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11 페이지

본문 바로가기

뉴스

  • 221
    [오피니언] 김병학 목사의 소통하는 교회 - 소통은 나아갈 방향이다 크리스천헤럴드2024.07.28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예상치 못한 후보직 사퇴는 전 세계에 거대한 파문을 일으켰다. 고령으로 인한 건강 악화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에 따른 경제적 불안감 증폭, 서민들을 옥죄는 살인적인 물가 상승 등 해결해야 할 난제들이 산적한 가운데, 상대 후보와의 경쟁에서 끝없이 추락하는 지지율과 거세지는 사퇴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대통령 후보직에서 물러났다.바이든의 사퇴는 단순한 정치적 사건을 넘어, 예측 불가능한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깊은 불안감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우리는 지금 기후 변화, 팬데믹, 경제 위기, 국제 정세 불안 등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격변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불확실성은 개인의 삶 곳곳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증폭시킨다.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불안감이 역설적으로 ‘변하지 않는 가치’, ‘영원한 안식’, ‘흔들리지 않는 진리’에 대한 갈증을 더욱 심화시킨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자신을 지탱해 줄 수 있는 확고한 버팀목을 찾고 싶어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과거 절대적인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던 기독교는 현대 사회의 급격한 변화와 내부적인 문제들로 인해 그 영향력을 급격히 잃어가고 있다.특히 개신교는 건국 이후 오랜 시간 동안 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교회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교회 지도자들의 도덕적 해이, 교권을 둘러싼 추악한 다툼, 시대착오적이며 비성경적인 교리 해석과 권위주의적인 태도는 사회의 비판을 불러일으켰고, 젊은 세대들은 교회가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만 늘어놓는다고 생각하며 늙어 버리고 영적 건강을 잃은 교회를 떠나고 있다.물론 희망의 불씨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며 사회에 희망을 주는 교회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러한 교회들조차 급변하는 사회 분위기와 내부적인 문제들로 인해 미래를 낙관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그렇다면 혼란스럽고 불확실한 이 시대 속에서 교회는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할까? 과연 교회는 다시금 세상의 등불이 되고 길 잃은 영혼들을 위한 안식처가 될 수 있을까?교회는 세상과 분리된 채 고립된 섬처럼 존재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시대의 아픔에 공감하고 사회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가난과 질병, 차별과 혐오 등으로 고통받는 사람들 곁으로 다가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이다. 그러려면 교회는 초대 교회가 보여주었던 아름다운 공동체의 모습, 즉 서로 사랑하고 돕는 ‘섬김과 나눔의 공동체’를 회복해야 한다. 교회 내부적으로는 서로 사랑하고 격려하며, 어려움을 당한 지체들을 위해 기도하고 물질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나아가 교회의 문턱을 낮춰 누구나 쉽게 다가올 수 있도록 열려 있는 공간, 따뜻한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특히 교회는 교회의 미래이자 희망인 ‘다음 세대를 위한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젊은이들이 교회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신앙 안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그들의 눈높이에 맞는 예배와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그들의 고민과 아픔에 진심으로 귀 기울여야 한다. 또한 다음 세대가 세상의 리더로서 성장할 수 있도록 성경적인 진리에 대한 가치관과 리더십을 길러주고, 그들이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며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격려하고 지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교회는 시대의 변화에 뒤처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개혁하고 변화하는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 교회 건강이 악화되고 오래 전 과거의 영광에 안주하거나 그리워하면서 고정관념에 갇혀서는 안 된다. 급변하는 사회 변화에 발맞춰 끊임없이 개혁하고 변화하는 유연성을 길러야만 시대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바이든의 사퇴는 우리 시대의 단면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불확실성의 시대일수록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성경적 가치와 세계관을 붙들고 서로 격려하며 함께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우리를 인도할 교회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교회가 다시금 사랑과 은혜가 넘치는 공동체, 정의와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공동체, 세상의 아픔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공동체로 거듭나기를 소망한다. 젊은 교회로서 보여주는 용기와 희망이 혼란과 불안에 휩싸인 이 시대에 한 줄기 빛이 되기를 기대한다.
    Read More
  • 220
    [오피니언] 김은주 교수의 탈진을 긍정하라 10 <문화속의 탈진> 크리스천헤럴드2024.07.28
    사람은 문화 속에 산다. 문화는 단일 문화 또는 복합 문화 간에 인간과 인간이 연결되는 상호관계의 총체적 체계이고 하나님의 천지창조 아래 포함한 모든 산물과 행위이다. 다소 복잡한 다문화는 사람에게 문화 충격을 안겨준다. 사람 마다 가치관 및 정체성이 다르고 환경의 서로 다른 이질감으로 스트레스를 낳고 심하면 탈진으로 이어진다. 단일 문화도 예외는 아니다. 각자가 문화를 이해하고 적응하기까지 도전과 변화가 필요하다.문화속의 탈진은 두가지를 이해하면 긍정의 관점을 발견하기가 수월하다. 첫째, 문화 충격이다. 자문화와 타문화의 다른 점에서 오는 충격은 정체성을 혼란 시키고 정신 뿐만 아니라 육체와 영적 타격도 불러온다. 토마스 홈즈와 마수수(Thomas Holmes and M. Masusu)는 생활의 변화로 생기는 스트레스를 측정했다. 배우자의 죽음을 100으로 설정했을 때, 이혼 73, 결혼 50, 직업 교체 36, 생활 환경의 변화 25, 거주지 이동 20, 함께 사는 가족 수의 변화 15, 식사습관의 변화 15를 나타냈다. 스트레스 150점 미만의 1/3정도가 2년 내에 큰 병이 걸릴 것이고 300점 이상 되는 4/5 정도는 향후 2년 내에 심각한 건강문제가 발생한다는 연구이다. 타 문화권의 신임 선교사는 보통 400점 이상의 스트레스를 쌓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경고를 울린다. 폴 히버트(Paul G. Herbert)는 이중문화를 만드는 그 자체도 스트레스라고 말한다. 이중문화는 단일문화 보다 스트레스 지수가 더 높다. 이민 문화를 가진 사람들은 자국을 떠나 언어장벽, 생활환경의 변화, 관계 갈등과 단절, 기후, 음식, 심리, 문화 장벽, 의사소통 부재 등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우울증 및 각종 질병 등으로 악화된다. 다양한 스트레스가 장기화 되면 에너지 고갈로 탈진한다.둘째, 문화 적응이다. 세월이 흐른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문화 적응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질적문화 적응은 긴장과 스트레스가 쌓이고 적대감 및 부적응의 의사소통의 부재로 어려움을 호소한다. 사회적 고립 또는 제약으로 심리 및 정신의 스트레스와 탈진을 유발한다. 문화 자체가 기하학적으로 복잡하고 잠재적 스트레스가 높지만 부정적 시각 보다 긍정적 영향이 많음을 기억해야 한다. 문화 충격이나 문화 적응의 스트레스는 스스로를 실패자로 여기거나 자살 충동까지 일으키지만 사람의 내면은 문화 적응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은 역동적 스트레스를 긍정의 자세로 수용하여 겸손과 존중을 배우고 공감하며 새로운 통찰력을 발휘한다. 일정한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이 속한 문화에 적응하고 새로운 사람과 친화하며 생존 기술을 연마한다. 자 문화와 타 문화 간에 상호 의사소통을 함으로써 공동체 의식이 높아진다. 문화 적응과 도전이 빠른 사람은 목표한 바 성장을 이루고 삶의 대처 능력이 향상된다. 결국, 능동적 문화 적응은 스트레스를 잘 관리하고 균형감각을 회복하며 고난을 승리로 이끈다.김영윤의 나선형 그래프를 생각해 보자. 동그라미의 연속인 나선형은 낮은 점의 퇴행과 재생을 통해 앞으로 상향한다. 스트레스와 적응을 반복하면서 탈진을 극복하고 성장한다. 파킹 설계의 혁명가로 불리는 하형록 목사님은 2012년 플로디가 주차협회 디자인상을 수상했다. 그는 어린시절을 목회하시는 부모님을 따라 부산 나환자촌에서 살았다. 친구들은 그가 나환자 촌에서 산다는 이유로 돌을 던지고 따돌림을 하였다. 그는 미국 이민을 와서도 인종차별과 인생의 쓴 뿌리를 경험했다. 곧 문화 충격과 문화 적응 스트레스를 받았다. 성공을 다짐했지만 교통사고로 심장이식을 두번이나 했고 약에 의존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마음을 새롭게 했다. ‘남을 위하여 살자.’ 인생의 어려운 난간이 여러 번 있었지만 새롭게 도전하여 나선형의 성공이 있었다. 결국 문화를 뛰어넘는 성장을 보여줬다.  문화는 사람과 분리될 수 없을지라도 사람은 문화를 지배하고 문화 속의 탈진을 극복하며 더 나은 미래로 성장한다.
    Read More
  • 219
    [오피니언] 아모스 목사의 일터영성 - ‘Follow Me’ 크리스천헤럴드2024.07.28
    한 사람의 영성은 그 사람의 됨의 한 부분이다. 나눌수 없다는 말인데, 무슨 말인가 하면, 교회 영성이 따로 있고, 일터 영성이 따로 있고, 영성을 드러내지 않아야 하는 혹은 않아도 되는 삶의 부분이 따로 존재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결코 그렇지 않다는 말이며, 그래서도 안될 뿐더러 그럴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실상은 많은 이들이 자신의 영성을 구분해서 발휘하고 있다고 생각 한다. 예배를 드릴때, 찬양을 할때, 기도를 할때, 공적인 신앙 모임이 있을 때에는 평소 집에서 혹은 직장에서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표정과 언어선택을 하며 최대한의 영성을 드러내려 하는 것을 보게된다.하지만 교회에서 모임을 마치고 그 자리를 벗어나는 순간, 그 영성의 스위치는 OFF가 되어지고, 또 다른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에게 되물어 보아야 한다. 필자의 컬럼도 큰 타이틀이 ‘일터영성’ 인데, 이것이 다른 영성과 구분 되어져야 하는 특별한 것이 되어서도 안되고, 그럴수도 없는 것이라 강조하고 싶다.종종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 혹은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고 있다, 라는 식의 표현을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그런 표현 자체가 어불성설이 아닌가? 우리의 삶은 하나다. 생명도 하나이고, 하나님도 한분 이시고, 결국 우리의 영성도 구분되어 질 수 없는 하나의 영성이다.예수님의 삶을 생각해 보라.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기 위해 애쓰셨던 삶의 부분이 따로 있으셨고, 세상과 어울려 살아내셨던 삶의 부분이 따로였다고 나눌 수 있는 삶이었던가? 결코 그렇지 않으셨다.예수님은 어떤 순간에도 예수님으로 사셨다. 계획하신 사역들을 이루어 가시는 순간에도 예수님은 예수님 답게 사셨고, 우연히 지나가시던 곳에서 만났던 그 어떤 만남의 순간에도 예수님은 예수님으로 사셨다.제자들과 밥을 드시거나 대화를 나누실때는 케주얼한 복장을 입으셨다가도, 회당과 길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천국을 가르치실때에는 정장으로 갈아입으시고 옷 매무시를 보다 더 신경을 쓰셨다는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예수님이 예수님으로 사셨다 라는 표현을 다르게 바꾼다면 “예수님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를 마주하시던지 사랑의 사람으로 사셨다.” 가 아닐까. 멋지지 않은가? 그렇다.우리 또한 예수님의 제자라면 예수님 처럼 삶을 살아내야 마땅하다. 교회사역, 예배, 기도, 전도, 선교 등을 할때에만 신앙인 처럼 살아내다가 사역을 마치고 나면 자연인의 모습으로 돌아와 세상을 벗삼아 살아가고 있는 생활의 반복을 하고 있다면, 결국은 탈진하고 말것이며, 위선과 교만으로 가득찬 내 모습만 발견하게 될 것이다.의지적인 결단으로 사랑의 사람으로 살겠다 라고 결단하고 살아가는 삶이, 가장 아름다운 삶이며, 예수님 닮아가는 삶이며,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가장 모범적인 모습이라고 확신한다.예수님이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수제자 라는 말은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수제자 라고 하면 베드로를 떠올릴 것이다.처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만나셨을때(마4:19) 하셨던 말씀과, 부활하셔서 공생애의 마지막 즈음을 보내고 계시던 때에 베드로를 만나셨을때 (요21:22)의 말씀은 놀랍게도 같은 말씀이셨다.“Follow Me!” 나를 따르라 라는 말씀이셨다. 무엇을 이루고, 무엇을 유창하게 숙련되게 하는 것을 우리에게 원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그저 나를 따르지 않겠니? 라고 우리에게 간청하고 계신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 처럼 삶을 산다는 말이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어떤 순간에만 따르는 것이 아니라 호흡하고 있는 모든 순간에 예수님과 동행한다는 뜻이다. 나누어 생각 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예수님 따름의 가장 핵심은 예수님 처럼 사랑의 사람으로 매 순간을 살아간다는 말이다.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착각 한다. 대형교회, 유명한 목사, 특정한 능력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큰 일들을 해 낼 것이라는 바로 그것이다.하지만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이,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큰 업적을 이루어 내는 것 이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다.예수님이 가장 바라시는 것, 하나님이 가장 바라시는 것은 교회의 부흥과 성장이 아니다. 성도 한사람 한사람이 예수님을 닮아가기를 가장 소망하신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이란 결국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며, 그런 인생이라야 나와 내 주위가 예수의 향기와 기쁨과 축복과 행복으로 가득 채워질 수 있다.그런 이유로 나를 따르라 라고 지금도 말씀하시는 것이다. 크고 힘있고 영향력 있는 교회들이 뭔 일을 낼것이라는 망상을 버려야 한다. 곳곳에 작은 예수들이 필요한 세상이다기독교의 핵심은 예수님의 삶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이며, 그 사랑에 대한 성도의 바른 응답은, 나도 예수님 처럼 내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흐르게 하겠습니다, 라고 결단하는 것이다예수님은, 내 소원을 위해,내 성공을 위해, 내 교회의 부흥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지 않으셨다.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가장 사랑하는 것이 '나' 였기에 기꺼이 그리 하셨다!이것이 복음이며, 우리가 삶으로 전해야 하는 것이 이것이며, 그런 삶의 핵심이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행위를 드리는? 행위로 보여지는 신앙생활은 멈춰져야 한다.호흡하는 모든 순간을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예수님의 삶이 그러셨던 것 처럼 말이다.
    Read More
  • 218
    [오피니언] 조영석 목사의 생각하며 기도하며 - “니들이 신앙을 알아?” 크리스천헤럴드2024.07.28
    나이가 든 것을 실감하는 순간 중 하나는 청장년 모임에 참석할 때이다. 특별한 목적이나 모임 구성이 정해져 있는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자연스레 연령대로 모여 있게 된다. 예를 들어 식사 때 그렇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가서 음식을 담아 올때까지는 어른과 청년들이 뒤섞여 있지만 모두가 착석을 하고 나면 나이별로 앉아있는 것을 발견한다. 어떤 테이블은 나이가 있는 어른들만 모여서 앉아있고, 어떤 테이블은 젊은 청년들만 앉아 식사를 하고 있다. 나이별로 앉으라고 자리를 정해 준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 나도 자연스럽게 어른들 사이에 함께 앉아 식사를 하게 된다. 내 마음은 건너편에 앉은 청년들과 달라진 것이 없는데 그쪽은 언젠가부터 어울리지 않는 자리가 되어 버렸다. 청년들이 모여 앉은 모습을 보며 나도 언젠가 저 자리에 앉아서 어른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을 바라보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이렇게 시간이 흘렀구나 싶어 옛 생각에 잠시 잠기기도 했다. 한 유행가의 가사처럼 “머물러 있는 청춘 인줄 알았는데 “ 역시 그럴 수는 없는 것이구나 싶다. 그러나 아무리 흐른 세월이 아쉽고 그때 그 시절이 그립다고 해도, 지나간 세월을 못 잊어 하며 뒤 돌아보며 살수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물론 그렇다고 세월이 덧없이 흘러간 것은 아니다. 내 청춘은 갔지만 그 동안 내가 겪고, 견디고, 경험하며 이룬 내 삶의 열매들은 결코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어떤 기회와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하다. 일찍 결혼해 젊은 시절부터 동고동락하며 같이 웃고 울며 함께한 아내, 너무도 사랑하는 자녀들, 그리고 내 삶과 사역을 통해 이루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하다. 또한 이 모든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나의 속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물이다.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실체는 날이 갈수록 더욱 뚜렷해지는데 이것을 놓고 어떻게 이전으로 돌아가려 하겠는가.젊고 열정으로 가득했을 때 하나님이 나만 사랑하시는 것 같이 느껴질 때도 있었고, 내 기도만 응답하시는 것 같은 신앙의 자만에 빠진 적도 있었다. 그러다 인생의 고비를 만나 수없이 넘어지고 좌절하며 믿음도 약해져 하나님이 나만 외면하시고 내 기도만 응답하지 않는 것 같은 신앙의 밑바닥도 경험해 보았다. 그 어렵다는 돈을 초월해 보기도 하고 얽매여 보기도 하였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이전보다는 조금 더 성숙한 믿음의 소유자로 그 나라의 신비와 섭리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었는데, 이것을 어떻게 놓고 이전으로 돌아가려 하겠는가. 곧은 길을 힘차게 뛰어서도 가고, 안개속에 지나듯 희미한 길을 더듬어서도 가고, 가파른 절벽을 기어오르듯 힘겹게 겨우겨우 올라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 되돌아가려 하겠는가. 그래서 추억은 추억으로만 머물러 있게 두고 나는 나의 삶의 여정을 통해 조금 더 알게 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에 기쁨과 소망을 두고 살아가야겠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내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며 나의 부르심을 이루어 가며 살아야겠다. 그래서 젊은 친구들에게 신앙의 선배로서 조언을 해줄 수 있을 만큼 더 성숙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하겠다. 그리고 그 조언의 첫 마디는 일단은 이렇게 시작하려고 한다.“니들이 신앙을 알아?”“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고후 4:16-
    Read More
  • 217
    [오피니언] 최재홍 목사의 하루한장 말씀 - 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이 있습니다 크리스천헤럴드2024.07.28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의상, 옷, 패션은 참 중요합니다. 옷은 착용하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 많은 것을 말하고 있고, 새로운 사실을 알게 해줍니다. 언제나 정답인 것은 자신에게 어울리는 옷을 입었을 때에 더 아름답고 편안하고 행복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옷에 관련된 놀라운 기적과 역사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특히 옷을 입는 것과 벗는 것은 매우 중요한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옷을 입지 못한 벗은 상태는 죄수와 노예 혹은 도망자의 신세를 의미합니다. 창3:7-8에서 아담과 하와는 범죄한 이후 그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부르시는 하나님께 “내가 벌거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10) 라고 답변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상태는 죄악의 상태, 그로 인한 두려움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에 하나님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창3:11)라고 책망하십니다.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삼년 동안이나 ‘벗은 몸과 벗은 발’(사20:2-3)로 예언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장차 애굽과 구스의 포로가 앗수르 왕에게 끌려갈 때 젊은 자나 늙은 자가 다 벗은 몸, 벗은 발로 볼기까지 드러내어 애굽의 수치를 보이게 할 것에 대한 젓은 선지자의 예표였습니다(사20:3-5).막14:51-52절에는,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 오다가 무리에게 잡히게 되자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한 내용을 설명하고 기록한 이 내용을 볼 때, ‘벗은 몸’은 예수님을 배반하고, 버리고, 도망하는 비겁한 신앙을 가리키고 있습니다.이처럼 아담 이후 타락한 인류를 ‘벗은 몸’으로 그 죄악의 수치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죄인된 인류의 벗은 몸을 친히 사랑으로 덮어 주고자 몸소 자신의 옷을 벗으셨습니다.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은 저녁을 잡수시다가 ‘겉옷’을 벗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요13:4). 겉옷을 벗고 엎드려 발을 씻기는 것은 종이 하는 일입니다(삼상25:41). 예수님은 우리의 죄로 인해 벗은 몸을 덮어 주시고자 스스로 당신의 겉옷을 벗어 종의 자리에까지 내려가셨으며, 그리고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는 로마 군병들에 의해 겉옷뿐 아니라 속옷까지 다 벗기움을 당했습니다(요19:23-24). 주 예수님께서 벗음으로 오히려 우리의 벗은 허물을 가리우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롬13:14), 합하여 하나 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갈3:27).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다는 것은 죄악으로 인해 벌거벗은 우리의 수치를 가리고 그리스도의 은총과 능력으로 덧입는다는 뜻입니다.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자는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겉옷을 만졌습니다. 이는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는 간절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예수님의 겉옷을 만짐으로 나음을 입었습니다. 이를 영적으로 비유하자면, 혈루증 앓는 여인은 단순히 예수님의 옷을 만진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게 됨으로 모든 질병이 낫고 건강한 새 몸을 덧입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옷을 입는다는 것은 곧 그분의 능력을 덧입는다는 뜻입니다.구약 성경에서 엘리야의 능력이 그의 겉옷을 통해 제자인 엘리사에게 전수되는 광경을 볼 수 있습니다. 엘리사가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 옷’을 주워서 요단 강물을 칠 때 물이 갈라져서 요단강을 건넜습니다(왕하2:13-14). 이처럼 엘리야의 겉옷은 그의 모든 영감과 능력의 상징이었고, 이를 통해 엘리사에게 그대로 전수될 수 있었습니다.마찬가지로 이 세상 마지막 때를 사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음으로서 그분의 영감과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예수로 옷 입음으로 하나 되어야 합니다(갈3:27). 이것이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는’ 길입니다(롬13:11-12). 나의 죄악 된 겉옷은 벗고 예수님의 의의 옷, 능력의 새 옷을 덧입어야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잘 어울리는, 나 됨을 말해주는 옷으로 갈아입으십시오. 바로  예수 그리도로 옷을 입는 것입니다. 아멘!“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갈 3:27)
    Read More
  • 216
    [오피니언] 김병학 목사의 소통하는 교회 - 소통은 현실 파악과 대안이다 크리스천헤럴드2024.07.03
    얼마 전, 한국 신병교육대에서 벌어진 군 간부의 무리한 훈련으로 신병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안타까운 사고 소식은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지만, 이 사건은 단순한 개인의 과실로 치부하기엔 너무나 많은 것을 시사한다.2020년부터 젊은 세대, 특히 MZ세대의 군 장교 지원율이 급격히 하락하면서 군의 양적, 질적 저하가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낮은 봉급과 빈번한 근무지 이동 등 열악한 근무 환경은 젊은 인재들의 발길을 돌리게 만들었고, 결국 군 장교의 수준 저하는 대형 사고로 이어질 가능성을 높였다.군대는 국가 안보를 책임지는 중요한 기관이다. 그러나 낮은 봉급과 열악한 근무 환경은 군 장교의 질적 저하를 불러왔고, 이는 곧 국방력 약화로 이어진다. 군 장교들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지만, 현실은 그들의 희생과 노고를 제대로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그런데 이것은 군대만의 문제는 아니다. 목사 후보생 감소 역시 심각한 현실이다. 물론 여러 복합적인 이유가 존재하지만, 불안정한 목회자의 경제 현실은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다. 대부분의 교역자들은 최저 시급에도 미치지 못하는 생활비로 생계를 걱정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다. 이러한 열악한 현실은 목회자의 수준 저하로 이어져 결국 교회 공동체 전체의 붕괴를 초래할 수 있다.교회는 영적인 지도자를 배출하고, 지역 사회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끄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하지만 열악한 목회 환경은 미래 목회자들을 양성하는 데 어려움을 야기하고, 이는 결국 교회의 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 목회자들은 영혼을 치유하고 공동체를 이끌어야 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지만, 현실은 그들의 헌신을 외면하고 있다.군대는 한국 사회의 중요한 축을 담당해왔다. 하지만 지금은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다.문제 해결은 쉽지 않다. 하지만 시스템의 근본적인 문제를 인식하고, 변화를 위한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먼저, 군 장교의 처우 개선을 통해 군의 미래를 보장하는 문제는 국가가 나서면 해결이 된다. 그래서 적절한 봉급과 근무 환경을 만들어서 젊은 인재들을 군에 끌어들이고, 군 장교의 전문성을 높이게 될 것이다. 한국의 상황에서, 국방력 강화는 국가의 미래를 위한 필수적인 요소이며, 이를 위해 군 장교의 처우 개선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이기 때문이다.그러면 교회는 어떻게 하나? 누가 목회자들의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나?교회의 경우도 목회자들의 경제적 안정을 보장하는 시스템 마련이 시급하다. 최소한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지원책을 통해, 목회자들이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과 공동체를 위해 헌신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중요하다. 목회자들의 경제적 어려움은 그들의 사명감을 흔들고, 결국 교회 공동체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그러려면, 단순히 교단에만 의지할 수 없고, 너무나 뻔한 대형 교회 중심의 지원 시스템은 작은 교회의 어려움을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 지역 교회 공동체가 서로 협력하고, 어려움에 처한 작은 교회와 목회자들이 살아나도록 함께 돌보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이것을 위하여 기독교 연합 단체, 기독교 언론들은 꾸준히 안내와 홍보를 하는데 앞장서야 한다. 이런 협력을 통해 교회 공동체의 균형을 유지하고, 건강한 성장을 도모할 수 있다면, 공교회성이 회복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우리는 이런 위기를 단순히 개인이나 한 교회의 문제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시스템의 문제점을 정확히 인식하고, 변화를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교회의 새로움은 교회의 미래를 위한 필수적인 과제다. 우리 모두의 노력과 관심이 필요한 시점이다.
    Read More
  • 215
    [오피니언] 송경화 교수 칼럼 - 자녀양육 - 들어가는 글 (2) 크리스천헤럴드2024.07.03
    상담실에 오는 대부분의 내담자들의 문제 근원이 바로 부모님이고, 부모가 자녀를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양육하도록 도와주는 교육이 적절하게 주어진다면 상당히 많은 정신건강 문제를 미리 예방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지만, 그렇다고 내가 모든 부모들을 만나 일일이 교육을 하는 것은 여러가지 이유로 불가능하다. 그것이 내가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이다. 굳이 상담심리대학원에 진학하지 않아도, 최대한 많은 부모들(과 예비 부모들)이 정서적으로 건강하게 자녀를 양육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방법이 글이다. 비록 나는 너무 늦게 배워서 내 딸들에게는 잘 적용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이 글을 읽는 나보다 젊은 부모들은 이 책의 내용들을 통해 아이들을 키우는 데 도움을 얻고 나보다는 잘 키워 주기를, 그래서 앞으로 상담실을 찾는 분들이 서서히 줄어들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 글을 읽어 나가면서 어쩌면 본인의 부모가 떠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부모님들이 나에게 정서적으로 안정적인 양육을 해 주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들도 글을 읽으면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세상에 완벽한 부모는 없다. 가족상담학자였던 미누친은 자녀 양육은 아무리 잘 해도 후회가 남는다고 말한 바 있다. 그만큼 부모 역할은 힘들고 어렵다. 나의 부모님이 나에게 실수하거나 부적절하게 한 부분들이 이 글을 읽으면서 서서히 명확해질 때 그것을 수용하고 인정하는 것은 참 힘든 일이다. 상담을 하면서 정말 악한 부모가 있다는 사실에 종종 소름돋는 순간이 있기도 하지만 그건 예외적인 경우이고,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하나같이 자녀들을 사랑하고 잘 키우려고 애쓰고 있다. 나의 부모님들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부모님이 나에게 부적절하게 한 것들도 있었지만 그건 부모님이 잘 몰랐었고, 그 분들의 그 때 상황과 능력의 한계 내에서 나름의 최선이었을 것이다. 일단 그것은 인정하자.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은 나에게 안정적이고 편안한 양육환경을 제공하는 데 충분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 그것은 현재의 나에게 아직까지도 상처와 흔적을 남기고 있을 지도 모른다. 이 글의 목적은 부모님을 비난하거나 탓하려는 게 아니다. 부모님을 탓해 봐야 지금 와서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저 우리 부모님이 잘 몰라서 그랬거나, 부모님도 당신들 나름의 트라우마나 상처가 있어서 그랬다고, 혹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것이었지만 많은 것이 부족한 것이었다고 인정하자. 그리고 부모님이 나에게 준 상처나 결핍에 대해서 감추고 부인하고 회피하려 하지 말고 담담하고 용기있게 그것을 직면하는 것이 치유의 여정을 시작하는 전환점이 된다. 그것을 인정하고 직면할 때 우리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슬픔과 원망, 분노와 수치심 등을 느끼게 된다. 이 과정이 힘들지만 이런 애도 과정은 치유로 들어가는 첫 관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부모님의 어떤 것이 떠오르고 그로 인해 어떤 감정을 느낀다면 그 감정을 충분히 표현하는 게 바람직하다. 감정의 표현을 위해 전문상담사를 만나도 좋지만, 그저 작은 노트에 감정들을 느껴지는 대로 적어보는 것도 좋다. 눈물이 나오면 참지 말고 마음껏 우는 것도 좋다. 어쩌면 이 글을 읽으면서 나의 자녀들에게 잘 못 해준 것들이 떠올라 마음이 힘들어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책 읽는 것을 잠시 멈추고 자녀들에게 다가가 마음을 전해 보자. 미안하다고 해도 좋고 사랑한다고 고맙다고 해도 좋다. 따뜻하고 친절하게 안아줄 수 있다면 더 좋다. 멀리 떨어져 있다면 전화나 문자를 통해 마음을 전해줄 수 있다. 부모-자녀 관계는 아주 특별하다. 이 관계는 자녀가 경험하는 최초의 관계이고 가장 친밀한 관계이며, 자녀에게 이 세상과 하나님에 대해 아주 강력한 가르침을 주는 관계이다. 그런데 어떤 부모도 부모 연습을 미리 해 보고 부모가 되지는 않는다.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부부는 느닷없이 부모가 된다. 그리고 아이와 함께 부모도 자란다. 아이가 돌이 되면 부모 역시 돌쟁이 부모가 되고, 아이가 사춘기에 들어서면 부모도 질풍노도의 시기에 빠진다. 누구나 부모는 처음이기에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좌충우돌하다 보면 어느새 아이는 이미 다 자라 버렸다. 아이의 발달 과정에 대해서 그리고 각 과정에 맞는 양육방법을 몰라 허둥거리는 동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녀에게 불필요한 상처를 주곤 한다.  대부분의 부모들이 직면하는 이런 상황에서,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곳에 서 있는 여행객의 손에 쥐어진 작은 나침반처럼 이 글이 조금이라도 부모님들께 도움이 되기를, 그래서 많은 부모님들이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행복한 자녀들을 길러 내고 결과적으로 상담실을 찾는 분들이 점차 줄어들고 마침내 사라지는 그 날이 언젠가는 오기를 기대해 보며 글을 열어 본다.
    Read More
  • 214
    [오피니언] 아모스 목사의 일터영성 - 정말입니까? 십자가가 하나님 사랑의 클라이막스 인가요? 크리스천헤럴드2024.07.03
    주님은 십자가 사역을 위해 오신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을 보여주러 오셨다.  믿음이란 단어는 기독교에 있어서 빠져서는 안될 가장 중요한 단어 중 단연 으뜸이 되는 단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수도 없이 많이 해왔던 질문 같지만,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생각하지 않고 그저 믿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게된다.필자는 흔히 이야기 하는 모태신앙의 소유자 인데, 어린 시절 신앙생활 했던 경험들을 떠올려보게 되었다. 어린시절 마주했던 나를 가르치셨던 목회자 분들은 나에게 믿음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셨던가? 놀랍게도, 믿음에 대한 대부분의 가르침이 ‘소원’ 과 연결시켜 강조하고 가르쳤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즉, ‘이루어 주실 것을 믿으라’ 라는 것이 믿음의 핵심이었던 게다.지금은 어떤가? 감히 나는 아니다 라고 말하고 싶다. 아주 초보의 영성으로는 믿음을 내 소원과 결부시키는 것이 굳이 해서는 안될 일 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신앙생활을 꽤 오래 한 사람이라면 이제는 믿음이라는 단어를 정말 의미있게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야 함을 권고한다.믿음이란, 하나님이 사랑이신 것과 그 사랑이 지금도 변함 없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영원히 변함 없을 것임을 믿는 것이다. 십자가 사건을 아는가? 십자가 사건을 믿는가? 십자가의 사건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신 사건임을 믿는가? 그런데 만약 이 시점에서 이렇게 물으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예수님의 사랑의 클라이막스는 당연히 십자가 입니까? 맞는것 같지만 정확하지는 않은 표현이다.왜 그런가 하면, 십자가 사건이 인류를 구원할 근거가 되는 엄청난 사건 이었음은 분명하지만, 예수님의, 하나님의 사랑의 사역이 그 사건을 기점으로 멈추어 진 것이 결코 아님을 우리는 안다.다시말해, 하나님의 사랑은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고 십자가에 죽기 까지 하셨고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셨지만 그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이다.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해 보라. 하나님의 사랑은 시작부터 위대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크게 증폭 되어져 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성경을 읽다보면, 아 하나님은 정말 위대한 창조주 시구나 하고 감탄하다가 어느덧 하나님의 사랑은 결국 나를 향한 사랑이구나 라는 대목에서 눈물을 흘리게 되고, 거기서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후에도 오늘에 이르기 까지 나와 함께 하셨구나 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그런면에서 필자는 하나님의 사랑의 클라이막스는 결코 십자가 사건이라고 말할 수 없다 라고 주장해 본다. 하나님 사랑의 클라이막스는 과거의 어느 시점이 아니라 바로 지금, 그리고 나에게 향해 있음을 믿는 것이 참 믿음이며, 그것을 믿고 사는 이가 정말 복된 사람인 것이다.그리고 더 나아가서 앞으로의 내 삶을 통해서도 지금보다 더 큰 증폭된 하나님의 사랑이 내 삶의 순간 순간마다 함께 함을 믿는 것이 믿음의 본질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 관점으로 성경을 읽어보라! 그동안 깨닫지 못했던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에 탄복하게 될 것이다.Great Commission, 즉 대사명 이라고 불리우는 마태복음 마지막장의 마지막 두 구절을 아는가?“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새번역)예외없이 모든 교회와 신앙인들이 이 표현들에을 주목하고 강조한다.  가라! 모든 민족에게! 제자 삼으라! 침례 (세례)를 주라! 가르치라! 지키게 하라! 그래서 그것들을 사명이라 부르며, 그 사명을 이루어 내기 위해 모든것을 드리고 바치며 힘쓰고 애쓰며 산다.왜 그러고 사세요? 왜 그래야만 하나요?  라고 물으면, 받은 은혜가 커서요, 혹은 주님의 명령 이잖아요 라고 대답들을 하면서, 힘들고 지치고 번아웃 되는 한이 있더라도 이 사명을 위해 모든것을 쏟아낸다.하지만 멈추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은 지금도 점점 더 커진 최고의 크기의 사랑으로 이 순간 나에게 함께 함을 믿고 살아가는 이들에겐 아마도 다른 표현이 눈에, 그리고 가슴에 깊이 새겨질 것이다.“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그렇다. 믿음이란 결국 이것을 믿는 것이다.Great commission 이 아니라 이 구절은 Great promise 라고 해야 더 정확하지 않을까. 사도요한도 요한복음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유월절 전에 예수께서는, 자기가 이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가야 할 때가 된것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요13장1절, 새번역) 라고 말이다. ‘끝까지’ 라는 말은 이미 끝났다 라는 말이 아니다. 지금도 유효하다는 말이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 하다는 말이며, 그 누구도 아닌 나에게 그리 하시겠다는 말이다. 이것을 믿는것이 진짜 믿음이다.소원따위를 이루어 줄것을 믿는 믿음에서 벗어나 참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세상과 교회들에 넘쳐나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Read More
  • 213
    [오피니언] 김병학 목사의 소통하는 교회 - 소통은 외로움을 극복하게 한다 크리스천헤럴드2024.06.16
    현대 사회의 구조적 문제로 인한 외로움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 사회적 관심사로 자리 잡고 있다. 혼밥이나 혼자 사는 것에 대한 TV 프로그램이 낯설지 않고, 안타깝게도 고독사 같은 극단적인 문제도 흔하게 일어나고 있다. 정부에서 정책을 만들어도 해결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교회의 역할이 중요해지고 있다. 그러면 교회가 어떻게 소통을 통해 이 외로움을 극복할 수 있을까?우선, 교회는 정기적인 모임과 활동 참여를 통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개인들의 소속감을 높일 수 있다. 이것이 교회가 가진 공동체로서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정기적으로 교회에 참여함으로써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관계를 맺고,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 외로움을 극복할 수 있다.또한, 정기적인 소그룹 활동이나 성경 공부 모임은 더 깊은 수준의 대화와 관계 형성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므로 소그룹이나 성경 공부가 단순히 모임 자체가 목적이 아니어야 한다. 여러 차례 강조하였지만, 교재에 답달고 느낀점을 이야기하는 수준으로는 인간의 근본적인 외로움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사람들 사이에 거리감만 만들고, 모임과 만남이 형식적으로만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모임들은 같은 신앙을 공유하는 사람들과의 친밀감을 증진시키며, 서로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목회자나 리더십은 소그룹을 이해하고, 인도하는 법을 잘 배워서 적용해야 한다. 소그룹 멤버들도 비형식적인 모임도 많아져서 소통이 계속 일어나야 한다.또한 성경 공부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자원봉사 활동으로 이어지게 하고, 공동의 목적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것은 구성원들 사이의 결속을 강화하고, 공동체 의식을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게 한다. 특히 젊은 세대는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교회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지를 교육하고, 섬길 대상을 함께 찾아서 지속적인 교류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금까지 교회는 외부의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을 계속 해왔지만, 대부분 돈을 보내는 것이나 지역 정부 기관에 돈이나 물품나물을 보내고 사진을 찍는 것이었다. 그래서 계속 교회는 좋은 일을 해왔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는 젊은 세대나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이것은 방법의 문제만은 아니다. 목회자나 교회지도자가 이런 일들을 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생각할 수 있는 것이 그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 밖의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 것의 담당은 젊은 세대가 맡아야 한다. 그 자리마저 교회지도자가 담당이 되면, 의미가 없다. 교회는 하는 역할에 따라 담당자를 과감하게 젊은 세대로 넘겨줘야 한다. 이런 것들이 소그룹에서 논의가 되고 진행이 되도록 교회는 그 마당을 열어야 한다.디지털 시대의 도래로 교회는 온라인 플랫폼을 활용하여 소통의 범위를 넓힐 수 있다. 소셜 미디어, 웹사이트, 온라인 포럼 등을 통해 신체적으로 시간이 되지 않거나 장애를 가져서 교회에 올 수 없는 사람들도 커뮤니티의 일원으로서 교류를 이어갈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일도 소그룹에서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분명히 교회 내에 이런 일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을 성경적으로 훈련해서 지도자로 세워나가야 한다.결국 교회는 모든 구성원이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당연히 노력해야 한다. 소통은 단순한 대화를 넘어서 서로의 필요와 감정을 이해하고 지지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교회는 더욱 강력한 공동체가 될 수 있으며, 사회적 외로움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이러한 다양한 소통의 전략을 통해 교회는 구성원들의 외로움을 적극적으로 해소하여 모두 오히려 소외된 이웃을 찾아 섬기고, 더 나아가 지역 사회에서도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노력이 개인뿐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건강과 행복에 기여할 것이다.
    Read More
  • 212
    [오피니언] 송경화 교수 칼럼 - 자녀양육 - 들어가는 글 (1) 크리스천헤럴드2024.06.16
    나는 상담을 하고 상담을 가르치는 사람이다. 매일매일 다양한 문제를 호소하는 내담자들이 상담실을 찾는다. 상담실 문을 두드리는 내담자들 중에 행복하고 만사 형통한 사람들은 없다. 이들은 하나같이 마음 속에 큰 멍을 안고, 고통 중에 혼자서 신음하다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상담실로 발걸음을 옮긴 분들이다. 이 분들을 만나면서 나의 마음은 찢어지게 아프다. 이 분들의 마음을 만지고 치유하는 일을 하면서 이 분들의 인생 속으로 함께 들어가는 상담의 과정은 거기에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다면 한 인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상담실을 찾는 분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는 현실이다. 나는 상담실을 찾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상담실 문을 닫아야 하는 그 날이 오기를 진심으로 고대한다. 상담실에서 내담자와 대화를 나누는 일이 반복되면서, 그 일의 연차가 늘어나면서 나는 한 가지의 사실을 깨닫고 소름 돋는 경험을 자주 한다. 내담자들이 호소하는 모든 아픔의 원인은 하나같이 “부모”였다!!! 내담자들이 처음에 상담실 문을 열 때에는 다소 다양한 문제를 호소한다. 부부 갈등, 고부 갈등, 불안, 우울, 낮은 자존감, 열등감, 죄책감, 기억 상실, 섭식 장애, 주의 집중 문제, 불면증, 인간 관계의 어려움, 공포증,  자해, 자살, 중독… 이런 다양한 문제로 상담을 시작하지만 대화를 해 나가다 보면 결국 이 모든 문제들의 중심에는 그들의 부모가 있었다. 개인적으로 내가 접한 내담자들의 적어도 90%의 문제는 부모로부터 기인했거나 부모와 관련이 있었다. 여기서 나는 10%의 예외를 인정한다. 그것은 부모도 어찌할 수 없는 외부적 사고로 인한 문제도 적지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 내담자들의 호소 문제는 부모로 인한 것들이다. 부인할 수 없는 이 현실을 마주했을 때 나의 첫번째 반응은 놀람과 부인이었다. 그럴리가 없다. 뭔가 잘못된 것일 거다. 어떻게 자녀를 사랑하고 돌보는 부모가 자녀의 상처의 근원이란 말인가. 분명 그럴 수는 없는 거다. 도대체 왜?나는 내가 발견한 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증명해 줄 내담자를 만나길 간절히 바랬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상담을 하면 할 수록 내가 발견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만 점점 더 증명될 뿐이었다. 어떤 문제로 상담을 시작하든 결국 이야기의 끝은 부모님으로 귀결되었다.  종종 자녀를 학대하거나 방임한 부모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내담자의 부모님들은 그저 평범한 분들이었다. 그들은 자녀들을 사랑했고 자녀들을 위해 희생했으며 힘든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든 본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자녀들을 양육한 분들이었다. 그런데 이런 부모들의 자녀들은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와 아픔을 가슴 속에 안고 성인이 된 이후에도 여전히 그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상담실을 찾아온다. 이런 현실이 너무도 안타깝고 기가 막힐 뿐이다. 어째서 부모는 사랑했으나 그 자녀들은 사랑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것일까?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여기에는 희망도 있다. 상담실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문제의 원인이 그들의 부모님이라면, 부모님들이 자녀를 키울 때 상처를 덜 주고 건강하게 키울 수 있는 방법을 알기만 하면, 잠재적 내담자 90%가 겪을 불필요한 상처와 고통을 피할 수도 있다. 이 세상의 부모님들이 자녀에게 상처 주지 않고 자녀를 양육하는 방법을 안다면, 그 때가 바로 상담실이 문을 닫아야 하는 그 때일 수 있다. 내가 고대하는 그 날 말이다. 학교에서 상담을 가르치면서, 종종 학생들의 탄식 섞인 말을 듣곤 한다. “교수님, 지금 배우는 것을 10년만 일찍 배웠다면 제 아이들을 다르게 키웠을 거에요. 너무 아쉬워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이다. 나 역시 부모로는 처음으로 딸들을 키웠고, 지금 아는 것을 그때는 모르는 채 참 미숙하게도 딸들을 키웠다. 자녀 양육에 대해 배워 나가는 동안 딸들은 기다려주지 않고 너무도 빨리 쑥 커 버렸다. 그래서 나 역시 이미 성인이 된 딸들을 보면 아쉽고 미안하고 안타깝다. 지금 딸들을 처음부터 다시 키운다면 훨씬 더 잘 키울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래서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 야속하고 아이들에게는 미안하다.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