울을 좋아하는 분들도 무척 많습니다. 사회의 특성상 잊혀진 계절, 잊혀지는 사람으로 남는 부분도 있겠지만, 숨고르기의 시간으로 간주하고 쉼으로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쉼은 쉬는 것이지 모든 게 끝나는 마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타이어를 갈아끼울 Re – Tire 할 시간이 필요할 뿐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예배하며 사는 우리 인생은 모두가 승리자이기 때문입니다. 메모지 한 장에 남은 우리 각자의 인생을 아름답게 수놓을 내 영혼의 버킷 리스트를 적어보시길 바랍니다. 크리스쳔/성도는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에서 주 예수의 복음을 전하며 살다가, 저 천성을 향하여 달려가는 순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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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조영석 목사의 생각하며 기도하며 - 사랑을 굶긴 죄 크리스천헤럴드2024.04.13
    개인적으로 가장 힘든 시기가 언제인지 돌아보면 마흔쯤 인 것 같다. 삶의 무게가 가장 버겁게 느껴졌던 때이다. 성공과 실패를 평가하는 냉정한 현실을 마주하는 시점이다. 책임도 많았다. 위아래로 돌보아야 할 가족이 있었다. 내 아버지를 가장 많이 이해한 것도 이때쯤 이였다. 짊어져야 하는 짐과 미래에 대한 불안과 염려로 자신감은 바닥을 쳤다. 이때가 내곈 가장 힘든 때였다공교롭게도 내가 가족을 가장 힘들게 한 것도 바로 이때다. 내가 힘드니 그 영향이 주위에 고스란히 전가되었다. 어느때 보다 나를 간절히 필요로 했던 가족을 제대로 돌아보지 못했다. 그 중 제일 미안한 것이 아이들이다. 부모가 전부인 어린 아이들에게 필요한 관심과 애정을 주지 못했다. 지나고 보니 물질적으로 많은 것을 해주지 못한 것은 그리 큰 아쉬움이 아니다. 없어서 못해준 것은 아이들도 크면 이해한다. 그러나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은 줄 수 있는 사랑을 굶긴 것이다. 마땅히 받아야 할 사랑을 주려서 생긴 마음의 병이다. 한 공상과학 영화를 본적이 있다. 전투원인 주인공은 작전 수행 중 발견한 아기를 키우게 된다. 이 선택으로 많은 것을 잃게 되었다. 옮은 결정을 했지만 그로 인해 힘들어진 그는 방황했다. 자신이 힘드니 양딸에게 잘해 주지 못했다. 여느 날 처렁 술집에서 실의에 빠져있는 그를 찾아온 아이를 귀찮아 하며 내보냈는데, 잠시 후 우주선 폭파로 인해 양딸을 잃게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우주로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생존 가능성도, 찾을 가능성도 희박한 딸을 찾기 위해 그가 우주를 떠돌며 찾아 해매이는 그런 스토리다. 흥행작도 아닌데 기억에 남는 것은 내게 어필되는 부분에 있어서 이다. 딸을 잃은 슬픔도 크지만, 하필이면 그가 힘들어서 돌보아 주지 못할 때 그렇게 된 것이 더욱 마음에 걸렸던 것 같다. 만약이라도 찾게 된다면 그때 대했던 모습이 진심이 아니었다고, 그때 힘들어서 그랬다고 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무의미하게 우주를 떠도는 그의 행동은 사랑을 굶긴 것에 대한 속죄로 보인다. 내가 아이들에게 늦게나마 노력하는 이유도 비슷하다. 힘들었을 때 보여준 모습이 진심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서 이다. 사랑하지 않아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실의에 빠져서 그런 것이었다고 용서를 구하고 싶어서 이다. 힘들다는 핑계로 주지 못한 사랑을 이제라도 주고 싶어서이다. 아직 기회가 있을 때 이 실수 만큼은 만회해야 하기 때문이다. 야고보는 옳은 일을 할 기회를 저버리는 것을 죄라고 했다 (약 4:17). 이 때를 놓치면 어쩌면 그 기회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할 수 있는 기회이다. 나의 사랑을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들을 외면하는 것만큼 큰 잘못이 없다는 뜻이다.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 모든 순간 사랑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달라지지 않으셨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언제나 사랑과 온유로 대하셨다. 힘들 때도, 지치실 때도, 그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변해도 예수님은 변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자신을 배신하고 부인할 것을 아시면서도 이전과 똑같이 사랑하셨다.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 당하는 순간에도 그를 못박은 사람들을 위해 구하셨다. 피 흘려 죽으시면서도 남은 자들을 위로하셨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동안 끝까지 사랑하셨다.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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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아모스 목사의 일터영성 - ‘증폭되는 사랑이 진짜 사랑입니다’ 크리스천헤럴드2024.04.13
    요즘들어 ‘사랑’ 이라는 단어를 묵상함에 있어서 가장 많이 떠오르는 생각은, 진짜 사랑은 점점 증폭 되어 진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진짜 사랑엔 과거란 없고, 기약없는 미래도 없는 법이다. 가장 큰 사랑 역시 ‘지금’ 이며, ‘현재’ 일수 밖에 없다.얼마전 올해의 사순절과 부활주일을 지켰는데, 그 기간 중 설교자들과 성도들이 가장 많이 입에 담았던 단어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부활과 십자가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지난주 엘에이에 있는 어느 교회에 설교부탁을 받고 설교를 하는 시간에 성도들에게 질문을 해 보았다. 예수님의 사랑의 가장 드라마틱한 클라이막스는 뭐라고 생각하세요?그랬더니 여러 곳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십자가’ 입니다, 라는 대답들이 들려왔다. 올해 부활주일 전 까지는 필자 역시 예수님 사랑의 클라이막스는 당연히 십자가 라고 생각해 왔었고, 그 신념 이랄까? 여튼 그 생각이 평생 변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상상조차 해본적이 없었다.하지만 여러 순간들을 통해 성령님이 조명해 주신 사실 한가지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 관한 것 이었다.  아모스야, 너는 정말 십자가가 예수님 사랑의 클라이막스 라고 생각하니?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이 2천년 전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부터 지금까지 그 오랜 세월동안 더 큰 사랑을 행하신 적이 없으시니? 라고 물으시는것을 듣는 영적체험을 하게 되었다.그리고 그 문제에 관해 여러날에 걸쳐 기도하고 묵상하는 가운데 여러가지가 새로 정리가 되는 은혜를 경험하였다. 이야기 하면 너무 길어서 다 서술할수는 없지만, 간단히 요점만 말하자면, 크리스찬의 삶은 그저 예수님 믿고 죽으면 천국가는 것, 그것이 복음의 99% 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 종교적인 생각 이라는 것이다.만약 그것이 우리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표라면, 십자가가 예수님 사랑의 최고 클라이막스 라고 얘기해도 틀린 말이 아니겠지만, 천국가는 것이 인생의 전부라면, 천국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전까지 살아가는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은 과연 어떤 의미란 말인가?생략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 성령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야 말로 우리가 매일의 삶에서 추구해야 하는 삶의 지향점이 아니던가?우린 오늘도 그 삶을 살아가고 있고, 놀랍게도 그런 삶을 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점점 더 증폭된 사랑으로 나를 향해 있다는 것을 우린 알고 있는가? 그렇다. 예수님은 우릴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지만, 더 자세하게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사랑 하셨고, 십자가를 지셨고, 부활 하셨고, 그것으로 사역을 마치시고 천국 보좌에 올라가셔서 뒷짐지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날 위해 간구하시며 내가 걷는 길, 살아가는 삶에 함께 하시되, 할수 있는 가장 큰 사랑으로 함께 하시는 분이 우리 주님임을 아는 것이 믿음이요 은혜요 복 임을 잊지말자.요한복음13장 1절 말씀,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는, 자기가 이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가야 할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아, 정말 감격적이지 않은가? 그리고 자기의 사람들의 범주 안에 나도 포함되어 있음이 기적이 아닌가? 그리고 나 역시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이 말씀에 어찌 감동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예수님의 사랑을 말하면서 성경에 있었던 이야기들과 과거의 이야기들을 늘어놓는 것으로 다 말했노라 말하지 마라. 예수님의 사랑은 언제나 더 증폭되는 그런 사랑이며, 그 사랑은 바로 지금 나를 향해 있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란 사실에 아멘! 하는 자들은 복이 임할 줄 믿는다.마지막으로, 우리 모두가 잘 아는 마태복음의 마지막 서너구절을 암송해 보자. 이 말씀의 핵심 메세지는 ‘명령’ 인줄 알았다. 어느 순간부터 다른 것이 더 크게 눈에, 마음에 다가오는 것을 경험한다.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겠다’ 라는 사랑의 약속이 바로 그것이다.Again, 진짜 사랑은 점점 증폭된다. 진짜 사랑은 지금이 클라이막스다. 그랬기에 그 사랑의 주님이 부활하신 이후에 빌라도의 법정이나 십자가에 달리신 그곳으로 찾아가셔서 만천하가 떠들석하게 승리를 선포하시지 않으셨다. 대신에, 두려움과 절망가운데 떨고있던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예수님의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셨고, 그들을 바라보시며 나지막히 미소지으며 한마디를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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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김병학 목사의 소통하는 교회 - 소통은 미래 준비다 크리스천헤럴드2024.03.30
    다음 세대가 없어지는 교회의 앞날을 예측하는 것은 어려운 일 아니다. 이미 그 현상들은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교회의 위기에 대하여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겠지만, 가장 큰 문제는 많은 사람들, 특히 다음 세대의 젊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에 대부분 사람은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에 대한 통계 자료를 보면, 너무나 그 이유가 많고, 그 이유를 살펴보면 이해가 되는 것들도 있지만 어느 것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기도 하다. 그 이유 중 어느 것들은 교회가 감당하고 해결할 수 있는 것들도 있으나, 어느 것들은 교회가 전혀 감당하거나 해결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물론 사회가 세속화로 변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교회가 강조하는 진리와 구원의 방식에 회의를 느끼고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것뿐 아니라 과학 기술의 발달과 인터넷의 확산 영향도 오히려 교회에 불리하게 작용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개인적인 이유도 많이 있다.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이 안타깝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외로움을 느끼고 소속감이나 공동체를 경험하지 못했거나, 교회가 너무 정치적으로 되어 영적인 성장이나 신앙적 성숙보다 사회적인 문제와 정치적인 색깔을 드러내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 목회자나 교회의 직분자들의 진정성이 없어 보이는 이중적인 말과 태도, 세상 문화와 너무나 동떨어진 듯한 교회의 문화와 설교 등에 지루함을 느끼는 등의 문제들은 너무나 아쉽다.그러면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아니 좀 더 노골적인 질문을 해보자. 교회는 변화를 위하여 무엇을 해볼 의지나 있나? 교회는 혹시 ‘빅브라더’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예전의 방식대로 교회가 여전히 각 개인의 삶을 통제하고,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사람들이 따르기를 바라며, 자신들은 무엇이든 모든 것에서 옳다고 여기는 것이 아닐까?그래서 여전히 뜻맞는 몇몇 사람들이 모여서 걱정하며 토론하고 기도하는 것으로 할 만큼 했다고 만족하지 않을까?만일 교회가 계속 이렇게 생각한다면, 앞으로 교회는 텅 빈 건물만 붙들고 있을 것이다. 젊은 세대가 없는 교회는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교회는 그동안 수없이 ‘한 영혼’을 구호로 외쳤지만, 사실은 구호로만 그쳤던 한 영혼에 이제부터라도 집중해야 한다. 그동안 교회는 이 구호를 습관처럼 외쳤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는 말하지 못하였다. 한 영혼에 집중한다는 것은, 각 개인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가치와 그 가치에 맞는 영적 성장이 일어나도록 돕는 것이다. 세상의 기준과 판단이 아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기 때문에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는 확신이 필요하다.그리고 각 개인에게 적합한 교회의 영적인 돌봄이 있어야 한다. 교회는 모든 사람이 모두 같은 영적인 과정일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각 개인의 영적인 성장을 위하여 맞춤형 돌봄과 양육의 과정을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그동안 교회는 일방적으로 준비한 프로그램에 성도들을 참여시켜 일률적이고 획일적인 교육과 훈련을 해왔고 상당한 효과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각 개인의 영적인 성숙도를 분석하고, 그 개인의 영적인 경험과 가치관 그리고 성장 배경 등을 파악해서 그 한 사람에게 적합한 양육과 훈련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실행해야 한다. 그 한 사람과 함께 기도하고, 그 한 사람과 함께 말씀 묵상하고, 그 한 사람과 함께 정기적인 상담과 피드백을 해야 한다. 그래서 그 한 사람을 지지하고 공감하는 신앙적인 공동체에 참여하고 형성하도록 돕고, 그 한 사람이 잘 세워져서 다른 한 사람을 양육하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교회는 책임을 지고 감당해야 한다.교회는 예전의 좋았던 때를 그리워하고 그때로 돌아가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거역할 수 없는 파도처럼 밀려오는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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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3
    [오피니언] 샘신칼럼 - 죽음과 부활 (Death and Resurrection) 크리스천헤럴드2024.03.30
    만일 지금 우리에게 죽음이 찾아온다면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죽음 앞에 설 떄 돈과 권력과 명예, 그리고 주변 사람들은 나를 정말 도와줄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죽음 앞에는 무력합니다. 움켜 쥐고 살았던 모든 것이 아무 의미 없이 사라지는 순간입니다.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진실해집니다. 그리고 깨단게 되는것은 자신이 바보처럼 살았다는 사실입니다. 속고 살았다는 말입니다. 중요하지 않은 것을 꽉 붙잡고 살았왔음을 죽음 앞에 와서야 깨닫게 된다면  이미 늦은 것입니다. 큰 사업을 하며 분주하게 살던 한 사람이 어느 날 자기의 인생을 정리합니다. 그동안 너무나 바쁘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바쁘다는 것은 삶에 우선 순위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모든게 너무 분주한 사람은 자신의 삶의 우선순위를 다시 배치해야 합니다. 이 사업가도 그리하게됐습니다.이 사람이 우선순위를 재배치함에 있어서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죽음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합니다."내가 죽었을 때 울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 그는 바로  그들을 위해 가장 많은 시간을 사용할 것을 결심합니다.예수를 믿는 우리에게 죽음이 찾아온다면 주님 밖에 의미가 없습니 다. 죽음이 찾아오면 모든 것은 사라지지만 주님은 그곳에 계십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는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가 추구하며 살았던 그 모든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이었는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누구를 미워하는 것 역시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죽음 앞에 있다면 우리는 모든 사람을 용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더 빛나는 분이 예수님 이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돈과 권력이 죽음 앞에서는 의미가 없지만 부활은 죽음 앞에서만 의미가 있습니다. 죽음이 있기에 부활은 귀하고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이 감격으로 다가오려면 죄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고,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합니다. 왜냐하면 부활은 죄와 죽음의 건너편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와 죽음의 성경적 의미를 아는 사람 만이 부활의 진정한 가치를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주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며, 주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 믿는 사람들이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뒤 집으면 부활이 사실이라면 우리 믿는 사람들이 가장 복 받은 사람들이 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사실이며, 우리의 부활 역시 사실입니다. (The Lord’s resurrection is true, and our resurrection is also true) 어느 날 우리는 우리 자신들이 가장 복 받은 사람임을 확인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One day we will realize that we are the most blessed people) 우리가 죽음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이유는 부활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부활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려면 반드시 죽어야만 합니다. 만일 우리의 육신을 십자가 죽음에 넘기 운다면 부활의 능력을 경험할 것입니다. 죽음과 부활은 항상 같이 다닙니다. (Death and resurrection always go toge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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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
    [오피니언] 최재홍 목사의 하루한장 말씀 - 예수님의 부활은 교회 부흥의 시작입니다 크리스천헤럴드2024.03.30
    1492년 스폐인령의 지브롤터 해안 끝에 작은 팻말이 하나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의 라틴어 문구(Ne Plus Ultra / No More Beyond)가 씌어져 있었습니다. 바로 이곳이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이 세상의 땅끝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배운대로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가 이곳을 통하여 세상의 끝을 넘어갔고, 이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놀라운 신대륙이 펼쳐져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후부터 그곳에 세워진 팻말의 문구가 바뀌었다고 합니다. 맨 앞에 씌어진 ‘Ne / No’ 를 떼어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너머에 더 많은 것이 있다’(Plus Ultra / More Beyond) 라는 의미로 바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우리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전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당하면 한없이 슬퍼하고 절망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수난을 예고하시면서 3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여러번 강조하고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했고 곧 잊어버렸습니다. 심지어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대면하여 보았지만 사실을 믿지도 못했습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눅 24:44)고 말씀해 주셨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셨습니다.이후에 성령충만해진 제자들은 나가서 ‘예수 부활하셨다!’하고 외쳤습니다. 이 소식이 땅끝까지 전파되어 오늘날 전 세계 곳곳에 교회가 세워졌고 매주일마다 예수는 살아계심을 예배로 드립니다. 2천년 전에 막달라 마리아와 몇명의 사람들로 부터 시작된 ‘예수 다시 사셨습니다!’ 라는 부활의 소식은 놀랍게도 코리안 디아스포라 750만 명과 1천만 대한민국 성도들, 그리고 온 세상의 25억 명의 크리스쳔들이 이 땅에 존재하며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예수님이 부활하셨냐고 의심하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교회가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부활이 없었다면 오늘날 전 세계의 지상의 교회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교회에 속한 성도님들의 삶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확실한 증거입니다. 제가 섬기는 원웨이 쳐치는 해마다 고난주간 새벽기도회를 드리고 있습니다. 전체 교인을 비율로 볼 때에 60% 이상 참석하여 큰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아주 먼 거리에서는 인근 지역 교회로 출석을 합니다. 주차장 밖에서 게이트가 열리기를 기다리는 차량들, 성전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성도님들, 서로 손을 잡아드리고 엘리베이터와 계단을 오르시는 권사님들의 새벽 모습을 보면 늘 새벽기도에 힘쓰시던 앞서가신 기도의 용사들이 생각납니다. 미리와서 찬양을 준비하는 분들, 은혜의 말씀을 마음으로 듣고 아멘으로 화답하며 합심기도로 주여~! 외치며 구하고 찾는 간절한 기도가 성전에 가득 울려퍼집니다. 저희 부부도 25마일을 달려가야 하지만 성도들이 보고 싶고 기도드리고 싶어서 빨리 교회에 가고 싶습니다. 아내도 부활주일 달걀을 준비하려고 벌써부터 기쁨으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어릴 때에 해마다 부활절 달걀 메시지를 받고 성장한 타주에 있는 자녀들에게서도 ‘아빠 부활주일 메시지가 뭐냐?’고 내용을 미리 알려달라고 연락이 옵니다. 성도님들은 부활절 축하카드를 보내주셨습니다. 이렇게 우리 모두는 교회를 중심으로 부활의 기쁨속에 한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를 통해서 온 세상 사람들이 부활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부활을 증거하는 것입니다.우리도 부활의 증인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말씀대로 고난을 받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가는 곳마다 목숨을 걸고 이것을 증언했습니다. 초대교회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었습니다. 우리가 그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 믿음이 우리에게 부활의 영광과 능력을 경험하게 하고 부활을 전하는 증인이 되게 합니다. 우리를 통해 예수님의 부활이 전해지고, 이 땅에 세워진 교회마다 부활의 소망과 기쁨으로 새로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날 것을 믿습니다. 십자가의 능력과 부활의 기쁨이 교회와 가정마다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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