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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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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조영석 목사의 생각하며 기도하며 - 고향 크리스천헤럴드2024.11.26
    가을이다. 아내가 장모님과 함께 한인 마트에 가서 빨간 고추를 한 가마니 가득 사왔다. 뒷마당 곳곳에 빨간 고추가 사방에 널려져 있다. 장모님께서 모두 말려서 태양초 고춧가루를 만드신다고 한다. 미국생활 처음으로 한국에서나 보았던 가정에서 직접 햇볕에 말린 태양초 고춧가루를 먹어 보게 되었다.그런데 이 고추들을 보고 있으니까 갑자기 한국이 너무 그리워 진다. 미국에 살고 있으니 한국음식이 그리워져서 그런 것은 아니다. 이제 미국 전역에 한인음식점들이 있고, 유명한 한식당에 가면 한국에 있는 어지간한 식당들 보다 더 맛있게 한국음식을 잘한다.한국사람이 그리워서도 아니다. 한국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곳이 그리우면 LA 한인타운에 가면 된다. 그곳은 외국 사람들 보다 더 많이 보인다. 어떤 곳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을 보기가 희귀할 정도이다.한국에 두고 온 가족이 그리워서 그런 것 또한 아니다. 미국으로 이민을 온지 오래되어서 이제 이곳에서 더 오래 살았다. 내 가족 대부분은 미국에서 살고 있다. 친구들도 이곳에 더 많다. 이제는 한국에 가면 오히려 갈 곳이 적고 낯설다.그럼 미국서 구하기 어려운, 꼭 한국에서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그리워서 그러냐 면 그 또한 아니다. 미국에서도 한국의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온다”는 가을 전어를 맛볼 수 있다. 전남 광양의 자연산 가을 전어를 이곳 모 한인 마켓에서 수입해 직송판매 한다고 한다. 또 전 날 제주도에서 갓 잡은 광어도 산채로 미국으로 가져와 그 다음날이면 이 곳 한인 마트에서 살수 있다고 한다. 낙엽이 떨어지는 덕수궁 돌담길이 그립기는 하지만 LA 근방에 있는 Pasadena 시에 가면 오래된 나무 사이로 제법 운치 있는 가로등이 있는 거리를 걸어볼 수 있다. 한국 시골 고향 가는 길 따라 붉게 물든 단풍잎이 보고싶기도 하지만 LA 근교로 조금 더 운전해 나가면 예쁘게 물든 낙엽이 떨어지는 꽤 낭만적인 거리에서 낙엽도 밟아볼 수 있고 오색 풍경도 볼 수 있다.그러면 여기 다 있는데 왜 한국이 그립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그곳이 바로 내 고향이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 나의 삶이 시작된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천국을 그리는 마음도 마찬가지 아닐까 싶다. 금은 보화로 장식된 화려한 궁정과 보석으로 수놓은 거리가 보고 싶어서 가 아니고, 부귀영화를 누리고 더 좋은 것을 갖고 싶어서 도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신 그곳이 바로 우리 영혼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시편 8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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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44
    [오피니언] 아모스 목사의 일터영성 - 바른 크리스찬의 기준 크리스천헤럴드2024.11.26
    성경은 분명히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크리스찬들이 이 성경말씀을 정말 바르게 이해하고 삶속에 적용하며 살고 있기는 한것일까?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라는 가르침은 어떤 것에 Value를 두어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이지, 이 말씀의 본질은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더라도 신경쓰지 말고 크리스찬들은 전통을 지키며 우리들만의 세상안에 머물러 있으라는 가르침은 결코 아닐것이다.한번 솔직하 따져보자. 어떤 크리스찬이 바른 크리스찬인가? 아마도 이 질문에 곧바로 떠올려지는 답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독자들 마다 제각각 순서는 다를지 몰라도 이런것들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어떤 일이 있어도 주일에 예배에 빠지지 않을것. 십일조, 즉 하나님의 것을 10분의 1 구분해서 매 달 드려야 하는 것이 성도의 가장 중요한 의무 중 하나임. 술 담배 안하기, 크리스찬 이라면 술이나 담배를 절대 하지 않아야 세상 풍조를 따르지 않는 직접적인 증거가 되어짐. 교회봉사, 크리스찬 이라면 교회에서 한가지 이상의 봉사는 해야 그것이 진정한 크리스찬의 소양임. 기도와 말씀읽기, 틈이 있는대로 기도생활 말씀생활에 열심을 내야 함. 전도,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대사명에 반드시 동참해야 함.그렇다. 이같은 기준은 필자가 초중고 시절 신앙생활 할때에도 강조되던 것들이고, 현재까지도 강조되고 있는 기준들이라 하겠다.아주 조심스러운 이야기 이지만 이제는 제발 이 기준들을 고이접어 어딘가에 넣어 두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된다. 바른 크리스찬이란, 그들이 하는 행동으로 결코 결정지어지지 않는다.무엇을 하고 하지 않고는 그 사람의 됨 보다 중요하지 않다. 아니 그런 정도가 아니라, 그 사람의 됨 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예수님의 가르침엔 분명히 무엇을 해야함도, 무엇을 하지 않아야 함도 포함되어 있지만, 예수님의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은 그것들을 넘어서는 됨에 관한 것 이었음을 간과해선 안된다.주일에 교회를 가고, 술 담배를 안하고, 십일조를 하고, 교회 봉사를 하고,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며 전도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이런 것들을 강조함 보다 더 중요하게, 더 강력하게 가르치고 권고해야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바른 크리스찬은 내 마음에 하나님의 마음을 담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삶으로 그 표본이 되어주셨다. 하나님의 마음의 핵심은 사랑이다.그렇다. 예수님은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내셨다. 그리고 마지막에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것도 다름아닌 너희는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라 하는 것 이었다.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감히 말한다. 감히 주장한다.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주일 성수 보다 더 중요하다.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술 담배 하지 않는 것 보다 더 중요하다.기도와 말씀, 전도, 교회봉사 보다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며 이것이 올바른 크리스찬의 삶에 가장 핵심이다.재미있는것은, 앞에 열거한 이제까지의 기준들을 잘 충족시킨다 하더라도 그 크리스찬이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할 확률은 거의 없지만,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가다 보면 누가 강조하거나 시키지 않아도 기존의 기준들은 자동으로 지키게 될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지금 세상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지금 세상에 필요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술 담배 안하는 사람이 필요한가? 주일성수, 교회봉사, 십일조 하는 사람들을 더 필요로 하는가?세상은 사랑에 목말라 있다. 그리고 세상은 예수님과 같은 사랑의 사람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사람이 바로 내가 되어야 함을 확신하는 순간 진정한 하나님과의 동행이 시작됨을 잊지말자.사랑의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누구든지 살리겠다 라고 결심하고 사는 사람이다. 사람을 수단으로 삼지않고 언제나 사람을 목적으로 삼겠다 라고 결심하고 사는 사람이다.나로인해 너의 삶이 좋아져야 한다 라고 결심하고 사는 사람이다. 준것에 생색을 내는 삶이 아닌, 더 주지 못한것에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다. 준것 받은것을 계산하며 공평성을 따지며 사는 사람이 아니다.이쯤되면 떠오르는 한 분, 그렇다 바로 예수님 처럼 살아가기로 결심하고 사는 사람이 사랑의 사람이다. 이제 곧 12월, 세상은 더 많은 돌봄과 관심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로 곳곳에 넘쳐날 것이다.사랑의 사람으로 12월을 살기로 결심해 보자. 하나님께서 우리의 손을 꼭 붙잡고 함께 가자 하시며 일으키시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돌봄과 도움, 관심과 사랑이 필요한 그들에게 기꺼이 다가가서 작은 예수로 멋지게 내 전부를 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지극히 작은자 하나에게 다가와 가진 모든것을 쏟아 부으시되, 그 귀한 보혈까지도, 생명까지도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그 지극히 작은자가 나 였음을 기억하자. 복 받으려고 예수믿는 것은 이제 제발 그만하자.이미 내가 받은것이 예수의 보혈이요 생명이었기에, 나는 예수의 생명을 가진자요, 하나님의 성품을 소유한 자, 즉 사랑의 사람인것을 잊지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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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43
    [오피니언] 류응렬 컬럼 - 하나님과 친밀함 크리스천헤럴드2024.11.26
    아름다운 단풍으로 물들어가는 버지니아의 가을에 ‘하나님과 친밀함’이라는 주제로 강준민 목사를 모시고 교회 설립 51주년을 기념하는 부흥회를 가졌습니다. 주제말씀처럼 ‘친밀함’이란 참 소중하고도 애틋한 단어입니다. 하나님과 관계 뿐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 누구라도 친밀함을 원하지만 진정한 친밀함을 간직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강 목사는 설교에서 친밀함이란 익숙함이 아니라 ‘경외감’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시편에서 다윗은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다”고 노래합니다. 한 나라의 왕일지라도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진정한 경외감이 있을 때 곁에 계시는 하나님을 더 깊이 누릴 수 있었습니다. 친밀함이 경외감으로 나아가는 데는 사고의 전환과 생활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누군가와 오랜 시간을 보내고 깊이 대화할수록 우리는 더 익숙해지기 마련입니다. 진정한 친밀감이란 책임과 존중이 수반돼야 건강한 관계와 기쁨과 성숙의 열매를 맺습니다. 친구나 남편과 아내 혹은 성도 사이라 해도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친밀감이 존중과 배려라는 그릇에 담길 때 그 관계는 세월 따라 짙어가는 포도향처럼 깊은 맛을 더할 것입니다.하나님과 친밀함이란 말은 죄인 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닙니다. 우리의 아름다운 의를 다 모은다 해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는 누더기 같은 존재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과 친밀함의 시작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입니다. 죄인을 향해 자비와 긍휼의 손을 내미시는 하늘 아버지가 계시기에 허물과 죄악 속에서도 얼굴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모든 수고와 열정을 다 쏟는다 해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다리는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유일한 통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다리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해 따스한 미소를 지으시고 모든 것을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사랑만이 친밀한 관계의 시작이요 호흡이 끝나는 날까지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소망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함은 구원의 은혜를 입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하늘이 베푸는 최고의 선물입니다.하나님과 친밀함을 경험하고, 회복하고, 유지하기 위해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분주한 일상과 나름대로의 열심으로 하나님을 향한 방향을 상실하지는 않았는가, 외적인 친밀한 모습과 달리 깊은 내면을 바라보시는 하나님과 관계가 무너져 있지 않았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과 친밀함은 단순한 신앙생활이 아니라 호흡마다 주님과 관계를 이어가는 삶 자체입니다. 때로는 하나님과 친밀함을 위해 광야 같은 고독과 침묵의 자리로 나아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픈 상처를 감싸고 묵묵히 주님을 바라보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부서진 그 자리에서 진정한 부서짐을 경험한 주님의 아픔이 보일 때, 그때 십자가는 나를 치유하는 주님의 능력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올해 가을은 찬란한 색으로 물들어가는 단풍처럼 하나님과 친밀함의 자리로 나아가 영혼이 주님의 성품으로 물들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지켜보시는 하나님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흐를 때 우리 영혼은 지상에서 넘치는 기쁨을 경험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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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42
    [오피니언] 이영훈 컬럼 - 절대 감사의 비결 크리스천헤럴드2024.11.26
    이 세상에 100% 만족스러운 삶은 없을 것이다. 사람이 살다 보면 최소한 어느 한 가지는 부족한 부분이 있다. 그러다 보니 세상 사람들 대부분은 감사보다 원망과 불평하는 것이 빠르다. “왜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냐. 사는 게 힘들어 죽겠다. 못 살겠다. 문제가 많다”라며 불만을 터트린다. 특히나 요즘처럼 SNS를 통해 다른 사람과의 비교가 빠른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너도나도 SNS를 통해 자신의 삶을 자랑하는 현시대에서 매일 감사의 삶을 살아가는 일은 쉽지 않아 보인다.그런데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에게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라고 권면했다. 범사, 즉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이다. 심지어 바울은 자신이 옥에 갇혀 고통 가운데 있는 상황에서도 오히려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라고 권면하기도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을까?고난 중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절대 감사의 비결은 바로 ‘절대 긍정’의 믿음에 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긍정’이라는 단어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먼저, 긍정은 어떤 대상이나 사상에 대해 옳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절대 긍정의 믿음은 하나님에 대해서 전적으로 옳다고 인정하는 신앙의 자세를 말한다. 또한 긍정은 어떤 대상이나 일에 대해 밝고 희망적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절대 긍정의 믿음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환경 속에서도 희망을 발견하는 신앙의 자세를 말한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절대 긍정의 믿음을 가지면 필연적으로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우리는 이 같은 신앙의 자세를 약 400년 전 영국 청교도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1620년에 102명의 영국 청교도는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인 미국으로 떠났다. 그들은 65일간의 항해를 마치고 미국 북동부 지역 플리머스에 도착했다.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리고 교회를 건축했다. 그런데 신대륙에서의 생활은 그들이 떠나기 전 기대하던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그들은 낯선 환경 속에서 질병과 굶주림으로 고통 받았고, 원주민과 야생 동물로부터 위협받았다. 이로 말미암아 그들이 도착한 첫해 겨울에 무려 절반가량이 사망했다. 눈앞에서 사랑하는 부모, 자녀, 이웃들을 주님 곁으로 떠나보내는 슬픔을 겪은 것이다.하지만 극한의 고난 속에서도 청교도들은 낙심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고 일했다. 신대륙에 정착하고 1년 후에 처음으로 수확했으나 결실이 많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힘들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자신들을 지켜주시고 수확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렸다. 또한 자신들에게 농사하는 법을 가르쳐 준 원주민들을 초대해 음식을 만들어 함께 식사를 나눴다. 이렇게 고난 중에 드린 감사가 미국 추수감사절의 기원이 됐다. 이들의 감사 정신은 오늘날 미국의 ‘Thank you’ 문화를 만들었다.우리의 인생에 늘 좋은 일만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갑작스럽게 질병이나 재정의 문제가 찾아올 때도 있고, 전쟁이나 재난으로 삶의 터전을 잃을 때도 있다. 때로는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을 주님 곁으로 떠나보낼 때도 있다. 지금 우리가 마주한 현실의 문제가 태산과도 같을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절대 긍정의 믿음으로 감사의 예배를 올려드리자. 그리하면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이 우리의 고난을 축복의 통로로 변화시켜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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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41
    [오피니언] 김병학 목사의 소통하는 교회 - 소통은 상처를 통한 공감이다 크리스천헤럴드2024.11.13
    대한민국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한강의 작품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것은 그의 문학이 보편적인 인간의 정서를 잘 반영하고 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는 것이 노벨상 위원회의 평가이다. 그의 작품 속에서 느껴지는 깊은 고통과 상처, 죄의식, 그리고 희미하지만 결코 꺼지지 않는 구원의 희망은 독자들에게 큰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작가의 작품들을 읽고, 작품의 평가를 읽으면서 이런 궁금함이 생겼다. 그렇다면 교회는 작품에 등장하는 이러한 정서를 가진 사람들과 어떻게 소통해야 할까?한강의 문학 속에서 묘사되는 인물들은 고통 속에서 방황하고, 자신의 상처에 갇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 이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 속에서 상처와 고통을 경험하며, 때로는 그 고통이 너무 커서 해결할 방법조차 찾지 못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회는 이들의 상처를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그 상처를 인정하고, 그 속에 담긴 아픔과 슬픔을 깊이 이해해야 한다.한강의 작품을 읽다 보면, 등장인물들이 겪는 고통과 상처는 단순한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 역사적 차원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교회가 개인의 고통뿐만 아니라, 사회적 구조 속에서 발생하는 상처에도 주목해야 함을 시사한다. 교회는 사회적 불의와 억압에 대해 침묵해서는 안 된다. 한강의 작품처럼, 인간의 상처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깊이 파악하고,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또한 한강의 작품 속 인물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고통을 혼자서 짊어진다. 그들은 고통 속에서 외로움을 느끼고,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는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야 한다. 교회는 고통을 나누고 함께 짊어질 수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한강의 문학이 고통 속에서 빛을 찾으려는 인간의 몸부림을 그려내듯이, 교회도 그들에게 빛을 비추고 희망을 전달해야 한다.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회가 단순히 해결책을 제시하는 위치에 서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한강의 작품 속 인물들이 경험하는 고통은 복잡하고 얽혀 있다. 단순한 구호나 도덕적 교훈으로는 그들의 상처를 온전히 치유할 수 없다. 교회는 그들의 고통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고통 속에서 그들과 함께 머무르고, 그들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경청해야 한다. 교회는 단순한 답변을 제시하기보다는 한강의 문학처럼 깊은 이해와 공감을 바탕으로 대화를 나눠야 한다.또한 한강의 문학 속에서 중요한 주제 중 하나는 '구원의 가능성'이다. 그의 작품은 때때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희미한 구원의 빛을 암시한다. 그러나 저자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작품 속 인물들은 그 빛을 찾지 못한다. 교회는 바로 이 점에서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 중요한 매개체가 될 수 있다. 교회는 고통 속에서도 희망이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희망은 단순히 기적처럼 쉽게 풀린다는 단순한 낙관론이 될 수 없다. 한강의 문학이 그렇듯이, 교회의 메시지도 고통과 상처를 그대로 인정하고, 그 속에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구원의 가능성을 제시해야 한다.교회는 또한 한강의 작품을 읽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을 법한 질문들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의 문학 속 인물들은 종종 인간 존재의 의미, 고통의 이유, 그리고 구원의 가능성에 대해 깊은 회의를 품는다. 교회는 이 질문들에 대해 가볍게 답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그 질문들을 함께 나누고, 신앙 속에서 어떻게 이러한 질문들에 답을 찾아갈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결국, 교회가 해야 할 일은 한강의 문학 속에서 반영되는 보편적인 정서를 가진 사람들을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고 그들과의 진정한 소통이다. 그들이 느끼는 상처와 고통을 인정하고, 그 속에서 구원의 희망을 함께 찾아가는 여정이 필요하다. 한강의 문학이 그러하듯, 교회도 그들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고, 그들이 진정으로 구원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해야 한다. 세상이 많이 아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교회도 많이 아프다. 아파하는 사람들과 함께 아파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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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40
    [오피니언] 김은주 교수의 탈진을 긍정하라 14 <탈진 관점으로 본 선교사 이야기 2 – 알렌> 크리스천헤럴드2024.11.13
    선교사는 대부분 낯선 땅에 도착하여 이중문화 가운데 여러 가지 갈등을 경험한다. 히버트는 이중문화 그 자체가 스트레스를 유발한다고 주장하고, 존 폴 레더락(John Paul Lederach)은 갈등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정상 범위에서 지나치면 탈진이 된다. 선교사가 타 문화로 들어가 갈등을 겪는 것은 탈진의 요소다.호러스 알렌(Horace Newton Allen)은 한국 최초의 서양 선교사로 일컫는다. 미국 북장로교에서 파송 한 의료선교사역자로서 26세 때, 1884년 9월 14일 조선에 도착하여 21년 동안 사역했다. 그는 미국 공사관 공의 자격으로 입국하여 제중원을 설립하고 주로 의료와 학교, 외교사역을 하였으며, 선교사들의 입국을 돕는 통로역할을 했다.그가 고종의 큰 환대를 얻은 것은 갑신정변 때 조선의 권력자요, 보수파 민영익을 극적으로 치료한 사건이다. 민영익은 온 몸에 심한 자상과 여러 군데 동맥이 끊겼고, 머리 외 일곱 군데를 칼로 찔려 피투성이었다. 목숨이 위태롭건만, 당시 한의사들은 검은 송진으로 상처에 바르고 있었다. 이 때 알렌이 등장하여 외과 수술을 했다. 만약 수술 도중 실패했다면 미국의 이미지를 실추하고, 기독교를 전하지도 못한 채 칼로 사람을 죽인 것이 되어 그 또한 죽음을 면치 못할 상황이었다. 그는 죽음의 위기와 조선의 복음을 위해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고, 마침내 생명을 구하였다. 민영익의 후원과 고종의 시혜로 광혜원을 설립했다. 기독교가 금기 되던 때에 불안정하게 입국한 모든 선교사들을 그곳에서 사역하도록 동원하여 보호하였다. 그러나 증원하는 환자와 관리사들로 인해 병원의 예산이 부족하여 힘들었다. 또한 한국의 전통치료법은 종기에 암소 배설물을 바르고, 정신착란에 구더기를 사용하는 등 경악할 사건도 많았다. 그러나 그는 폄하하지 않고, 신중한 자세를 취했다.청국과 일본의 수백명의 군인을 치료하고, 하루에도 수백명의 사람들을 진료하느라 온전히 잠을 이루지 못하는 고된 날을 보냈다. 의약품 구입은 어려웠고,  키니네(학질특효약)를 만병통치약처럼 사용했다. 약이 없을 때는 논두렁의 흙을 상처에 발랐더니 묘약처럼 효과를 내어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예수박사라 불리우며, 희생적으로 봉사했다.그는 고종의 신임으로 왕실의 의사와 정치 고문이 되어 모든 내외국 고위인사들을 만나고, 그들의 역할과 공적들을 기록화 했다. 고종에게 종2품의 ‘가선대부’로 벼슬까지 받았지만, 동료 선교사들의 핀잔과 갈등, 독설과 불신으로 힘들었다.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는 방법 따른 마찰이었다. 알렌은 당시 선교사들이 조선의 법을 어기고 마구잡이로 전도하는 위험에 독단적이지 말라고 간곡히 호소했고, 비일비재하게 위험이 노출될 때마다 도와주었다. 그러나 다른 선교사들은 알렌이 선교하러 와서 병원 같은 것이나 세웠다고 맹비난하며, 정치와 종교가 얽히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알렌에게 파쟁과 갈등은 고통이었다.알렌의 탈진을 세가지로 간단히 요약한다. 첫째, 신체적 탈진이다. 그는 수백명의 환자를 치료하느라 사역의 과부하였다. 둘째, 심리적 탈진이다. 그가 민영익을 치료할 때 죽음을 감수하는 위기를 겪었다. 선교사들 간의 갈등은 불안과 고립을 의미했다. 고종이 미국에 한국공사관의 참찬관으로 임명했을 때 다른 선교들에게서 쫓겨가는 듯한 자괴감도 느꼈을 것이다. 셋째, 문화적 탈진이다. 벼룩과 모기, 더위와 추위, 불결한 위생, 이방나라에서 긴장, 한국전통치료법의 난해, 국가 정세의 불안정, 낙후한 문화 상태 등은 스트레스를 넘어 선 탈진 요소다.그는 일관된 헌신을 보여주므로, 의료, 교육, 외교, 문화적 근대화의 문을 열도록 공헌한 점은 기념할 만 하다. 때로는 과묵함으로 인내하고, 성실하게 사역하며, 한국의 자유와 주권을 지키도록 노력한 일관성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진지한 동정심과 친절한 감정’이었다. 믿음의 열정적인 사역과 갈등의 스트레스를 중립하려는 노력은 회복방법이었다.특히 이중문화 가운데 복음을 전하는 방법에 따른 마찰은 알렌에게 큰 과제였다. 박선기박사는 레더락의 갈등 전환의 변화로 그 자체를 초월하여 자신을 돌아보고, 타인을 품어주며, 더 성숙할 수 있는 기회라고 말하며, 화해의 영성을 추구한다. 과거에 일어났던 반복된 패턴과 현재의 갈등을 인식하고, 근본 원인을 찾아 다양한 해결 방식을 찾으며, 갈등의 고리를 끊는 방법이다. 더욱이 용서하고, 화해하며, 성숙한 삶으로 지향하는 것은 갈등으로 인한 탈진을 긍정적으로 재인식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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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최재홍 목사의 하루한장 말씀 - 예배냐? vs 영혼구원이냐? 크리스천헤럴드2024.11.13
    간혹 세상에서 못되먹은 사람들이 행하듯이 교회 공동체와 가정에서도 함부로 대하고 무시하고 폭력적 언행으로, 보고 듣는 사람들을 실망케하고 시험에 들기도 합니다. 그렇게 신앙하는 것은 눈물로 세워가는 우리 공동체 모두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공동체를 멍들고 어둡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께 드리는 예배와 기도시간이 고통스럽고 힘든 기도, 어두운 기도, 슬픈 기도를 드리는 인생이 되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 시간 간절히 소망하고 바라기는 이민사회의 동시대에 허락하신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섬기는 공동체와 가정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즐거이 부르며 할렐루야를 힘차게 높여드리고 가슴 뛰는 벅찬 주일의 감격과 감사의 기도, 자녀를 향한 비전의 기도, 세상을 향한 기쁨의 기도, 영혼을 위한 구원의 기도를 드리는 공동체와 가정이 되기를 기원합니다.최근 2-3주 동안에 어느 이민교회 리더십 그룹과 목회 상담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작은 관계의 오해가 시작이 되어서 교회를 떠나겠다는 분들이 생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상담을 시작하면서 저의 첫 질문은 ‘주일 예배를 정시에 시작하지 못했습니다. 전도를 통해서 새가족들이 처음 방문하게 되어 안내하고 환영하느라 5분 정도 늦게 시작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새가족이 시간에 맞춰 도착하고 정시예배를 드리면 좋았겠지요, 하지만 그분들이 완전 새가족입니다. 어떤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이미 우리가 아는 정답은 이렇습니다. 은혜로운 공동체가 되려면 기존 성숙한 성도들이 숫자는 더 많겠지만 섬기는 마음으로 이해하고 소수의 새 가족을 따뜻하게 맞이해서 자리에 앉게하고 예배를 5 분 늦게 드리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습니다. 해외 선교현장에서 현지인들과 예배를 드리기로 했는데 ‘목사님 금방갑니다, 거의 도착했습니다(무쓰, 워먼 마샹 따올러!)’ 라고 말하던 사람이 1시간을 늦게 도착했습니다. 저는 솔직한 심정으로 화가나서 견딜수가 없었습니다. 제 마음 속에 지각한 새가족 때문에 주일의 은혜가 다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영성훈련이 안된 그들의 문화에서는 충분히 이해가 되는 상식적인 표현이었습니다.그때에 생각나는 말씀 한 구절, 한 단어가 흥분된 나를 바로 잡을 수 있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영접이라는 말씀이 빨간 글씨로 크게 각인이 되었습니다. 늦었지만 가족들을 데리고 땀을 흘리면서 들어오는 그들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저 보다도 더 일찍 출발했지만 여러 사정으로 늦은 것입니다. 저는 영접이라는 단어의 참 의미를 다시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고, 목사라는 사람이 얼마나 속이 좁고 몰인정하고 무자비함을 깨닫고 제 속마음이 화끈거리고 부끄러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말과 표정에서 나를 사랑해주고 존경하는지 금방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웃어 주고 기다려 주고 섬기고 나눠주는 삶이 우리 모두를 아름답고 풍성하게 합니다. 5분 늦게 드린 예배를 우리 하나님이 더 기쁘시게 받을 것입니다. 새가족만 이런 실수를 할까요? 우리 모두는 허물도 많고 약점과 실수투성이입니다. 실수를 실수로 인정하고 받아주면 오히려 그 사실을 알게 될 때에 깊고 진한 마음의 감동이 전달될 것입니다. 한 영혼의 값어치는 우리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으신 목숨 값과 비례합니다. 이 사실을 절대로 잊으면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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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8
    [오피니언] 장세훈 칼럼 - 웃사의 죽음, 그만의 책임인가? (삼하 6:6~7) 크리스천헤럴드2024.11.13
    구약에는 종종 갑작스런 죽음을 당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중 매우 충격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는 웃사의 죽음이다. 웃사가 수레에 법궤를 싣고 가던 도중 소가 뛰기 시작했으며, 수레에 실려 있던 법궤가 흔들렸다. 이런 상황에서 웃사는 흔들리는 법궤를 붙들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급사하고 말았다. 그런데 단순히 웃사가 흔들리는 법궤를 만졌다는 이유만으로 죽음을 맞이했다고 이해한다면 이런 접근은 뭔가 석연찮은 느낌을 던져준다. 웃사의 죽음은 과연 웃사 그만의 잘못 때문일까? 다른 누군가의 책임은 없는 것일까? 더 근본적으로 사무엘하 6장 1~8절에 등장하는 웃사의 죽음을 통해서 저자가 의도하고 강조하려는 논점은 과연 무엇인가?이런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찾는 작업은 본문의 전후 문맥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돼야 한다.  해당본문에서의 문맥은 다윗의 법궤 이동에 초점을 두고 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왜 다윗은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이동하려고 하는가?”원래 법궤는 블레셋 족속에게 빼앗겼지만 법궤 앞에서 부러진 다곤 신상 사건(삼상 5:1~4)으로 인해 결국 기럇여아림으로 다시 옮겨진다(삼상 7:1~2). 기럇여아림 사람들은 아비나답의 아들 엘르아살을 구별시켜 다윗의 때까지 줄곧 법궤를 지키게 했다. 다윗이 왕위에 올라 이방민족들을 물리치고 예루살렘을 정복했을 때, 그는 명실상부한 이스라엘의 절대 권력의 자리에 올라서게 됐다. 그러나 다윗은 뭔가 한 가지 부족한 것을 느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법궤의 부재였다. 다윗은 예루살렘을 종교적 도시로 확고히 세우기 위해 법궤의 귀환을 절감했다. 그래서 그는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기 위한 작업을 감행했다. 이 법궤의 이동은 다윗의 통치의 클라이맥스라고 볼 수 있었다. 법궤의 귀환으로 다윗의 권력은 절대적인 위치를 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웃사의 죽음으로 이런 다윗의 계획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웃사의 죽음은 웃사 그만의 탓은 아니다. 본문의 문맥은 웃사보다도 다윗의 문제를 더 부각시킨다. 다윗이 블레셋을 쉽게 무찌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께 아뢰었기 때문이다. 다윗이 어떻게 싸워야 할지 하나님께 여쭸을 때,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싸움의 방식을 알려주셨고, 다윗은 그 방식대로 전투에 임해서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대승을 거둔 다윗은 곧바로 법궤의 이동을 추진한다. 놀랍게도 전투를 위한 방식을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아뢰었던 다윗은 법궤의 이동을 위해서는 전혀 하나님께 구하지 않는다.더욱 안타까운 것은 다윗이 법궤를 이동할 때 지켜야 할 하나님의 지침을 전혀 준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법궤는 반드시 레위인들이 어깨에 메어 옮겨야 했다. 그러나 법궤 이동을 책임 맡은 다윗은 레위인의 어깨에 메게 하지 않고 법궤를 수레에 실어 이동시켰다. 만약 다윗이 하나님의 규례에 따라 법궤를 레위인의 어깨에 메고 옮겼다면 웃사의 죽음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크게 두 가지 잘못을 범했다. 첫째, 법궤 이동과 같은 중대한 문제를 시행하기에 앞서 전혀 하나님께 그 뜻을 묻지 않았다. 둘째, 법궤 이동에 반드시 필요한 하나님의 지침을 완전히 무시했다. 나중에 수레가 아닌 어깨에 메고 법궤를 이동시킨 다윗의 모습은 법궤를 메지 않고 이동시켜 문제를 초래했던 이전의 모습과 대조를 이룬다. 이것은 다윗이 다시는 이전의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그의 의지를 엿보게 한다. 그러므로 웃사의 죽음을 소개하는 본문의 전후문맥은 웃사의 죽음이 웃사 한 사람의 잘못 뿐만 아니라 다윗의 실수와도 결부돼 있음을 깨닫게 한다.사무엘하 6장 1~8의 전후 문맥을 고려하지 않고 사무엘하 6장 6~7절만을 피상적으로 읽으면 웃사의 급사는 웃사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웃사가 흔들리는 법궤를 만지는 행위는 독자들의 눈에는 부주의한 모습처럼 비춰진다. 물론 웃사가 법궤를 만지는 행위는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본문의 전후 문맥적 상황은 웃사의 죽음이 또 다른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음을 깨닫게 해 준다. 본문에 묘사된 법궤의 이동과 웃사의 죽음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보다 앞서갔던 다윗의 성급함을 엿보여준다. 또한 겸손히 하나님께 아뢰지 않는 다윗의 상태는 이전과는 다른 그의 교만한 모습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지도 모른다. 결론적으로 웃사의 죽음을 다루는 본문을 읽는 독자들은 본문의 전후문맥을 통해 웃사의 죽음은 웃사 한 사람의 잘못 외에 법궤의 이동을 성급하게 추진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묻지도 않고 법궤 이동을 위한 계명도 무시했던 다윗의 문제도 함께 인식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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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정재영 칼럼] 평신도의 의미와 바람직한 역할 크리스천헤럴드2024.10.19
    평신도의 의미 최근 평신도의 역할이 다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한국 교계에서 평신도 교회론이 강조된 것은 1980년대부터지만, 최근 부교역자 기피 현상이 나타나면서 불가피하게 평신도 사역이 더욱 중요하게 됐으며, 앞으로 새로운 트렌드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그런데 평신도라는 말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성경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묘사되는데, 이 ‘하나님의 백성’의 헬라어 표현에서 오늘날의 ‘평신도’라는 말이 파생됐다. 그러나 평신도란 흔히 잘못 이해되는 것처럼, 성직을 전담하고 있는 성직자와 이원화하여 본질 성격상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이것은 목회자와 평신도를 똑같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두 개의 다른 신분으로 볼 것이냐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이 성직자와 평신도의 이원화 현상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교회가 성장하고 발전해 감에 따라 교회 운영과 조직의 필요성이 대두돼 교회에는 감독, 장로, 집사들이 나타나 세분화된 직분을 수행하게 됐다.  이와 같은 성직의 변천 과정에서 교회에는 교권 제도가 강화돼 성직자와 평신도를 두 신분으로 구분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그러면서 평신도는 교회 운영으로부터 점차 소외되기 시작했으며, 교회 운영을 전담한 성직자들에게 의존하는 피동적인 계층으로 여겨지게 됐다.  성직자와 평신도의 양분화 된 현상이 수 세기 동안 지속해 오던 중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에 의해 ‘만인사제론’이 주장되면서 이러한 현상이 극복됐다.결국 오늘날의 목회자와 성직자는 똑같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직무의 차이를 제외하고서는 둘 사이에 아무런 구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목회자는 신학교에서 목회에 필요한 전문 교육을 받고 영성과 관련된 다양한 훈련을 받기 때문에 전문성을 갖춘 교회 지도자로 인정받고 존중돼야 한다. 그러나 목회자와 평신도 사이에 신분상의 차이가 있거나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서 일부에서는 평신도라는 말 자체를 쓰면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를 대체할 마땅한 말이 없다는 현실의 한계 때문에 계속 사용되고 있는 상황이다. 평신도 신학자인 폴 스티븐스조차 평신도를 다른 말로 하면 ‘목회자 아닌 하나님 백성’이라고 할 수 있지만 딱히 한 단어로 대체하기 어렵다고 말했을 정도다.  일부에서는 ‘성도’라는 말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목회자도 성도에 속하기 때문에 목회자 아닌 성도를 표현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평신도 중심의 교회론 20세기 후반에 들어서 서구 교회에서는 평신도 신학과 관련된 교회론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세속화돼 가는 사회에 대한 교회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과 그것을 위해 평신도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인식에서 비롯됐다.  서구 사회가 교회의 권위로부터 이탈·세속화됨에 따라 세상에서 기독교 윤리를 실천할 수 있는 평신도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게 됐다. 또한 사회 환경의 변화와 함께 현대 사회가 다원화, 전문화됨에 따라 목회자 혼자서 모든 사역을 담당할 수 없게 된 상황도 평신도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데 한몫 했다.  사회의 다원화와 직업의 세분화는 교회 운영의 구조와 형태에서 근본으로부터의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다양한 문화와 세계관, 개인의 경험과 가치관의 차이 속에서 이제 목회자 일인 체제의 교회 운영은 한계에 다다르며 전문화와 세분화를 요구받게 됐기 때문이다.이런 상황에서 교회 안에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평신도들을 방치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유휴한 자원으로 남아있는 평신도들을 교회의 활성화를 위한 자원으로 개발·훈련해 동역자로 세울 필요성이 제기됐다. 이렇게 함으로써 교회 조직 자체도 더 효율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평신도 중심의 교회관은 교회의 공동체성 회복에도 큰 역할을 한다. 목회자와 평신도를 구분해서 평신도를 부수적인 위치에 고착시키는 것은 교회의 공동체성을 저해한다. 이러한 평신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성직을 전담하고 있는 목회자와 평신도의 역할을 이원론식으로 구분하는 것은 교회의 본질 성격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흔히 평신도라고 하면 마치 기업에서의 ‘평사원’과 같이 집사, 권사, 장로 등의 직분이 없는 말단 교인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전적으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평신도의 활동을 독려하는 평신도 운동은 종래의 목직자 위주의 교회관으로부터 교회의 공동체성 회복을 위한 교회 혁신 운동의 성격을 나타낸다. 평신도의 자리와 역할 그러나 평신도의 올바른 자리와 역할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대개의 교회 지도자들은 평신도들을 훈련시켜서 교회 안에서 많은 봉사를 하도록 요구한다. 요즘 보편화돼 있는 ‘작은 목자’라는 개념은 평신도를 목회의 동역자로 인정한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만하나 자칫 평신도를 교회 안에만 매여 있게 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물론 교회 안에서 요구가 있을 때 이를 위해 봉사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특히 부교역자가 부족해지고 있는 요즘 상황에서 평신도가 보다 적극적으로 교회 사역에 동참할 것이 요구되고 있다. 교회 공동체 자체가 약해지면 교회의 외부 사역도 힘을 잃게 되고 지속가능성을 담보하기 어렵다.  그러나 평신도들이 교회 안에만 매여 있는 것 역시 바람직한 상황이 아니다. 평신도는 오히려 소명을 따라 직업 활동을 통해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 루터가 이야기한 만인사제론도 교회 안에서 목회자와 평신도가 동등하다는 의미보다는 세상에서 사제와 같은 사명을 가지고 신앙을 실천해야 한다는 뜻이 내포돼 있다.  그럼에도 목회자들은 훈련받지 않은 평신도들이 세상에 보내졌을 때 제대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므로 체계를 갖춘 훈련을 통해 준비를 시킨 후에 내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앙 훈련이라는 것은 단시일에 끝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앙이 먼저, 사회 참여는 나중에’라는 것은 논리상의 순서인 것이지 시간상의 순서가 아닌 것이다. 평신도들은 이미 세상에 보내졌기 때문이다. 또한 ‘성화’라는 표현을 쓰듯이, 신앙 훈련은 일생을 통해서 이뤄져야하는 것이다. 일상생활의 대부분의 시간을 직장과 같은 사회에서 보내는 평신도들은, 전문 목회자들과 같이 교회 안에서의 활동에 몰두하기보다는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책임을 다해야 한다.  평신도들의 삶의 자리는 교회라기보다는 사회인 것이다. 이미 보냄 받은 사회 안의 각각의 영역에서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책임의식을 가지고 선교의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이들이 철저하게 기독교인의 삶의 원리를 따라 사회생활을 하며 주위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미칠 때 평신도들은 자연스럽게 우리 사회를 변혁시킬 주체자의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 평신도들의 사역과 균형 있는 역할에 대해 올바른 시각의 정립이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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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아모스 목사의 일터영성 - “가성비와 효율성” 크리스천헤럴드2024.10.19
    사역자로 교회 사역을 처음 시작한 것이 올해로 36년째를 맞이하고 있다. 그리고 Chef  로서 식당관련 업종에서 일을 한지가 연속으로는 9년째 이며 이전의 모든 식당관련  경력을 다 합하면 대략 15년 정도는 되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전혀 쭈뼛거림 없이 누군가가 물으면, 그렇습니다 저는 일터 사역자 입니다 라고 말을한다.한번도 식당의 주인을 해 본 적은 없지만, 일반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더라도 식당 경영의 가장 큰 목적은, 어떻게 하면 손님을 만족스럽게 하면서도 동시에 식당에 이윤을 많이 남길수 있을까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그러기 위해서 따지는 것이 가성비와 효율성 이다. 최소한의 직원을 적제 적소에 투입해서 효율적으로 경영을 해야 하기에, 때로는 경력이 없는 두세사람을 채용하기 보다, 급여를 많이 주더라도 한사람의 경력직을 고용하기도 하고, 식재료에 있어서도 손님들이  만족하면서도 포만감 있게 먹을수 있음에도 재료비가 최소한으로 들어가는 식재료가 무엇일까를 항상 고민한다.교회 사역의 현장에서는 어때야 할까? 놀랍게도 많은 교회들이 일반 비지니스에서 중요한 요소로 여기는 가성비와 효율성을 교회 사역에서도 적용 하려는 모습들을 보게된다. 이건 아니지 싶다. 이래서도 안되고 이럴수도 없다.장황하게 설명할수는 없지만, 한두가지만 이야기 해 보려 한다. 교회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가? 아마도 이 질문을 들으면 자동으로 이런 대답들이 나올 것이다. 영혼구원! 부흥! 그리고 이 영혼구원과 교회의 부흥을 이루기 위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 담임목회자 이다.교회가 오랜기간 부흥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쇠퇴 하기라도 한다면,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담임 목회자가 훌륭한 사람으로 바뀌면 교회가 성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도 한다. 혹여 여러 이유와 사정으로 담임목사가 공석인 교회들은 어떤가?그 교회들이 제시하는 청빙의 기준을 보고 있노라면, 동의가 되는 부분이 더 많기는 하나 어떤 항목들은 눈쌀을 찌푸리게 하거나 내 눈을 의심하게 하는 조건(?)들도 적젆게 볼수 있다. 더 큰 문제는 지원하는 목회자 들이다.지금 현재 사역하고 있는 사역지가 있음에도, 더 나은 조건의 교회로 옮겨가고 싶어서, 본 교회에는 비밀로 하면서 청빙원서를 부끄럼없이 제출하는 목회자들이 얼마나 많은줄 아는가? 오히려 청빙 조건에 현재 사역하지 않고 있는 목회자만 지원해 주세요 라고 하는 것이 더 맞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실상은 정 반대다. 현역으로 사역하는 목사여야 한다는 조건이 붙은 청빙 광고가 더 많다. 이렇게 까지 해서 수퍼스타급 목사를 모셔와서 이루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결국은 효율적인 영혼구원, 그리고 교회부흥을 위해서 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렇다고 영혼구원이, 교회의 부흥이, 중요하지 않다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것이 아니다.교회는 세상의 성공 원리와 같을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있으며, 또한 교회는 예수님이 명령하신, 분부하신 것을 이루어 나가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의 마지막 분부는 자명하다.새 계명을 주셨는데, 그것은 교회를 부흥시키라는 부탁이 아니었고, 제자 된 너희들 이라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 라고 부탁하셨음을 잊으면 안된다. 예수님이 친히 비유로 드신 잃어버린 양 한마리에 관한 이야기를 주목하자. 효율성이 아니다. 가성비가 아니다.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영혼 구원에만 초점을 둔 비유 라고도 말할수 없다.이 비유의 초점은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이야기 하고 있고, 그 한마리의 양은 지금 예수를 믿지않는 세상속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다 라고 한번 생각해 보길 권면한다. 예수님은 어떤 교회를 보기 원하실까? 수퍼스타 한사람이 교회 전체를 효율적으로 이끌어 가며 숫적으로 부흥되는 교회를 더 보기 원하실까? 아니면 교회 공동체 구성원 전체가 모든것을 다 쏱아 부어서라도 한 사람을 살리는 시스템의 교회를 더 보기 원하실까?더이상 부흥을 얘기하지 말자. 더이상 영혼구원만을 강조하지 말자. 교회는 가성비를 따지는 곳이 아니다. 두사람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었던지, 2천명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었던지, 그 공동체 한사람 한사람 모두가 서로를 사랑으로 살리고 든든히 세우는 것 만이 목표여야 한다.지난 주간에 오래 알고 지내던 어느 부부의 요청으로 만남을 가졌다. 대형교회에 오래동안 헌신하고 있는 부부인데, 흔히 하는말로 시험에 들었다고 했다. 이유를 물었더니, 담임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있기가 매우 불편하다고 한다. 내용이 어떻길래 물었더니, 이 교회가 오늘날 대형교회로 성장한 것의 가장 큰 요인이 자신이 목회 했기 때문이라고도 했고, 그렇기에 자신의 뜻에 반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지 못하는 사람일 확률이 높다고도 말했단다.십수년간의 신앙생활이 주마등 처럼 스쳐지나가며, 우린 과연 이 교회에서 무엇을 위해 사역을 했으며 모든것을 드려 헌신한 것인지에 대한 회의가 한번에 몰려왔다고 했다. 이렇게 말하고 싶다. 하나님은 그 목사도 사랑하신다. 사랑 하시되, 그 목사가 교회를 부흥 시켰기에 사랑하시는 것도 아니요, 남들보다 나은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것도 아니다.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사랑 하시기로 결정 하셨기에 그 의지적인 사랑으로 그 목사 뿐 아니라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는 것 이라고 말이다.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을 시작하신다.“유월절 전에 예수께서는, 자기가 이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가야 할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 (요한복음 13장 1절) 라고 말이다.승천하시기 직전에 하신 말씀도 땅 끝까지 가라 라는 사명으로 새겨듣고 있지만, 정말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사랑으로)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라는 말씀 이었다는 것을 잊지말자. 예수님의 마음, 하나님의 뜻은 자명하다.우리가, 그리고 우리의 교회들이  ‘부흥’ 이나 ‘영혼구원’ 이라는 단어만을 붙들고 효율성과 가성비 따져가며 요령부리는 것을 멈추고, ‘끝까지 서로를 사랑하라’ 라는 아가페의 사랑이 너가 아닌 나에게서 보여지기를 가장 바라고 원하신다. 교회는 세상과 다르다. 달라야 한다. 그렇기에 당연히 존재목적도 달라야 한다. 여튼 부흥과 성공은 아니다. 사랑만 있으면 되고, 사랑만 남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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