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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김병학 목사의 소통하는 교회 - 소통은 권한보다 신뢰가 먼저다 크리스천헤럴드2026.08.23
    ​며칠 전 대한민국 국회는 검찰의 보완수사권을 폐지하는 내용의 검찰개혁안을 통과시켰다. 오랫동안 유지돼 온 검찰의 수사 구조를 뿌리부터 바꾸는 결정이다. 정치권과 법조계, 시민사회의 반응은 엇갈린다. 권한 남용을 막기 위해 더는 미룰 수 없는 개혁이라는 평가가 있는 반면, 수사 공백이 생기고 피해자 보호가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만만치 않다.이번 개혁이 성공했는지는 결국 제도가 현장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본 뒤 판단해야 한다. 다만 법안에 찬성하든 반대하든 분명히 짚어야 할 대목이 있다. 이처럼 큰 폭의 제도 개편 요구가 나온 배경에는 오랜 세월 쌓인 국민의 불신이 있다는 점이다.한국 검찰은 수사권과 기소권을 함께 행사하며 막강한 권한을 지닌 기관으로 자리해 왔다. 권력형 비리를 파헤치고 사회 정의를 세우는 데 기여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정치권력과의 유착, 표적수사, 과잉수사, 선택적 기소에 대한 비판 역시 끊이지 않았다. 검찰의 권한이 과연 공정하게 쓰이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쌓이면서, 개인의 양심과 선의에 기대기보다 제도적 견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요구가 커졌다.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느 기관이 더 많은 권한을 갖느냐가 아니다. 그 권한을 누가, 얼마나 책임 있게 행사하느냐가 핵심이다. 권한은 법과 제도가 부여하지만, 그 권한을 정당하게 만드는 것은 국민의 신뢰다. 신뢰는 직책이나 명령만으로 얻을 수 없다. 상대의 말을 듣고, 결정을 설명하며, 과정과 결과에 책임지는 시간이 쌓여야 비로소 생긴다.개혁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지 않는다. 작은 문제 제기가 계속 묵살되고, 비판이 불편한 목소리로 치부되며, 질문하는 사람을 공동체를 흔드는 존재로 몰아갈 때 불신은 자라난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충분히 설명하지 않는 일이 반복되면 사람들은 더 이상 조직 내부의 자정 능력을 믿지 않는다. 그렇게 쌓인 불신 끝에 개혁은 대화와 합의가 아니라 외부의 압력과 제도적 강제의 모습으로 찾아온다.교회도 이 질문에서 비켜설 수 없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공동체이며, 목회자와 직분자가 가진 권한은 단순한 행정 권력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겨진 청지기의 책임이다. 그렇다고 교회의 권위가 비판과 검증을 넘어선 절대적 권한이 될 수는 없다. 성경은 권위를 부정하지 않지만, 그 권위가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는 분명히 말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권위를 없애신 것이 아니라, 권위의 방향을 지배에서 섬김으로 돌려놓으신 것이다.문제는 권한 그 자체보다 권한을 가진 사람이 공동체와의 소통을 잃을 때 생긴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많은 갈등도 교리의 차이보다 의사결정 과정에 대한 불신에서 시작된다. 성도들이 묻는 것은 결정의 내용만이 아니다. 왜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는지, 왜 자신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는지, 왜 질문이 불순종으로 받아들여지는지를 묻는다. 이런 질문에 답하지 않는 공동체에서는 아무리 좋은 결정이라도 공감을 얻기 어렵다.소통은 말을 많이 하는 기술이 아니다. 모든 사람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도 아니다. 결정권을 가진 사람이 먼저 듣고, 자신의 판단을 설명하며, 그 결과를 책임지는 태도다. 때로는 잘못을 인정하고 결정을 바꾸는 용기까지 포함한다. 지도자가 질문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공동체는 건강해진다. 비판을 적대감으로 여기지 않을 때 신뢰도 깊어진다.세상은 법과 제도로 권력을 통제한다. 교회는 그보다 앞서 복음으로 자신을 절제해야 한다.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말만으로 교회의 책임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교회는 세상보다 낮은 기준이 아니라 더 높은 윤리와 책임을 요구받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영적 권위는 직분의 이름에서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진실한 삶, 투명한 의사결정, 약한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태도에서 나온다.이번 검찰개혁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시간이 판단할 것이다. 그러나 이 논쟁이 교회에 던지는 질문만큼은 분명하다. 우리는 직분 때문에 존중받는가, 아니면 신뢰할 만한 삶과 소통으로 존중받는가. 권한을 지키는 데 더 민감한가, 공동체의 아픔을 듣는 데 더 민감한가.검찰이 국민의 깊은 신뢰를 받아왔다면 이처럼 거대한 개혁 요구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교회도 다르지 않다. 작은 목소리를 오랫동안 외면하면 언젠가 더 큰 갈등과 마주하게 된다. 반대로 성도와 세상의 목소리를 겸손히 듣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정직하게 돌아본다면, 개혁은 외부에서 강요되는 사건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자발적으로 시작되는 성숙의 과정이 될 수 있다.권한은 법과 제도가 줄 수 있다. 그러나 신뢰는 소통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신뢰를 잃은 권위는 오래 버티지 못한다. 이것이 오늘의 검찰개혁 논쟁이 한국 교회에 던지는 가장 무거운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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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조영석 목사의 생각하며 기도하며 - 새 사 람 크리스천헤럴드2026.08.23
    딸이 친구 생일 파티에 초대를 받았다. 생일 맞은 친구가 가까운 친구 몇 명만 초대해서 함께 디즈니랜드에서 특별한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비싼 입장료까지 그 부모가 내주면서 친한 친구들과 다녀오게 되었으니 딸은 전날 밤 부터 들떠 있었다. 생일 맞은 딸의 아빠도 동행해서 아이들이 하루 종일 안전하게 맘껏 즐기고 올 수 있게 되어 자녀를 맡긴 부모들도 안심하고 보낼 수 있었다.밤이 되어 집에 곧 도착한다는 문자를 받았다. 딸이 얼마나 즐겁게 보냈는지 이야기를 듣기 위해 아내와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반갑게 딸을 맞이했는데 얼굴 표정이 안 좋았다. 그리고 엄마를 보자마자 갑자기 달려가 끌어안고 펑펑 울었다. 지상에서 가장 행복한 곳이라는 디즈니랜드에 다녀온 아이가 갑자기 울어대니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걱정되어 딸을 진정시키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았다.뜻밖에도 울었던 이유는 같이 갔던 한 친구의 딱한 사정 때문이었다. 즐거운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같이 갔던 한 친구가 느닷없이 생일 맞은 친구에게 "너는 좋은 아빠가 있어서 좋겠다" 며 울먹였다고 한다. 자기 아빠는 매일 밤 술에 취해 있고, 엄마와 소리 지르며 싸우고, 자기에게 관심도 없고 같이 시간도 보내지 않는데 친구 아빠를 보니 부럽다며 울었다는 것이다. 평소에 아빠에 대한 실망과 원망이 쌓여 있던 중, 생일 맞은 친구가 아빠의 관심과 사랑을 듬뿍 받는 모습을 지켜보다 서러운 마음에 친구들에게 그 동안 감췄던 속마음을 털어놓은 것이었다.전혀 몰랐던 친구의 뜻밖의 사정을 알게 된 딸이 친구 앞에서는 내색하지 못하고 있다가 집에 와서 엄마를 보자 친구가 가엽다며, 몰랐던 게 너무 미안하다며 슬퍼했다. 아내와 나도 사연을 듣고 나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 아이가 불쌍해서도 그랬지만 나에겐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 아이의 아빠 모습은 지금 나의 모습 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변하지 않았다면 안타까운 친구의 가정상황이 지금 우리 가족의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내 딸도 친구의 가정을 부러워하며 상처를 갖고 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나 또한 평탄한 가정 환경에서 자라지 못했고, 그 후유증으로 방황했던 시절이 있었다. 상처와 애정결핍, 세상에 대한 적대감으로 만나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대하지 못했고, 나도 모르게 주위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다. 나의 말과 행동이 주위 사람들을 얼마나 힘들게 했을 지 나중에야 가늠할 수 있었다. 모순과 열등감으로 내 안은 혼란스러웠고, 일그러진 자화상은 나 스스로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다.내 삶을 바꿔 놓은 그 한 사건이 있지 않았다면 지금도 가족과 주위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며 살고 있었을 것이다. 그 아이의 아빠처럼 우리 아이들에게도 상처를 주며 삶을 멍들게 했을 것이다. 지금도 내 안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세상의 위로를 찾아 다니며 허송 세월을 보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젯밤 취했던 흔적을 바라보며 후회로 오늘을 시작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그러나 나는 주를 만나고 변했다. 완전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나서 참 사랑이 무엇인지 알았고, 누군가가 나를 죽기까지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나서 나는 달라졌다. 상처투성이로 아무 쓸모도 없는, 버림받은 사람인 줄 알았던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란 것을 믿게 된 날부터 나는 변했다. 내 삶을 통해 이루실 전능하신 분의 계획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 삶에 대한 태도는 분명 달라졌다. 나의 자화상도, 나의 가치도, 나를 보는 시각도, 남을 보는 시선도 모두 새로워졌다. 이것이 주안에서 새로운 삶이 가능한 이유이다. 주를 만나고 나의 모든 것이 변했다. 이것이 오늘날 내가 새 삶을 살고 있는 이유이다.“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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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신춘식 교수와 함께 하는 조나단 에드워즈 선교신학 <고난의 시간을 해석하는 법> 크리스천헤럴드2026.08.23
    이민자의 삶에는 예기치 않은 순간들이 찾아온다. 열심히 준비한 비자가 거절되고, 믿었던 직장을 잃고, 낯선 땅에서 건강이 무너지는 경험도 하게 된다. 함께 신앙의 길을 걷던 배우자와의 관계가 흔들리고, 애써 키운 자녀가 신앙에서 멀어지는 것 같아 마음이 무너지기도 한다. 삶이 우리의 계획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때, 신앙인이라면 피할 수 없는 질문 앞에 서게 된다.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그리고 이 고난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 질문은 오늘을 살아가는 이민자들만의 질문이 아니었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 역시 자신의 삶에서 이 질문과 끊임없이 마주했다. 그는 하나님의섭리를 책상 위에서만 논한 신학자가 아니라, 반복되는 고난의 한복판에서 그것을 붙들고살아낸 사람이었다. 20 여 년을 섬긴 노샘프턴 교회에서 해임되어 스톡브리지라는 변방의선교지로 떠나야 했고, 사랑하는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죽음을 자신의 집에서 지켜보아야했다. 이후 프린스턴대학교 총장으로 부임했지만, 불과 몇 달 만에 천연두 예방접종의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삶은 그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지만, 에드워즈는 그 모든 굴곡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과 선하신 섭리를 끝까지 붙들었다.에드워즈의 섭리 신학(Theology of Providence)의 핵심은 단순하면서도 깊다. 하나님은 우주의 모든 사건을, 크고 작은 것 하나도 예외 없이 자신의 선하신 목적을 향해 이끌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에게 섭리는 하나님이 세상을 멀리서 바라보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순간 친히 개입하시고 다스리시는 적극적인 통치였다. 고난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고난의 순간이야말로 하나님의 섭리가 가장 깊이 작동하는 때였다. 에드워즈의 신학과 삶을 함께 살펴보면, 고난을 바라보는 몇 가지 중요한 통찰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고난은 믿음을 연단하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더욱 순수하게 하는 과정이 될 수 있다. 에드워즈에게 참된 신앙은 평안할 때의 감정만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정서가 지속되는가를 통해 드러난다. 또한 고난은 우리가 붙들고 있던 세상의 것들을 내려놓고,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한다. 실제로 그는 목회지에서의 해임과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 자신의 앞날을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붙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고난의 경험은 다른 사람의 아픔을 더 깊이 이해하고 품게 하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결국 에드워즈에게 고난은 단순히 견뎌야 할 불행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드러내고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이끄시는 섭리의 한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에드워즈가 노샘프턴에서 해임된 사건은 그의 섭리 이해를 가장 잘 보여 주는 장면 가운데 하나다. 1750 년, 20 년 넘게 섬긴 교회에서 해임된 에드워즈는 인간적인 시선으로 보면 실패한 목회자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이 아픈 사건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스톡브리지라는 변방으로 옮겨간 뒤, 선교사로 사역하는 동시에 자신의 신학을 더욱 깊이 다듬어 갔다. 바로 그 시기에 『의지의 자유』(Freedom of the Will), 『원죄론』(Original Sin), 『참된 미덕의 본질』(The Nature of True Virtue)등 그의 대표적인 저술들이 집필되었다. 역설적이게도 목회 인생의 가장 큰 좌절처럼 보였던 시간이 그의 신학적 사유가 가장 깊어지는 시간이 된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에드워즈의 삶과 신학을 관통하는 섭리의 역설을 발견하게 된다. 인간의 눈에는 실패와 끝처럼 보이는 순간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는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가 붙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게 하시고, 예상하지 못한 자리로 이끄시며, 그곳에서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길을 열어 가신다. 그러므로 고난은 언제나 그 순간의 모습만으로 해석할 수 없다. 오늘 우리에게 닫힌 문이 내일 어떤 길을 여는지, 지금의 상실이 훗날 어떤 열매를 맺게 될지 우리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노샘프턴의 해임이 스톡브리지라는 새로운 사명의 자리로 이어졌듯이, 오늘 우리가 서 있는 고난의 자리도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새로운 섭리가 시작되는 자리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에드워즈의 섭리 신학은 오늘 미주 한인 디아스포라의 삶을 바라보는 데에도 깊은 통찰을 준다. 이민의 삶에는 적지 않은 고난이 따른다. 언어의 장벽과 문화적 낯섦, 고국에 두고 온 가족에 대한 그리움, 때로는 이방인처럼 느껴지는 외로움까지, 이민자들은 저마다 보이지 않는 무게를 안고 살아간다. 그러나 에드워즈의 섭리 이해는 우리의 삶을 단순한 우연의 연속으로 바라보지 않게 한다. 지금 당장은 그 의미를 모두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붙드시고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는 믿음으로 현재의 자리를 다시 바라보게 한다. “왜 내가 여기에 있는가”라는 이민자의 질문은 그래서 “하나님은 이 자리에서 나를 통해 무엇을 이루고 계시는가”라는 신앙의 질문으로 바뀌게 된다.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디아스포라의 고난은 선교적 의미를 지닐 수도 있다. 성경에서도 낯선 땅으로 흩어지거나 삶의 터전을 옮겨야 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쓰임 받는 장면을 반복해서 발견한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팔려 이방 땅의 노예가 되었지만, 훗날 그 고난의 자리가 가족과 민족을 살리는 통로가 되었다. 다니엘은 포로로 바벨론에 끌려갔지만 그곳에서 하나님을 증언했고, 에스더 역시 타국의 왕궁에서 자신의 민족을 살리는 사명을 감당했다. 그들에게 낯선 땅은 단순히 견뎌야 할 유배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사명의 자리가 되었다. 고난이 그 자체로 선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고난조차 자신의 선하신 목적을 이루는 통로로 사용하실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고난의 시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에드워즈의 섭리 신학은 먼저 상황보다 하나님의 성품을 바라보도록 우리를 이끈다. 환경은 변하고 삶의 계획은 무너질 수 있지만, 하나님의 선하심과 지혜와 주권은 변하지 않는다. 동시에 고난 앞에서 단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만 묻기보다, “이 시간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의 믿음을 어떻게 빚어 가시는가”를 물을 필요가 있다. 모든 고난의 이유를 우리가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성품을 신뢰하며 그분의 섭리를 기다리는 것, 바로 그것이 고난을 통과하는 신앙의 중요한 자세이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은 혼자 지켜 내기 어렵다. 에드워즈 역시 고난의 시간을 홀로 지나지 않았다. 그의 곁에는 아내 사라와 가족이 있었고, 스톡브리지에서는 새로운 공동체와 함께 삶과 사역을 이어 갔다. 바로 여기에 오늘 디아스포라 교회의 중요한 역할이 있다. 교회는 고난의 이유를 쉽게 설명해 주는 곳이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고난을 함께 견디며 하나님의 섭리를 기다려 주는 공동체여야 한다. 함께 울고, 함께 기도하며, 서로의 짐을 지고, 상처 입은 이가 다시 일어설 때까지 곁을 지켜 주는 공동체, 그것이 낯선 땅을 살아가는 이민자들에게 교회가 줄 수 있는 가장 깊은 위로이며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선교적 증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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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The letter 김광근 - 사람들의 부름보다 주님의 뜻으로 크리스천헤럴드2026.08.23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 마가복음 1장 38절새벽은 우리의 마음이 가장 솔직해지는 시간입니다.알람을 끄고 다시 눕고 싶은 몸오늘 해야 할 일들을 떠올리며 분주해지는 마음인정받고 성과를 내야 한다는 세상의 소리가 함께 밀려옵니다예수님은 성공적인 사역의 다음 날 아직 어둠이 짙게 남아 있을 때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사람들의 박수와 기대 속에 머물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주를 찾는다는 말에도 붙들리지 않으셨습니다 새벽의 기도 속에서 아버지의 뜻을 다시 붙드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예수님은 기적의 영웅으로 남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닙니다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고 마침내 죄인들을 대신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오셨습니다새벽 미명의 순종은 겠세마네의 기도로 이어졌고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는 은혜로 완성되었습니다주님은 우리에게 새벽에 일어나야 성공한다는 짐을 지우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대신하여 완전하게 순종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심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움직이는 공로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은혜를 받아 누리는 자리입니다오늘도 세상은 더 인정받고 더 성과를 내라고 우리를 재촉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음성을 기억하십시오.사람들의 부름보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 걷는 하루 그 길에 은혜가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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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정재우 칼럼 - 메가와 초격차보다 더 중요한 것 크리스천헤럴드2026.07.14
    대한민국은 지금 '메가'와 '초격차'를 말한다. 초대형 투자, 초거대 기업, 인공지능, 반도체, 바이오…. 모두가 더 크게, 더 빨리, 더 멀리 나아가야 한다고 외친다. 침체된 경제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국민의 기대도 그만큼 커지고 있다.그러나 역사는 우리에게 한 가지 진실을 반복해서 가르쳐 준다. 성공은 규모가 아니라 방향에서 결정된다. 속도가 빠를수록 방향은 더욱 중요하다.지난 5월, 카톨릭 교황 레오 14세는 인공지능 시대를 위한 첫 회칙 'Magnifica Humanitas'(위대한 인간성)를 발표했다. 그는 "인류는 새로운 바벨탑을 세울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거하는 도시를 세울 것인가의 갈림길에 서 있다"고 선언했다. 이어 "인공지능은 소수의 권력과 이익을 위해 존재해서는 안 되며, 언제나 인간의 존엄과 공동선을 섬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술의 발전보다 인간의 가치가 먼저라는 선언이었다.이 메시지는 오늘 대한민국에도 깊은 울림을 준다. '메가'는 거대한 규모를 뜻한다. '초격차'는 경쟁자가 따라올 수 없는 압도적 경쟁력이다. 모두 필요한 가치다. 그러나 그것이 목표가 되는 순간 우리는 성장의 착시에 빠질 수 있다. 숫자는 커질 수 있지만 행복은 작아질 수도 있다. 기술은 발전하지만 공동체는 무너질 수도 있다.한국 축구가 국제무대에서 남긴 아쉬움도 같은 교훈을 준다. 뛰어난 선수는 있었지만 이를 살리는 전략은 부족했고, 기대는 높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꿈은 필요하지만 꿈만으로 승리할 수는 없다. 철저한 준비와 냉철한 현실 인식이 있을 때 비로소 결과가 따라온다.결국 다시 리더십이다. 진정한 리더는 속도를 높이는 사람이 아니라 방향을 바로 세우는 사람이다. 윤리의 기준을 세우고, 성장의 열매를 함께 나누며, 강한 기업일수록 더 큰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도록 이끄는 사람이다. 대기업은 세계를 향해 뛰되 중소기업과 지역경제를 함께 살려야 한다. 그것이 지속 가능한 성장이다.1998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르티아 센(1933~ )은 '자유로서의 발전'에서 "발전은 국민소득의 증가가 아니라 인간의 자유를 확장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또 2001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1943~ )는 "성장의 혜택이 공정하게 분배되지 않는 사회는 오래 지속될 수 없다"고 경고했다. 두 경제학자는 한목소리로 경제의 크기보다 사람의 삶을 먼저 보라고 말한다.대한민국의 성장 역사도 이를 증명한다. 가난했던 시절, 우리는 '수출 100억 달러'라는 꿈을 향해 함께 땀 흘렸다. 교육에 투자했고, 기술을 익혔으며, 기업가들은 세계시장에 도전했다. 정주영의 도전정신, 이병철의 인재 철학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소중한 자산이다.그러나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은 우리에게 또 다른 교훈을 남겼다. 성공은 영원하지 않으며, 변화의 방향을 놓치는 순간 성장도 멈춘다는 사실이다.오늘 세계가 K-문화에 열광하는 이유도 화려한 기술 때문만은 아니다. 가족을 사랑하고, 약자를 품고, 함께 울고 웃는 한국인의 정서가 세계인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문화의 경쟁력은 결국 사람의 품격에서 나온다.대한민국은 이제 새로운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 메가 프로젝트도 필요하고 초격차 기술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세워야 할 것은 윤리이며, 신뢰이며, 공동체의 가치다.더 겸손해야 한다. 더 성실해야 한다. 더 검소해야 한다. 더 많이 섬겨야 한다. 그리고 더 하나 되어야 한다.기술은 나라를 부유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품격만이 나라를 위대하게 만든다. 대한민국의 진정한 초격차는 반도체가 아니라 사람이며, 규모가 아니라 품격이다. 그것이 우리가 다음 세대에 반드시 물려주어야 할 가장 위대한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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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정재영 칼럼 - 당신의 정신 건강, 안녕하십니까? 크리스천헤럴드2026.07.14
    심각한 정신 질환 문제현대 사회에서 정신질환은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는 중요한 건강 문제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우울증, 불안장애, 조현병, 알코올 사용장애 등 다양한 정신질환을 경험하는 사람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2024년에 조사한 우리나라의 정신질환 실태를 보면 10명 중에 3명 꼴(27.8%)로 평생 한 번 이상 정신질환을 경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1년 유병률은 8.5%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정신질환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부정적인 시선 때문에 치료를 받지 않거나 치료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상황은 증상을 더욱 악화시키고 일상생활과 사회생활에도 큰 어려움을 초래할 수 있다.학업, 취업, 경제적 어려움, 인간관계의 갈등 등 여러 사회적 요인이 정신건강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최근에는 코로나19 이후 우울감과 불안감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증가하였으며, 청소년과 청년층의 정신건강 문제도 중요한 사회적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과도한 경쟁, 스마트폰과 SNS 사용 증가, 미래에 대한 불안 등이 정신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는 높은 자살률을 보이고 있어 정신건강 관리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우리와 같이 사회적 고립이 심한 이른바 ‘각자도생’의 사회에서는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약점으로 여기거나, 모든 문제를 혼자 해결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기 쉽다. 이로 인해 스트레스와 불안이 지속되고 우울감이 심해질 수 있다. 개신교 신자도 예외가 아니다. 비신자들보다는 댜소 적지만 개신교 신자들도 2명 가운데 한명 꼴로 외로움을 느끼고 있다고 말할 정도이다. 공동체를 강조하는 개신교에서도 외로움 문제는 심각한 수준인 것이다. 또한 우울증은 종교의 유무와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는 정신질환이다. 따라서 정신 질환 문제에 대해 바로 이해하고 대처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개신교인의 우울 경험과 인식최근 <한국교회탐구센터>에서 실시한 “개신교인의 우울 경험과 인식 조사” 결과를 통해 개신교인의 정신 질환 실태를 파악할 수 있다. 이 조사에서는 개신교인(교회출석자)들 중에 3명 중 1명인 33%가 최근 1년 사이 2주 이상 연속적으로 우울감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우울 증상이 시작된 계기는, ‘경제적 문제’(46%)를 가장 높게 꼽았으며, 이어 신체적‧환경적 취약성에 따른 ‘건강 문제’(36%), ‘가족 문제’(32%), ‘취업/직장/학업 스트레스’(31%)가 뒤를 이었다.이러한 내용은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우울증을 경험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오히려 상당수의 기독교인도 일반 사회와 마찬가지로 경제적 어려움, 건강 문제, 가족 갈등, 직장과 학업의 스트레스 등으로 인해 우울 증상을 경험하고 있다. 따라서 교회는 신앙적 돌봄과 함께 정신건강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전문 상담과 의료적 치료를 연계하는 역할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또한 신자들이 우울증을 숨기거나 신앙 부족으로만 여기지 않고,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우울증에 대한 인식과 관련하여, ‘우울증 관련 오해’ 항목을 제시하였는데, 기독교인의 29%는 ‘우울증은 본인이 나약하기 때문’이라고 보았고, ‘매우 영적인 사람은 우울증에 걸리지 않는다’는 데도 28%가 동의했다. 기독교인 10명 중 3명은 우울증이라는 질환을 개인의 나약함과 영성 부족으로 치부하는 오해가 상당한 셈이다. 또한 ‘정신질환으로부터 회복하는 것은 대개 운에 달려있다’며 전문적 치료가 아닌 운에 기대는 비율도 19%였다. 특히 우울 증상이 있는 기독교인들은 세 항목 모두에서 전체 평균을 웃도는 동의율을 보여서, 스스로를 ‘신앙이 없고 유약한 존재’로 자책하는 등 부정적 자기인식이 두드러졌다. 이러한 결과는 우울증 자체의 증상인 자기 비난과 낮은 자존감이 종교 신념과 결합될 경우 더욱 심해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또한 기독교인(교회출석자)의 43%는 ‘목회자가 우울증에 걸리면 성도들에게 덕이 되지 않는다’는 부정적 인식에 동의해, 우울증 같은 목회자의 정신질환이 목회자들에게 도덕적/신앙적 부담감을 크게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전체 기독교인의 29%는 ‘우울증 성도에 대한 교회 내 부정적·차별적 시선이 있다’고 응답했다. 특히 우울 증상이 있는 기독교인의 경우 이 비율을 37%로 더 높게 체감하고 있어, 실제 정서적 아픔을 겪는 성도들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소외감을 느끼고 있음이 확인됐다.이 결과는 교회가 사랑과 돌봄을 강조하는 공동체임에도 불구하고, 정신질환에 대해서는 편견과 낙인이 일부 남아 있음을 시사한다. 특히 실제로 정신적 어려움을 겪는 성도들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이해받기보다 소외되거나 판단받을 수 있다는 불안감을 더 크게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경험은 우울증을 악화시키거나 상담과 치료를 받는 데 장애 요인이 될 수 있다. 따라서 교회는 우울증을 신앙 부족이나 개인의 문제로 바라보기보다 치료와 돌봄이 필요한 정신건강 문제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목회자와 성도 모두가 편견 없이 자신의 어려움을 나누고, 전문적인 상담과 의료적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교회 공동체가 안전하고 지지적인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정신이 건강한 공동체를 위해이 조사에서는, 우울할 때 정서적 지지를 받는 대상으로는 우울 증상 여부와 관계없이 ‘가족’이 가장 높았다. 다만 우울 증상이 있는 기독교인의 우울 증상이 없는 집단과 비교해 ‘가족’을 꼽은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고, ‘친구’나 ‘교회 성도’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은 점이 눈에 띄었다. 특히 소그룹에 정기적으로 참여하는 경우(35%) ‘참여하지 않는 그룹’(15%) 대비 우울 경험 시 ‘교회 성도’를 의지하는 비율이 높게 나타난 점이 특징적이다.그리고 우울 증상이 있는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우울 증상이 지속되었을 때 34%는 목회자나 주위 성도 등 교회의 도움을 기대한 경험이 있었다고 응답했다. 특히, 소그룹에 참여하지 않는 그룹(27%)보다 정기적으로 참여하는 경우(64%)에 교회에 도움을 기대한 경험이 훨씬 높았다. 평소 소그룹을 통해 긴밀한 관계망을 형성한 성도일수록, 위기 상황에서 교회를 기꺼이 의지할 만한 안전한 울타리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이것은 우울 증상이 있는 기독교인들은 가족만으로는 충분한 지지를 받지 못하거나, 자신의 어려움을 가족보다 가까운 신앙 공동체나 친구에게 더 편하게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음을 의미한다. 특히 소그룹 활동을 통해 형성된 친밀한 관계가 어려운 상황에서 실제적인 정서적 지지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우울 증상이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우울감이 지속될 때 정기적으로 소그룹에 참여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교회에 도움을 기대하는 비율이 두 배 이상 높았다. 이는 평소 소그룹에서 신뢰와 친밀감을 쌓은 사람일수록 위기 상황에서도 교회를 안전하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공동체로 인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결국, 교회가 단순히 예배를 드리는 공간을 넘어 신뢰할 수 있는 관계망을 형성하는 공동체가 될 때 정신건강에도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소그룹은 우울감을 경험하는 성도들이 자신의 어려움을 나누고 정서적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중요한 통로가 될 수 있다. 이것은 코로나 사태 당시에 소그룹 참여자들이 코로나 블루의 경험이 낮은 데서도 확인된 바 있다. 따라서 교회가 소그룹 공동체를 활성화하고, 구성원들이 편견 없이 서로의 어려움을 나눌 수 있는 문화를 조성하는 것이 정신건강을 증진시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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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신춘식 교수와 함께 하는 조나단 에드워즈 선교신학 <부흥에서 선교로 대각성 운동이 제시하는 디아스포라 교회… 크리스천헤럴드2026.07.14
    미주 한인 교회에서 ‘부흥’이라는 단어는 특별한 무게를 가진다. 뜨거운 찬양, 눈물의 기도,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는 집회, 이런 장면들이 먼저 떠오른다. 부흥을 갈망하는 마음은 진실하고 귀하다. 그러나 한 가지 질문을 붙들어야 한다. “우리가 바라는 부흥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부흥이 교회 안의 뜨거움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에드워즈가 말한 참된 부흥과 거리가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가 주도한 18 세기 대각성 운동(Great Awakening)은 단순한 감정적 흥분이나 종교적 열기가 아니었다. 에드워즈는 참된 부흥을 ‘하나님의 영광이 확장되는 운동’으로 정의했다. 그리고 그 영광의 확장은 반드시 교회 밖, 세계를 향한 선교적 움직임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믿었다. 부흥과 선교는 그에게 동전의 양면이었다.  에드워즈는 부흥의 참된 증거를 다섯 가지로 제시했다. 그의 저작 『성령의 역사를 분별함』(The DisAnguishing Marks of a Work of the Spirit of God)에서 그는 감정의 강렬함이나 외적인 현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가, 죄를 거슬러 싸우는가, 성경을 사랑하는가, 건전한 교리를 따르는가, 그리고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자라는가를 기준으로 삼았다. 이 마지막 기준 이웃을 향한 사랑은 선교적 행동과 직결된다. 참된 부흥은 안으로 불타오르는 동시에 밖을 향해 흘러야 한다.  실제로 대각성 운동은 선교적 열매를 맺었다. 부흥의 불길이 뉴잉글랜드 교회들을 휩쓸고 지나간 후, 교회는 안으로 뜨거워지는 데 그치지 않았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가 인디언 부족을 향해 나아갔고, 에드워즈 자신이 스톡브리지 선교지로 떠났다. 부흥은 사람들을 세상으로 내보내는 에너지가 되었다. 이것이 에드워즈가 말한 부흥의 방향성이다. 안으로 모이는 원심력이 아니라, 밖을 향해 나아가는 구심력이었다.  에드워즈는 또한 부흥을 고립된 사건이 아니라 역사 전체를 흐르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으로 보았다. 그의 저작 『구속 사역의 역사』(A History of the Work of RedempAon)에서 그는 창조에서 종말까지의 역사를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선교의 이야기로 해석했다. 부흥은 그 큰 흐름 안에서 일어나는 특별한 역사의 물결이다. 따라서 부흥을 경험한 교회는 반드시 그 물결을 타고 세계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부흥의 감격이 교회 안에서만 소비될 때, 그것은 에드워즈의 신학으로 보면 반쪽짜리 부흥에 불과하다.  에드워즈는 특별히 『기도합주회』(원제: An Humble A*empt, 1747)에서 전 세계 교회가 연합하여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기도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어느 한 교회의 부흥이 전 세계 선교의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작은 기도 모임이 세계 선교 운동의 씨앗이 될 수 있다는 이 확신은, 훗날 윌리엄 캐리의 현대 선교 운동에 직접적인 영감을 주었다. 한 지역의 부흥이 전 세계적 선교로 연결되는 이 흐름을 에드워즈는 신학적으로 정교하게 설계했다.  이 관점에서 오늘 미주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를 바라보면 흥미로운 통찰이 열린다. 디아스포라 교회는 구조적으로 이미 경계선 위에 서 있다. 우리는 한국 문화와 미국 문화, 이민자 세대와 현지 세대, 동양적 영성과 서구적 신학 사이에 위치해 있다. 이 경계선은 약점처럼 보이지만, 에드워즈의 선교신학으로 보면 오히려 강력한 선교적 자원이다. 경계선 위에 선 자만이 두 세계를 연결하는 다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디아스포라 교회가 추구해야 할 부흥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에드워즈의 대답은 명확하다. 먼저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깊은 갈망이 회복되어야 한다. 그 갈망이 기도로, 말씀 묵상으로, 삶의 변화로 이어질 때 진정한 부흥의 씨앗이 심겨진다. 그리고 그 씨앗은 반드시 교회 밖을 향해 자라야 한다. 이웃을 향한 섬김, 지역 사회와의 연대, 그리고 세계 선교를 향한 구체적인 헌신으로 이어질 때 부흥은 비로소 완성된다.  미주 한인 교회는 이 점에서 독특한 위치에 있다. 우리 교회는 한인 공동체를 섬기는 동시에, 미국 사회 안의 다양한 문화권과 접촉하고 있다. 스페인어권 이민자들, 아시아계 다른 민족들, 미국 주류 사회의 이웃들이 모든 접촉면이 잠재적 선교 현장이다. 에드워즈가 말한 부흥의 선교적 방향성을 붙든다면, 디아스포라 교회는 단지 한인을 위한 교회가 아니라 열방을 섬기는 선교적 교회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단번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에드워즈 자신도 노샘프턴 교회에서 수년간의 신실한 목회 끝에 대각성의 불길이 타오르는 것을 경험했다. 부흥은 인간이 기획하는 이벤트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이다. 그러나 그 은혜는 준비된 공동체 위에 임한다. 말씀과 기도로 깊어진 교회, 하나님의 영광을 갈망하는 공동체, 세상을 향한 마음이 열린 신자들, 이것이 부흥을 준비하는 교회의 모습이다.  대각성 운동이 일어난 18 세기 뉴잉글랜드와 오늘 미주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의 상황은 다르다. 그러나 에드워즈가 붙든 질문은 동일하다. “이 부흥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만족을 위한 것인가.” 이 질문 앞에 정직하게 서는 것, 그리고 부흥의 방향을 교회 안에서 세계를 향해 돌려놓는 것, 그것이 에드워즈의 선교신학이 오늘 우리에게 요청하는 전략이다.  디아스포라 교회의 부흥 전략은 화려한 프로그램이나 대형 집회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엎드린 소수의 기도에서, 말씀 앞에서 무릎 꿇는 공동체에서, 그리고 이웃을 향해 문을 여는 작은 결단에서 시작된다. 에드워즈의 대각성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작은 시작이 한 시대의 선교 역사를 바꾸었다.  오늘 미주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가 부흥을 꿈꾼다면, 그 꿈의 방향을 분명히 해야 한다. 부흥은 교회의 크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한 것이다. 부흥은 우리를 위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보내기 위한 것이다. 에드워즈가 살았던 시대에 부흥이 선교를 낳았듯, 오늘 우리의 부흥도 반드시 선교로 이어져야 한다.  참된 부흥은 교회를 흔들고, 그 흔들림은 세상을 향한 발걸음이 된다. 대각성 운동이 그것을 증명했다. 그리고 오늘 디아스포라 교회 안에서도 그 증명은 계속될 수 있다. 부흥에서 선교로, 이것이 에드워즈의 신학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강력한 교회 전략이다. 부흥은 교회 안으로 끝나지 않는다. 참된 부흥은 언제나 세상을 향해 문을 연다. 그리고 그 문 너머에서 디아스포라 교회의 선교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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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상처를 축복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크리스천헤럴드2026.07.14
    "당신들은 나클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윤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 창세기 50장 20절인생의 울타리가 사라졌다고 느낄 때, 마음 깊은 곳에서 가장 먼저 고개 드는 것은 '두려움'입니다 야곱이 죽자 요셉의 형들은 오래전 자신들이 저지른 죄가 마침내 보복으로 돌아올까 멸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들 앞에서 심판자의 자리에 않지 않았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이 한마디는 용서가 무엇인지 보여 줍니다.용서는 악을 가볍게 여기는 일이 아닙니다. 내 존으로 끝까지 같아 주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공의와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입니다 형들은 요셉을 해하려 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사람의 악한 계획보다 하나님의 선한 섭리가 더 깊고 감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용서는 말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형들과 그 자녀를 돌보겠다고 약속하며 간곡히 위로했습니다이은혜는 십자가에서 완성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죽였지만, 하나님은 그 악을 통해 우리를 살리는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내 인생의 최종 결정권은 나를 아프게 한 사람이나 환경에 있지 않습니다. 보본이지 않아도 통치하시고. 늦어 보여도 선으로 빛으시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붙드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있습니다. 그러니 두려움과 분노를 십자가 않에 내려놓읍시다 주님은 상처를 별로, 눈물을 찬송으로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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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황순원의 10가지 감사노트 크리스천헤럴드2026.07.14
    1 오늘은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날입니다. 자유가 없는 나라에서나 전쟁의 위협 속에서 주일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이웃들을 생각하며 감사를 드립니다.2 오늘 주신 말씀은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눅15:29)입니다. 이런 아들의 불평을 달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3 큰 아들은 아버지집에서 살았지만 자녀로 살지 않고 종으로 살았습니다. 동생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께 보상을 바라며 동생을 정죄하고 비판과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이런 아들에게 "내 것이 다 네 것이 아니냐"고 설득하시고 타일러 주신 아버지의 사랑에 감사를 드립니다.4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 감동을 받으면 은혜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설교가 마음에 부담이 되거나 죄를 지적당하면 시험에 들기까지 합니다. 치리와 징계가 사라지고 있는 현대 교회를 볼 때 안타까운 마음으로 회개하며 감사를 드립니다.5 하나님 아버지는 자신의 것을 마음껏 누리며 살기를 원하시는데 우리는 자녀의 특권을 실제로 얼마나 누리며 사는지 돌아볼 때마다 아버지의 사랑의 넓이와 깊이와 높이를어제보다 오늘 조금씩 더 알아가기를 원하며 감사를 드립니다.6 야곱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약속하신 것을 매우 소중히 여겨 태어나서도 장자의 명분을 매우 소중히 여겼습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약속하신 것이 성취되는 것을 무엇보다 우선시 한 야곱의 생애를 묵상하며 나에게도 약속한 말씀 붙잡고 나 아갈 것을 다짐 하며 감사드립니다.7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목적은 아버지와 자신이 하나 된 것처럼 우리 인간도 아버지와 하나 되기를 원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죽으신 은혜를 생각할수록 감히 하나님과 하나 됨의 축복을 어찌 다 실감할 수 있으리오? 기쁨이 넘칠 수 있게 하심이 감사합니다.8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기 위함이라는 간판아래 나의 욕망을 채우기 쉽습니다. 나의 소원이 다 이루어졌다고 영광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들은 이것을 알았기에 자신을 포기할 수 있었던 것이요, 우리는 구원 얻게 되어 감사를 드립니다9 어떤 사역 중에도 가장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영혼구원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만이 경험할 수 있는 기적을 체험하기를 우선순위로 하고 복음 전파에 가장 큰 무게를 두고 사역에 임할 것을 다짐하며 감사를 드립니다.10 해외 여러 나라로 부름 받아 복음 위해 나아간 사모님들을 섬길 때마다 각 나라 언어로 문회에 적응하느라 애를 쓰는 노고를 주님이 아시고 더 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열심을 다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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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김병학 목사의 소통하는 교회 - 소통은 역사 의식에서 시작된다 크리스천헤럴드2026.07.03
    5월 18일, 한국의 스타벅스코리아가 텀블러 판촉 행사에 ‘탱크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가 거센 비판을 받았다. 홍보 문구에는 ‘책상에 탁!’이라는 표현도 함께 쓰였다. 문제는 그날이 5·18민주화운동 기념일이었다는 사실이다. 논란이 커지자 스타벅스는 행사를 중단하고 사과했다. 대표이사 명의의 사과문에서는 5·18 영령과 오월 단체, 광주 시민, 박종철 열사 유가족에게 사죄했고, 임직원 역사 교육과 내부 검수 절차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누군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상품 이름이 우연히 그렇게 정해진 것 아니냐고. 텀블러의 모양이나 행사 콘셉트 때문에 ‘탱크’라는 말을 쓴 것뿐 아니냐고. ‘책상에 탁’이라는 표현도 그저 가벼운 광고 문구 아니었겠느냐고. 물론 의도적으로 역사를 조롱하려 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번 논란은 단순한 홍보 실수로만 넘기기 어렵다. 날짜와 단어와 역사적 기억이 한꺼번에 겹쳤기 때문이다.왜냐하면 5월 18일은 한국 현대사에서 아무 날짜가 아니다. 1980년 광주에서 시민들은 계엄군의 폭력 앞에 섰고, 탱크와 장갑차는 그 비극의 기억 속에 깊이 남아 있다. 그러니 그날 ‘탱크데이’라는 말이 등장했을 때, 누군가에게 그것은 이벤트 이름으로만 들리지 않았다. 어떤 이에게는 군홧발 소리로, 어떤 이에게는 금남로의 공포로, 또 어떤 이에게는 아직 다 아물지 않은 광주의 상처로 들렸을 것이다.‘책상에 탁!’이라는 표현도 마찬가지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당시 권력은 한 청년의 죽음을 숨기려 했다.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말은 국가폭력의 거짓말로 한국 사회에 남아 있다. 그래서 ‘탁’이라는 한 글자는 어떤 이에게 경쾌한 의성어가 아니다. 그것은 고통을 지우려 했던 말, 죽음을 가볍게 덮으려 했던 말, 폭력의 책임을 회피하려 했던 말로 기억될 수 있다.여기서 중요한 것은 말이 의도만으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역사 의식은 단순히 연도를 외우는 일이 아니다. 1980년 5월 18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것, 1987년 박종철 열사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역사 의식은 그 사건들이 오늘의 언어와 상징 속에서 어떻게 살아 있는지를 살피는 감각이다. 이 날짜에는 어떤 말을 조심해야 하는지, 이 표현은 누구의 상처를 건드릴 수 있는지, 이 상징은 어떤 기억을 불러낼 수 있는지를 묻는 태도다.기업 마케팅은 늘 빠르다. 더 짧아야 하고, 더 눈에 띄어야 하고, 더 자극적이어야 한다. 사람들의 손가락을 멈추게 해야 하고, 클릭하게 해야 하고, 구매하게 해야 한다. 그런데 그 속도 속에서 자주 사라지는 것이 있다. 맥락이다. “이 말이 팔릴까”는 묻지만, “이 말이 누구를 아프게 할까”는 묻지 않는다. “재미있나”는 보지만, “역사 앞에서 괜찮은가”는 묻지 못한다.이번 사건은 바로 그 빈틈에서 일어났다. 한 기업의 홍보 문구가 한 도시의 슬픔을 건드렸고, 짧은 이벤트 이름이 민주화의 상처를 다시 불러냈다. 이것은 단순히 한 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가 기억을 얼마나 쉽게 소비하고, 언어를 얼마나 가볍게 다루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소통은 말을 빠르게 전달하는 기술이 아니다. 소통은 말하기 전에 그 말이 닿을 사람의 기억을 생각하는 책임이다. 그러므로 이번 스타벅스 논란은 한 기업의 실수로만 끝낼 일이 아니다. 우리 사회가 역사적 기억을 얼마나 쉽게 지나치는지 보여주는 사건이다. 여기서 교회의 질문이 시작된다.교회는 역사 앞에서 말을 조심하는 공동체인가. 우리는 상처 입은 사람들의 기억을 충분히 듣고 있는가. 아니면 너무 쉽게 “이제는 잊자”, “그만 넘어가자”, “너무 예민하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은가.기독교 신앙은 본래 기억의 신앙이다. 성찬은 “나를 기념하라”는 주님의 말씀 위에 서 있다. 출애굽의 신앙도 기억 위에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애굽에서 종 되었던 시간을 잊지 말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고통의 기억을 잃어버린 공동체는 쉽게 강자의 언어를 쓰기 때문이다. 자신이 아팠던 시간을 잊은 사람은 남의 아픔에도 둔감해진다.그래서 교회가 역사적 상처 앞에서 가져야 할 첫 태도는 해석이 아니라 경청이다. 역사의 아픔 앞에서 교회는 함부로 말하지 않아야 한다. 어떤 자리는 설명보다 침묵이 먼저다. 어떤 상처 앞에서는 정답보다 애도가 먼저다. 신발을 벗고 서야 하는 거룩한 땅처럼, 한국 현대사의 아픈 기억 앞에서는 우리의 언어도 낮아져야 한다.소통하는 교회는 세상보다 말을 많이 하는 교회가 아니다. 사람들의 아픔을 더 깊이 듣는 교회다. 왜 사람들이 분노했는지, 왜 단어 하나가 마음을 무너뜨렸는지, 왜 “실수였다”는 해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지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 들음이 없으면 교회의 말은 복음처럼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또 하나의 판단처럼 들릴 수 있다.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셨다.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셨다. 이것은 단순히 따뜻한 성품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방식이다. 약한 것을 더 약하게 만들지 않는 말, 상처 난 곳을 다시 찌르지 않는 태도, 기억을 함부로 소비하지 않는 조심스러움. 그것이 복음의 언어다.교회가 다시 교회다워지려면 말을 다시 배워야 한다. 더 멋진 말이 아니라 더 조심스러운 말. 더 강한 말이 아니라 더 낮은 말. 더 빠른 말이 아니라 더 오래 듣고 난 뒤에 나오는 말. 그리고 역사 앞에서 말을 조심하는 것.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소통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교회는 세상의 상처를 비껴가는 공동체가 아니라, 그 상처 곁에 조용히 머무는 공동체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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