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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지상설교 - 박희민 목사편 -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2) 크리스천헤럴드2022.06.21
    설교를 제대로 준비하는 목사들이라면 설교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자세는 물론, 삶의 철학, 세계를 보는 시각과 가치관 등이 담기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존경받는 목회자들은 자신만의 명설교들을 가지고 있다. 남가주 한인 기독교계에서 몇 안 되는 존경받는 원로로 꼽히고 있는 목사 중 한 명이 새생명선교회 회장 박희민 목사다. 박희민 목사는 1936년 충남 예산에서 출생했다. 에티오피아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1974년부터 남가주에서 목회했다. 1988년부터 나성영락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취임한 후 2004년 은퇴했다. 현재 새생명선교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박희민 목사의 지상설교 3번째 주제 ‘영과 진리도 드리는 예배’ 두 번째다. (편집자 주) 예배순서를 보면 크게 두 가지 순서가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의 계시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의 감사와 응답이다. 예를 들어 성경을 읽고 설교를 하고 축도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계시하고 선포해주는 것이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헌금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와 은혜에 대한 인간의 감사와 응답이다.이 두 가지가 마주치면서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을 통해 죄 용서함을 경험하고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맛보며 새 사람됨을 체험하게 된다. 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보여주시는 새로운 삶의 비전과 환상을 바라보게 되며 상처받은 심령이 치유되고 회복되며 자기 자신과 세상과 사탄의 유혹을 이길 수 있는 새 힘과 능력을 경험하게 된다.이런 신령과 진리로 드려지는 예배가 회복되고 예배가 살아나야 한다. 예배가 살 때 교회가 살고 교회가 살아야 우리 사회와 백성이 살고 소망이 있게 된다. 그럼 예수님이 말씀하신 신령과 진리로 드려지는 예배가 어떤 것인가? 기독교 예배에는 성경을 기초한 다섯 가지 중요한 신학적 원리가 있다.1.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 예배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분명이 이해해야 한다. 예배의 대상이 잘못될 때 우상숭배가 되고 미신이 되어진다. We become what we worship이란 말이 있다. 우리는 예배의 대상을 닮아가게된다. 예배드리는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요 인자하시고 공의로운 하나님이시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며 인격적인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그런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예배드릴 때 그의 거룩하심과 인자 하심과 공의와 사랑을 닮아가게되는 것이다. 인격적인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경배하고 찬양해야 한다.이사야 6장에 보면 이사야가 성전에 들어갔을 때 스랍들이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우고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모습을 바라보게 된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을 바라보고 체험하면서 자기 자신이 누군가를 깨닫게 된다. 그는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하고 자기 죄를 고백하고 회개 하게되며 그때 하나님이 스랍을 통해 숯불로 그의 입술을 지져 깨끗하게 치유하고 새사람 되게 하신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심정을 깨닫고 누가 나를 위해 갈꼬하는 부름에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주소서 응답하고 헌신하게 된다. 예배를 통해 이 세 가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을 바라보며, 자신이 죄인 됨을 고백하고 회개함으로 새 사람됨을 경험하며 새 소명과 헌신을 경험하여야 한다.주일 오후에 어느 목사님이 집으로 가다가 집 가까이에 사는 집사님을 만났다. 목사님이 오늘 교회에서 보지 못한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있었느냐 물었더니 그가 머리를 만지며 대답하기를 “사실은 목사님 제가 오늘 교회가서 예배 드리면서 골프장 생각만 하고 앉아 있기보다는 골프장에 가서 교회 생각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서 골프장에 갔었습니다”라고 고백했다. 말이 된다. 교회에서 예배드리면서 딴생각하고 있으면 예배를 공치게 되는 것이다.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고 경배하여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정과 사랑을 가지고 이웃을 섬겨야 한다.2. 예수 그리스도중심의 예배.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우리가 볼 수 없다. 그 하나님을 보여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다. 그러므로 기독교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예배다. 예수의 성육신은 하나님을 보여주셨다. 그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그의 부활은 우리의 영생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우리가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사건과 부활을 바로 이해할 때 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진리되신 예수그리스도를 바로 이해 할 수 있을 때 진리로 드려지는 예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예수님이 가장 사랑하시고 자주 들렸던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 삼남매의 가정이 있었다. 한 번은 예수님이 그 가정을 심방 가셨을 때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앞에서 말씀을 경청하며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마르다는 열심히 음식을 준비하였다. 말씀과 예배없이 섬기다 보면 불평이 생긴다. 그래서 예수님께 동생 마라아로 하여금 왜 좀 나를 도와주라고 말씀하지 않는냐고 불평하게 되었다. 그때 예수님은 네가 많은 일로 분주하지만 한 가지면 족하도다 하시면서 마라아는 그 좋은 편을 택하였다고 말씀하셨다.여기서 예수님은 무엇을 말하려고 한 것인가? 예배가 우선권이라는 말이다. 교회에서 봉사할 때도 먼저 예배를 priority로 두어야 한다. 그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 하나님 중심의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예배가 없는 섬김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자기중심적인 섬김이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독선적인 섬김이 된다. 그때 봉사가 기쁨이 아니라 무거운 짐이 되고 불평거리가 되어진다. 진리 되시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예배가 될때 예배자는 주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찾아가 사랑으로 섬기게 되는 것이다.3. 성령을 통한 예배.예수님의 사건은 역사적으로 2천 년 전 사건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사건과 부활의 사건을 오늘 나의 사건과 교회 공동체의 사건으로 체험하게 하는 것이 곧 성령의 역사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를 이해하지 못하면 신령과 진리로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설교만 듣기위해 교회 나와서는 안 된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와야 한다. 예배를 통해 지식과 정보를 얻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얻고 치유를 경험하고 구원을 경험하며 삶의 변화를 경험해야 하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는 예배를 통해서만 우리는 삶의 감격과 눈물과 회개와 치유, 그리고 삶의 놀라운 변화를 맛보게 되는 것이다.4. 공동체적 예배.예수님은 제물을 드리다가 형제와 불화한 것이 생각나거든 제물을 두고 돌아가서 형제와 화해하고 돌아와서 그 제물을 하나님께 바치라고 했다. 이것은 공동체 예배를 강조해 주는 말씀이다. 찬송을 함께 부른다든가 서로 인사를 한다든가 아멘으로 화답하는 것은 바로 공동체적 예배를 강조하는 것이다.그러므로 예배드리고 서로 인사도 안하고 째려보고 나간다든가 제직회나 파킹장에서 서로 다투고 싸운다면 예배를 공치는 것이다. 온 교회가 주님 안에서 한 공동체가 되고 한 사람이 아파 할 때 모든 지체가 함께 아파하고 한 사람이 기뻐 할 때 온 공동체가 함께 기뻐하며 축제를 즐기게 되는 것이다. 김 집사가 아파하는데 이집사가 고소하면 이것은 한 몸된 공동체의 모습이 아니다.   5. 기독교예배는 예배와 삶이 하나다.로마서 12잘 1절에 보면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했다. 무슨 말인가? 우리의 삶을 통해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이 가장 기뻐 받으시는 참된 예배라는 것이다. NIV 영어성경에는 ‘This is your spiritual act of worship.’라고 번역하였다. 계속해서 2절에서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므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했다.어떤 목사님이 미국교회 예배에 참석했다. 계속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읽고 간증하는 등 다른 교회 예배와 달리 예배가 진행 되고 있었다 그래서 옆에 있는 성도에게 “정식예배가 언제부터 시작되느냐?”고 물었다. 그는 “당신이 이 교회 문을 나갈 때부터 정식예배가 시작된다”고 말했다. 아주 중요한 말이다. 주일 한 시간 예배는 서론이다. 그리고 주일 오후부터 월화수목금토일 주일 아침까지가 본론이다. 그러니까 주일예배에서 선포되고 경험한 말씀과 은혜를 일주일 동안 가정과 사회에서 혹은 일터에서 삶에 적용하고 실천하므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이 점에서 예배의 끝은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는 영적예배의 시작인 것이다. 다시 말해 기독교 신앙 안에서 예배와 삶은 하나다. 아니 예배와 섬김도 하나이다. 영어로 Service라는 단어는 예배도 되지만 섬김이라는 뜻도 된다. 이것은 예배와 섬김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잘 설명해 준다. 크리스천에게는 강대상과 오피스의 Desk가 일직선상에 놓여있다. 교회 성찬상과 가정의 식탁이 일직선상에 놓여있는 것이다. 예배와 선교도 하나이다. 예배와 삶이 하나되지 못하고 예배와 섬김 또는 선교가 하나되지 못하고 분리될 때 위선적인 삶이 되는 것이다.하나님이 가장 기뻐 받으시는 영적인 예배는 우리가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드리는 예배라는 것이다. 즉 삶의 현장에서 가난하고 고난 당하며 소외된 사람들 예를 들면 고아나 과부들, 다시 말해서 자기 힘으로 자기 권리를 지킬 수 없는 힘없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가지고 찾아가 만나주고 사랑해 주며 인정해주고 격려해주고 섬겨주는 삶이라는 것이다.어떤 이가 세상에는 심미적 크리스천들이 많은데 이들은 누구냐? 예배드리고 위로받고 즐기기만 히는 사람들이다. 이웃의 가난과 고통받는 사람들을 찾아가 만나주고 그들의 고독과 아픔을 나누고 섬겨주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참여하기를 기피하는 사람들이다.또 윤리적 크리스천들이 있는데 이들은 누구냐? 내가 받은 상처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경험케 하려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윤리적으로 실수한 사람들을 용납하지 못하고 정죄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상처를 주고 받게하는 사람들이다. 그것을 보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그리스도인들이다. 내가 신학교를 책임을 지고 있을 때 공부했던 한 목사님이 있다. 그는 조폭 세계의 경험도 있고 마약 경험도 있는데 그가 한번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자기가 교회에 들어와 보니까 조폭 세계에서도 보지 못 한 것을 볼 때가 많다.” 조폭 세계는 질서가 있고 충성이 있고 의리와 용서가 있는데 교회는 그렇지 못한 것을 수없이 경험한다는 것이다. 더 잔인하다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최고의 축복이다. 그러므로 예배를 신령과 진리로 드림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 무엇보다 믿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하나님은 아벨과 가인의 제사 중 아벨의 예배만 받으셨다. 그것은 아벨이 믿음으로 드렸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성령 충만한 예배가 되도록 마음을 열고 기도하고 찬양하며 말씀을 사모해야 한다. 예배는 전쟁인 동시에 축제다. 예배는 생명이요. 주님과의 만남이요. 응답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경청하며 하나님의 은혜에 아멘으로 화답하며 무엇보다 예배를 통해 삶의변화를 체험하며 말씀과 은혜를 생활화해야 한다. 이런 축복이 함께하시기를 축복한다.박희민 목사새생명선교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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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지상설교 - 박희민 목사편 -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1) 크리스천헤럴드2022.06.07
    설교를 제대로 준비하는 목사들이라면 설교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자세는 물론, 삶의 철학, 세계를 보는 시각과 가치관 등이 담기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존경받는 목회자들은 자신만의 명설교들을 가지고 있다. 남가주 한인 기독교계에서 몇 안 되는 존경받는 원로로 꼽히고 있는 목사 중 한 명이 새생명선교회 회장 박희민 목사다. 박희민 목사는 1936년 충남 예산에서 출생했다. 에티오피아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1974년부터 남가주에서 목회했다. 1988년부터 나성영락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취임한 후 2004년 은퇴했다. 현재 새생명선교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박희민 목사의 지상설교 3번째 주제 ‘영과 진리도 드리는 예배’ 첫 번째다. (편집자 주) 본문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말씀이다.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대화한 내용이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하는데 어느 것이 옳은가? 질문을 던졌다. 이 질문은 아주 중요하고 어려운 신학적인 질문이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도 아니고 그리심산도 아니고 하나님은 영이시나 신령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대답해 주셨다.사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하고 기본이 되는 것이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고 신령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생활의 기초요 ABC다. 영국의 에릭 이란 젊은이는 1924년에 캠브리지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해 파리 올리픽에 참석해서 400미터 육상 경기에서 금메달을 받았다. 그러나 원래 그는 100미터 경기 금메달리스트였다. 그런데 주일날 경기가 있자 주일을 지키기 위해 그 경기를 포기했다. 큰 뉴스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금메달 리스트의 영광을 포기하고 중국에 선교사로 들어가 20여 년 간 열심히 복음을 전하다가 40대 중반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일생을 영화로 만들게 되었다. 그 영화가 ‘불수레’라는 영화인데 1982년에 아카데미 최우수상을 받았다. 이 한 편의 영화가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10계명에 보면 제4계명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말씀이다. 구약시대는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를 안식일로 지켰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그렇게 지킨다. 출애굽기 31잘 14절에는 안식을 지키지 않고 더럽히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고 하였다. 그만큼 엄격하고 철저하게 지켰다. 그러나 신약시대 와서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주일을 지키면서 안식일이 주일로 바뀌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우리가 일주일에 하루를 구별하여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이것은 창조의 질서다안식일의 시작은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후 안식한 데서 시작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원리와 창조 사역을 바로 이해 해야만 안식일의 의미를 바로 알 수 있다. 기계를 사면 매뉴얼이 따라온다. 거기에 지시대로 다루어야 기계가 고장이 안 나고 잘 작동한다. 인간과 자연도 마찬가지다. 창조해 주신 하나님의 고안과 설계를 따라 다루어야 한다. 그런데 그 매뉴얼의 중요한 원리의 하나가 일주일에 하루를 쉬는 것이다. 이것을 거슬려 살 때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건강이 망가지며 삶의 리듬이 깨지고 병이 생기게 된다. 사람들에게 안식을 주기 위한 것안식의 궁극적 내용은 살롬이다. 룻기 3장 1절을 보면 나오미가 룻에게 말하기를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나?”라고 말한다. 이것은 보아스를 만나게 해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말이었다. 이 장면은 우리가 신랑 되신 예수님을 만나 천국에서 안식할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즉 주님과 함께 천국에서 기쁨과 행복을 누릴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다. 주일은 천국의 안식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주일을 거룩하게 잘 지키려면 토요일부터 준비해야 한다. 어려서 학교에서 소풍간다면 얼마나 그날을 기다리며 준비하였는가? 소풍 갈 때 입을 옷 음식을 미리 준비해 놓고 밤에 자다가도 혹 비가 오면 어떻게 하나 염려가 되어 하늘을 몇 번씩 점검해 보지 않았는가? 주일을 사모하고 기다리는 마음이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토요일 저녁에는 좀 일찍 자는 것이 좋다. 너무 늦게까지 TV보고 비디오를 너무 늦게까지 보면 주일 예배시간에 졸기쉽고 안졸아도 TV나 비디오에서 본 장면들이 눈앞에 오락가락해 은혜받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우스운 이야기가 있다. 어떤 집사가 토요일 저녁 밤늦게까지 사극 비디오를 보느라고 밤을 새다시피하고 주일 아침에 교회왔다. 하필 기도 차례였다. 그래서 강단에 올라가 기도하면서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라고 한다는 것이 ‘전하 성은이 망극하나이다’해서 온 교인이 웃었다는 말이 있다.교인들 중에는 교회 오면서 부부싸움을 하는 분들도 더러 있다. 남자들은 양복만 걸치면 간단히 끝나는데 여자들은 그렇지 않다. 화장도 해야 하고 머리도 해야 하고, 아이들 옷도 입혀야 하니까 시간이 아무래도 더 걸린다. 그러다 보니 교회 오면서 부부가 당신 때문에 또 5분, 10분 늦었다고 다투게 된다. 그렇게 마음이 상해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다 보니까 신령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는데 방해가 된다.교회 오가면서 부부끼리 대화도 조심해야 한다. 아이들이 뒤에서 앉아서 안듣는 것 같아도 부모의 대화를 다 듣고 있다. 이민사회에서 대화거리가 없으니까 교회 이야기를 많이 한다. 차를 타고 목사님 장로님 흉도 보고, 권사님 집사님 욕도 좀 하면 뒤에서 다 듣고 목사님이나 장로님도 별로 믿을 사람이 못 되는구나 하는 부정적인 생각이 그 어린이들의 마음속에 뿌려진다. 이렇게 가라지가 뿌려지면 교회학교에서 아무리 성경말씀과 좋은 말을 가르쳐 주어도 잘 받아드려지지 않게 된다. 자녀들의 신앙교육을 실패하게 하는 가장 큰 이유의 하나가 대부분 부모들에게 있다. 그러므로 차 안에서의 대화도 교회와 성도들에 대한 긍정적이고 좋은 미담을 나누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가능한 10분 전에 교회와서 그날 예배에 부를 찬송가를 미리 찾아 놓고 성경을 미리 읽고 묵상하면서 기도로 예배를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언제인가 젊은이들이 교회 앞에서 서로 대화하는 것을 들으니까 “오늘 날씨가 너무 좋다”, “예배드리기에는 너무 아깝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여러분 예배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더 중요한 것은 예배가 무엇인가를 바로 이해하고 무엇보다도 신령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려는 자세다. 예배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사건이다. 존 헉스테이블은 “예배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 간의 대화다”라고 말했다. 윌리암 탬풀은 “예배는 첫째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의하여 양심을 각성시키고, 둘째 하나님의 진리로 지성을 기르고, 셋째 하나님의 아름다움심에 의해 상상력을 맑게 하고, 넷째 하나님의 사랑에 마음을 열고 다섯째 하나님의 목적에 뜻을 바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박희민 목사새생명선교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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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김요셉 목사의 카톡큐티 -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 예수님 크리스천헤럴드2022.06.07
     카카오톡 아이디 kimbg1212로 연결하시면 메일 카톡으로 말씀을 묵상할 수 있는 큐티자료를 보내 드립니다.요한복음 17장은 첫째는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요, 둘째는 열두 제자를 위한 기도요. 그리고 오늘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 이 땅의 모든 성도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다는 것은 교회의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가 되는 것만큼 이 역사속에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주님은 믿은  사람들이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루기 위해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 중심으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인 영혼 구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될 때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은 세상에 드러낼 수 있습니다.  교회는 복음 전하는 증인 공동체로 이 땅에 주님이 세우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믿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은 성도들의 궁극적인 소망인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야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신앙의 궁극적이 목표 는 천국가는 것입니다. 주의 성도들은  하늘 나라의 영광인 영원한 구원을 바라 보면서 이 땅에서 죽는 날까지 어떤 유혹과 핍박이 오더라도 결단코 세상과 타협하거나 진리를 양보하거나 세상에 오염되지 아니하고 끝까지 거룩함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상속자 입니다. 그리고 천국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가 부활의 몸 인 영광스러운 몸을 입어 하나님의 후사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영광스러운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며 기도할 때  어떤 세상의 유혹에도 마음을 빼앗기지 아니하고 끝까지 진리안에서 살아가는 믿음의 승리자가 될수 있습니다.그리고 예수님은 믿는 사람들이 아버지의 사랑을 나타내는 공동체가 되게해  달라고 기도 하셨습니다.  그 사랑을 알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이름을 알아야 하는데 그의 이름을 알게 하는 목적은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우리안에 있게 하기 위함 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빼버리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성도는 참된 성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를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 마음속에 없으면 자기만을 사랑하는 것이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모든게 불만이 됩니다. 자기 연민에 빠지게 됩니다. 자기만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하면 그 마음에 고통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충만히 부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살릴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모든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흘러가게 살지 않기 때문에  불행을 자초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세상에 모든 사람들 가운데 내 맘에 드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 보내야 합니다.  악에,  독에 받쳐 있는 마음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녹여햐 합니다. 그래야 내가 행복하게 삽니다 우리는 기도 할  자유와 기도 하지 않을 자유가 있습니다. 나의 자유를 결정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마치 비가 내리는데 바가지를 꺼꾸로 들고 있는 것과  같기 때문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은혜를 단 하나도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오늘 우리는 예수께서 기도를 가르쳐 주신 대로 하나가 되며 천국을 바라보면서 세상에 마음을 빼았기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람들을 살릴수 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아멘.김요셉 목사가든그로브 복음루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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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조영석 목사 칼럼 - '틈' 크리스천헤럴드2022.06.07
     오랜만에 만난 아내가 반갑고, 집으로 돌아와서 기분도 좋은데 속에서 자꾸 짜증이 난다. 갑자기 아내의 운전습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왠지 아내의 말투가 거슬린다. 아내의 말과 행동에서 어딘가 탐탁지 않은 부분들이 자꾸 보이고 신경이 쓰인다 …조금은 긴 일정으로 한국을 다녀왔다. 아내와 떨어져 있는 동안 영상통화를 자주하며 지내서인지 거리감을 느끼지 못했고 항상 가까이 있는 듯했다.공항에 마중 나온 아내와 반갑게 포옹을 하고 웃으며 차를 타고 집으로 출발했다. 익숙한 거리로 집으로 향하며 그간 있었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씩 불편해졌다. 오랜만에 만난 아내가 반갑고, 집으로 돌아와서 기분도 좋은데 속에서 자꾸 짜증이 난다. 갑자기 아내의 운전습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왠지 아내의 말투가 거슬린다. 아내의 말과 행동에서 어딘가 탐탁지 않은 부분들이 자꾸 보이고 신경이 쓰인다.그렇게 반가웠던 재회는 조금씩 어색한 분위기로 바뀌었고, 우리의 대화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좋은 이야기를 나눠도 모자랄 판에 싫은 소리들이 오가며 둘 다 마음이 언짢았다. 분위기를 망친 나 자신도 왜 그랬을까 싶었다. 오랜만에 만난 아내에게 짜증을 내고 잔소리를 한 것이 미안하고 후회가 됐다.그날 저녁 내가 왜 그랬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 이유는 바로 우리가 떨어져 있는 사이 생긴 거리 때문이었다. 같이 있을 때는 익숙해져서 잊고 있었던 서로의 차이들이 거리로 인해 생긴 틈을 통해 다시 드러나 보인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뒤에는 다시 평소처럼 더이상 아내의 습관이나 행동이 거슬리지 않았다. 떨어져 지낸 만큼 다시 서로의 차이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사실 아내와 나는 성격과 성향이 많이 다른 사람들이다. 생각도 다르고, 대화하는 스타일도 다르다. 생각 차이와 의견 충돌로 인해 다툰 적도 있고, 오해를 한 적도 있다. 이 차이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적응한 것일 뿐, 처음이나 지금이나 우린 변하지 않았다. 다만 서로에게 맞춰가며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이것은 우리만이 아니라 많은 부부들도 그럴 것이다. 오래전 참석한 세미나에서 메인 강사가 치약을 중간부터 눌러 짜는 아내의 습관을 받아들이는데 20년이 걸렸다고 하는 말을 들은 적 있다. 이것이 상대의 방식을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부부의 모습일 것이다.부부만이 아니라 우리가 맺고 있는 많은 관계들이 그렇다.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똑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다른 환경에서 살면서,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성격과 습관을 가진 다른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부부로 살고, 친구로 지낼 수 있는 것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서이다. 서로의 좋은 점에 집중하고 이해되지 않는 다른 점들은 그냥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지 않는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없다.펜데믹으로 인해 교회에도 틈이 생겼다. 떨어져 지낸 동안 성도와 성도 사이에 거리가 생겼다. 함께 모여 예배 드리지 못하고 교제하지 못한 사이 힘써 주안에서 하나를 이루었던 공동체 사이에 다시 메꿔야 할 틈이 생겼다.긴 공백을 끝내고 이제 교회로 모이고 있지만 이 틈을 통해 그동안 잊고 있었던 서로의 차이와 허물을 다시 보게 될 수 있다. 우리의 다름과 다양성을 인정하고 서로의 차이가 익숙해질 때까지 인내하고 적응해야 한다. 이런 현상을 서로에 대한 사랑이 식어서 그런 것으로 오해하면 안 된다. 다만 천성처럼 가지고 있는 우리의 연약함과 이기심을 극복하고, 서로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는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 뿐이다.이해와 사랑으로 틈을 메꾸지 않는다면 그 틈 사이로 분열이 쌓일 것이고 다시 하나되기 힘들게 된다. 교회와 틈이 너무 벌어져 떠난 사람들이 있다.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고 마음이 식어버린 사람들이 있다. 다르고 부족하고 연약한 모습을 이해와 사랑으로 덮어주지 않는다면 방법이 없다. 의로우신 예수께서 먼저 죄인들을 찾아오셔서 친구가 되어 주신 것처럼 우리 또한 사랑으로 서로를 받아들여야 한다. 예수께서 우리 사이에 있는 막힘 담을 허시고 가깝게 하신 것처럼 우리 눈에서 대들보를 빼고 서로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가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시면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굳게 지키는 한 몸이 되어야 한다.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마라..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엡 4:27, 32)조영석 목사찬양사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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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송경화 교수 칼럼 - 애착1 ; 애착 유형과 인간관계 크리스천헤럴드2022.06.07
     불안정한 애착 유형을 가진 사람도 “저는 화목한 가정에서 별문제 없이 자랐는데요”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그분의 7세 이후의 경험이었거나 혹은 그랬기를 바라는 희망사항인 경우가 많다상담을 받으러 오는 분들의 대다수는 인간관계의 갈등과 문제 때문에 상담사를 찾곤 한다. 한 번 만나고 말 사람들과의 관계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부부 관계, 부모님과의 관계, 자녀와의 관계, 연인 관계, 친구 관계, 고부 관계, 교회 성도들과의 관계 등 자신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관계에서 겪는 갈등은 과도한 짐이 되어 그 사람을 짓누른다. “저는 왜 이렇게 인간관계가 힘들까요?”라는 호소를 하며 상담소를 찾는 분들은 그들의 인간관계에서 반복되는 패턴에 지칠대로 지치고 마음의 상처로 만신창이가 된 상태로 상담사를 찾는다. 이렇게 인간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 분들과 상담을 할 때에는 먼저 그분의 어린 시절 부모님과의 관계나 양육환경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왜냐하면 성인의 인간관계 방식은 대체로 어린 시절 부모님과 갖는 생애 최초의 인간관계 경험에 크게 좌우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어린 시절 부모님과 맺는 최초의 인간관계 경험이 굳어져서 그 사람의 일반적인 인간관계 방식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님과의 관계는 한 사람의 평생을 지배할 만큼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게 되는데,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애착 bonding”이라는 용어로 설명한다.그런데 부모와 애착을 형성하는 결정적인 시기는 생후 만 3년까지의 시간으로, 이때 가졌던 부모와의 관계는 사실 거의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보통 사람들이 기억하는 가장 어린 시절은 아마도 6-7세 이후의 일들일 것이다. 그래서 애착 형성 시기에 부모와 어떤 관계를 가졌는지는 본인이 기억하는 게 아니라 부모나 친척들로부터 들었거나 혹은 6-7세 이후의 부모-자녀 관계를 토대로 유추해 볼 수 있는 정도이다. 즉, 정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매우 불안정한 애착 유형을 가진 사람도 “이상해요. 저희 부모님은 늘 따뜻하고 사랑이 많으셨고 저는 화목한 가정에서 별문제 없이 자랐는데요”라고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것은 그분의 7세 이후의 경험이었거나 혹은 그랬기를 바라는 희망사항인 경우가 많다.(우리의 기억 체계는 가변적이고 부정확하기 때문에, 우리는 종종 간절히 희망하는 것이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라고 기억하게 되는 현상이 자주 벌어진다.)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생후 3년 동안 부모가(혹은 아기를 키우는 양육자가) 아기에게 늘 따뜻하게 웃어주고 아기의 필요를(주로 먹고 자는 것, 혹은 위생 처리나 편안한 정서적 필요들을) 즉각적으로 해결해 주고 자주 안아주고 쓰다듬어 주면서 키웠다면 그 아기는 부모와 안정적인 애착을 형성하게 된다. 반대로, 부모가 자기 기분에 따라 어쩔 때는 잘 돌봐주고 어쩔 때는 아기의 필요를 무시하거나,  아기에게 화나 짜증을 자주 내거나, 안아주는 등의 신체 접촉이 부족했거나, 심지어 먹고 자는 기본적인 필요도 해결해 주지 않고 방임이나 학대를 했다면, 아기는 정도에 따라 불안정한 애착을 형성하게 된다. 이렇게 생후 3년 동안 부모의 양육방식에 의해 형성된 애착 유형은 그대로 굳어져서 그 아기가 크면서 고정적인 인간관계 방식이 되는 것이다.  한번 형성된 애착 유형은 특별한 노력이 없다면 평생동안 바뀌지 않고 남아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안정적인 애착을 형성한 아이들은 인간관계가 원만하고 관계 속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친구 사귀는 게 어렵지 않고 관계 속에서 그다지 큰 상처도 받지 않으며, 늘 관계를 주도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 대체로 전체 인구의 30% 정도가(통계에 따라 30-50% 정도의 차이가 있다) 이런 안정 애착이라고 한다. 반대로 불안정 애착의 아이들은 관계 속에서 늘 긴장하고 자신이 없고 사소한 일에도 예민하게 상처를 쉽게 받는다. 친구를 사귀거나 우정을 유지하는 게 어렵고 실제로 좋은 관계를 잘 유지하지 못한다. 불안정 애착에는 그 특징에 따라 다시 세 가지의 유형이 있는데 회피거부형, 불안집착형, 혼란형이 있다.이렇게 아기의 생애 첫 3년 동안 부모의 양육 방식이 그 아기의 평생을 좌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많은 부모들과 예비 부모들은 꼭 알아야 한다.송경화 교수월드미션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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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지상설교 - 박희민 목사 편 - 부활의 승리 (2) 크리스천헤럴드2022.05.24
    설교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목사들이라면 말씀을 대하는 자세는 물론, 삶의 철학, 세계를 보는 시각과 가치관 등이 자신의 설교에 담기기 마련이다. 존경받는 목회자들은 자신만의 명설교들을 가지고 있다. 남가주 한인 기독교계에서 몇 안 되는 존경받는 원로로 꼽히고 있는 목사 중 한 명이 새생명선교회 회장 박희민 목사다. 부활절기를 지나는 한인 기독교인들에게 전하는 ‘부활의 승리’라는 제목의 설교 중 두 번째다. (편집자 주) 미국의 필립 부룩스라는 유명한 목사가 있다, 링컨 대통령의 장레식에서 설교한 목사였다. 그런데 그의 원래 꿈은 하바드대학교에 교수가 되는 것이었다. 그는 꿈이 좌절되자 낙심하고 고통 스러워 했다. 하지만 그 고난 가운데 오히려 믿음을 더 얻었으며 후에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었다. 그리고 보스톤 지역과 필라델피아 지역에서 에피스코플교회 주교를 지내면서 더 큰 일을 하고 더 많은 영향력을 미국 사회에 미쳤다.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은 다를 수 있다. 필립 부룩스 목사의 이야기 중에 이런 일화가 있다. 그가 말 년애 병들어 입원하게 되었는데 아무도 면회를 해주지 않았다. 그런데 당시 이름있던 잉거솔이라는 법율가가 면회를 요청했는데 유일하게 허락했다. 그는 우쭐대면서 필립 목사를 만났다. 그랬더니 필립 목사가 다른 사람은 천국에서 만날 수 있겠지만 당신만은 아무래도 못 만날 것 같아서 특별히 만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 말에 잉거솔이 충격을 받고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하나님의 역사는 생각을 초월하신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기 때문어떤 부인이 바가지를 계속 긁으니까 남편이 듣고 있다가 결국 돈이 없다는 말이군 하고 응수했다. 우리가 신앙적으로 영적으로 생각해 볼 때 결국 우리가 슬퍼하고 낙심하며 절망하는 이유가 나의 삶 속에서 길이요 진리료 생명이신 주님을 모시지 못 한데서 오는 문제인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가난과 기아의 문제를 생각해 보아도 그렇다. 온 인류가 1년간 생산한 곡식과 물자를 정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함께 나누어 먹을 수 있다면 7년을 먹고도 남는다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랑이 없기에 일 년도 안 되어서 세계 곳곳에서는 수십만이 굶어 죽어가며, 북미에서는 너무 많이 먹어 비만증으로 병들어 죽어간다. 정말 평화의 주님을 모시고 살 수 있다면 이 땅에 전쟁과 싸움이 멈추고 그 전쟁 비용만으로도 수 백 만명을 먹여 살릴 수 있다. 2010년 12월 23일 안동의 귀금속협회 회장 집에 4인조 복면강도가 침입했다. 모녀의 옷을 벗기고 끈으로 묶어 놓고 집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런 집에서는 귀금속을 집에 두지않고 은행같은 곳에 보관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마침 주인 회장이 집으로 들어왔다. 그런 장면을 바라본 주인이 놀라서 마침 가방에 널어온 천 만 원을 내어 주면서 이것 가지고 가고 집에 있는 쓸만한 물건 있으면 그것도 가지고 가되 딸에게는 손을 대지 말라고 사정했다. 그런데 그들이 책상 서랍을 열자 감사패 하나가 나왔다. 그 감사패는 정창근 장로님이란 분이 이 회장에게 준 것이었다. 이 정 장로님은 병원원장도하고 재활원과 자선단체의 이사장도하며 그 지역에서 많은 봉사를 하는 덕망있는 분이다. 그래서 안동의 슈바이쳐로 불리며 많은 분들이 존경하는 주님을 참으로 잘 믿는 장로님이다. 그것을 보더니 한 강도가 좀 심각해졌다 정창근 장로님게 많은 사랑의 빚을 진 사람이었다. 그들은 저희들끼리 숙덕거리더니 슬그머니 미안하다고 하면서 집을 떠나갔다. 이 가정은 정 장로님 덕분에 더 정확히 말하면 그분이 믿는 예수님 덕분에 그날밤 봉변을 면했다.그리스도인들은 삶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과 부활의 주님을 증거 해야 한다. 어떤 타운의 마켓 주인이 그 타운에 새로 부임한 목사님이 설교를 잘한다고 가게에 오는 손님들에게 크게 선전했다. 그래서 어떤 분이 “당신은 그 교회 나가십니까”라고 물었다. 자기는 그 교회 안 나간다고 했다. 그럼 그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보았느냐? 물었다. 설교도 들어본 일이 없다고 했다. 그럼 어떻게 그 목사님이 설교를 잘하는 줄 아느냐? 물었더니 그 목사님이 취임한 후에 그 교회 교인들이 외상값을 다 갚았다고 답했다. 말하자면 교인들의 삶이 달라진 것을 보고 설교를 잘 하는 줄 알았다는 말이다. 그것이 증거라는 말이다. 옳은 말이다.어떤 젊은 목사가 한 교회에 취임했다. 첫 설교를 하고 광고시간에 광고를 하려는데 강단 위에 종이 쪽지가 올려있었다, 광고를 부탁하는 종아인줄 알고 읽었다. 거기에는 “우리는 목사님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과 부활의 주님을 만나보기를 원합니다. 교인일동”이라고 쓰여 있었다. 좀 충격적이었지만 그것이 교훈이 되어 그 교회서 훌륭한 목회를 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옳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우리는 여러분들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 부활의 주님을 만나보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삶을 통해 부활의 주님을 보여주고 증거해야 하는 것이다.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부활하신 주님이 바로 곁에 계셨지만 육신의 눈으로 영안이 가리워져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우리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 임마누엘의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슬퍼하고 눈물을 흘리며 두려워하고 낙심하며 살 때가 얼마나 많은가? 파랑새의 작가는 행복의 파랑새에서 한남매가 붙잡으려고 사방을 쫓아다니다가 지쳐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 행복의 파랑새가 집 처마에 앉아있더라고 묘사했다. 괴테도 “네 발 아래를 파라 거기에 네가 찾는 생수가 흐르리라” 했다. 주님은 “천국이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 하지 못하리니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말씀했다. 영어성경에는 within you 혹은 among you라고 번역했다. 주님을 내 마음 속에 모시면 내 마음 속에 천국이 임하고 너와 나 사이에 모시고 우리 안에 모실 때 우리 가운데 천국이 임한다는 뜻이 아닌가? 찬송가에도 초막이나 궁권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천국이라고 했다.그러나 주님은 더이상 마리아의 슬픔을 방관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 마리아야! 부르심으로 그의 영안을 떠서 무덤 앞의 슬픔과 두려움과 절망이 부활의 기쁨과 부활의 승리로 바뀌게 하셨다.그러나 무조건하신 것은 아니다. 그녀가 동산지기인줄 알고 “당신이 옮겨갔거든 내게 이르소서 내가 가져가리다”하는 주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의 고백을 들으시고 마리아야 말씀함으로 그의 영안을 떠서 무덤 앞의 슬픔과 절망이 변하여 부활의 기쁨과 승리로 변하게 하셨다. 지금 그녀가 있는 곳은 공동묘지다. 그녀는 연약한 여성이다. 시간은 어두운 새벽이다. 그녀가 가지고 가겠다는 것은 황금덩어리가 아닌 무겁고 냄새나는 시체이다. 그럼에도 주님에 대한 그녀의 뜨거운 사랑 고백을 하게 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주님 우리 가정의 십자가를 내가 지고 가겠습니다. 우리 교회의 어려운 십자가를 내가 지고 가겠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입니다. 이런 고백이 있을 때 무덤 앞의 슬픔과 정망이 변하여 부활의 기쁨과 승리로 변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주님에 대한 신앙고백과 사랑의 고백을 통해 무덤 앞의 슬픔과 절망이 부활의 기쁨과 승리, 부활의 능력과 영광으로 바뀌는 놀라운 축복이 함께 하기를 기도한다. 주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나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요11:25)했다. 부활절기를 지내며 우리의 삶을 통해 부활의 복음을 삭막하고 황폐해가는 이 땅에 널리 전파하므로 이 땅에 생명의 새 물결이 넘쳐흐르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도한다.박희민 목사새생명선교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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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주성철 목사의 기독교와 법 - 교회 손을 들어 준 제9순회연방항소법원 크리스천헤럴드2022.05.24
     미국에는 각 도시에 Municipal Court가 있다. 쉽게 시 정부의 법원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판결이 힘들게 되면 그 위에 카운티고등법원이 있고 그 위에는 주고등법원이 있다. 그 위는 순회연방항소법원있고 최고의 법원인 대법원이 있다. 웬만한 이슈들은 순회 연방법원에서 최종결정을 한다. 간혹 대법원까지 갈 때도 있다. 미 전국적으로 순회 연방항소법원은 10개로 묶여 있다. 캘리포니아가 속해 있는 항소법원은 제9순회연방항소법원이 한다, 이 지역의 순회연방항소법에는 5명의 판사가 있다. 이중 3명이 한국계 미국이다. 이 판사들은 투표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의 지명으로 배치된다. 닉슨 대통령이 지명한 고령의 판사를 비롯해 최근 바이든 대통령이 지명한 판사도 4명이 있다.이 제9연방순회항소법원에서 최근 관심이 가는 판결을 내린 것이 있다. 살릴나스 시내 특별 구역의 다운타운 제3블럭에서 교회의 1층 건물 점유를 금지하는 도시 계획이 연방법에 위반된다는 판결이다. 이번에 판결이 난 살리나스시는 샌프랜시스코에서 약 100 마일 남쪽에 있는 곳이다. 조그마하고 아름다운 도시다. 비교적 안정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범죄률이 낮아 사람이 선호하는 바닷가 도시다. 이곳에 뉴하베스트라는 교회가 있다. 교회는 지난 25년 넘게 살릴나스시의 한 공간을 임대해 교회로 사용해왔다. 사실상 이 교회는 그 지역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좋은 평판을 듣고 있었다. 교회가 부흥하면서 교회 리더들은 더 많은 사람을 수용하기 위해 큰 공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인근 조그마한 골목에 있는 건물을 매입했다. 뉴하베스트교회 대표들은 살리나스시 시의회에 구역코드(조닝) 변경 및 조건부 사용 허가 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런데 시의회는 이를 거부했다. 교회가 활성화되고, 유흥업소들이 몰려있는 중심가에 교회가 세워지면 방문자들에게 거부감을 준다는 이유에서였다. 법원 공방이 5년째 지속되면서 시의회의 말 바꾸기가 드러났다. 이들은 교회설립을 처음부터 거부하지 않았다. 처음 교회가 건물을 매입 할 때에는 1층에 상가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면 조닝을 변경시켜 주겠다고 했다. 교회가 조건부 승인을 위해 빌딩 1층을 사용하기 원하는 업주들의 리스트를 보여달라고 했다. 관계자들은 리스트를 보고 너무 당황했다. 술집과, 마리화나 상점을 비롯해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업소들이 임대를 원했던 것이었다. 교회에서는 당연히 거부했다. 시는 이것을 트집 잡아 교회의 조닝변경을 승인하지 않았다.결국 분쟁은 제9순회연방항소법원까지 올라왔다. 교회 관계자들은 오랫동안 이어온 법적분쟁으로 고통 받아야 했다. 하지만 길거리에 나가 시위를 하지도 않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태평양법률협회는 교회를 대신해 연방항소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2019년에 수정된 종교 토지 이용 및 제도화된 내용에 대한 법안에 기초해 법리 논쟁을 시작했다. 이 법안은 50개 주에서 받아들여진 것으로 RLUIPA(Religious Land Use and Institutionalized Persons Acts)란 것이다. 여기에서 사용되는 영어 단어 Persons란 것은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내용물’을 의미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지금의 법 아래서는 50개 주에 그 어느 곳에서도 종교적인 용도로 부지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협회는 교회가 주어진 법에 따른 동등한 대우를 요구했을 뿐이란 점을 강조했다. 현재 시행되고 있는 법안에 따라 교회가 다운타운의 건물을 사용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점을 어필했다. 결국 살리나스시는 유흥가에 교회가 들어서게 되면 세금 수거에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기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종교 토지법이 왜 중요한가가 다시 확인된 셈이다. 종교 토지법은 교회가 건물을 구입하는 것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건물을 임대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에도 적용된다. 이런 점에서 한인 교회에도 영향을 미치는 법이다. 지금도 상당수 한인 교회가 임대문제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RLUIPA 법안은 쉽게 풀어 종교 토지법 또는 종교부지 사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가 신축, 증축, 보수 등등으로 시 정부의 저지를 받을 경우가 있다. 불합리한 이유로 교회가 어려움을 당할 때 이 법을 기억해 두는 것이 좋다. 그리고 태평양법률협회가 교회를 대신해 무료로 싸울 수 있다는 점이다.주성철 목사 태평양법률협회 한국어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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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신선묵 목사의 교수칼럼 - 우리가 붙잡을 것 – 은혜 크리스천헤럴드2022.05.24
     어린 시절 학교 운동회에 달리기 시합을 하던 기억이 새롭다. 나는 별로 달리기를 잘하지 못해서 특별한 좋은 추억은 없지만 우스꽝스럽고 재미있는 장면이 생각난다. 저학년 어린아이들이 한 줄로 서서 선생님이 신호를 보내면 결승선을 향해서 달리기 시작한다. 부모님들은 옆에서 열심히 소리치고 응원을 한다. 그런데 이따끔 어떤 아이는 결승선 목표를 향하여 달리지 않고 엉뚱하게 엄마가 있는 곳을 향하여 열심히 달려가는 경우가 있다. 엄마가 아무리 앞을 향해 달리라고 손짓하며 소리쳐도 아이는 엄마에게 열심히 달려간다. 그런 광경을 바라보는 군중들은 배꼽을 잡고 웃는다. 달리기는 잘하는데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다. 때로는 우리가 우리 삶 가운데 달리기를 열심히 하는데 잘못 달리는 경우가 자주 있다. 열심도 있고 능력도 뛰어난데 엉뚱한 방향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그러면 달려야 할 방향이 무엇일까? 빌립보서 3장 7절~14절에 나온 사도바울의 권고 속에는 ‘영적 지도력의 비밀’이 들어있다.첫째, 우리가 달려야 하는 푯대는 ‘예수 그리스도’다. 3장 8절을 보면 “내 주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라고 말한다. 우리는 영적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엉뚱한 방향으로 달리지 말고 정확히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야 한다. 레오날드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 그림을 그렸다. 역사상 위대한 작품 중의 하나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그림이다. 그런데 다빈치가 처음 그 그림을 그릴 때 예수님께서 만찬 중 사용한 주전자를 은주전자로 아름답게 그렸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그림을 보고서는 다 “와 주전자, 참 멋있다. 나도 갖고 싶다”라고 하면서 주전자에만 관심을 가졌다. 다빈치는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아, 내가 그림을 잘못 그렸구나! 이 그림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신데 엉뚱하게 사람들이 주전자에 관심을 다 빼앗기니 이는 실패작이다”하고 하고 그림을 다시 그렸다고 한다. 개인적 신앙생활에서 또 영적 지도자로서 자주 그런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삶에서 관심을 받아야 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데 삶의 관심이 그리고 대중의 관심이 엉뚱하게 주전자에 가 있는 경우가 많다. 살아가거나 영적 지도력을 발휘하는 중에 엉뚱하게 주님이 받아야 할 관심을 다 빼앗아버리는 은 주전자가 있는지 살피자. 만일 있다면 다빈치처럼 그림을 새로 그려야 한다. 달려가야 할 방향은 예수 그리스도뿐이기 때문이다.삶의 중심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여야 한다. 여기에서 좀 더 생각해 보고 싶은 점이 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여야 한다는 말이 때로는 편협한 축소주의적인 (Reductionism) 신앙을 말하는 것처럼 들리는 경우가 있다. 예수님만을 말하면서 다른 부분들을 외면하는 신앙 말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중심’이란 그런 편협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신앙의 편중이나 편협을 경계해야 한다. 진정으로 신앙의 중심이 잡혀있는 사람은 유연성이 있다. 삶의 다양한 측면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부분을 풍성하게 살되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이다. 우리 삶의 중심이 분명히 그리스도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우리 삶이 어느 한 편으로 치우치거나, 종교라는 울타리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포괄적인 모든 부분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 나간다는 것이다. 즉, 중심이 분명해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삶의 중심이어야 한다.둘째 우리가 달려야 하는 푯대는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이다. 빌립보서 3장 12절을 보면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라고 말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걷는 놈 위에 뛰는 놈이 있고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고… 그다음 나는 놈 위에 붙어다니는 놈이 있다”고 했다. 맞다. 신앙생활은 뛰는 것도 나는 것도 아니라 붙어다니는 것이다. “예수님께 붇잡힌바 된 그것”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은혜를 붙잡는 삶’이라고 생각한다.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붙잡는 것이다. 개인 신앙 여정에서 또 영적 지도력에서 처음에 은혜로 시작했다가 나의 의나 노력으로 끝이 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를 의지하는 것에서 시작은 하지만 종국에는 지혜와 노력과 의로 채우려 한다. 그래서 결국에는 은혜를 붙잡지 못하고 나의 의와 노력을 의지한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한다고 하면서 실상은 나의 의와 능력과 지혜를 의지하는 모습을 어떻게 볼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의 조급함과 정죄함에서 잘 보인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나의 능력과 지혜를 의지하기 때문에 걱정하고 조급해한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지 않고 나의 의를 의지하기 때문에 타인의 부족함에 대해 정죄하고 분노한다. 우리는 죄인이고 구원받는 것은 100% 은혜로 인한 것이다. 나의 의가 1%도 가미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은혜로 시작해서 은혜로 끝난다. 뿐만 아니라 내가 이 세상 삶 가운데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하고 또 나중에 하나님 앞에서 영화스러운 존재로 설 수 있는 것도 100% 은혜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서는 하나님의 선교에 대해서도 100%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고 100% 하나님의 은혜이다. 영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지도력도 100%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의 힘으로는 작은 변화도 일으킬 수 없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서‘그리스도의 은혜’다.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시고 삶을 향하여 아름다운 계획과 그림을 가지고 계시며 그것을 친히 이루시는 은혜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오늘 본문 말씀을 전한 사도바울도 아마 자기의 의와 자기의 계획과 능력으로 많은 것을 이루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어깨에 힘이 많이 들어갔을 것이다. 그래서 일이 되기보다는 도리어 많은 어려움을 가져오게 된 것 같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의 몸에 가시를 두셨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런데 그 가시 때문에 그는 큰 비밀을 깨달았다. 하나님께서 그의 어깨에 힘을 빼라고 하신 것. 그 가시 때문에 결국 그는 하나님의 은혜가 족하다는 것을 배웠다. 가시 때문에 힘을 빼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족한 줄로 아는 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지도력의 핵심이었다.신선묵 교수월드미션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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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김요셉 목사의 카톡큐티 - 아버지의 한 없는 사랑 크리스천헤럴드2022.05.24
     카카오톡 아이디 kimbg1212로 연결하시면 메일 카톡으로 말씀을 묵상할 수 있는 큐티자료를 보내 드립니다.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에게 아들 둘이 있었습니다. 그중 둘째가 아버지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아버지 재산 중 내게 돌아올 분깃(상속될 유산을) 내게 주십시오!” 그러자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그들의 분깃을 각각 나누어주었습니다. 자기의 유산을 받은 둘째 아들은 그 재물을 가지고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아버지의 집을 떠난 그는 육체적인 쾌락을 추구하였고 걷잡을 수 없는 방탕으로 인해 그가 가진 모든 소유를 다 탕진해 버렸습니다. 이제까지 온갖 즐거움과 자유를 누렸던 그에게 궁핍함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닥친 궁핍은 그에게 새로운 안목을 갖게 하였고 아버지의 집이 참 풍족하며 행복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으며 아버지께 돌아갈 것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하고 탄식합니다.(17절) 여기서 “스스로 돌이켜”라는 말은 제정신이 돌아왔다는 말입니다. 즉 방탕의 결과로 ‘궁핍’이라는 거울을 통해 아버지를 떠나 비참해진 죄인으로서의 자신의 참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궁핍을 통해 자신과 하나님을 발견 할 수 있다는 것은 복입니다.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한 그는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라고 결심하게 됩니다. 그는 그토록 자상하고 사랑이 많은 아버지를 주신 하나님께 범죄 했음을 겸손히 인정하게 됩니다. 이는 참된 회개를 말하는 것으로 마음의 변화와 함께 하나님께로 적극적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아버지는 둘째가 떠난 이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동네 입구를 바라보면서 돌아올 날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굶주려서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형색을 한 그를 먼 거리에서도 한눈에 알아보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삐뚤어진 관계의 회복이 아버지의 주도하에 이루어지게 됩니다. 아버지는 아들로부터 회개의 말을 듣기도 전에 아들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게 되는데 그 입맞춤은 아버지의 기쁨을 말해주며 또한 끝없는 용서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그리고 그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겼습니다. 제일 좋은 옷은 큰 영광을 주는 것으로 아들로서 모든 권리가 여전히 유효한 것임을 공표하는 행위입니다. 가락지는 자신의 권위를 나타내는 인장 반지와 같은 것으로서 아들에게 자신의 권한을 아들에게 위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을 신게 합니다. 먼 나라에 가서는 다른 사람의 머슴의 신세였던 그가 아버지께로 돌아와서는 다시 자유인으로서 살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의 환락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과 물질을 허랑방탕하게 낭비하며 사는 삶을 주님께서는 ‘죽었다’고 정의하십니다. 사람들은 성공, 행복, 사랑을 성취하게 될 때 잘 사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만약 이 둘째 아들이 나가서 성공적인 삶을 살았을지라도 그 삶은 죽은 삶이라는 것입니다.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신 이야기의 핵심은 “죄인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 즉 구원의 마음 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는 작은 아들이 물질을 잃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자신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아들이지만 오직 자신에게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한 없는 사랑을 가지신 아버지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먼저 받은 사람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아버지처럼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어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증거하여 영혼을 구원하려는 그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인생을 허비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멘김요셉 목사가든그로브 복음루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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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박희민목사 지상설교 - 부활의 승리 (1) 크리스천헤럴드2022.05.10
    설교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목사들이라면 말씀을 대하는 자세는 물론, 삶의 철학, 세계를 보는 시각과 가치관 등이 자신의 설교에 담기기 마련이다. 존경받는 목회자들은 자신만의 명설교들을 가지고 있다. 남가주 한인 기독교계에서 몇 안 되는 존경받는 원로로 꼽히고 있는 목사 중 한 명이 새생명선교회 회장 박희민 목사다. 부활절기를 지나는 한인 기독교인들에게 전하는 ‘부활의 승리’라는 제목의 설교 중 첫 번째다. (편집자 주)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부활을 의심하지 않고 확신했다. 그리고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순교했다.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목 베임을 당했고, 마태는 이디오피아에서 칼로 순교를 했으며, 누가는 그리스에서 교수형을 당했으며…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복음의 핵심이요 진수이다. 그중에도 부활은 복음의 절정이요 극치다. 바울은 만일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요 우리의 전하는 것도 헛것이며 우리는 거짓말하는 자들이 될 것이라고 했다.서양격언에 ‘마지막 웃는 자가 참으로 웃는자’라는 말이 있다. 예수의 십자가는 모든 것이 끝장나고 패배한 듯 보였다. 그래서 심지어 제자들도 실망하며 뿔뿔이 흩어져 옛날 일터로 돌아갔다. 로마 군병들과 유대종교 지도자들은 이제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 뒤에는 부활의 아침과 역사가 기다리고 있었다.한마디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정의가 불의를, 선이 악을, 진리가 비진리를, 사랑이 미움을, 생명이 죽음을 이긴 승리의 사건이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가장 큰 소망과 힘과 용기를 주었다. 부활절은 세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주님의 부활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이다. 둘째는 우리가 누릴 미래의 부활을 바라보며 소망하는 것이다. 셋째는 현재 우리 삶 속에서 부활의 신앙과 정신으로 승리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기독교의 생명력은 빈 무덤에 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다시 살아 나셨다(He is not here. He is risen)”라는 메시지에 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6장 33절에서 “너희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 강하고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세상은 세상의 고난, 시험, 두려움, 문제, 질병, 죽음 들을 포함하는 말이다. 우리는 세상을 이기신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군사이기 때문에 우리의 싸움은 이미 승리가 보장된 싸움이다.어느 주일학교 교사가 부활주일 아침에 어린이들에게 부활주일에 가장 큰 기쁨의 소식이 무엇이냐? 물었더나 한 어린이가 손을 들더니 놀라움(Surprise)이라고 엉뚱한 답을 했다. 그렇지만 죽었던 사람이 살아났다는 것은 가장 Surprise(놀라운) 사건이다. 영국의 젊은 저널리스트 프랭크린 모리슨은 무신론자로 예수 부활이 거짓말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많은 책들과 역사자료를 수집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오히려 예수를 믿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신앙을 갖게 됐다. 예수의 구주 되심과 부활을 변호하는 책을 쓰게 됐다 그 책이 ‘Who moved the Stone(누가 돌을 옮겼는가)’다. 그가 감동받은 것은 예수님을 따르던 모든 제자들이 부활을 의심하지 않고 확신했으며 그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순교했다는 사실이었다.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목베임을 당했고, 마태는 이디오피아에서 칼로 순교를 했으며, 누가는 그리스에서 교수형을 당했으며, 마가는 애굽 알렉산드리아에서 말에 끌려 다니다가 순교했다. 도마는 인도에서 창에 찔려 순교했고, 예수의 동생 유다는 화살에 맞아 순교했다, 세상에 거짓을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은 없다.예수의 부활로 말미암아 죽음이 생명 속에서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바울은 “사망아 너희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로 하여금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였다. 사도행장 16장에 보면 바울이 2차 선교여행 때 1차 선교여행 때 갔던 소아시지방에 가서 복음을 전하려 했다. 그런데 성령이 그 길을 가로막아 하는 수 없이 드로아로 내려갔다가 밤에 한 마케도니아 사람이 와서 도와달라는 환상을 보고 배를 타고 유럽의 첫 성인 빌립보로 가 복음을 전하게 시작했다. 유명한 역사가 토인비는 이 장면을 해석하면서 이때 바울을 태운 배에는 새로운 유럽을 싣고 갔다고 설명했다. 사실 복음이 들어감으로 그 후 야만적인 해적들이 변하여 지난 2천 년 간 문명국가로서 인류 역사를 이끌어오게 됐다.이런 맥락에서 1620년 11월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102명의 청교도들이 미국 땅을 밟은 것은 새로운 미국을 싣고 온 사건이었다. 그리고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한국 땅 제물포에 손을 잡고 동시에 발을 디뎠던 것은 바로 새로운 한국을 싣고 온 사건이었다. 이처럼 부활은 인류의 역사를 바꾸는 시발점이 되어 왔다. 그리고 그 시발점이 얼마나 큰 축복을 그 땅으로 이끌었는지 사람들은 잘 모른다. 맣은 현대인들은 본문에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처럼 부활한 주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무덤에 앞에서 슬피 울며 살아간다. 왜 막달라 마리아가 슬피 울었을까?눈앞에서 일어난 일들을 목격막달라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신 것을 직접 목격했기에 부활이 더 믿어 지지가 않았다. 마리아는 사건의 일부만 보고 전체를 보지 못했다. 그 배후에서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손길, 부활의 역사를 바라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슬퍼하고 눈물을 흘렸다.인간 대부분의 슬픔과 눈물, 좌절과 절망도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므로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하는 주님의 말씀 속에는 네 믿음의 눈을 떠서 그 사건의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놀라운 부활의 역사를 바라보라는 음성이 담겨있는 것이다.어거스틴의 이야기 중에 이런 일화가있다. 어느날 어떤 모임에 가서 강연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날은 길을 잃고 많이 헤매게 되었다. 그래서 시간이 늦어 강연장에 제시간에 나타나지 못하게 되어 자존심도 상하고 많이 침울해 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어거스틴이 온다는 말을 듣고 그를 미워하는 그룹에서 자객을 시켜 그를 살해하려고 골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길을 잃고 방황하는 바람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것을 알고 어거스틴은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었다. 우리도 내 계획, 내 뜻대로 안 되었다고 안타까워하고 낙심하고 절망할 때가 많다. 그러나 나중에 보니 그것이 내가 오히려 사는 길이였고 은혜의 길이였고 축복받는 길이였음을 뒤늦게 깨달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배후에서 일하시고 계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를 보지 못해 안타까워하고 발을 구르며 초조했던 것을 경험할 때가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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