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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김은주 교수의 탈진을 긍정하라 22- 탈진 관점으로 본 선교사 이야기 10 - 샬럿 딕스 문 크리스천헤럴드2025.10.02
    중년 여성 선교사를 대상으로 탈진의 원인을 살펴보니 타문화 부적응, 의사소통 부재, 긴장과 갈등, 소외감, 여성 폄하의 시선, 정체성 상실, 과도한 사역 및 불안정한 경제력 등으로 나타났다. 신체적 이상과 심리적 위축과 고립, 하나님과 소원함은 탈진을 넘어 선교사의 중도 탈락을 가져오거나 죽음의 공포와 자살 충동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한성국 박사는 중년 여성의 탈진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소명을 재확인하는 회복탄력성을 발견했다. 탈진은 심각한 악영향을 초래하기도 하지만, 대처방식에 따라 성숙의 기회와 믿음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재발견의 시간이 될 수 있다.샬럿 딕스 문(Charlotte Diggs Moon)은 19세기의 영향력 있는 여성 선교사로 꼽힌다. 그녀는 해외선교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로티라는 이름으로 불려졌다. 7형제 중 넷째로서 13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미망인 어머니로부터 엄격한 신앙훈련을 받았다. 1873년 여동생을 뒤따라 중국 선교로 갔지만, 여동생 에드모니아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으로 4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왔고, 로티는 39년 동안 중국 사역을 이었다. 1885년부터 중국 촌락을 순회하며 전도했고, 1887년 중국인 남성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문의 정책에 따라 외국 선교사의 개입이 없이 20년 동안 중국인 목사 리서우딩 집례로 1000여명에게 세례를 시행했다. 이 외에도 덩저우에서 신입 선교사 훈련 및 중국 여성 상담, 그리고 저술활동을 했다.필자는 로티 문의 탈진을 발견하고자 한다. 첫째, 신체적 탈진이다. 20세기 초는 중국에 전염병과 천연두가 휩쓸고, 1911년 반란이 일어나 대규모 기아 상태를 초래했다. 그녀는 1912년 기아대책을 위해 금식하며, 재원을 마련했으나 역부족이었고, 영양실조와 아사 직전에 놓였다. 결국, 본국의 결정으로 귀국하던 중 일본 고베의 선상에서 숨을 거두었다. 둘째, 심리적 탈진이다. 로티 문은 여동생이 선교생활의 중압감, 발작 증세, 그리고 몸이 아파서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외로움과 깊은 우울증에 죽을 것 같았다. 그 후, 일본 선교를 함께 하자고 구혼을 한 남자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다윈 진화론 입장을 지지할 수 없기 때문에 혼자 남기로 결정했다. 그녀는 중국의 기근으로 미국에 재원 요청을 했지만, 선교위원회는 이를 거절했다. 통장을 탈탈 털었지만, 너무나 미미하여 깊은 우울에 빠졌고, 더군다나 여동생이 스스로 머리에 총을 겨누어 자살했다는 소식은 깊은 상처를 남겼다. 셋째, 문화적 탈진이다. 여자 선교사가 누구를 가르치거나, 선교하거나, 남자에게 권위를 행하는 것은 금지였고, 마을에서는 여자 도깨비라고 불려져 중국인과 동화되는 것은 힘들었다. 고작 여학생 몇 명만 가르치는 일은 로티에게 지독한 권태와 혐오와 실패한 인생처럼 자각됐다. 현지 이사 T. P. 크로퍼드의 강압적 권위도 사임의 위기를 만들었다. 로티 문의 탈진회복은 다음과 같다. 첫째, 헌신하는 마음이다. 그녀가 17세 때 강한 회의론자를 넘어서서 1858년 전도집회에서 전도자의 부르심을 입은 뒤, 세상을 떠나기까지 중국 사역에 헌신했다. 둘째, 강한 여성으로서 꿈의 실현이다. 원대한 사역을 꿈꾸는 여성 선교사로서 신념과 정체성을 자리매김하고, 남자 선교사만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편견을 깼다. 남녀 선교사가 평등한 권리를 갖도록 저술하고, 강연으로써 남침례교인들에게 호소력을 지녔다. “백만여 명에 이르는 남부 침례교도들이 중국 전체에 남자 선교사가 겨우 새 사람 파송 할 능력밖에 안된다는 게 이상하다.” 남자 선교사들이 오지 않는다면, 여성 선교사들을 파송 해달라고 주장했다. 로티는 30개 이상의 교회를 설립했고, 핑투는 남침례교 최대의 선교 중심지가 되도록 공헌했다. 그녀에 의한 ‘로티 문 성탄절 헌금’은 전설적인 물결을 만들었다. 1888년 첫 번째 성탄절 헌금은 원래 목표액 보다 초과되어 세 명의 신입 여성 선교사들에게 봉급을 줄 수 있었고, 그녀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액수는 계속 증가했다. 셋째, 재능의 발휘이다. 로티는 위기 때마다 글을 써서 호소력을 전파하여 중국선교에 설득력을 얻었다. 다재다능한 글솜씨는 교파 출판물과 외국 미션 저널에 편지하여 선교의 필요를 간청했고, 여성선교연합의 창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로티의 마지막은 건강이 악화되어 생명을 뺏겼지만, 탈진의 위기 때 마다 강한 여성으로서 신념과 선교의 열정을 재발견함으로 극복하였다. “내가 천개의 목숨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그것들을 중국의 여인들을 위해서 내놓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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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황순원의 10가지 감사노트 - 가을의 시작, 10월에 드리는 감사 크리스천헤럴드2025.10.02
    1 새로운 달, 새로운 날을 주신 하나님이 이달에 주실 은혜를 구체적으로 알게 해 주시고 주실 은혜를 받을 그릇을 준비하라는 부탁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다짐하며 새달을 시작하면서 감사를 드립니다.2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구원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이제는 옛것은 모두 지나가고 새것이 되었다고 하시는 주님은 과거를 떨쳐 버리고 새로운 날 새롭게 살아가라고 구체적으로 알려주신 대로 실습하다 보니 진한 감동과 감사가 밀려옵니다.3 매일 찾아오는 근심 걱정을 주님께 고백하고 있을 때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는 명령이 강하게 들려옵니다. 염려는 단지 감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내가 주인이 되는 데서 나오는 것이기에 엄밀히 말하면 우상숭배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도 인식하지 못하는 우상들이 내 안에 너무 많은 것을 깨닫고 새달에는 숨어있는 우상들을 샅샅이 내 쫒을 것을 결단하며 감사를 드립니다.4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바로 알 때 염려는 물러가고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할 것을 과거 신앙생활 속에서 증명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느덧 잊은 채 염려의 종이 되어 가고 있는 자신을 바라본 후부터 기도의 제목을 다시 기록하며 감사를 드립니다.5 갈수록 불경기가 몰아치는 현실 속에서 소리 없이 들어온 재물의 우상은 우리의 신앙을 갉아먹고 있습니다. 돈이 우리의 노후대책이 되는 줄 알고 열심히 일을 하여 넉넉하게 쌓아 놓습니다. 그러나 돈의 액수가 그 사람의 가치를 매기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쌓이는 돈은 우리에게 또 다른 염려를 안겨 줍니다. 돈은 사용하라고 주신 것인데 그것을 사랑하여 축적하려고 할 때 예기치 못한 불안과 초조가 생깁니다. 이러므로 돈의 성질과 사용법을 잘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6 돈이 없으면 불편할 뿐 죄는 아닙니다. 돈의 씀씀이를 보면 믿음과 가치관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우선순위가 무엇이냐에 따라 돈의 사용도가 달라지는데 그것 또한 인격과 비례되는 것이므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하신 말씀을 다시 새겨보며 감사를 드립니다.7 나와 맞지 않는 사람과 불편한 사람을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대하여 자세한 방법을 알려 주시는데 우선은 하나님이 나의 인격을 잘 다듬어 주시려고 준비하여 보내주신 분이라 생각하니 새로운 안목과 더 넓은 세계로 인도하심인 줄 알고 감사를 드립니다.8 값비싼 다이아몬드의 재료는 석탄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갈고 닦여서 어느 날 빛나는 보석으로 변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이 깎일수록 빛이 다양하고 화려합니다. 이 보석이 결혼반지에 사용되는 것은 부부가 처음 만났을 때는 석탄과 같이 새까맣지만 서로 갈고 연마하는 동안 반짝거려서 마침내 성숙한 부부로 하나 되게 하시고 흠과 티가 없는 가정으로 만드실 것을 생각하고 감사를 드립니다.9 이처럼 공동체 안에서 맘에 들지 않는 사람 앞에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찾아 나설 때마다 교회라는 공동체는 특히 서로 다른 점들을 존경해 주고 서로 보완해 주고 위로해 주는 것이 사명입니다. 도저히 화목할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자들을 향해서도 화평을 만들어 가라는 지상 명령을 받았으니 무슨 일을 만나든지 성령의 음성을 순종하는 태도를 취할 때 성령의 열매가 그득하게 맺혀질 것을 바라보면서 결단하게 하심 감사합니다.10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죄인인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 삼아 주셔서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굳게 하셨으니 감사를 드립니다. 아직도 이런 하나님의 목적을 몰라서 불안의 노예가 된 채 힘들어 고통당하는 자들에게 찾아가셔서 다시 정체성을 되찾아 새로운 비전을 갖고 새 출발 하게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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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정재영 칼럼 - 한국교회는 양적 부흥을 이룰 수 있을까? 크리스천헤럴드2025.10.02
    작년에 ‘목회데이터연구소’에서 한국 개신교 장래 인구 추계를 발표했다. 15개 교단의 교세통계 자료와 우리나라 인구통계를 토대로 분석한 결과에서 2050년 한국 개신교 인구는 11.9%까지 감소할 것으로 예측됐다. 현재 828만 명(16.2%)으로 추정되는데 560만 명으로 3분의 1 정도가 줄어드는 것이다. 이 수치에서 이단 신자와 가나안 신자를 제외하면 정통 교회에 출석하는 개신교 신자 수는 400만 명 이하가 되고 비율로는 10% 이하가 될 것이다. 이것은 현재 대표적인 개신교 교단 2개를 합한 것보다 적은 수치이다.이러한 상황에서 교회 수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신자 수의 감소 추세를 감안할 때 교회 수는 대략 4만 개 안팎으로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상황에서 더욱 어려움을 겪는 교회는 교인 수가 100명이 되지 않는 작은 교회들이다. 올해 발표한 예장 통합 교단의 소형 교회 비율은 72.4%로 나타났다. 이것은 3년 전 68.9%에서 더 늘어난 수치이다. 가장 안정적인 교단에서 이 정도라면 군소 교단 상황은 더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소형 교회의 비율이 80%에 육박할 것으로 추정된다.이러한 추세에 따라 25년 후에는 상당수의 교회는 재정 자립이 어렵고 목회자 사례비를 감당하기 버거운 상황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재정 자립이 가능한 교회는 1만 개에 불과할 것으로 예상된다. 교회 양극화 현상이 심화된다면 훨씬 더 심각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최근 ‘목회데이터연구소’에서 발표한 ‘부흥하는 교회, 쇠퇴하는 교회’ 관련 통계를 보면, 부흥하는 교회에서 100명 이하 교회 비율은 52.5%였고, 쇠퇴하는 교회는 69.4%로 나타났다. 이렇게 작은 교회에서 쇠퇴 경향이 더 크다면 절대 다수인 소형 교회들은 말 그대로 고사 상태에 내몰리게 될 것이다. 코로나 사태 이후에 적지 않게 일어나고 있는 작은 교회들 사이에 합병 현상이 더욱 두드러지게 될 것이다. 소형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해서 안정적인 규모를 이룰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이 조사에서 소형 교회가 부흥하는 경우는 중대형 교회에 비해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소형 교회와 소형 교회의 목회자들은 극단적인 상황이 벌어지기 전에 현실적인 자구책을 강구해야 한다. 이 조사에서 부흥하는 교회 목회자는 교인 부흥의 요인으로 ‘예배와 설교’(45%)를 가장 높게 꼽았다. 그리고 ‘교인 간의 친밀한 교제와 공동체 의식’ 39%, ‘소그룹 활성화’ 29% 등의 순이었다. 예배와 설교가 주된 성장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고, 2~3위에 해당하는 공동체성과 소그룹 활성화가 교회의 부흥을 이끄는 핵심 내부 동력이 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교인 연령별 구성을 보면, 부흥하는 교회는 교회학교 학생부터 고령 신자까지 고르게 분포돼 있다. 반면에 쇠퇴하는 교회는 고령 신자가 46%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교회학교 학생과 청년은 매우 적었다. 특히 교회의 허리인 3040 세대에서 차이가 컸는데 부흥하는 교회의 47%가 3040 세대가 증가했다고 응답해, 쇠퇴하는 교회(3%)와 큰 격차를 보였다. 쇠퇴하는 교회에서는 3040세대가 감소한다는 응답이 65%에 이르렀다. 따라서 ‘3040 세대를 어떻게 유입시킬 것이냐’가 매우 중요한 관건이 된다. 3040 세대의 자녀들이 교회학교 학생들이 된다는 점에서 이것은 교회의 미래와도 직결된다. 실제로 부흥하는 교회에서는 코로나 이후에 다음 세대가 증가했다는 응답이 절반 가까이(44%)에 달했다. 반면에 쇠퇴하는 교회는 단 5%만이 증가하였고, 78%가 감소해 큰 대조를 이뤘다.신자들의 신앙 수준에서도 차이가 나타났는데, 부흥하는 교회가 쇠퇴하는 교회에 비해 1단계 신앙 비중은 낮고, 4단계 비중은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부흥하는 교회는 성도의 신앙 수준이 쇠퇴하는 교회보다 높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흥하는 교회와 쇠퇴하는 교회를 가르는 가장 큰 차이 중 하나는 사역 참여 문화이다. 부흥하는 교회는 교회 사역 프로그램 수(44%)와 교인들의 사역 참여도(51%) 모두 절반 안팎으로 증가했으나, 쇠퇴하는 교회는 각각 8%, 7%에 그쳐 극명한 격차를 보였다. 이는 부흥하는 교회가 활발한 사역 참여를 통해 교회의 역동성을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이러한 부흥하는 교회의 특징들은 시사하는 바가 커서 교회 사역에 참고할 부분이 많다. 그런데 부흥하는 교회들의 성장 요인은 그리 명확하지 않다. 앞에서 설명한 요인들로 인해서 양적 성장을 이룬 것인지, 아니면 양적 성장이 이루어져서 이러한 특징들이 나타났는지 인과 관계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많은 교회가 1교인 1사역을 강조하지만,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교회는 많지 않다. 그렇다면 어떻게 교회 안에 사역 참여 문화를 만들 것이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그럼에도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신자들의 신앙 수준이다. 신앙 단계가 낮다면 신앙생활이나 교회 생활의 모든 면에서 적극성이 떨어질 것이다.  따라서 성도들의 신앙 성장이 이뤄지도록 하는 데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또한 교인의 인구 구성이 역 피라미드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3040 세대를 유입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3040 세대의 특징을 고려해 이들이 관심을 갖고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 의사 결정 구조를 민주적으로 개선해 젊은 사람들이 교회의 미래를 이끌어가는 데 참여할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 한국교회에서 부흥하는 교회가 얼마나 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정확한 통계를 찾아보기 어렵지만, 2023년에 출판된 ‘한국기독교 분석리포트’에서 신자들 가운데 출석하는 교회가 성장하고 있다는 응답은 35.9%였고, 정체 또는 감소하고 있다는 교회는 64.1%였다. 감소한다는 응답보다는 성장한다는 응답이 많았지만, 성장한다는 응답은 98년 71.1%에서 절반이 줄었고, 정체한다는 응답은 22.2%에서 51.3%로 두 배 이상 늘었다. 1970-1980년대에 한국 교회는 폭발적인 성장을 이뤘으나 당시부터 나타난 여러 가지 부작용의 여파로 한국 교회는 침체기로 돌아섰고, 이제는 위기 상황을 맞고 있다. 따라서 성장 자체를 추구하기 보다는 교회가 본래의 존재 목적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건강한 신앙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고 그들이 모여서 거룩하고 능력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본연의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할 때 한국교회는 영적으로 성숙해지고 질적으로 향상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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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The letter 14 김광근 - 강한 척 말고, 주 안에서 강해지십시오 크리스천헤럴드2025.10.02
    "끝으로 녀희가주 안에서와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 에베소서 6장 10-1 1절세상은 말합니다. "강해져야 산다."그래서 우리는 더 열심히 배우고, 버티고, 싸우며 강한 척 살아갑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진짜 강함'은 내 안에 없다는 것.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의 마지막에서 이렇게 외칩니다."주 안에서 강건하여지라." 강건함은 결심이1 아니라 위치의 문제입니다. 내가 주 안에 있느냐, 아니냐. 여기서 모든 것이 갈립니다. 바울은 단순히 "싸우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서라"고 말합니다. 넘어지지 말고, 흔들리지 말고, 말씀 위에 굳게 서 있으라. 왜냐하면이싸움은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마귀의 간계를 이겨내는 영적 전쟁이기 때문입니다.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내가 너를 강하게 하리라. 너는 내 능력 안에 거하라.""강한 척하지 말고, 내 안에서 강해지라."지금 흔들리고 계신가요? 힘이 빠지고, 마음이 무너지고 있나요? 그렇다면 조용히 이 말씀 앞에 다시 서 보십시오.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진짜 강함은 주 안에서 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분 안에 있는 사람은, 끝까지 버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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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김병학 목사의 소통하는 교회 - 소통은 작은 속도의 헌신이 필요하다 크리스천헤럴드2025.09.15
    “당신은 피스메이커Peace Maker가 되세요. 나는 페이스메이커 Pace Maker가 되겠습니다.”지난 8월 25일, 한국의 이재명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한 말이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한반도 평화를 위한 중재자 역할에 기대를 걸며, 이 대통령 자신은 그 평화의 여정을 지원하고 뒷받침하겠다는 다짐을 전한 것이다. 이 말은 단순한 외교 수사가 아니다. 속도와 방향, 주도권과 협력의 의미가 담긴 발언이다.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라”(마 5:9). 곧 피스메이커가 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긴다. 페이스메이커는 예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인가.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렇게 질문을 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는 세상 속에서 피스메이커인가, 아니면 페이스메이커인가. 또는 이런 것들과 관계없이 교회는 누군가의 속도를 조율하며 함께 걷는 동반자였는가. 아니면 여전히 자기 나름의 속도로 앞서가기만을 원하는가. 마라톤 경기에서 페이스메이커는 결승선을 통과하지 않는다. 대신 다른 선수들이 끝까지 완주할 수 있도록 처음부터 일정한 속도로 끌고 가주는 역할을 한다. 중심이 되기보다, 흐름을 만들어주는 조력자다. 그런면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한 말의 의미는, 앞에서 중재하는 역할은 당신이 하되, 나는 그 길이 끝까지 가도록 돕겠다는 것이며, 협력과 조율, 그리고 겸손한 헌신이 담긴 말이라고 해석이 된다.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피스메이커의 복은 ‘순간적 화해’가 아니라 ‘지속 가능한 평화’이다. 그런데 그 평화가 유지되려면 반드시 누군가의 뒷받침이 필요하다. 피스메이커가 평화를 세운다면, 페이스메이커는 그 평화를 끝까지 지켜내는 힘이 된다.우리는 자주 묻는다. 왜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가. 그러나 더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교회는 지금 누구의 속도에 맞춰 걷고 있는가.현대 사회는 점점 더 복잡하고 다양해지며,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의 언어는 여전히 교회 중심적이다. 예배와 선교, 헌신과 봉사의 언어는 있지만,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이들의 언어, 상처받은 이들의 시간, 교회를 처음 찾는 이들의 ‘속도’는 고려되지 않는다.소통은 말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속도를 맞추는 것이 소통의 시작이다.지쳐 있는 성도를 위해 교회의 속도를 늦추는 용기, 질문이 많은 청년을 위해 설명을 생략하지 않는 인내, 낯선 이웃을 위해 형식을 깨는 유연함. 이러한 태도가 오늘날 교회가 회복해야 할 ‘페이스메이커’의 정신이다.누군가의 곁을 지키며, 그 사람이 포기하지 않도록 돕는 사람. 묻고, 기다리고, 다시 말해주는 사람.넘어진 이에게 정죄보다 손을 내미는 사람. 그들이 바로 교회의 ‘페이스메이커’다. 많이 말하지 않지만, 누군가를 살리는 이들이다. 앞서가지 않지만, 공동체가 끝까지 완주할 수 있도록 만드는 힘이다. 그리고 바로 그들이야말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피스메이커의 사역을 가능하게 하는 숨은 동력이다.교회가 진정한 소통을 원한다면, 더 많이 들어야 한다. 더 많이 기다려야 하며, 더 많이 맞춰야 한다.이 시대가 교회에 묻고 있는 것은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느냐”보다 “당신이 얼마나 함께 걷고 있느냐”는 질문일지도 모른다.교회는 세상 속에서 피스메이커로 불려야 한다. 동시에 교회 안에서는 서로에게 페이스메이커가 되어야 한다. 피스메이커가 방향을 제시한다면, 페이스메이커는 그 길을 지속하게 만든다.예수께서 말씀하신 화평케 하는 자의 복은 오늘 우리 시대에 이렇게 확장될 수 있다.“화평을 만드는 자는 복이 있다. 그리고 그 평화를 끝까지 지켜내는 자 또한 복이 있다.”이 땅의 수많은 신앙의 경주자들이 포기하지 않도록, 우리 교회가 그 옆에서 속도를 맞춰 함께 걸어갈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산상수훈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깊은 소통의 메시지일 것이다.질문으로 남긴다:당신은 지금, 누군가의 곁을 지키며 걷고 있는가. 당신의 공동체는, 어떤 속도로 이웃과 함께 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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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황순원의 10가지 감사노트 - 내 짐을 주께 맡기며 오늘을 시작합니다 크리스천헤럴드2025.09.15
    1 오늘 첫 시간에 말씀해 오시는 주님은 “네 짐을 내게 맡기렴 내가 대신 져 줄 테니 “라고 하십니다. 그동안 무겁게 느껴졌던 짐들을 마음 놓고 맡길 수 있어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며 감사를 드립니다.2 누군가에게 맡길 수 있으려면 그를 온전히 신뢰해야 합니다. 수없이 맡겼다고 하면서도 염려는 그대로 하는 것은 아직 머리로만 맡길 뿐 실제로는 맡기지 않은 것입니다. 맡길 수 없는 것은 온전한 신뢰가 없기 때문임을 알고 솔직히 고백할 수 있어서 감사를 드립니다.3 육신의 몸이 약해질 때마다 아무 희망이 없어 보이곤 합니다 그러나 내가 힘이 없어 쓰러져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쉬지 않고 일하시는 것이 눈앞에 보일 때마다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증거 할 수 있어 감사를 드립니다.4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 4:6,7) 이 말씀은 바울이 옥에 갇혀 있을 때 빌립보 성도들에게 강조한 명령입니다. 이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 마음속에다 감사의 앱을 설치하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감사가 튀어나오게 할 것을 다짐하며 감사를 드립니다.5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후로는 사람의 말이 하나님귀에 들리는 대로 재창조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가시는데 우리의 말대로 하시겠다는 엄청난 권세를 부여해 주신 약속이기에 오늘도 믿음으로 선포하며 감사를 드립니다.6 세계로 흩어져서 사역하던 선교사님들이 병으로 혹은 코로나로 갑자기 사별의 슬픔을 안고도 남편을 묻은 그 땅에서 사역하다 지친 홀로 된 사역자들을 위해 홀사모 센터를 수년동안 기도하여 왔습니다. 때가 되매 현실적으로 실행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 눈에 보이기 시작 하자 새 힘이 솟아나기 시작하면서 창조의 하나님을 향하여 선포하게 하며 감사를 드립니다.7 평생 동안 해온 기도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방법으로 이루어질 때마다 원망과 불평을 쉴 새 없이 해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보니 하나님을 향해 수없이 질문해 온 것들이 나를 성숙시켜 준 것임을 알았을 때 성숙의 재료는 예상한 것과 반대됨을 알고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8 지난날들 동안 겪었던 고통과 시련이 클수록 그 기억은 더 깊고 더 빛납니다. 불같은 시련이 지나간 자리에는 불평대신 감사가, 공허대신 만족이, 절망대신 희망이 남은 채 또 다른 깊은 세계로 인도해 주시기에 감사를 드립니다9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절실함과 책임감 그리고 사명감이 어떤 방해물 앞에서도 포기할 수 없었기에 하나님도 결코 포기할 수 없어 지금도 앞으로도 쉬지 않고 일하실 것을 확신하며 감사를 드립니다10 오늘도 섬길 수 있는 수많은 사모님들이 나의 기쁨의 활력소가 되어 줄 뿐 아니라 말랐던 에너지를 품어내 주는 마중물 같은 분들임을 알고 이 모든 것이 나의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할 수 있어서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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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조영석 목사의 생각하며 기도하며 - "종"에서 "아들"로 크리스천헤럴드2025.09.15
    대학생 때였다. 삶의 의미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을 할 때였다. 내가 사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할 때였다. 비록 교회를 다니고 있었지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이었다.하나님을 믿었지만 나와는 상관이 없는 분이었다. 그 이유가 인간의 삶의 목적에 대해 하신 말씀 때문이었다.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를 이사야서 43:21 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함이니라.” 믿음이 어릴 때 읽는 이 성경 구절은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전지전능한 신을 숭배하기 위해 만들어진 도구와 같은 기능적 피조물에 불과하다면 내가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결국 나란 존재는 저 높이 계신 전지전능한 신께서 정해놓는 운명대로 살아야 하는 별것 아닌 존재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저 수많은 창조물 중 하나일 뿐이었다.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가 사는 이유가 이미 정해졌다면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이런 생각이 끊임없이 머릿속에 맴돌았고, 그것을 나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자니 왠지 인간의 삶이 단순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었지만, 그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또 다른 이야기였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 분인가 아니면 이용하시는 분인가, 하나님과 나의 관계의 진정성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다.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늘 그러듯 키우던 작은 애완견이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꼬리를 흔들며 좋다고 달려오는 녀석에게 과자를 하나 던져주고 맛있게 먹는 모습을 서서 내려다보는데 갑자기 서글퍼졌다. 순간 그 개에서 내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과자를 던져준 사람은 하나님 같았고, 꼬리를 흔들며 좋다고 받아먹는 개는 나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런 자존감도 생각도 없이 저렇게 단순하게 사는 모습이 나였던 것이다. 갑자기 허탈해지며 이것이 신과 인간과 관계의 한계인가, 이것이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인가, 결국 인간은 신이 던져주는 복이나 은혜를 바라보며 생각 없이 살아가는 그런 존재 밖에 되지 않는 것인가 싶었다. 그리곤 개를 쳐다보며 슬픔에 젖어, “어쩜 넌 나와도 같구나” 라고 말하며 내 신세를 한탄했다.바라보고 있던 개에게 묘한 연민이 느껴지며 쓰다듬어 주려고 몸을 낮추고 손을 내미는데 문득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개를 위해 죽을 수 있을까?’ 질문과 동시에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내가 미쳤어 개를 위해 죽게!” 소리치며 기막혀 했다. 그리고 그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는 개와 개 주인의 관계가 아니었다. 목숨까지 내어 줄만큼 사랑하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이다.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시며 지키신 소중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죽음으로 증명한 사랑이다.성경을 다시 보니 이사야서 43:21절을 내가 오해한 것이었다. 43장 전체를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신 놀라운 일들로 가득하다. 우리를 향한 축복과 약속의 말씀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 예배이다. 내가 하나님을 찬송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님은 나에게 찬송 할 이유를 주셨다는 것이다. 말씀의 초점이 거기에 있다. 놀라운 사랑과 약속을 받은 자의 벅찬 감동의 반응이 바로 예배인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나의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다.“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8)“너희가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로마서 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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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The letter 13 김광근 - 침묵하시는 하나님으로 느껴질때 크리스천헤럴드2025.09.15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시편 13편 1절우리는 신앙의 길을 걷다 보면 종종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간구해도, 하늘은 닫혀 있는 듯 느껴지고, 하나님의 응답은 들리지 않습니다. 다윗도 그러한 절망을 토로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하나님께 버림받은 듯한 절망을 토로했습니다. 시편 13편은 그의 절규로 가득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을 향한 신뢰로 마무리됩니다.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의 부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분의 훈련입니다. 우리를 자라게 하시고, 말씀에 뿌리내리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간접적인 통치입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 우리는 신앙의 뿌리를 감정이나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과 '말씀'에 두게 됩니다.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지 않으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 깊이 신뢰하게 하십니다. 침묵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일하고 계십니다 그 침묵을 견딜 줄 아는 신앙이 진짜 신앙인 것입니다.하나님이 침묵하시는 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러므로 침묵의 시간에도 우리는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그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침묵은 끝이 아니라 성장의 시작이며, 하나님은 침묵 속에서도 우리를 가장 정확하게 이끌고 계십니다.오늘 하루도, 침묵하시는 하나님으로 느껴질때... 말씀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살아가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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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김병학 목사의 소통하는 교회 - 소통은 존재를 존중하는 일이다 크리스천헤럴드2025.09.03
    “당신의 아이가 더 똑똑해질 수 있다면, 선택하시겠습니까?”이 질문은 이제 공상과학의 영역이 아니다. 최근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확산되고 있는 ‘배아 유전자 선택’ 서비스는, 부모들이 시험관 아기 단계에서 여러 배아의 IQ를 예측해 가장 높은 지능을 가질 가능성이 있는 배아를 선택하게 한다는 뉴스의 내용이다. 비용은 최대 5만 달러에 이르지만, 그럼에도 수요는 꾸준히 늘고 있다고 한다.부모들은 왜 이런 선택을 하게 되는가?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실리콘밸리 부모들은 자신들이 ‘성공’한 이유를 똑똑함과 노력, 그리고 좋은 유전자 덕분이라고 여긴다. 그런 혜택을 누린 부모들은 자녀에게도 ‘같은 조건’을 주고 싶어 한다. IQ 예측 기술이 이런 혜택을 가능하게 한다면,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논리다.이런 부모들의 심리 상태는 단순하지 않다. 자녀의 미래를 위한 사랑과 열망이 있지만, 그 밑바닥에는 강박에 가까운 불안과 통제 욕구가 자리잡고 있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성공을 유지하려는 엘리트 계층의 계층 재생산 욕망도 배제할 수 없다. 유전자까지 설계하려는 시도는, 인간이 ‘하나님 흉내’를 내려는 태도이기도 하다.그러나 이 기술의 문제점은 결코 가볍지 않다. 첫째, 예측 모델을 개발한 교수의 말에 의하면, 예측 정확도가 낮다. 최대 3~4점의 IQ 차이밖에 기대할 수 없다고 한다. 오히려 높은 IQ를 가진 배아가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질 위험도 더 높다고 전문가들은 경고한다. 둘째, 더 생각해 볼 문제가 있다. 윤리 문제다. 생명을 선택하고 버리는 행위, 인간의 가치를 숫자로 판단하는 사고방식은 생명의 존엄성을 해친다. 셋째, 계층 불평등 심화다. 부자들만이 ‘우월한 유전자’를 선택하게 되면, 사회는 유전적 차별까지 불러올 수 있다. 생명의 시작 단계부터 ‘우열’을 따지는 구조는 결국, 인간 사회의 근본을 흔들게 된다.우리는 이 기술을 보고 고개를 흔들지만, 이와 비슷한 사고방식이 교회 안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은 간과하기 쉽다. 신앙이 깊은 가정, 아이가 잘 자란 집, 소위 ‘성공한 가정’은 교회에서 본보기가 되지만 때로는 암묵적인 기준이 되기도 한다. 신앙조차 ‘잘 키워야 하는 프로젝트’가 되어버린 시대, 교회는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교회는 성취 이전에 존재를 바라보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기에 유전적 조건, 학벌, 성과로 평가받을 수 없다. 또한 바울이 고백했듯, 약함 속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온전해진다(고린도후서 12:9). 부모의 사랑은 자녀의 성취를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의 여정을 함께 인내하며 걸어가는 것이다.교회는 이러한 가치관을 회복해야 한다. 교회에서 자주 열리는 자녀 교육 세미나는 ‘잘 키우는 법’보다 ‘함께 살아가는 법’을 나누는 자리여야 한다. 성도 간의 대화는 성공담보다 연약함을 나누는 진솔함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가장 연약한 이들을 품으셨듯, 교회는 ‘가장 작고 연약한 이들’을 중심에 두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신앙의 깊이는 성공의 척도가 아니라, 사랑의 밀도로 측정되어야 한다.무엇보다도 교회는 사람을 ‘결과로 판단하지 않는 언어’를 회복해야 한다. “그 가정은 자녀 교육을 잘했다”, “그 아이는 신앙이 참 바르다”는 말은 칭찬처럼 들릴 수 있지만, 동시에 다른 부모와 자녀들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부담과 비교를 불러일으킨다. 말에는 힘이 있다. 교회가 신앙의 여정을 격려하려면, 비교가 아닌 공감의 언어, 경쟁이 아닌 동행의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또한 교회는 부모들에게 ‘자녀를 통제하려는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를 신뢰하는 믿음’을 심어주어야 한다. 하나님은 각 사람을 독특하게 만드셨으며, 그 다양성 속에서 공동체는 더욱 풍성해진다. 자녀가 부모의 기대를 채우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 신앙 교육의 본질이다. 교회는 그 과정을 단순한 지도나 교육이 아닌, 공동체 전체의 동반 성장의 장으로 바꾸어야 한다.이 시대는 무엇이든 선택하고 조정할 수 있다고 믿는 시대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이 주신 ‘선택 불가능한 선물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사랑할 것인가를 가르쳐야 한다. 배아를 고르듯 교인을 고르고, 신앙 유형을 고르고, 사역 스타일을 고르는 시대 속에서 교회는 다름과 한계를 끌어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세상과 다른 교회, 은혜가 말이 아니라 삶이 되는 교회의 모습이다.믿음의 공동체가 다시 한 번 ‘생명은 선물이다’라는 진리를 소통할 수 있다면, 교회는 세상의 통제 열망을 넘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증언하는 공간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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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후회와 회개 크리스천헤럴드2025.09.03
    후회와 회개는 다르다. 앞을 보면 같지만, 뒤를 보면 확연한 차이가 있다. 앞을 보면 자기성찰로 시작 되어 같아 보이지만 뒤로 가면 결과가 다르다.회개는 회복으로 이어지는 반면, 후회는 더 깊은 좌절에 이르게 한다. 회개는 분명한 대상이 있어 그에게 저지른 행동을 뉘우치고, 용서를 받음으로써 그 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그러나 후회는 스스로가 대상이어서 자기가 자기자신을 용서하고 자유로울 수 없으니 오히려 더 큰 무력감과 깊은 상처가 남는다. 그래서 회개로 나아가지 않는 자각심은 자기연민으로 남아 평생을 그 후회의 순간을 떠나지 못하게 하며, 그 주위를 맴돌게 한다. 엉뚱한 참회는 바로 후회이다.후회가 없는 인생은 없을 것이다. 나 또한 내 삶에 많은 후회가 있다. 기억에서조차 지웠으면 하는 부끄러운 잘못과 실수들이 있다. 돌이킬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에 잠시 머물게 될 때도 있다. 머리 속 깊이 박혀있는 후회의 순간들은 나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발목을 잡을 때도 있다.그러나 그 후회마저도 복음의 눈을 통해서 바라보고 해석해야 한다. 후회가 많은 인생이기에 죄인을 찾아오신 주님을 만나게 되었고,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이 있기에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의 사랑을 찾게 되었다. 오늘도 허다한 후회를 덮는 은혜를 날마다 경험하며 살고 있다. 그러니 지금 내가 나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여전히 부족하기 짝이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나는 바로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의 결과물인 것이다.그러니 한 순간도 후회 속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설령 돌이킬 수 있다 해도 돌이켜서는 안 된다. 내 삶에 수없이 발견되는 하나님의 손길을 어찌 지울 수 있겠는가. 나의 악까지도 선으로 바꾸신 하나님의 열심이 내 삶에 가득한데 그것을 어떻게 외면하고 이전으로 돌아가려 하겠는가. 나 삶의 후회를 지우려 할 때 그가 일하신 흔적도 함께 지워야 한다.그러니 나의 나 된 것을 감사하며 오늘도 그 은혜로 받은 새 삶을 기뻐하며 살아야 한다. 내 삶에 끊임없는 회개는 있을지 언정 후회는 없어야 한다. 어제의 후회와 무력감에 빠지지 않고 오늘 내가 받은 은혜가 헛되지 않게 다시 시작하는 모습이 진정한 회개이며, 은혜에 부응하는 삶이다. 오늘도, 내일도 계속해서 실수와 부끄러움이 반복 되겠지만, 또 다시 뉘우치고, 털고 일어서야 한다. 밭을 가는 자가 뒤를 돌아보며 앞의 땅을 제대로 갈 수 없듯이, 어제의 후회에서 벗어나야 앞으로 전진할 수 있다. 나는 내게 주어진 길을 걸으며 새로 허락된 오늘을 소중히 가꾸며 살아야 한다. 후회에 대해서는 날마다 죽고, 회개로 다시 일어나 새날을 살아야 한다."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 15:10)"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눅 9:62)"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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