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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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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우리가 알아야 할 것 크리스천헤럴드2022.04.12
     카카오톡 아이디 kimbg1212로 연결하시면 매일 카톡으로 말씀을 묵상할 수 있는 큐티자료를 보내 드립니다.바울은 이스라엘 선조들의 출애굽과 광야 생활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홍해를 건너게 되었고 광야 생활 가운데 하늘에서 내려 주시는 만나와 신령한 반석에서 나온 물을 마셨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뻐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았지만, 광야에서 죽게 되었고 그 시체가 여기저기에 흩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일들은 우리에게 거울이 되고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경계로 기록하였다고 말합니다. ‘거울’이라는 말은 ‘타격을 가한 흔적’이라는 뜻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를 교훈으로 삼아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에 지워지지 않을 하나의 흔적으로 새겨 놓으라는 강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이 악한 일을 즐겨 행했기 때문에 멸망 받을 수 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광야 생활 가운데 우상숭배, 음행, 불평과 하나님을 시험하다가 죽임을 당하였다고 말하면서 종말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런 악을 행하면 우리도 멸망 당할 수 있다는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주어진 시간 안에서 보편적으로 성공, 행복, 사랑이라는 목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우리는 종말론적인 시간(하나님의 시간) 안에서 우리의 영원한 구원을 소망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교린도 교회에 성도들에게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말합니다. 선줄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복음에 대한 지식과 생활에 흠이 없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넘어진다는 것은 실패하여 멸망할 수도 있다는 것 입니다.기독교인들은 생명의 길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주님이 언제든지 다시 오실수 있다는 종말론적인 영적인 긴장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왜냐하면 우리는 일상의 삶 가운데 시험에 들기도 하고 시련이 늘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날마다 우는 사자처럼 우리를 삼키려고 합니다. 롯의 처를 생각해 보면 됩니다. 따라서 영적으로 깨어 있어 멸망 할 수도 있다는 긴장감을 유지하고 주님을 바라보고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주시기 때문에 그 어떤 시험도 이길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긴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자녀답게 멋있는 믿음의 삶을 살아내어 하나님 나라에서 잘했다 칭찬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멘김요셉 목사가든그로브 복음루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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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예수님의 변형 사건 크리스천헤럴드2022.03.22
     카카오톡 아이디 kimbg1212로 연결 하시면 매일 카톡으로 말씀을 묵상할 수 있는 큐티자료를 보내 드립니다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기도하러 올라가셨습니다. 산에 오르신 예수께서 기도 하실떄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옷은 하얗게 변해 빛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를 빛으로 경험했다는 것으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께서 별세 하신 것을 말씀하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하였고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비롯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야 할 율법을 받았습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 850명과 대결하여 이겼으며 마지막 순간에 불수레를 타고 승천한 위대한 역사의 신앙 인물입니다.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모두 무덤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두 선지자들은 예수께서 별세(죽으심)하실 것인데 그 죽음의 장소가 예루살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중요한 하나님 나라의 구원 역사가 계시될 때 제자들은 곤하여 졸고 있었지만 완전히 깨어나 예수의 빛 된 영광과 함께 선 두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런 신비한 경험에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짓자고 제안합니다. 하지만 베드로의 이런 제안은 예수님의 뜻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그의 초막 셋을 짓자는 제안은 예수님을 모세나 엘리야와 같은 위치에 놓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다른 제자들도 비슷한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 속에서 “이는 나의 아들, 나의 택한 자니 그의 말을 들으라”라는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씀은 기독교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중요한 진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것은 명령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우리의 구원을 위해 택함받은 자로서 그를 신뢰하고 순종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그리고 영광스러운 순간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오직 예수만 보이시더라고 말합니다. 누가는 이것을 ‘오직’이란 뜻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오직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을 바라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기독교는 오직 예수 안에만 생명이 있음을 믿는 신앙입니다. 예수 안에 생명이 있음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런 신비한 신앙의 경험에서 가장 하시고 싶은 말씀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셔서 그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있는 구원의 비밀이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 사실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이 빛으로 변형된 사건에서 생명을 경험했습니다. 그 빛은 곧 부활 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언젠가 빛으로 변형될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날에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어 부활의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믿는다면 오늘 우리가 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 분명해 집니다. 부활 생명으로 변화되는 그 날을 바라보며 그 순간을 기쁘게 사모하며 오직 예수를 바라 보야하 합니다. 예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발견하고 그의 말씀을 듣고 오직 그를 바라보며 사는 자는 장차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새 생명의 부활로 변화 될 것 입니다. 아멘김요셉 목사가든그로브 복음루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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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
    [오피니언] 하나님의 이미지 크리스천헤럴드2022.03.22
     어쩌면 일상적인 언어를 통해 또 일상의 삶에서 맺고 있는 관계의 이미지를 통해 하나님은 더 친밀하고 정확하게 이해되어왔는지 모른다하나님에 대하여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가는 신앙인에겐 중요한 질문 중 하나다. 영성을 정의 할 때 주로 삼는 기준이 있다. 어떤 행동을 보이느냐다. 어쩌면 모든 행동을 통해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있는가’의 답을 찾아 가는 것이라 생각된다. 결국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보는가가 중요한 질문이 된다. 내가 믿는 하나님, 내가 아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따라서 그에 합당하게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토저는 그의 책에서 말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 할 때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이 가장 중요하다. 인류 역사는 그 어떤 사람도 그가 가진 종교보다 높이 올라선 적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역사는 그 어떤 종교도 하나님에 대한 개념 이상 커 본 적이 없다. 이런 이유로 교회 앞에 가장 중대한 질문은 항상 하나님 그 자신이었다. 어떤 순간을 기준으로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깊은 마음속에서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은 영혼의 비밀스런 법칙에 의해 하나님에 대한 정신적인 이미지를 향해 나아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실까 그리고 그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논리적으로 펼치는 것이 신학이다. 하나님에 대하여 또 그분이 원하시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알 필요가 있다. 어떤 신학을 가지고 있는가가 신앙생활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 또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나 이미지는 시나 언어를 통해 표현될 수가 있다. 어쩌면 일상적인 언어를 통해 또 일상의 삶에서 맺고 있는 관계의 이미지를 통해 하나님은 더 친밀하고 정확하게 이해되어왔는지 모른다. 그래서 성경 속에는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신학 논문과 같은 바울의 서신도 있지만 동시에 구약의 시편과 복음서에서의 예수님의 비유와 같은 문학적인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시편 23편은 인류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중에 한편으로 여겨지는 시다. 다윗은 이 시를 통해 그가 알고 그가 경험한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6절에 불과한 짧은 시지만 은유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깊고 놀라운 인식을 보여준다. 첫 번째 다윗은 ‘목자’라는 은유를 사용해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목자와 같은 분이셨다. 다윗은 자신이 양들을 돌보는 목자로 젊은 시절을 보낸 사람이다. 양을 지키기 위하여 사자와 목숨 걸고 싸우기도 했다. 고대 근동 지방의 목자는 지팡이를 들고 앞장서서 위험을 먼저 살피고 길을 인도해야 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있어 이런 목자와 같은 분이셨다.둘째로 다윗은 ‘안내자’라는 말로 하나님을 묘사했다. 다윗은 하나님을 설명하면서 길을 인도하시는 안내자의 이미지를 사용했다. 여행 안내자의 이미지는 오늘날에도 경험할 수가 있다. 여행사를 통해 안내를 받으면 여행 이외에 다른 것은 할 필요가 없다. 그저 가이드를 놓치지 않고 따라다니면 된다. 다윗에게 있어 하나님은 인생의 험한 길에서 가야 할 길을 안전하게 안내해 주는 그런 안내자였다.셋째로 다윗은 ‘초대자’의 은유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묘사했다. 손님을 초대하고 잔치를 벌이는 집주인에 비유했다. 유대 문화 속에서 집주인은 손님을 모실 때에 자신의 명예를 걸고 지킨다. 다윗은 하나님을 그런 손님을 초대한 집주인에 비유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묘사했다.다윗은 하나님에 대해 이런 이미지들을 가졌기 때문에 평생 하나님을 따르고 의지하며 살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가? 내게 있어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은유를 통해 내가 경험하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표현해 보자. 어쩌면 신앙과 영성에서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 이것이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내가 알고 내가 관계를 맺고 있는 하나님은 나에게 있어서 어떤 분이신가를 고민해 보자.둘째, 내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이미지가 얼마나 건강하고 성경적인가를 점검해 보자. 내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이미지가 꼭 다른 사람의 논리나 은유를 통해 표현될 필요는 없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는 항상 성경과 바른 신학으로 점검되고 다듬어져야 한다. 잘못된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는 신앙의 깊은 성장에 장애가 된다.신선묵 교수월드미션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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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
    [오피니언] 김병학목사 컬럼 “소통은 가치이다” 크리스천헤럴드2022.03.22
     예전에는 모이는 교회를 강조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대형 교회들이 생겨나고 그런 방법들을 배우려는 많은 세미나와 학습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그런 대형 교회를 부러워하는 대부분 모든 교회가 많은 사람이 모이는 것을 꿈꾸고 소망하였다코로나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하고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는 뉴스가 계속되고 어디에서나 필수품이던 마스크도 벗을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만나지 못하였던 사람들과 만나서 식사도 함께 할 수 있어서 그동안 미뤄 놓았던 대화가 끊이지 않는다. 교회도 교인들이 온라인보다는 대면 예배에 더 많이 참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대로 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부분의 교인이 예배당 예배에 참석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하나의 의구심이 드는 것이 있다. 이것이 당연한 노멀(normal)인가? 이렇게 교인들이 함께 모이는 것이 노멀인가? 우리가 좀 더 고민하고 기도할 때이다. 무조건 예전으로 돌아가려는 것만 시도할 때가 아니다.코로나 이전에는 교회는 모여서 예배하고 교제하고 흩어져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는 ‘모이는 교회 흩어지는 교회’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인정하듯 모이는 것에는 많이 치중하였지만 흩어지는 것은 거의 하지 못하였다. 기껏 구역 또는 목장으로 모이는 정도였을 것이다. 교회는 점점 불균형이 되어 가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르는 상황이었다.그러다가 코로나의 위중한 상황에 교회가 모이는 역할은 할 수 없고 오직 흩어지는 것뿐이었다. 코로나가 계속되면서 처음에 낯설었던 흩어져 예배하는 것이 많이 익숙해졌고 오히려 여유까지 생겼다. 심지어 코로나가 진정이 되었는데도 교회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오히려 익숙하지 않을 정도이기도 하다. 그래서 교회는 온라인 예배에 익숙한 교인들을 예배당으로 다시 부르기 위하여 여러 가지 아이디어들을 짜내고 있다. 당연히 예배당에 와서 예배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것이 아쉽다.지금은 정말 중요한 때이다. 어쩌면 하나님이 교회의 참된 가치를 회복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것일 수도 있다. 예전에는 모이는 교회를 강조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대형 교회들이 생겨나고 그런 방법들을 배우려는 많은 세미나와 학습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그런 대형 교회를 부러워하는 대부분 모든 교회가 많은 사람이 모이는 것을 꿈꾸고 소망하였다. 그러나 코로나 때문에 강제적으로 흩어지는 교회가 된 지금은 다시 예전처럼 불러 모으기보다 흩어진 교회로서 해야 할 일들을 찾아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정한 뜻일 수도 있다. 모이기만 하던 사도행전의 교회를 사울의 핍박으로 흩어지게 하신 하나님은 그 흩어짐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시작하였다.(사도행전 1장 8절) 그래서 그렇게 흩어짐이 불행으로 해석되지 않는 이유이다. 지금의 상황도 하나님은 모이기만 하던 교회를 흩으셔서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고 제자 삼으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다고 믿는다. 의미를 알았다면 이제는 방법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핍박을 받았지만 흩어져서 전도하고 양육하던 초대교회와 중국 지하교회처럼 훈련과 양육이 예배당이 아니라 가정에서 또는 일터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도들이 교회에 코로나 이전보다 더 모이도록 독려하고 프로그램을 더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흩어져 삶의 터전이 교회가 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교회다움이며 교회의 참된 가치이다. 당장에 급한 마음에 이 중요한 가치를 잊지 말아야 한다. 좀 더 멀리 보고 걸음을 옮겨야 한다.김병학 목사주님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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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
    [오피니언] 2022년 사순절에는… 또 한 번의 바람 크리스천헤럴드2022.03.08
    교회가 교회를 미워하고, 성도가 성도를 신뢰하지 못하며 예수님의 몸 된 교회라 말은 하지만 실제는 욕심과 갈등만이 존재하는 인간의 교회… 이것이 우리가 처한 현실이요, 아픔이다 교회력에 따라 지난 3월 2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됐다. 교회력에서는 성회(재의) 수요일(Ash Wednesday)부터 시작되어 부활주일 전날까지 주일을 뺀 40일간의 시간을 사순절(Lent)이라 부른다. 기독교 전통적으로 모든 주일은 작은 부활절로 여기기 때문에 40일간의 시간 중 주일은 포함되지 않는다. 그리고 사순절의 마지막 주간을 성 주간 혹은 고난주간이라 부른다.성주간에 드리는 예배 중 중요한 두 예배가 있다. 성목요일 예배와 성금요일 예배다. 성목요일을 영어로는 Maundy Thursday라 부른다. 세족 목요일이라는 의미다.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고 최후의 만찬을 통해 우리에게 성만찬의 귀한 은혜를 허락하여 주신 날이다. 여기서 Maundy라는 단어는 라틴어 Mandatum novum나왔다. 새 계명이라는 뜻이다.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은 요한복음 13장 34절(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이다.성금요일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모든 고통과 아픔을 감수하시고 돌아가신 날이다.예수님께서 운명하신 직후 온 땅이 어두웠다고 성경은 증언한다. 그래서 성금요일의 예배를 어둠(Tenebrae)의 예배라 부르고. 루터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의식에 따라 성금요일 날 ‘테네브라이(어둠) 예배’를 드린다.예수님께서 운명하신 슬프고 어두운 날이었지만 구원의 길이 열리고 하나님 자녀의 권세를 소유하며 천국 소망의 삶이 시작되는 날이었기에 성금요일을 Good Friday라 부른다. 진정으로 좋은 날이라는 의미다.사순절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나를 돌아보는 참회와 회개다. 진정한 부활의 기쁨, 참된 부활의 의미, 그리고 더 나아가 신앙의 진정한 성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변화된 영적인 존재임을 깨닫고 자신의 삶을 정직히 돌아보는 참회와 회개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올해도 어김없이 지난 3월 2일부터 시작된 40일간의 사순절 여정이 시작됐다. 2022년의 여정이 막을 올렸다.이 기간 우리는 자신을 정직히 돌아보는 성숙의 시간이 되어야 한다. 지금 앞에는 여전히 코로나19의 어려움이 버티고 있다. 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두 나라 간의 전쟁으로 인한 막연한 두려움도 있다. 한국은 대통령 선거 전후로 사회적 갈등과 미움의 아픔의 잔상이 남아있다. 교회가 교회를 미워하고, 성도가 성도를 신뢰하지 못한다. 예수님의 몸 된 교회라 말은 하지만 실제는 욕심과 갈등만이 존재한다. 이것이 우리가 처한 현실이요, 아픔이다. 나를 먼저 돌아보는 회개의 성숙을 통해 내가 먼저 변화될 수 있다면 갈등과 미움, 두려움과 절망, 이 모든 것에서 참된 자유를 얻는 것은 물론이요. 평안과 기쁨, 그리고 참된 소망 속에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럭저럭 살아왔습니다. 깊은 뉘우침 없이 적당히 당신을 기다리는 채 했습니다. 가끔 지치고 서글픈 일에 닥쳐서야 아픔을 감추며 삼키는 눈물 속에서 그제서야 당신의 상처가 떠오릅니다. 죄도 없이 십자 나무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 너무 죄가 많아 부끄러운 나를 그분에게 맡기고 싶은 은총의 사순절입니다” T.S, 엘리엇 ‘재의 수요일’남은 사순절 기간만이라도 ‘나를 돌아보는 자리’ 그 성숙의 자리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이 됐으면 한다.전치민 목사어바인 예수사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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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PK를 위한 호소 크리스천헤럴드2022.03.08
    PK는 내가 가고 싶은 내 교회를 선택할 권리도 없다. ‘목사님 자녀’라는 타이틀은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본이 되어야 한다는 부담으로 PK의 목을 조른다. 상담실에서 종종 목사님의 자녀들인 PK(Pastor’s Kid)를 만나곤 한다. 이들은 부모님의 직업을 좀처럼 말하려 하지 않는다. “목사”라는 직함에, 또 그것이 대변하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에 조금이라도 누가 될까 하는 염려 때문이다. 상담실을 찾는 PK 들은 대부분 아주 착하고 지나치게 예의가 바르며 매우 조심스럽다. 공통적으로 자존감이 낮고 외로움과 거절감에 젖어 있으며 억압된 분노와 절망에 차서 상담실을 찾는다.목사님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목회의 길을 선택하고, 사모님들도 그런 남편과 상의하고 기도하면서 함께 그 길을 가기로 결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PK들은 그런 동의와 선택의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그냥 태어나 보니 부모님은 사역자이고 본인은 PK로 태어난다. PK는 돌봄의 사각지대에서 자란다. 부모님은 교회와 성도들이 항상 우선이고, PK 는 늘 남는 것을 받는 데 익숙하다. 뭔가 모자라면 못 받는 아이는 PK이다. 교회에서 다른 아이들은 부모님들이 살뜰하게 살피지만 PK는 혼자 자기를 챙긴다. 교회 아이들은 때마다 목사님께 선물도 받고 기도도 받지만 PK는 집에서도 교회에서도 목사님께 무언가를 받지 못한다. 사역 중에 부모님이 겪는 온갖 험한 일들을 다 듣고 다 본다. 소위 “믿는 사람”들이 하는 상식 밖의 말과 행동을 보면서 환멸을 느끼지만 누구에게도 그것을 말할 수 없다. PK는 내가 가고 싶은 내 교회를 선택할 권리도 없다. “목사님 자녀”라는 타이틀은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본이 되어야 한다는 부담으로 PK의 목을 조른다. 아무리 노력해도 완벽해질 수는 없기때문에 늘 비난과 자책에 익숙하고 항상 부족하고 자신 없고 미안한 존재가 된다. PK에게는 부모도, 교회도, 목사님도, 이런 모든 것을 속시원히 나눌 친구도 없다. 철저히 혼자다. 때로는 부모에게 반항도 하고 싶지만 그것은 곧 하나님께 반항하는 것처럼 과장되게 느껴지고 부모님의 권위는 너무도 강력해서 숨을 쉴 수가 없다.모든 사람은 자기 부모에게는 최고의 관심과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PK의 부모님들은 거룩한 사명을 감당하느라 PK에게 최고의 관심과 사랑을 줄 여유가 없다. 그러는 동안 어떤 PK들은 마치 오랫동안 물을 주지 않아 말라 죽는 화초처럼 서서히 마음이 병들어 간다. 성인이 된 후 온 몸과 마음이 처참하게 무너진 상태로 상담실을 찾는 PK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모든 PK들이 다 그런 건 물론 아니다. PK가 어릴 때는 사역보다 PK를 더 우선적으로 돌보거나 둘 사이에 균형을 잘 맞추는 목회자 부부도 있다. 그리고 비록 상황이 힘들어도 잘 극복하면서 정서적으로 건강하게 자라주는 고맙고 기특한 PK들도 당연히 있다. 나 역시 남편이 목사이니 나의 자녀들도 PK이다. 아이들이 PK로 겪는 어려움을 최소화하려 나름의 노력을 많이 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만나는 대부분의 PK들은 상담실에서 만나는 분들이기 때문에 더 우울하고 무거운 모습이 많다.나는 부모님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따라 사역에 헌신하면서 자기 자녀는 방치하고 돌보지 않아 몸과 마음이 병들어 가는 PK들을 종종 본다. 마약에 중독되어 절실한 도움이 필요한 자녀를 외면하고 선교지로 떠나는 목회자도 있고, 늘 자살 생각으로 가득한 우울증이 있는 자녀는 알고도 방치하면서 사역에만 몰두하는 목회자도 있다. 그리고 이런 분들을 대할 때 내 마음에서는 견딜 수 없는 아픔과 분노를 느낀다. 나 역시 PK를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 그 내담자들이 다 내 자식 같아서 더 그런 마음이 든다. 그 PK 들이 느끼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철저히 버림받고 내던져진 거절감과 외로움이다. 이 세상에 자기를 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느낀다. 부모마저 그들을 버렸고, 그 부모가 섬기는 하나님도 그럴 것이라 느낄 것이다. 사역을 핑계로 그렇게 자녀를 방치할 거라면 자녀를 낳지 않는게 현명한 선택이다. 일단 자녀를 낳았다면 그 자녀에게 관심과 사랑을 기울여 키우는 것이 당연한 부모의 책임이다. 소아정신과 오은영 박사는 부모는 부모이기 때문에 반드시 아이에게 해 주어야 하는 것이 있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이런 부모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않고, “나는 오직 주님께 헌신하니 아이는 주님이 다 책임지신다”라 말하면서 자녀를 방치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무책임한 것이다.주님의 뜻을 이루고자 수고하시는 목회자들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말 못하는 PK들을 위해 호소하고 싶을 뿐이다. 당신의 자녀들은 당신이 돌보고 섬겨야 할 가장 첫번째 양이라는 것, 자녀들을 버리고 다른 사람들을 먼저 섬기지 말라는 것, 하나님이 맡기신 사역의 영역에 당신의 자녀들을 가장 일등으로 세우라는 것이다.송경화 교수월드미션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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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문제는 자녀교육에 대한 부모의 권리다 크리스천헤럴드2022.03.08
    지금 말하고 있는 이슈는 과연 “주정부가 부모의 교육 권리까지 박탈시킬 수 있는가?”라는 이슈다. 코로나19가 확산이 극심할 때 캘리포니아에서는 주지사의 명령으로 공립학교와 사립학교 구분없이 학생들에게 백신접종을 의무화 하겠다고 선포했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까지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강요했었다. 이것은 자녀들의 대한 부모의 권리를 무시하는 직격탄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아이들에게 가장 최선의 것을 선택할 수 있는 부모의 권리를 무시하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자녀들의 건강이나 교육 그리고 미래에 대해 부모보다 더 관심있는 사람들이 있을까? 당연히 없다.일부에서는 이런 부모들의 의향과 생각 그리고 뜻을 존중해 주지 않고 법으로 밀어붙이려는 주 정부에 반기를 들었었다. 이들의 생각은 장년들은 각자의 소견대로 행동을 취하면 되겠지만, 자녀들의 교육과 생활 및 건강에 대하여는 부모가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이 컸었다.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지금 말하고 있는 이슈는 과연 “주정부가 부모의 교육 권리까지 박탈시킬 수 있는가?”라는 이슈다. 이미 공립학교 교육이 수준이하로 떨어진 상황 속에서 많은 부모들… 특히 캘리포니아주에 살고있는 부모들의 생각은 캘리포니아 교육수준이 다른 주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져 있다고 여기고 있다.항간에서는 캘리포니아 주민들 가운데 들리는 소문은 2022년도에는 공립학교에서 자녀들을 빼내어 “홈 스쿨링”하는 부모들이 부쩍 늘어날 것이라는 예상이다. 이미 캘리포니아 남동부 지역에서는 폐쇄되는 공립학교가 늘어나고 있다. 왜냐하면 도시 외곽에 사는 사람들은 대략 중상류층인데, 공립학교 시스템을 불신하고 있고, 요즘처럼 성소수자들이 날뛰고 있는 상황에 자녀들을 공립학교에 맡길 수 없다는 생까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이것이 더 큰 문제가 된 것은 공립학교는 물론이고 사립학교에까지 주지사 행동명령을 강요하겠다고 하고 법을 어길 시 막강한 벌금을 물리겠다고 경제적 무력을 가해오고 있다. 이것은 자유 민주주의의 정신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나갔다는 의미다. 건강이란 내용을 가지고 주민들의 자유와 권리, 부모의 자유와 권리를 박탈시키려는 행동이라고 보고 있다. 그런데 백신 접종의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백신이 불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군인들이 이런 강제 행동명령에 거부하고 나선 것이었다. 군대 안에서 백신 접종에 대한 행동명령과 또한 매주 코로나19 테스트 규정은 부당한 처사라고 했다. 또 종교적 신념에 대하여 어긋나는 일이라고 해서 군인들이 거부하고 나섰던 것이었다. 주정부가 군인들에게 매주 코로나19 테스트와 마스크 착용을 강제로 강요하는 것은 종교 자유에 권한을 박탈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가운데, 잘못된 뉴스들이 나오면서 무조건 백신접종을 거부한다는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도 있다. 예를들어, 공군에서 가장 최고라고 할 수 있는 F22 랩터 스텔기 조종사들이 백신 접종을 거부하면서 군에서 사퇴했다고 했는데, 이것을 잘못된 보도다. 군 관계자들은 보통 이런 전투기 조종사들이 사퇴를 한다 하더라도 여러가지 많은 절차들을 통과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쉽게 보통 사람이 직장에서 수퍼바이져에게 “나 그만 두겠소”라고 나올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말이었다.그러면 이것이 왜 그토록 문제가 되는가? 모두가 다 같이 건강하자는데 뭐가 문제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건강을 위해서는 백신을 맞을 수도 있다. 그런데 아까 언급했지만, 캘리포니아주에서 주지사 행동명령으로 내놓은 법안이 불당한 처사라는 것이다. 적어도 부모의 입장으로 볼 때 주지사가 이런 행동 명령을 계속 만들어 낸다고 하면 자녀교육에 있어서 부모의 권리를 빼앗기게 된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면 학교에서 학생들이 배우는 것에 대하여 부모는 아무런 할 말이 없다는 결론이다. 그저 학교 정책에 의해 학생들은 교육되어지고, 부모의 권리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처럼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12학년까지의 자녀를 둔 학부모들도 아직 늦지 않았다. 학교에 깊이 관여해서 자녀들의 교육은 물론이고 학교 분위기까지 바꾸어 놀 수 있었으면 한다. 사실 부모들은 자녀들의 교육을 위하고 아메리칸 드림을 위해서 미국에 왔다고 하지만, 우리는 밤낮 돈 버는 것에 많이 신경썼지만 자녀들의 세계와 그들이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는지는 전혀 관혀하지 않고 있었다. 많은 이민 가정을 보면 영어가 원만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그저 공립학교 교사들에게 자녀를 맡기고 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공립학교에서 여러분의 소중한 자녀들이 어떤 교육을 받고 있는지 아신다면 경악을 금치 못하실 것이다.주성철 목사태평양법률협회 한국어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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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하나님의 채워주심을 경험하려면… 크리스천헤럴드2022.03.08
     카카오톡 아이디 kimbg1212로 연결하시면 매일 카톡으로 말씀을 묵상할 수 있는 큐티 자료를 보내 드립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행복을 풍족함, 건강, 명예, 지식, 여유로움, 쾌락…. 등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을 마음속에 모신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풍성히 채워주시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가 하심 말씀을 건성으로 대충 한 귀로 듣고 흘려 버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깊은 관심을 가지고 마음을 다하여 경청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우리 주님은 원수 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라고 하신 대상을 살펴보면 미워하는 사람, 모욕하는 사람, 저주하는 사람, 뺨을 치는 사람, 겉옷을 빼앗는 사람 등입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사랑을 베풀기보다는 다시는 보지 말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더 나아가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고 선하게 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의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이렇게 사셨음을 알수 있습니다. 그는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실 정도로 가난하게 사셨지만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풍성히 주시고 사람들의 연약을 긍휼히 여기시고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침 뺃음의 모욕을 당하셨고 가시관을 쓰시고 마치 죄인처럼 자신을 다루며 못박는 그들을 향해 저들의 죄를 용서해달고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옷을 다 빼앗기셨고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다 주셨음을 알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큰 사랑인가요?사람들은 자신에게 관대하게 대해 줄것을 기대합니다. 내가 뭔가를 잘못해도 상대방이 와서 용서해준다고 말해주기를 기대합니다. 나의 필요를 누군가 알아서 채워주기를 기대합니다. 사람들은 타락한 죄성 때문에 끊임없이 시기하면서 불평하며 갈등 속에 살아갑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남에게 대접받기는 원하면서 대접하기는 싫어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상대에게 먼저 해주라고 말씀하십니다.예수님은 우리에게 적극적으로 남을 대접하라고 하십니다. 내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이 원칙을 기억하며 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말씀을 따라 살면 그러면 너희는 큰 상을 받을 것이요, 너희는 가장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말씀하신 큰 상급을 바라보아야 하며 하나님의 나라의 자녀로 그 품위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일반화하여 주라 그러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은 물질을 생각하여 물질을 하나님께 드리면 풍성이 받는 다고 생각 하고 자신의 형편보다 더 많은 물질을 드려서 복을 받으려는 얄팍한 속셈으로 이 말씀을 남용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문맥상 사람을 선히 대하는 것과 원수를 사랑하며 축복하는 일, 자신의 겉옷까지도 주는 일, 다른 사람을 헤아리는 일등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그러면 하나님께서 채워주신다고 하십니다. 채워주시는데 하나님이 친히 후히 되어 주시고, 거기다가 누르고 또 흔들어 그리고 넘치도록 하여 가득 채워 안겨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진정한 영성이 무엇인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실천하며 살아갈 떼 하나님이 풍성히 넘치도록 채워주시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 입니다. 아멘 김요셉 목사가든그로브 복음루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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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소통은 함께 함이다” 크리스천헤럴드2022.02.23
    교회가 전도해야 하는 세상이 교회를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을 마음 아파하면서도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이때가 교회를 새롭게 할 때인 것을 공감할 것이다 이 시대가 소통을 강조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내용이 아니다. 국가 정부 뿐 아니라 회사나 단체 그리고 가정에서도 소통을 강조하고 있다.얼마 전 요즘 세대는 월급을 많이 주는 것 보다 소통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여 회사를 결정한다는 기사를 읽었다. 아마 기성 세대 특히 배고픔을 거친 세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지만 그만큼 소통이 중요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젊은 세대가 원하는 소통은 함께 하는 것이다. 일방적이고 권위적이며 지시하여 목적을 이루고 결과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함께 생각하고 함께 진행하고 함께 그 결과를 만들어 나가는 소통이다. 그 소통을 통하여 만족감을 얻기 때문에 더 많은 경제적인 보상이나 업적보다 더 중요한 함께 함을 선호하는 것이다. 이런 소통을 모르고 지시한대로 시키는 대로 일방적으로 살아 온 기성세대는 젊은 세대를 답답해 하고 건방지다 하고 아무 것도 모르면서 자기주장만 내세운다고 한탄한다. 그러니 점점 세대 간의 간격이 더 벌어지고 갈등은 깊어진다. 그런 것이 정치적인 의견 대립과 충돌로 드러날 때는 걷잡을 수 없는 갈등 관계가 되기도 한다.그런데 이런 안타까운 모습이 교회에서 더 잘 드러나고 있다는 것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여전히 권위적인 몇몇 직분자들은 교회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모습으로 너무나 세속적인 행태를 보여주고 있다. 교회를 마치 자신의 전유물이나 소유물이 된 듯 함부로 한다. 그래서 교회가 전도해야 하는 세상이 오히려 교회를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을 마음 아파하면서도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이때가 교회를 새롭게 할 때인 것을 공감할 것이다.어떻게 교회가 새로워질 수 있을까? 교회는 함께 하는 것을 회복해야 한다.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하신 것처럼(요한복음 7장 16절) 교회는 함께하는 것이 신앙적인 것을 알아야 한다. 예전에는 모든 것이 일방적이었다. 목회자는 가르치기만 하고 성도들은 배우기만 하였다. 그래서 좋은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였다. 그 훈련 프로그램으로 성공하였다는 소식을 들으면 많은 목회자는 그것을 배우기 위하여 달려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양한 훈련이라는 이름으로 과정을 만들어 그 과정을 이수하는 사람들에게 직분과 역할이 주어졌다. 그러나 그 폐해가 얼마 지나지 않아 드러났다. 사람이 도무지 변하지 않고 직분을 받게 되니 아픔이 되는 것이 속속 드러나면서 훈련의 무용성까지 나오게 되었다. 그러면 훈련을 하지 않아야 하나? 아니다. 함께 하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가르치고 따라오는 구조에서, 답을 정해 놓고 그 답을 요구하는 방법에서 벗어나 서로 서로에게 함께 하는 것을 익혀 나가야 한다. 모든 과정을 획일화하여 그 과정을 이수하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는 각 사람에게 적합한 과정을 만들고 그 과정을 함께 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그러려면 목회자는 성도 개개인을 잘 알아야 한다. 그의 성품, 성향, 성격, 태도, 일상 등을 잘 알아야 한다. 마치 목자이신 예수님이 양들의 이름을 아시는 것처럼 목회자는 성도를 알아야 한다. 그 성도의 강점과 약점을 알고 어떤 과정을 어떤 내용으로 어떻게 훈련하여 그 성도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온전하게 하는 것을 만들고 시행해야 한다.그것이 목회자의 날마다의 기도 제목이며 연구와 노력이 되어야 한다.지금 팬데믹 상황에서 우리는 다시 본질로 돌아갈 수 있는 너무나 좋은 기회를 하나님이 주셨다고 믿는다. 더 좋은 영상 장비와 시설을 만들고 더 많은 사람을 현장으로 불러 앉힐 방법을 머리 싸매고 궁리하는 것을 그치고 한 영혼에게 집중할 때가 되었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김병학 목사주님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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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행동 설계의 힘 크리스천헤럴드2022.02.23
    변화를 일으키는 힘은 인간의 감정이다. 사람들의 감정이 움직일 때 비로소 변화가 일어난다   새해에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결심을 한다. 이제 1월이 지나면 새해의 많은 결심들 중에서 많은 것들을 포기하게 된다. 변해야하는 줄은 알지만 변화를 하겠다고 굳은 결심을 하였지만 그리고 열정을 가지고 시작하였지만 여러가지 이유들로 인하여 실행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책이 하나있다. 짐 히스와 댄 히스라는 형제가 쓴 ‘스위치 : 손쉽게 변화를 이끌어 내는 행동 설계의 힘’라는 제목의 책이다. 변화를 추구하는 방식에 관한 책이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조언했다. “행동 방식에 변화를 가하려면, 당신은 기수에게 방향을 제시하고 코끼리에게 동기를 부여하며 지도를 구체화해야 한다. 이 세 가지를 동시에 해내는 경우 당신은 권한과 자원이 많지 않더라도 실로 극적인 변화를 창출할 수 있다.” 풀어서 설명하면 변화를 하기 위해서 다음의 세 가지 요소가 중요하다. 첫째 지도자가 비전을 분명히 세워야 한다. 비전이 분명하고 구체적일수록 그것을 성취할 가능성이 높다. 둘째 변화를 일으키는 힘은 인간의 감정이다. 사람들의 감정이 움직일 때 비로소 변화가 일어난다. 저자들은 감정을 코끼리에 비유하면서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지만 조절하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셋째 감정을 잘 통제하여서 변화가 일어나게 하기위해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야 한다. 결국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인간의 감정이지만 그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사람이 의지를 가지고 감정을 통제하는 것은 곧 지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객관적인 계획이 있어야 한다. 그럴 경우에 작은 조절을 통하여서도 큰 변화를 일으킬 수가 있는 것이다. 책은 몇 가지 예화를 들었다. 극장에서 사람들에게 대, 중, 소, 세 가지 종류의 팝콘 그릇을 나누어주고 영화를 보면서 먹게 하였다. 그릇의 크기 말고 다른 요소들은 다 무작위로 하여 차이가 없었다. 영화가 끝이 난 후 사람들이 팝콘을 먹은 양들을 비교해 보니 사람들이 무의식 중에 팝콘을 먹었는데 큰 그릇을 가진 사람이 많이 먹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이어트를 하려면 음식을 많이 차려놓고 의지로 자기의 감정을 통제해서 적게 먹으려고하기보다 그릇을 다 작은 것으로 교체하면 아무래도 자연스럽게 적게 먹게 된다는 것이다. 아마 올해 다이어트를 목표하고 시작하였는데 벌써 처음 시작하였던 열정은 줄어들고 의지도 줄어들어서 포기하는 지경에 이른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변화를 너무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려는 의지에만 맡겨두지 말고 이런 실제적인 방안을 써보면 어떨까 한다.그 전에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대입 입시를 위하여 열심히 공부하는데 새벽에 5시에 일어나서 공부하기로 결심하였다. 비전도 분명하고 그것을 실행하려는 감정도 충분한데 막상 아침이 되어서 알람시계가 울리면 너무 피곤하니까 더 자고 싶은 마음에 일어나려는 마음보다 크게 되고 결국은 알람을 끄고 계속 자게 되었다. 대부분 그럴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 방법을 연구하였다. 그가 아파트 10층에 살고 있었는데 알람시계를 나무상자에 넣고 그 상자의 열쇠를 저녁에 1층 정원에 숨겨둔 것이다. 아침에 5시가 되어서 알람이 울리는데 일어나려는 마음보다 알람을 끄고 자고 싶은 마음이 더 많지만 알람을 끌 수가 없고 결국은 알람을 끄기 위하여 아파트 1층까지 내려와서 열쇠를 가지고 다시 올라가서 알람을 꺼야하는데 그 과정에서 이미 잠이 다 깨어 있어서 다시 눕지 않고 공부를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나도 글을 쓰고 책을 출판하는 것을 결심하지만 실제적으로 결심을 실행에 옮기는 일이 쉽지 않은 것이다. 생각은 많은데 글로 정리되어 완결되지가 않는다. 그래도 글을 쓰는데 가장 좋은 것은 신문이나 언론 기관에 정기 기고를 하는 것이다. 처음과는 달리 바쁜 스케줄에 글을 쓰고자 하는 의지도 식고 감정도 식지만 마감일이 다가오면 어찌되었던 글을 써야하고 마감을 해야하기 때문에 그때 그때는 힘들지만 시간이 지나면 글들이 남는다. 이렇게 모아진 조각글들이 모여서 책이 되는 것이다. 아마 의지나 감정만을 가지고는 책을 완성하기 어렵고 변화를 위해서는 이런 행동 설계가 필요한 것이다. 지도력을 실행하는데에서도 이런 행동 설계는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기업체에서 문화를 바꾸는 것도 사람들의 의지와 감정에 호소하고 나아가면 일시적인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새로운 문화로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행동을 설계하고 조절할 필요가 있다. 전도사로 학생 사역을 할때에 점심식사 후에 1시부터 예배가 있었는데 학생들이 점심 먹고 대화를 하려고 예배실에 들어오지를 않아서 예배가 정시간에 시작되지 못하고 지연되게 되었다. 아무리 감정에 호소를 하여도 예배가 늦어지고 다른 사람들이 늦게 들어오니까 일찍왔던 사람들도 다음에는 늦게 들어오고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그래서 결심을 하고 광고를 하고 예배시간 1시가 되면 예배실 문을 닫아버리고 더이상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처음에는 몇 명을 놓치게 되었지만 나중에는 결국 다 시간을 잘 지키게 되었다. 개인 자신의 삶의 변화를 위해서도 또는 조직의 문화를 바꾸는 일에서도 사람들의 의지와 감정만을 의지하는 것보다는 행동을 설계하고 나아가는 것이 효과가 있을 때도 있는 것 같다.신선묵 교수월드미션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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