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세기언 제9회 신앙도서독후감 공모전 수상작 (1)
크리스천헤럴드2023.12.15
내가 팀 켈러 목사님의 책을 처음 접한 것은 한국의 친구 목사님을 통해서였다. 친구 목사님은 서울의 한 교회를 섬기고 있었는데, 도시 목회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던 차에 팀 켈러 목사님의 목회 철학과 사역을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책을 잃고 연구하던 중에 내가 한국을 방문 했을 때 나에게도 팀 켈러 목사님을 소개하며 그 분의 두꺼운 책 한 권을 선물해 주었다. 팀 켈러 목사님의 목회에 대한 소개와 신학적 배경과 사역 원리를 설명하는 책이었는데, 이 후로 팀 켈러 목사님의 설교와 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하나님에게 진실하면서 영혼을 위한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목회 방법이 매우 창의적이지만 진리 안에 견고히 서 있는 모습을 보면서 배울 것이 많은 목회자요, 철학자라고 생각했다. 이 책 『탕부의 하나님』 역시 나에게는 새로운 통찰과 반성을 일으키는 거센 파도 같은 책이었다. 먼저 나는 팀 켈러 목사님의 책 『탕부의 하나님』에서 두 아들에게 배분한 지면의 양을 주목했다. 거의 정확히 3분의 2를 큰 아들의 상태를 다루는데 활용한 것을 본다. 그것은 팀 켈러 목사님이 주 독자층으로 어떤 부류의 사람들을 고려하여 글을 쓰려고 하였는가를 알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 당시 특정 계층의 사람들, 말하자면 그 당시 종교인이라고 할 수 있는 유대 사회의 큰 아들들이 예수님에게도 역시 구원해야 할 잃어 버린 자들로 여겨 지셨다는 것을 더욱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중요한 포인트는 변하지 않는다. 두 아들을 구원하는 것은 아버지의 일방적인 사랑뿐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이 책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작은 아들은 그 사랑에 감격하며 살아나지만 큰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고 확신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저자가 지적하는 바 형들의 이런 모습의 이유는 "눈 멀어 실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영적으로 더 절망적이"라는 데 있다. 아버지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형들은 그저 의무감으로 아버지와 함께 한다. 아버지의 일을 하고 아버지의 지시를 따른다. 그 순종의 배경이 되는 것은 '두려움'이라고 지적한다. 더 정확히는 "두려움에 기초한 맹종"이라 말한다. 즉 형들의 순종은 복음에 기초한 순종이 아니라 자기의 감정과 위치를 사수하기 위한 복종에 가깝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복종은 자기 의로 쌓여져 결국 이 행위적 복종의 대가로 아버지의 것을 요구하는 자리에 이르게 되고 어느덧 아버지와 대등한 위치에서 아버지와 대결하는 구도를 만들게 된다.이러한 형들에게서 나타나는 병적 증상들을 읽으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그리고 조금은 고통스럽게, 아니 사실은 매우 아픈 마음으로 나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여간해서는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다.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나를 자극하고 화나게 만드는 것들이 많은 세상에서 늘 감정을 잘 조절하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이것이 통제되지 못할 때가 있고 느닷없이 그 벽을 허물고 나타날 때가 있어 가끔은 나 자신도 놀라곤 하는데, 팀 켈러 목사님의 담담하지만 정확한 분석을 읽으면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지 못하는 형들은 자기 결정에 기초한 순종을 통해 아버지의 사랑 밖에서 의의 성을 쌓으며 그것으로 존재 가치를 삼기 때문에 이를 건드리거나 무너뜨리면 불을 뿜어 낸다는 것이다. 세상을 "불행과 불화"에 빠트린다고 팀 켈러 목사님은 지적한다. 유독 자기 변호에 민감한 사람들이 있다. 바로 나 같은 사람이다. 나는 하나님을 따르며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듣기 싫어 하는 것이 나를 평가하고 나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지적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잘 견디지 못한다. 이에 대해 마음을 굳게 다 잡아도 이런 상황이 오면 내 얼굴이 이에 대한 불편을 감추지 못한다. 그리고 나는 왜 그 지적이 틀렸는가를 설명하는데 목소리를 높인다. 자기 변호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탕자의 형들이라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다. 크고 엄청난 진동이 나를 때렸다. "자기 변호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며 너무도 부끄러웠다. 마치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나의 벌거벗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기분이었다. 이 글을 혼자 읽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될 정도였으니 말이다.형들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차라리 동생처럼 한대 맞고 '아, 아프다.' 하고 끝나는 것이 나을 성 싶은데 형들은 더 참혹한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저자는 그것을 드러내고, 나는 또 이것 역시 피해 갈 수 없는 해당사항이기에 온 몸을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는 형들처럼 자기 의에 기반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내면적 증상으로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확신 없음"을 말한다. 이에 대한 부수적인 증상으로는 기도생활이 건조하다는 것이 대표적이고, 아울러 기쁨으로 올려 드리는 찬송이 없다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그렇다. 나는 잘 알 수 있다. 내 신앙 생활이 엉망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대체적으로는 저자가 지적한 그런 경향이 나타남을 나는 많이 경험했다. 하나님의 일을 누구보다 성실히 감당했다고 자부하며 보낸 지난날들에 대해서 부끄러움이 없지만 그 가운데 기쁨의 찬송이 있었고 눈물 어린 감격의 기도 생활이 있었는가 묻는다면 나는 사실 할말이 없다. 그러나 그 세월을 누군가 폄하한다면 나는 또 열을 올리며 나를 변호할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서 였노라고, 가족들을 위해서 희생한 것이었노라고! 그래서 나는 확실히 형들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독후감을 쓰면서 지나치게 자조적인 투로 써 나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나는 그 핑계를 저자의 단어 선택에 돌리고 싶다. 저자는 이 책을 쓰면서 기가막힌 단어를 사용하는데 그것이 신의 한 수라 생각된다. 바로 탕자의 "형"이 아니라 "형들"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이다. "탕자와 그 형"이라고 하면 그 스토리는 그저 단순한 교훈이요 성경 속 이야기로 끝이 나 버린다. 그런데 "탕자와 그의 형들"이라고 하면 스스로 그 비유 속 형 같은 많은 이들이 자기를 떠 올리게 된다. 그 "형들"이라는 단어는 당시의 바라새인, 서기관, 제사장들 그리고 이 시대의 나를 그 자리에 포함시키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팀 켈러 목사님은 많은 지면을 "형들"을 다루는데 할애 하면서 동생에 비해서 훨씬 아버지에게서 멀어져 있는 대상으로, 그래서 아버지에게로 돌아오기가 더 어려운 사람들로 묘사한다. 하지만 이들 역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고 아버지 곁에 설수 있도록 만드는 것에 있어서는 동생과 매 한가지의 길만 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한 없는 사랑"이다. 『탕부 하나님』이라는 제목이 신성 모독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책을 읽고 나니 확연히 이해가 갔다. 작은 아들의 아버지에 대한 있을 수 없는 요구 조건과 그 태도를 보면서 탕자라고 말 할 수 있다면, 큰 아들이 마음으로 아버지를 이미 멀리 떠나 아버지의 권위를 묵살하고 오히려 아버지를 잘 못된 길에 서 있는 사람인 듯 정죄하는 모습을 또 다른 탕자라고 말할 수 있다면, 도저히 받아 들일 수 없는 두 아들을 그저 사랑으로 기다리고 보듬으려는, 어쩌면 문제의식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는 무조건 적인 수용적 태도의 아버지도 분명 탕부라고 불릴 수 있을 듯 하다. 저자는 말한다. "아들의 자격과 노력이 아니라 아버지의 일방적 마음으로 아들의 가난과 누더기를 덮는다."라고. 나는 이 책을 읽으며 형들의 무리 가운데 내가 서 있고, 스스로를 비유속 탕자의 형과 다를 바가 없음을 자책하는 마음으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거기서 멈춘다면 그것은 또 다른 탕자로 머무는 것일 뿐이다. 수 십 년 목회를 하며, 그리고 인생의 중반기를 지나가면서 느끼는 것은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에 기대는 것 외에 소망이 없다는 것이다. 목회도 주님 때문에 여기까지 해 왔고, 가정도 주님 때문에 잘 지켜 졌으며, 내 인생도 주님으로 인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면 자기 의를 변호하기에 열 올릴 일은 없을 것이다. 저자는 형이 형의 상태를 몰랐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라고 했으니 그 위험 지대는 벗어 나도록 하자. 나에게는 다섯 살 난 딸이 하나 있다. 마냥 해맑고 사랑스럽게 웃기만 하던 아기가 어느덧 수백 일을 들숨 날숨 부단히도 호흡하더니 이내 세상 공기를 제법 마신 인간의 구색을 맞추어 가며 끝없는 질문과 솔직한 감정들을 쏟아내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 아이를 낳기 전까지 7년을 기다리며, 우리에게 자녀를 허락하신다면 가장 귀한 보물인 신앙의 유산을 꼭 남겨줄 수 있기를 기도했었다. 그러나 딸이 자라가며 그 아이가 오롯이 자신의 경험과 사고의 소용돌이에서 헤엄치는 동안, 나 역시 일상에서 민낯으로 드러나는 나의 투박한 물장구 속에서 복음의 반짝이는 빛을 전달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였다. 나는 때로 무지했고, 종종 무관심했으며, 자주 무력감을 느꼈다. 모든 부모가 두려워하는 사춘기가 다가올수록 나의 마음은 조급해져만 갔다. 여전히 내게도 하나님에 대한 궁금증 내지는 일종의 반발심과 원망감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마음 깊은 곳에 불편하게 자리잡고 있는데 이 아이에게 어떠한 진심과 설득력으로 신앙을 전달할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다만, 이러한 나의 현실을 직시하고 지금부터라도 찬찬히 내가 믿고 붙잡는 복음을 정리해보자는 용기로 의지를 다졌을 때 접하게 된 책이『믿음을 묻는 딸에게, 아빠가』였다. 처음에는 저자가 목회자가 아닌 평신도이고, 아이들과 신앙에 대해 기꺼이 대화하는 분이라기에 조금은 낮은 눈높이에서 쉽고 가볍게 읽을 만한 기독교판 즉문즉설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책을 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묵직한 추천인들과 그들의 추천사를 거쳐 목록을 훑는 순간, 이것이 어린 딸을 무릎에 앉혀놓고 재밌고 교훈적인 성경 구연동화를 들려주는 수준을 한참 넘어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히려 내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한껏 머리가 큰 사춘기 딸이 들이밀 서슬퍼런 이성과 감성의 질문 끝에 따뜻한 지혜와 균형잡힌 감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신앙의 방패들이 차곡차곡 전시되어 있는 것만 같았다.저자는 크리스천이자 의사로서 지성을 쌓아가는 과정, 수술대에서 의료 행위를 시행하는 과정, 그리고 더 나아가 교회 안에서의 신앙 전통과 선교 현장에서의 신앙 경험을 토대로 자신이 고민하고 기도하고 연구했던 하나님에 대한 사유를 풍성하게 제공한다. 딸의 예리하면서도 다채로운 질문의 스펙트럼을 포용하고 그 안팎으로 공감과 가르침을 동시에 줄 수 있다는 것은 그가 먼저 믿은 아버지로서 얼마나 책임감 있는 신앙의 걸음을 걸었는지를 보여준다. 그 스스로가 책에서 강조한 “생각없이, 관성대로 굴러가는 태만의 죄”에 빠지지 않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하나님은 우리 자녀의 아버지가 되어주시지만, 그렇기에 우리가 아비된 자로 마땅히 공부하고 가르칠 것들이 자동적으로 면제되는 것이 아니다. 같은 땅에 함께 서 있는 자로, 한 발 먼저 디뎌본 자로 우리는 이들에게 역사와 전통의 흐름을 일깨워주고 함께 발맞춰 걷는 법을 배우며 옳은 곳으로 손잡고 나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함을 책 읽는 내내 자각하게 되었다.저자는 세상이 지적하는 기독교 역사의 폭력성과 호전성에 눈가리고 아웅하기보다 해석의 역량이 낳은 오해와 실천적 방임이 낳은 실패를 직시하고 기독교의 소망과 성찰을 동시에 설파했다. 또한 오늘날에 도무지 의견 차이가 좁혀지지 않고 되려 혐오와 배제의 통로가 되는 동성애 논쟁과 전쟁 및 난민문제 등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사안에 대해서도 뭉뚱그려 말하지 않고 분별력 있는 어조로 특정한 입장과 태도를 제시한다. 단, 이 모든 것들을 자신의 연역적 사고나 편협한 경험에 의해 도달된 결론이 아니라 깊은 관심에서 우러나온 방대하고 절실한 연구의 끝에 맺혀진 열매들을 정성껏 바구니에 담아 전달하는 식이라,설득이 강요된다는 느낌보다는 친절하게 안내받는다는 인상을 받으며 읽어나갈 수 있었다. 같은 문제를 가지고 평생을 씨름했던 학자들의 땀방울들을 모아 그 중에서도 가장 권위있고 무결한 내용들을 체에 걸러 고운 가루를 내어 딸에게 먹여주고자 했던 아비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졌다. 특히, 가장 까다롭고 난해한 전쟁과 고통의 문제에 있어서 평화와 이상을 꿈꾸고 이루어 가는 궁극적 소망을 놓치지는 않되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머뭇거리거나 현실의 냉혹함과 부조리의 거대함에 짓눌려 한 걸음도 떼지 못하는 비겁한 사람은 되지 말자는 결의는 딸이나 독자들 뿐만 아니라 저자 스스로에게도 계속해서 되뇌이는 다짐처럼 느껴졌다.그의 글을 읽으면 읽을 수록 나는 저자가 균형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균형감은 고삐 풀린 열정으로 하나님에 앞서, 혹은 하나님과 다른 방향으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려는 이들이 이제껏 많은 크리스천들에게 심겨놓은 기독교적 불편함과 불쾌감을 기독교의 본질로부터 완벽하게 떼어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성급하게”, “함부로” 침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따라 낮아지고 섬기며 모범을 보이는 삶의 방식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내가 옳다고 여기는 근본적인 진리의 불변함을 우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주도되어 “옛 자아가 철저히 죽는 ‘정화’의 과정”을 거쳐 “새 자아로의 ‘변용’의 과정”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신앙의 열매로 나타나야 함도 일깨워주었다.사실 인간의 역사를 살펴보면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역사의 중심에는 분쟁과 투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슬프게도 많은 피흘림에는 종교 갈등과 성서의 오남용이 맞물려 있었다. 이는 곧 현대 사회에서 종교는 사회악이며 인간을 고통으로부터 구원해줄 존재가 아니라 인간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요인이라는 인식을 팽배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하지만 우리는 얼마나 많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자신의 목숨보다 다른 영혼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이 땅에서 죽고 썩혀져 끝없이 복음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왔는지를 생생하게 보고 들었다. 결국, 하나님을 오해하게 만드는 것은 극단주의와 탐욕으로 인한 신앙의 왜곡, 그리고 이를 분별하지 못하고 안일하게 순종하는 무지함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고, 이것이 곧 책 전반에 걸친 저자의 접근이다. 안타깝게도 굽은 길로 접어들어 오염되어 흐르는 복음은 생명력을 잃고 오늘날의 교회와 다음 세대의 신앙을 위협하고 있다. 저자는 자신의 생명보다 귀한 딸이, 그리고 그리스도가 핏값으로 살려낸 딸이 가짜 복음에서 시선을 거두고 복음의 진수를 누리며 자기 자신과 그와 연결된 모든 이들이 복음 안에서 해방되고 복음 안에서 재창조되고 복음 안에서 살아나고 살려내는 것을 경험하기를 기대하고 촉구하는 마음으로 모든 문장을 써내려간 듯 보인다.워낙 방대한 양의 글을 읽고 오랜 기간에 걸쳐 연구한 까닭에 딸의 단순한 질문에도 많은 신학자와 신학 용어들이 등장하게 되지만, 그마저도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기 위함이나 고차원적인 답변을 추구해서가 아니라 그만큼 복음이 파도파도 끝없고 결코 정복될 수 없는 무한대로 풍부한 영적 자원이기에 다양한 해석학적 위치와 사유의 범위가 연결되고 맞물리며 발견되는 은혜와 진리가 넘쳐나기 때문에 그것을 농축하여 표현하려면 어쩔 수 없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내가 부모의 권위를 가지고, 신앙 선배로서 충고의 말을 건넨다 해도 우리의 불완전함과 무의식적 치우침은 자녀에게 어떤 식으로든 신앙의 반발심과 걸림돌을 만들게 할 수 있다. 하지만 나 역시 겸허하게 배우는 입장에서 먼저 깨우쳐나간 과정을 공유한다면 우리 자녀들이 각기 걸어가는 고유한 길에서 빚어가는 독특한 신앙의 신비에 작은 보탬이라도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입지에서 출발하여 깨우침의 과정을 진솔하게 담은 책이나 사람을 많이 접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쉽사리 현실의 교회와 신앙의 실망스런 면모에 낙오하고 복음 자체를 폄하하게 될 위험에 처할 수 있다. 필립 얀시와 그레고리 보이드처럼 기독교에 대한 합리적(?)인 회의감에 사로잡힌 이들을 위해 따뜻한 길잡이를 자처하는 작가가 우리 나라에도 있다는 것이 참 다행스럽고 감사하다.이 책을 읽는 내내 맹목적인 신자가 아니라 값비싼 은혜의 대가를 치르는 참된 제자의 길을 소중한 딸이 걸어나가길 권고하는 저자의 진심이 문자를 넘어 가슴 깊이 전달되었다. 십자가가 반드시 가로와 세로의 접점을 가로지르며 존재하듯, 십자가의 도를 따르는 우리네 인생도 반드시 두 가지 길을 성실하게 걸어나가야 할 터이다.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이 각각 온전하게 한 인격에 담겨있듯이 우리도 전인적으로 하나님을 모시고 세상을 품고 살아가야할 운명과 능력을 부여받았다. 치우침없이 그 십자가의 길을 감당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이 이 땅에 흘리신 보혈 한 방울 한 방울을 헛되이 낭비하지 않고 우리 목숨보다도 귀한 우리 자녀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머리로 이해하고 눈으로 확인하고 가슴으로 새긴 그 신앙은 역사와 문화의 옷을 덧입으면 덧입을수록 더욱 강력한 힘과 빛으로 세대의 세대를 이어 뻗어나갈 것이다. 그 희망으로 나의 다섯 살 난 딸의 사춘기와 청년의 때와 장성하고 노쇠한 시절을 거쳐 영원에 이르는 모든 순간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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