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세훈 칼럼 - 웃사의 죽음, 그만의 책임인가? (삼하 6:6~7) > 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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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장세훈 칼럼 - 웃사의 죽음, 그만의 책임인가? (삼하 6:6~7)

작성일 : 2024-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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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사의 죽음에서 하나님보다 앞서갔던 다윗의 성급함을 볼수 있어

구약에는 종종 갑작스런 죽음을 당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중 매우 충격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는 웃사의 죽음이다. 웃사가 수레에 법궤를 싣고 가던 도중 소가 뛰기 시작했으며, 수레에 실려 있던 법궤가 흔들렸다. 

이런 상황에서 웃사는 흔들리는 법궤를 붙들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급사하고 말았다. 그런데 단순히 웃사가 흔들리는 법궤를 만졌다는 이유만으로 죽음을 맞이했다고 이해한다면 이런 접근은 뭔가 석연찮은 느낌을 던져준다. 

웃사의 죽음은 과연 웃사 그만의 잘못 때문일까? 다른 누군가의 책임은 없는 것일까? 더 근본적으로 사무엘하 6장 1~8절에 등장하는 웃사의 죽음을 통해서 저자가 의도하고 강조하려는 논점은 과연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찾는 작업은 본문의 전후 문맥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돼야 한다.  

해당본문에서의 문맥은 다윗의 법궤 이동에 초점을 두고 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왜 다윗은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이동하려고 하는가?”

원래 법궤는 블레셋 족속에게 빼앗겼지만 법궤 앞에서 부러진 다곤 신상 사건(삼상 5:1~4)으로 인해 결국 기럇여아림으로 다시 옮겨진다(삼상 7:1~2). 

기럇여아림 사람들은 아비나답의 아들 엘르아살을 구별시켜 다윗의 때까지 줄곧 법궤를 지키게 했다. 다윗이 왕위에 올라 이방민족들을 물리치고 예루살렘을 정복했을 때, 그는 명실상부한 이스라엘의 절대 권력의 자리에 올라서게 됐다. 

그러나 다윗은 뭔가 한 가지 부족한 것을 느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법궤의 부재였다. 다윗은 예루살렘을 종교적 도시로 확고히 세우기 위해 법궤의 귀환을 절감했다. 그래서 그는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기 위한 작업을 감행했다. 

이 법궤의 이동은 다윗의 통치의 클라이맥스라고 볼 수 있었다. 법궤의 귀환으로 다윗의 권력은 절대적인 위치를 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웃사의 죽음으로 이런 다윗의 계획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웃사의 죽음은 웃사 그만의 탓은 아니다. 본문의 문맥은 웃사보다도 다윗의 문제를 더 부각시킨다. 

다윗이 블레셋을 쉽게 무찌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께 아뢰었기 때문이다. 다윗이 어떻게 싸워야 할지 하나님께 여쭸을 때,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싸움의 방식을 알려주셨고, 다윗은 그 방식대로 전투에 임해서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대승을 거둔 다윗은 곧바로 법궤의 이동을 추진한다. 놀랍게도 전투를 위한 방식을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아뢰었던 다윗은 법궤의 이동을 위해서는 전혀 하나님께 구하지 않는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다윗이 법궤를 이동할 때 지켜야 할 하나님의 지침을 전혀 준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법궤는 반드시 레위인들이 어깨에 메어 옮겨야 했다. 그러나 법궤 이동을 책임 맡은 다윗은 레위인의 어깨에 메게 하지 않고 법궤를 수레에 실어 이동시켰다. 

만약 다윗이 하나님의 규례에 따라 법궤를 레위인의 어깨에 메고 옮겼다면 웃사의 죽음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크게 두 가지 잘못을 범했다. 

첫째, 법궤 이동과 같은 중대한 문제를 시행하기에 앞서 전혀 하나님께 그 뜻을 묻지 않았다. 

둘째, 법궤 이동에 반드시 필요한 하나님의 지침을 완전히 무시했다. 나중에 수레가 아닌 어깨에 메고 법궤를 이동시킨 다윗의 모습은 법궤를 메지 않고 이동시켜 문제를 초래했던 이전의 모습과 대조를 이룬다. 

이것은 다윗이 다시는 이전의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그의 의지를 엿보게 한다. 그러므로 웃사의 죽음을 소개하는 본문의 전후문맥은 웃사의 죽음이 웃사 한 사람의 잘못 뿐만 아니라 다윗의 실수와도 결부돼 있음을 깨닫게 한다.

사무엘하 6장 1~8의 전후 문맥을 고려하지 않고 사무엘하 6장 6~7절만을 피상적으로 읽으면 웃사의 급사는 웃사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웃사가 흔들리는 법궤를 만지는 행위는 독자들의 눈에는 부주의한 모습처럼 비춰진다. 물론 웃사가 법궤를 만지는 행위는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본문의 전후 문맥적 상황은 웃사의 죽음이 또 다른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음을 깨닫게 해 준다. 본문에 묘사된 법궤의 이동과 웃사의 죽음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보다 앞서갔던 다윗의 성급함을 엿보여준다. 

또한 겸손히 하나님께 아뢰지 않는 다윗의 상태는 이전과는 다른 그의 교만한 모습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지도 모른다. 

결론적으로 웃사의 죽음을 다루는 본문을 읽는 독자들은 본문의 전후문맥을 통해 웃사의 죽음은 웃사 한 사람의 잘못 외에 법궤의 이동을 성급하게 추진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묻지도 않고 법궤 이동을 위한 계명도 무시했던 다윗의 문제도 함께 인식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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