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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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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최재홍 목사의 카톡큐티 - “부활절이 부활해야 합니다!” 크리스천헤럴드2023.04.28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할렐루야! 부활절의 행복했던 추억들이 누구나 마음속에 남아있다. 가족들과 나누던 시간, 교회 공동체에서 준비하던 즐거움들이 지금은 신앙 속에 지켜지지 못하고 잊혀져 가는 애석함이 마음 한 켠에 자리한다. 나의 부활절에 대한 영적 분위기는 솟아오르는 태양의 찬란한 빛처럼 밝고 힘찬 새아침을 맞이하는 것처럼 신선하고 새롭게 느껴졌었다. 부활절의 상징처럼 인식되고 있는 달걀, 토끼, 백합 등은 각각 새로운 삶, 풍요, 순수함, 정결함을 의미한다. 유럽 중부나 동부지역에서는 어린 양을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이라고 해서 양고기를 부활절의 중요한 음식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또한 부활절의 복장으로 흰 옷은 새로운 생명을 나타낸다고 하여 부활절에는 흰색 계통의 옷을 널리 입는 유래가 되었다. 그리고 야외 행사로는 Easter Egg Hunting 이 다양한 방법으로 진행된다.교회학교에서 매해마다 장식하고 준비하는 부활절 달걀은 독일 이민자들이 미국에 오면서 전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마트나 매장에서 상품화된 부활절 토끼는 달걀, 사탕, 초콜릿 등을 착한 아이들에게 가져다 준다고 믿는 믿음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각 나라마다 부활절 달걀 찾기, 달걀 굴리기, 부활절 퍼레이드, 부활절 축하메시지 보내기, 카드 교환 등, 다양한 형태의 부활절 풍습이 전해져 오고있다. 미국에서도 부활절이면 관공서와 정부의 빌딩에 Happy Easter 플랭카드를 내걸고 부활절을 크게 축하했었다. 그리고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부활절 마시멜로는 핍(Peep)이라고 부르는데 부모들과 어린이들의 야외활동 시간에 자주 행하기도했다.이렇게 세상 속에서 문화의 흐름과 함께 자리잡은 부활절의 모습은 바로 우리 신앙의 모습이며 추억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삶 속에 부활절에 대한 신앙 추억들이 사라지고 있다. 나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어려서부터 부활절 새벽 연합예배를 드리려고 새벽 잠을 깨워 부모님과 함께 길을 따라나섰던 부활절 새벽에 대한 기억이다. 그곳에서 학교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나고난 후에 서로가 크리스쳔인 것을 알고 학교생활을 하는 동안 동질감, 연대감을 갖게 되었고 그 후로 평생친구가 되기도 했다. 우리 신앙생활의 시작은 에수님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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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신선묵 교수 칼럼 [72] 영성과 멘토링 크리스천헤럴드2023.04.28
       영성과 멘토링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면서 꼭 권하는 말이있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지도자를 선택하여 한 사람을 깊이 연구하라고 권한다. 학교에서는 학문으로 공부하기 때문에 가능하면 분야를 나누고 각 분야를 정확하고 세밀하게 공부하도록 한다. 가능하면 분야를 나누고 각 분야를 깊이 연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과 사역은 그렇게 나누어서 살 수가 없다. 그 나누어서 공부한 것들을 총체적으로 모아서 하나의 전체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 사람의 삶과 사역 속에 모든 것들이 종합하여 실제 상황 속에서 그 각 분야의 지식이 어떻게 실제적으로 나타나는가를 볼 수가 있는 것이다. 하나의 실제 지도자의 삶과 사역을 보면 각 분야로 나누어서 연구된 신학이 하나로 통합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신학 사상을 깊이 연구하면 그 속에 각 분야로 나누어졌던 신학들이 통합되어 하나의 전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위대한 신학자를 선택하여 그의 신학을 깊이 연구하면 그 속에 모든 신학 분야들이 통합되어 나오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필요한 신학은 각 분야로 나누어진 신학이 아니라 그것이 통합되어 하나의 전체로 나타난 바로 그 신학이 중요한 것이다. 그것을 잘하기 위하여 각 분야로 나누어서 연구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신학을 공부할 때에 하나의 위대한 신학자를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비단 신학뿐이 아니라 영성도 사역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각 분야로 나누어서 공부하고 배우지만 실제 한 지도자의 삶 속에서 이 모든 것이 통합되어 그의 독특한 영성과 사역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가 각 분야로 나누어진 연구도 중요하지만 한 모범적인 실제 사역자의 삶과 사역을 연구하여서 그 모든 것이 통합된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의 영적 지도자로서 성장하고 발전해 가는데 있어서 물론 신학교에서 각 분야로 나누어진 학문을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모든 것이 모아져서 통합되어서 나타나는 좋은 지도자를 만나서 그에게서 통합된 하나의 실제를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의 삶에서 그리고 우리의 사역에서 우리는 누구를 만나는 가가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사람을 통하여 받은 영향이 가장 크기 때문이다.  풀러신학교에서 지도자학을 가르쳤던 로버트 클린톤 교수는 멘토링이라는 개념을 강조하였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지도자로 성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우리의 삶 가운데 사람을 보내주셔서 그 사람을 통하여 우리를 만들어 가신다는 개념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영향력이 있는 지도자들은 그들의 삶 가운데 10명 이상의 의미있는 멘토를 만난다고 하였다. 우리가 멘토링이라고 하면 어떤 유명한 사역자가 따로 시간을 내어서 나에게 조언을 해주고 가르쳐줄 것을 기대한다. 그런 기회가 있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예외적인 경우이다. 여기에서 취할 수 있는 우리의 태도가 두가지이다. 첫번째는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 주위에 좋은 멘토들을 많이 보내주셨다는 것이다. 유명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마음을 열고 다가서면 우리를 여러가지 면에서 가르쳐주고 조언을 주고 격려해주고 모범이 되어주는 멘토들이 많이 있다. 우리가 멘토라는 개념을 좀 더 다양하고 넓게 생각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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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샘신 목사 칼럼 - 빚진 자 크리스천헤럴드2023.04.28
      하나님의 대표적인 속성 중 하나가 바로 ‘공의’입니다.성경은 하나님의 공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6절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7절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살후1:6-7)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7) 하나님은 반드시 갚아주십니다.성경은 그것을 하나님의 공의라고 합니다.그러므로 하나님은 빚을 지고는 못 사시는 분이십니다.우리도 하나님의 그러한 부분을 닮았습니다.우리가 이 부분을 이해하고 본문을 대하면 말씀이 더욱 실감나게 다가옴을 볼 수 있습니다.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바울이 자신을 향하여 스스로 빚진 자라고 표현했다는 것입니다.즉 바울은 상대방을 향하여 “너는 빚진 자”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우리가 이 설교를 듣고 스스로를 향하여 “그래 나도 바울과 마찬가지로 빚진 자야”라고 말한다면 문제가 없습니다.그러나 설교자가 청중을 향하여 “당신은 빚진 자입니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복음이 기쁜 소식이라는 개념에 위배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바울은 누구에게 빚진 자였습니까?바울은 14절에서 그 대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라는 표현은 결국 ‘모두에게’라는 의미입니다.만약 바울이 자신을 ‘하나님께 빚을 진 자’ 혹은 ‘마게도냐 교회에 빚을 진 자’라고 말했다면 이해가 쉬웠을 것입니다.그런데 바울은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빚을 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이 고백은 깊은 묵상을 필요로 합니다.오래 전에 저는 신학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성도들을 공부 시키면서 무엇인가 나는그들을 위해 하고 있다고 생각했읍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제 마음 속에 놀라운 생각 하나가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그것은 ‘내가 그들을 도운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나를 도왔던 것이었구나!’라는 생각이었습니다.그러자 제 마음 속에 바울처럼 빚진 자의 마음이 생기게 되었습니다.제가 빚을 갚아야 할 대상은 오래 전부터 저에게 배움을 가진 학생들과 성도님들 이었다는 것 입니다.제가 준 것보다 받은 것이 오히려 더 많았습니다.만일 그 분들이 없었면 오늘의 나도 없었음을 본 것입니다.그러자 이제 남은 생애는 그분들에게 받은 것을 돌려주며 살아야 된다는 생각이 찾아왔습니다.바울은 하나님을 대적했던 사람입니다.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특별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바울은 복음으로 인한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에게 넘쳤음을 경험했습니다.그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음으로 인한 행복함이 바울로 하여금 ‘복음에 빚진 자’의 마음을 가지게 하였던 것입니다.선교사들이 왜 그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면서까지 자기와는 아무 상관없는 선교지에 가서 자신의 일생을 헌신합니까?바로 바울과 같은 복음에 빚진 자의 마음 때문입니다.자신이 하나님의 은혜와 복음으로 인해 엄청난 복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이 영적인 채무의식이 되어 아내와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선교지에 그 빚을 갚으러 가는 것입니다.선교지에서 당하는 모든 불편함과 고난을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빚진 자의 마음으로 감당하는 것입니다.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의 빚을 진 자들입니다.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을 하십니다.이 질문은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라는 베드로를 향한 주님의 고백인 동시에 “나를 사랑해 달라”는 요구이며 더 나아가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랑을 갚아 달라는 부탁이기도 합니다.‘복음과 사랑의 빚진 자’가 되려면 먼저 우리 자신이 복음과 사랑으로 인해 행복하고 감격해야 합니다.만일 우리에게 그러한 마음이 없다면 아직 복음과 사랑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복음과 사랑,하나님으로 인한 감사가 없다면 빚진 자의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 어리석게 보일 뿐입니다.‘복음과 사랑의 빚진 자’의 마음은 복음으로 인한 고난,사랑으로 인한 희생을 능히 감당하도록 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바울의 삶을 보면 참으로 인간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험난한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본인이 다른 선택만 하면 얼마든지 고난을 피할 수도 있었고 인간적으로 더 나은 편안한 삶을 살 수도 있었지만 바울은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갔습니다.무엇이 바울로 하여금 그러한 삶을 살게 하였나요?그것이 바로 본문에 등장하는 빚진 자의 마음입니다.바울은 행복한 빚진 자였습니다.샘신 목사 SAM Community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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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김병학 목사 칼럼 - 소통은 현실직시이다 크리스천헤럴드2023.04.28
        코로나의 상황이 완전히 끝났다고 말할 수 없는 어정쩡한 가운데 교회는 여러모로 교회의 생존을 위하여 큰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런데 마치 방향을 잃어버린 것처럼 우왕좌왕하고 있다.   만일 ‘오늘 당신의 교회가 건강 검진을 받는다면 어떤 진단이 나올 것 같은가?’라고 질문한다면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톰 레이너, 죽은 교회를 부검하다, 두란노, 2022) 교회는 정직하게 교회를 건강 검진받는 것처럼 검진받아야 한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교회가 무엇이고,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기본부터 살피고 너무나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을 대비하여 철저하게 준비해야 한다.   만일 다시 코비드 같은 상황이 된다면, 이번에는 마스크 쓰고 소독 철저하게 하여 대면 예배를 강행하겠다는 것이 교회가 할 수 있는 준비의 전부가 될 수 없다.   지금 교회는 새로운 세대에 대한 준비를 전혀하지 못하고 있다. 교회가 대부분 기성세대로 구성되어 있는데 MZ세대라는 다음 세대에 대한 준비가 없다. 이미 방송이나 매체에서 그리고 회사들은 직접 이 세대를 경험하고 있고 대안 마련에 힘쓰고 있다.   이렇게 중요하고 시급한 것을 교단에서나 어느 단체에서 준비할 수 있다고 보기 어렵다. 이것이 지금의 교회 현실이다. 그렇다고 각 교회가 준비하기는 더 어렵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교회들은 크게 두 가지를 해야 할 것을 제안한다. 먼저, 목회자들의 설교가 변해야 한다. 너무나 뻔한 내용과 구성으로는 다음 세대에게 들려질 리가 없다. 성경을 연구하여 하나님이 전하시고자 하는 의도를 찾아내야 하고 말씀을 처음 들었던 청중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중들을 연구해야 한다. 그러려면 목회자들은 문화와 사회를 연구해야 한다. 두 번째는 기존 성도들이 많이 양보해야 한다. 지금까지 목회자가 돌봐주고 양육하던 직접적 대상에서 한발 뒤로 물러나 목회자들이 다음 세대에 집중할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한다. 교회의 조직과 구조를 변경하고 프로그램과 운영 방식을 바꿔야 한다.   그리고 하나 더 바람이 있다면 대형 교회들은 경제적으로 부담을 해서 지역 교회 중 몇 교회의 목회자들과 팀을 구성하여 다음 세대 준비를 위한 프로젝트팀을 운영하기를 제안한다. 내 입맛에 맞는 사람 몇 사람을 모아서 형식적으로 하지 말고 교회의 미래와 사활이 걸려있다는 심정으로 팀을 구성하고 운영해야 한다. 이런 제안은 최소한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매우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일은 빠를수록 좋다. 이 일을 준비해야 교회가 살고 예배가 살고 선교가 살아날 것이라고 확신한다.   교회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지금 교회의 구조는 외부의 누가 무슨 말을 해줄 수 없다. 교회 내부적으로도 그리고 외부적으로도 교회에 어떤 제안을 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그래서 각 교회는 무던히 시행착오를 경험했다. 그러나 이제는 교회가 정확히 무엇을 할 줄 알고 준비해야 할 때가 되었다.     김병학목사 / 주님의교회kim040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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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서민수 목사의 피시전도법 - 운동화 끈을 다시 한 번 조여 매면서 크리스천헤럴드2023.04.28
     왜 전도하라고 말하는가? 아마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목사님들로부터, 교회로부터 전도하라는 도전을 엄청나게 받았을 것이다. 우리는 전도해야 할 이유가 단순히 교회의 빠른 부흥과 성장 그리고 그 혜택으로 좋은 건물, 넓은 주차장, 풀타임 사례비에 있지 않음을 천명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전도해야 하는가? 이 명제가 분명해야 지치지 않는다. 이 명제가 확실해져야 끝까지 달려갈 수 있다. 우리가 전도해야 할 이유는 전도가 바로 이 땅에 존재하는 일 중에 가장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떠나시면서 가치 없는 일을 부탁하셨겠는가?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이기에 도우시는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신다고 말씀 하셨겠는가?하나님이 세상에 존재하는 피조물 중에 가장 사랑하시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사람이고 영혼이다. 천하보다 귀한 영혼이다. 이 영혼의 무게와 귀중함이야 말로 전도의 시작과 끝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되 당신의 이미지를 따라 사람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사람의 타락을 아파하셨고, 타락한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 구원의 대업을 완성하신 주님께서 이제 제자들을 통해 한 영혼, 한 영혼을 구원의 방주로 인도하길 원하신다. 이 아름답고, 가치 있는 일에 모든 성도들과 제자들, 교회들을 당신의 파트너로 부르셨다. 이같은 귀한 일을 맡기시면서 맨입으로 말씀하시지 않으셨다.“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8:18-20)가장 가치 있는 중요한 일은 마지막 순간에 부탁하고, 맡기는 것이다. 지금 당장 헤어지는데 그냥 일상적인 일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다. 당장 죽게 되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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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송경화 교수 칼럼 - 치유의 여정 크리스천헤럴드2023.04.03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롬3:10-18) 상담실에서 내담자들을 만나다 보면, 하나같이 문제와 고통을 가지고 온다.  어린 시절에 경험한 상처와 결핍, 현재 고통스러워 하는 우울이나 불안의 문제, 종종 찾아오는 공황 반응, 인간 관계에서의 갈등과 상처, 가족 관계에서의 어려움, 낮은 자존감과 열등감, 패배의식, 죄책감, 만성 통증과 피로감, 소화 장애와 불면증 등… 끝없이 나열되는 다양한 고통을 상담실에서 만나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나에게 문득 찾아온 하나의 질문은, “상담실에 오는 분들만 이런 걸까?”였다. 상담실을 찾지 않는 많은 사람들은 그럼 이런 문제들과 고통으로부터 자유한 걸까?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어떤 심리적 불편감도 없는 사람들, 그래서 현재에 만족하고 미래를 낙관하는 사람들이 과연 이 세상에 얼마나 존재할까? 어느 심리학파에서는 인간이란 자기 문제를 잘 알고 해결할 수 있는 방법과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실현을 할 수 있는 존재로 믿는다. 자기 안에 답을 가지고 있고, 스스로 삶을 개척해 나가고 현재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모든 능력과 자원을 자기 안에 가지고 있다고 본다. 정말 인간이란 그런 존재일까?  묵상과 성찰, 그리고 연구를 통해 나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점점 발견하고 있다. 아픔과 고통이 없는 사람이란 없다. 우리는 모두 삶을 살아가는 동안 언제든, 어떤 모습으로든 상처와 좌절과 결핍을 경험하고 고통을 마주한다.  그것을 생생하게 느끼고 인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거의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이유는 여러가지이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우리의 의식 체계에서 억압되어 그 고통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경우도 있다. 자기의 상처와 결핍을 기억하지는 못하더라도, 그것들은 종종 삶에서 여러가지 문제를 일으키면서 존재감을 나타낸다. 억압된 상처와 고통은 우울, 불안, 강박, 공황 등의 정신적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고, 중독에 빠지게 하기도 하며, 혼외 관계를 통해 결핍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불건전한 행동을 유발하기도 한다. 만성적인 공허감과 낮은 자존감으로 고통받지만, 도대체 왜 이런 건지 이해하기 어렵다고 호소하기도 한다. 원인에 대한 아무런 단서를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인지하든 억압하든, 모든 사람에게는 상처와 결핍의 고통이 존재한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다양하다. 그 고통이 크지 않아 그럭저럭 감당해낼 수 있는가 하면, 어떤 경우에는 고통이 압도적으로 강렬할 수도 있다. 혹은, 고통이 있지만 적절한 도움을 받거나, 지지적인 관계가 그 상처를 치유할 만큼 강력한 경우에는 시간이 지나면서 고통의 정도가 경감되기도 한다. 우리 모두에게 상처와 결핍의 고통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건 바로 우리 모두에게 공통으로 해당되는 죄 때문이다. 우리는 죄 가운데 태어나 유전적으로도 죄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뼛속까지 죄인이고, 살아가면서도 크고 작은 죄를 계속 범하는 유한하고 연약한 존재이다. 그런 죄인들이 모여서 만든 사회 구조와 문화 역시 죄로 물들어 있다.  죄인인 우리는 자기의 안전과 유익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서로 사랑하고 무조건적으로 수용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런 사랑과 수용을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말로, 행동으로 상처를 주고, 또 그것 때문에 괴로워한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안전과 생존을 위해 분투하지만, 그 과정에서 상처받고 상처를 준다. 이런 상처들은 세대를 따라 대물림 되고, 우리의 마음은 점점 더 피폐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사람은 도움을 받고자 상담실을 찾지만, 어떤 사람들은 상담실을 찾을 힘도 없고 용기도 없고 심지어는 상담실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정보조차 얻지 못한다.  상담실을 찾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큰 차이는 없다. 우리는 모두 마음의 짐을 지고 있고,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으며, 상처와 결핍으로 멍든 가슴을 안고 있다. 겉으로는 웃고 있고, 아무 문제 없는 것처럼 보이며, 그럭저럭 잘 기능하고 있지만, 그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울고 있는 크고 작은 상처가 있다. 신앙생활을 통해 해결되는 마음의 문제도 있지만, 신앙으로도 해결되지 않아 여전히 씨름해야 하는 문제도 또한 존재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모든 사람이 다 가지고 있지만 숨기고 있는 이 결핍과 상처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치유의 여정으로 갈 수 있는 지도가 있을까? 주님과 함께 용감하게 치유의 여정을 시작하고자 하는 이가 있다면, 그 길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시작한다.  치유의 여정에는 먼저 결핍과 상처를 알아보고 인지하는 것이 첫 걸음이고, 그것들의 원인과 영향력을 이해하는 것이 그 다음이며, 주님과 동행하며 일반 은총인 치유의 방법들을 적용하여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내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다. 앞으로의 글에서는 이런 치유의 여정을 하나씩 하나씩 그려보고자 한다. 송경화 교수월드미션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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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최재홍 목사의 카톡큐티 - “처음처럼 마지막까지 주님만을!” 크리스천헤럴드2023.04.03
     지난 주일 오후에 우리교회를 위해서 늘 기도해 주시는 남가주 프라미스교회 창립 12주년 기념주일에 있었던 목사 안수식에 성도님들을 대신해서 장로님 내외분과 함께 참석하였다. 이번에 안수받은 오 명진 목사는 주경야독하며 10년이 넘도록 신학교 수업을 받았다고 한다. 처음 헌신하게 사역지에서 11년 동안 찬양사역을 감당하며, 사역중에는 한번도 ‘아니오(NO)!’ 라는 대답을 하지 않았던 신실한 동역자라고 담임 목사님과 성도들이 이구동성으로 말씀해주실 때에 임직받는 목사님은 성품과 실력과 은혜가 준비된 사역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개인적으로 선배의 조언을 부탁하셨기에 고심하다가 이렇게 말씀을 드렸다. “저도 부족한데 한가지 말씀을 드리면, 목회는 내가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하십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눈치를 잘 살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드셔야 좋은 목회자가 될 수 있습니다.”라고 전해드렸다. 물론 나에게 가장 필요하고 원하고 바라는 부분이기도 하였기에 나의 마음을 그대로 전해드렸던 것이다.  교단 안수위원 목사님의 말씀 중에 내 마음에 ‘초심유지’라는 말씀이 와닿았다. 그리고 지난 시간 내 인생의 첫 순간들을 기억해 보게되었다. 연동교회에서 목사 안수 받던 순간, 성경공부 시간에 아내를 만난 순간, 딸 리베카가 태어난 순간, 수술을 마치고 의식을 되찾은 대니얼을 만난 순간, 미국에 도착한 날, 목회를 시작하던 첫 주일예배 등등, 내 인생의 소중한 순간들을 생각하니 부끄러움과 죄송함이 담긴 아쉬움으로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뛰었다. 목적을 가지고 마지막까지 달리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래서 힘을 보태주려고 “시작이 반이다” 라고 격려하는가 보다. 주일 아침 LA 마라톤 대회에 최 주은 집사의 아들 브라이언 형제가 참가하고 있었다. 마라톤의 특성상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려면 오랜 시간 준비했을 것이다. 우리는 엄두도 내지 못하는 26.2 miles 를 내달렸다. 엄마의 사랑을 가슴에 담고 완주를 꿈꾸며 힘든 순간을 견디고 자신과의 싸움을 이겨내며 우리 교회 모퉁이를 돌아서 힘차게 달렸을 것이다. 완주메달을 받았다는 기쁜 소식을 듣고 그 심정을 잘 알기에 무척 반가웠다. 나도 마지막을 바라보며 최후 승리를 위해서 끝까지 달리는 사역자가 되기로 다짐을 해본다. 처음의 마음과 자세를 세월이 지나도, 관계하는 상대와 환경이 바뀌어도 변함없이 이어가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다.  성경의 인물들 처럼, 환란과 핍박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방주를 지은 노아처럼, 포로로 잡혀가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생명을 건 다니엘의 변하지 않는 믿음처럼, 가족들에게 미움받고 구덩이에 던져진 형통의 사람 요셉의 인생처럼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처럼 말이다. 처음처럼 마지막까지 주님만을 바라보며 산다는 것은 하루하루를 초심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거룩한 초심을 품고 그 마음으로 우리 모든 크리스챤들이 천국문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님께 간구드린다. 샬롬!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욘 4:10)최재홍 목사쉴만한 물가교회joshchoi0331@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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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조영석 목사 칼럼 - 두 번 고난 당하신 예수 크리스천헤럴드2023.03.28
     오래 전 신학교를 다닐 때였다. 복음서 강의 시간이었다. 마침 부활절을 얼마 앞두고 있을 때였다. 이날 수업은 신학공부 보다는 고난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님의 희생에 대해 묵상하고 교회에 돌아가서 성도들에게 그 사랑을 전하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  교수님은 로마의 가장 가혹한 형벌인 십자가의 죽음이 인간이 겪기에 얼마나 고통스러운 경험인지 형벌의 과정을 자세하게 설명하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까지 당하신 수많은 잔인한 고문과 끔찍한 고통을 생각해보며 모두 조용해졌다. 그 장면을 머리 속에 떠올리는 듯 눈시울이 붉어지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런데 문득 한 학생이 교수님께 참으로 뜻밖의 질문을 했다. “정말 예수님은 아셨을까요...?”  이 말을 들은 교수님은 잠시 당황한 듯 말이 없다가 이내 침착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신학적 근거로 예수께서 그가 당하실 일들을 모두 알고 계셨다는 것을 설명하셨다. 일부 학생들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걸 정말로 몰라서 묻느냐는 듯이 그 학생을 쳐다보았다. 주일학교 아이들도 알고 있는 이 기본 신학을 정말 신학 대학원생이 몰라서 질문한 것일까. 그 학생을 잘 알고 있는 나는 생각이 달랐다. 내가 아는 이 사람은 절대로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그렇다면 왜 그런 어이없는 질문을 한 것일까. 그 이유는 신학적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생각해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 당할 일을 몰랐다면 모를까 어떻게 알면서 그 고통스러운 죽음을 스스로 겪으려 할까 하는 인간적인 생각이 드니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문득 그런 엉뚱한 질문을 한 것이다. 신학적으로는 잘못된 질문이지만, 인간적으로 생각해 볼 때 그 질문을 한 심정은 이해가 간다.  예수께서 당하실 고난을 미리 알고 계셨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알면서도 선택하신 것에 대해서는 선뜻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의 가사를 쓴 사람도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예수님에 대한 의구심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를 위해 하신 일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기가 막혀서 그런 것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자신이 당하실 일을 알고 계셨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예지의 능력으로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들에 대해서 이미 아셨고 정확하게 예언도 하셨다. 베드로가 어느 시간에 몇 번을 부인할지, 십자가에 어떻게 못박혀 죽을지 이미 아셨다. 가룟 유다가 자신을 배신할 것도 미리 아셨다. 마지막 만찬에서 “이것은 나의 살과 피” 라 하시며 자신의 살이 갈기갈기 찢기고 피를 쏟으실 것도 알고 계셨다. 예수님은 자신이 어떻게 고통받고, 어떻게 죽으실 것을 정확하게 알고 계셨다. 이 외에도 수없이 많은 일어날 일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하셨고, 모두 조금도 틀림없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마치 경험하신 것처럼 일어날 일들을 자세하게 설명하신 것을 볼 때 죽음의 공포와 고통의 정도도 정확하게 알고 계셨을 것이다.  알고 당하는 고통은 모르고 당하는 고통보다 더 클 수밖에 없다. 주사를 무서워하는 이유는 심리적인 요인이 크다. 주사 바늘이 몸을 찌르고 들어올 거라는 두려움이 공포를 유발하고, 당할 위치와 시간을 예측할 수 있기에 온몸의 신경이 그곳에 집중되어 고통이 더 가중되어 느껴질 수밖에 없다. 의사가 무서워하는 아이에게 주사를 놓을 때 생각과 시선을 분산시켜 집중을 방해하고 주사를 넣어 아이의 고통을 줄여주려는 이유가 그렇다. 모르고 당하는 게 낫기 때문이다. 이미 당한 후에는 통증은 남지만 앞으로 겪어야 한다는 공포는 없기 때문이다.  심인성 통증이란 증세에 의하면 생각만으로도 고통을 유발하는 의학적인 현상도 있다. 힘든 일을 또 해야 할 상황을 통틀어 당사자를 두 번 죽이는 일이라는 표현이 있다. 예수님이 겪으신 것이 그와 같다. 예지의 능력으로 당하실 고난을 한번 겪으셨고, 다시 또 한 번 몸소 겪으신 것과 다름이 없다.  또 다시 부활절을 앞두고 있다. 예년처럼 나를 위해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묵상하는 때이다. 사람이 한 번만 겪어도 끔찍한 고통을 이미 경험한 것과 다름없이 아시면서도 마다하지 않고 스스로 겪으셨다는 그 사실은, 나를 살리기 위해 하신 일이 내가 아는 그것 이상이란 걸 알게 해준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당하신 고난의 무게를 더 깊게 생각해보게 한다.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과 희생은 알아도 알아도 끝이 없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마 20:18-19) 조영석 목사 choyoungsu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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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샘신 목사 칼럼 - 순종하는 것이 더 쉽습니다. 크리스천헤럴드2023.03.22
     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29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7-30) 손녀 애리가 50 pound  나간다고 한다. 그런대 내 등에 50pound  짐을 지고 있다면 많이 힘들고 무거울 것이다. 50 pound  손녀를 업고 있다면 무게는 같을지 몰라도 다를 것이다. 같은 50 pound  나가는 어떤 의미에서는 같은 짐이지만 그 짐을 대하는 할머니의 마음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11장 27-30절은 모든 사람이 깊게 묵상해 보아야 할 아주 중요한 교훈을 담고 있는 말씀이다. 먼저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28절의 짐과 30절의 짐이다. 몇 가지로 차이가 있음을 본다. 28절의 짐은 그 짐을 진 사람을 수고하고 무겁게 만드는 짐이다. 즉 28절의 짐은 마음에 쉼을 주지 않는 짐이다. 인생을 살면서 힘들어 한다는 것은 28절의 짐을 지고 살기 때문이다. 주님은 사람들이 28절의 짐 때문에 힘들어 한다는 것을 아셨던 것이다.  반면에 30절의 짐은 가볍다고 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힘이 든다는 것은 짐이 문제가 아니라 그 짐의 무게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는 엄청난 짐처럼 보이지만 막상 당사자가 그 짐의 무게를 느끼지 않는다면 문제는 없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짐으로부터 자유로울 사람은 없다. 다만 그 짐이 28절의 짐이냐 아니면 30절의 짐이냐의 차이이다. 이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본문 말씀의 일차 청중이 누구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이 말씀이 누구에게, 어떤 의미로 주어졌는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본문의 일차 청중을 알려면 이 말씀의 범위를 확장해야 한다.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마11:20) 바로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책망”임을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많은 권능을 본 마을들이 회개하지 않는 것을 보시면서 주님은 그들을 책망하셨다. 오늘날 표현으로 한다면 수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역의 열매가 없는 상태이다. 우리 같으면 낙심할 환경이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을 책망하시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신다.“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11:25) 사역의 열매가 없으면 낙심을 해야 하는데 예수님은 오히려 감사를 하고 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만일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마음과 생각이 우리 속에 있다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감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왜 낙심하지 않고 감사했는지를 찾아야 한다. 이어지는 말씀 속에서 예수님이 낙심하지 않고 감사한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은 사역의 성공을 기준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기준이셨다. 다른 표현으로 한다면 모든 것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되는 것을 목적으로 살았기에 낙심하지 않고 감사했던 것이다. 만일 우리도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뜻이 소원이요 기준이요 가치라면 우리에게 어떤 환경과 사건들이 찾아와도 낙심, 분노하지 않고 감사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기에 그러하다. 오늘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살면서 힘들어 하는 성경적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회개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들이 힘든 이유를 회개와 순종에서 찾지를 않고 다른데서 그 이유를 찾는다. 무엇보다 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본문에서 아주 중요한 교훈 하나를 배울 수 있는데 그것은 회개하고 주님께 나아와 순종하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주님께 나아와 회개하고 순종하면 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 나아오지를 않는 것이다. 이 사실을 보면 우리에게 연상되는 그림이 있다. 그것은 에덴동산의 모습이다.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죽는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지만 악한 자는 죽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했고 아담과 하와는 그 거짓말에 속았던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주님께 나아와 회개하고 순종하면 더 힘들 것이라는 사탄의 거짓말에 속고 산다는 것이다. 물고기가 물에서 살도록 창조되었듯이, 그래서 물고기는 물속에 있을 때 쉽듯이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창조되었고 순종하고 사는 것이 훨씬 쉬운 삶 임을 믿어야 한다. 또한 우리가 순종할 때 주님은 우리의 짐을 주님의 짐으로 바꾸어 주시고 함께 져 주시기에 마음에 쉼이 있고 그 짐은 가볍다. 그래서 주님은 30절의 짐이 “내짐”이라고 말한다. 무거운 내 짐을 가벼운 주님의 짐으로 만들 수 있는 비결이 있다. 그것은 주님께 나아와 회개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마음의 쉼은 그렇게 회개하고 순종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다.샘신 목사 SAM Community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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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신선묵 교수 칼럼 - 이기적인 지도자 크리스천헤럴드2023.03.22
     가끔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하다보면은 비행기가 출발하기 전에 방송을 통하여 위기상황의 대체 요령에 대하여 안내를 받는다. 그때마다 꼭 나오는 말이 위급한 상황에서 산소 호흡기를 연결해야  할 때에 항상 자신에게 먼저 산소 호흡기를 달고 그 다음에 주위에 있는 노약자들을 도와주라고 한다. 특별히 자녀하고 동승하였을 때에도 자신에게 먼저 호흡기를 달고 그 다음에 자녀들을 도와주라고 한다. 그 방송을 들을 때마다 좀 이기적인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런 상황 속에서 실제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본인과 자녀 다 위험해 질수있다. 좀 냉정한 것 같지만 본인에게 먼저 호흡기를 달고 주위에 있는 자녀를 도와야한다. 어떤 의미로는 좋은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기적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지도력하면 섬기는 지도력이 되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가져다 주는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참 지도자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런 선의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좋은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도리어 좌절감에 빠지고 한다. 그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가져다 주는 섬기는 지도력을 발휘하려고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자기 자신이 망가지는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아이러니컬 하지만 진정한 지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기적이어야 한다. 여기서 이기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자가 자신을 먼저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하되 잘 사랑해야 한다. 자신을 사랑하고 건강하게 관리하여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 자신이 건강하고 행복할 때 비로서 건강한 지도력이 나오는 것이다. 건강하지 않은 사람은 남을 건강하게 사랑할 수 없다. 남을 사랑하기에 앞서서 자기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남을 행복하게 하기에 앞서서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지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좋은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 남을 사랑하고 섬기기에 앞서서 자신을 먼저 사랑하고 섬겨야 한다. 즉 좋은 의미로 이기적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건강한 지도력은 건강한 지도자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 내가 우리 아이들을 키우면서 자녀 교육에 관심이 많아서 공부를 한적이 있는데 다음과 같은 제목의 책을 보았다. “행복한 엄마가 행복한 아이를 만든다.” 우리 모든 부모들에게는 어떻게 우리 자녀들을 행복하게 만들까가 가장 중대한 관심사이다. 그래서 최선의 노력을 한다. 그런데 그 노력들이 어떤 때는 도리어 아이를 불행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아이를 행복하게 만들려고 노력하는데 아이가 따라오지를 않으니까 부모 자신이 불행해지고 아이들에게 부정적인 행동을 하게되고 그 결과로 아이들이 불행해지는 삶을 사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나 사실은  부모가 아이들을 행복하게 만들려고 노력하기보다 자기 자신이 행복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행복해지면 그 영향을 받는 자녀들이 행복해지게 되어 있다. 진정으로 아이를 행복한 자녀로 만들기 원한다면 아이들을 조절하려고 하지 말고 엄마 자신이 자신의 인생에서 행복해져라. 그러면 아이들이 자연적으로 행복한 사람으로 성장한다라는 것이 그 책의 메세지이다. 나도 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좋은 교수가 되기 위하여 노력한다. 한번은 파커 팔머라는 분의 책을 한번 읽었다. 그가 말하기를 수업 시간에 교수가 학생들에게 자유롭게 자신을 개발하게 돕는 것보다는 학생들을 통제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은 자신의 삶이 통제가 않되니까 학생들을 통제함을 통하여 자기의 안정감을 가지려는데서 나온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수업시간에 창조적인 공간을 주지 못하고 틀에 꽉 짜여진 수업을 진행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사가 먼저 자신의 내면에 자유함을 가지고 있다면 학생들에게 자유할수 있는 공간을 주고 그들이 성장할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우리 지도자들이 많은 경우에 지도력을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조절할까? 어떻게 영향을 주고 다른 사람을 어떻게 바꿀 수가 있을까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다른 사람을 효과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관점에서 지도력을 이해하려고 한다. 그런데 사실은 지도력은 남을 어떻게 조절할 까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어떻게 건강하고 바르게 세울까의 문제임을 인식해야 한다. 이 점이 근본적인 문제이다. 건강한 부모에게서 건강한 자녀가 나오고, 건강한 선생님 아래서 건강한 제자가 나오고 건강한 목회자 아래서 건강한 성도가 나오고 건강한 가장아래서 건강한 가정이 나온다. 그래서 지도자가 감당해야하는 첫번째 아니 궁극적인 과업은 바로 자신을 건강하고 바르고 행복하게 세우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로 성경의 원리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든 인류에게 복주시기를 원하셨다. 그런데 온 땅에 모든 족속에 복을 주시기위한 통로로 아브라함과 긔의 자손을 부르셨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하신 일은 아브라함을 복주시는 일이셨다. 아브라함을 복을 주고 그 아브라함을 통로 삼아서 모든 족속을 복주시기를 계획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의 첫번째 해야할 일은 하나님의 복을 바로 받아서 바로 누리는 것이었다. 먼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아 누리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눔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것이었다. 자신을 바른 의미로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도록 하는 일, 이것이 어찌보면 바른 지도력의 출발점이다. 한 가정의 부모이든, 한 교회의 목회자이든, 한 직장의 사장인든 자신을 하나님의 뜻 안에서 바르고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모든 지도록의 출발점이다.신선묵 교수월드미션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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