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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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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김요셉 목사의 카톡큐티 - 하나님의 회복과 사명 크리스천헤럴드2022.07.26
     카카오톡 아이디 kimbg1212로 연결하시면 메일 카톡으로 말씀을 묵상할 수 있는 큐티자료를 보내 드립니다.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는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갈멜 산에서 혼자 싸워 승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늘에서 불을 내려 영광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엘리야가 비오기를 기도하자 3년 반의 가뭄을 끝내는 큰 비가 쏟아졌습니다.엘리야는 갈멜산에서 위대한 승리 이루었지만 아합의 왕비 이세벨의 ‘죽이겠다’는 단호한 경고를 받은 그는 도피길에 오르게 됩니다. 그는 이세벨의 권세가 미치지 못하는 남왕국 유다의 남쪽 국경 지대인 브엘세바로 피신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람과 햇볕을 막아 줄수 있는 한 로뎀 나무 아래서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 가기를 기도하게 됩니다. 육체적, 영적으로 완전히 탈진하여 쓰러진 엘리야는 자신이 사명의 여정을 지속할 여력도 의욕도 완전히 사라졌지만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어 죽음에 직면한 상황을 이겨내도록 구운 떡과 물과 휴식을 제공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를 어루만져 주셨서 특별한 존재라는 의미를 더해 주게 됩니다. 이에 힘을 얻은 엘리야는 사십주 사십야를 걸어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도착하게 됩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때로는 금식도 하며 때로는 기도하면서 호렙 산을 향해 나아갔을 것입니다. 자신의 인간적인 한계를 오직 하나님께만 의지하여 나아 간 것을 알수 있습니다. 갈멜 산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큰 변화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엘리야는 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짐을 지고 하나님을 찾은간 여정이 바로 40일 입니다. 하나님의 산의 도착한 엘리야는 그 곳 굴에 들어가 머물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두 번째 다시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라고 물어셨습니다. 이 질문은 엘리야 자신을 냉정히게 성찰하게 하여 하나님의 사명을 깨닫고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음을 발견하게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첫번째와 같은 대답을 하게 됩니다.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10, 14) 엘리야는 ‘오직 자신만 남았다’고 하나님께 항변 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 당시 이세벨의 박해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보호하신 칠천 명의 순결한 자가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산 앞에 엘리야를 세우고 강한 바람과 지진, 불이 있은 후의 ‘세밀한 음성’ 가운데 그를 만나 주십니다. 하나님은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금방 알 수 있는 방법 가운데 나타나신 것이 아닙니다. 세미한 소리는 아주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만 들을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자신이 지금까지 알지 못하던 새로운 방법으로 하나님을 만났고 자신이 해야 할 사명인 말씀을 받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사명을 주셔서 관점을 바꾸게 하십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의 정의를 집행할 세 명의 새로운 지도자들, 즉 하사엘(아람 왕)과 예후와 엘리사를 세우는 일입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셔서 그 사명을 향하여 나아갈 때 지금 그에게 닥친 육체적, 영적으로 탈진한 상황을 극복할수 있기 때문 입니다. 우리는 엘리야를 회복하게 하신 하나님의 해결책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감기처럼 영적 인 침체가 찾아 올 수 있습니다. 특별히 모든 일들이 잘 되고 있는데도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처럼 생각이 되며 혼자라는 고독감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은밀한 중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현실에 안주하려는 자리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새로운 사명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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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신선묵 목사의 교수칼럼 - “사역의 변화 속도를 존중하라” 크리스천헤럴드2022.07.26
     우리가 속해 있는 사역에서 변화를 이끌어 내려고 할 때에 조급해지기 쉽다. 그래서 사역을 있는 그대로 현실을 보고 그 속에서 스스로 변화해 나아가는 것을 돕기보다는 변화를 빨리 이끌어 내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조급함으로는 외형적인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진정한 내면으로부터 시작된 온전한 변화를 이끌어 내기가 힘들다. 변화를 이끌어 내기위해서는 속해 있는 사역의 변화 속도를 존중해야 한다.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둘러서 추진한 변화는 때로는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NBA 팀 중에서 시카코 불스는 마이클 조단이 있던 명문팀이었다. 마이클 조단과 더불어서 스카티 피펜이라는 선수가 이 팀을 3연패를 두 번이나 이끌었다. 그런데 그 두 번의 3연패 사이에 마이클 조단이 농구에 흥미를 잃고 2년 동안 팀을 떠났다. 그동안 스카티 피펜이 팀의 리더가 되어서 팀을 이끌었다. 당시 시카고 불스의 감독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명장 중에 하나인 필 잭슨 감독이었다. 그는 마음을 명상으로 잘 다스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는 감독으로 알려져있다. 불스는 그의 지도하에 그 2년 동안도 불스는 강력한 팀 중에 하나였고 플레이 오프에 나갔다. 그런데 1994년 동부 컨퍼런스 결정전 게임에서 102 동점 상황 2초를 남겨두고 감독이 작전타임을 불렀다. 그리고 그 작전 타임에서 감독은 마지막 슈팅을 일반적으로 팀의 리더격인 선수가 하는 것이지만 피펜에게 다른 선수에게 패스할 것을 지시하였다. 피펜은 이에 불복하고 벤치에서 나가지 안아서 결국은 다른 선수를 대신 내보내고 기적적으로 게임을 이길 수 있었다. 경기가 끝이 난 뒤에 자신을 믿지 못한 감독에 대한 불만으로 피펜은 경기장을 먼저 떠나버렸다. 경기를 중계하던 중계진이 잭슨 감독에게 질문을 하였다. “피펜이 화가 난 것 같은데 감독으로 어떻게 할 것입니까?” 그 질문은 감독이 팀의 대표선수격인 피펜에게 사과할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감독으로서 해야하는 작전을 했다고 말하고 그의 감정을 무시하고 나아갈 것인지를 묻는 것이었다. 정말로 답하기 곤란한 질문이었다. 감독으로서의 자존심을 세우면 선수에게 성처 주게 되고 선수의 자존심을 세워주면 감독으로서의 권위가 실추되는 상황이었다. 이에 대하여 필 잭슨은 이렇게 답하였다. “그것은 팀이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는 지도자이지만 팀의 갈등에 책임을 지고 자신이 다 해결하려고 하기보다는 팀에게 문제 해결을 맡기고 자신은 거리를 유지하였다.  이 예화는 “적응적 리더십”의 작가 로날드 하이페츠와 말티 린스키의 글에 나오는 예화다. 그들은 적응적 리더십에서 변화하는 현장 속에서 지도자가 건강한 조직의 변화를 위하여 할 수 있는 것들을 몇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현장 속에서 변화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현장에서 거리를 유지하고 관찰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지도자는 조직 속에서 이렇게 관찰과 변화를 추구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건강히 하기위하여 지도자 자신에 대하여서도 이런 관찰과 변화를 위한 실제적인 노력을 해야한다고 하였다. 즉 조직 속에서이지만 자신을 건강하게 관리하고 그리고 변화를 위한 역할을 하는 것과 동시에 자신과 조직 사이에 건강한 거리를 두고 조직이 스스로 변화를 해 나아갈 수 있도록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조직이 스스로 변화해 갈 수 있도록 기다리고 필요할 때에 개입하는 것이 적응적 변화의 핵심이다. 아마 사람들은 모두 어떤 조직인가에 속해 있을 것이고 그 조직에서 변화가 필요한 점들을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조직의 변화가 쉽지 않다. 그래서 좌절하고 그 조직을 떠나던지 아니면 조직의 변화를 위하여 나서다가 상처입고 지쳐 버리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 조직은 가정일 수도 있고 교회일 수도 있고 직장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지도자일 수도 있고 중간 지도자일수도 있고 추종자 중에 한 명일 수도 있다. 어찌됐던 그 조직에 변화를 필요로 하고 그것을 추진하고 싶은 것이 현실이다. 여기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지도자가 그 조직의 일원으로 남아있고 변화를 위하여 노력하면서도 동시에 그 조직과 떨어져서 자신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조직의 변화를 위하여 개인이 해야 할 수 있는 부분은 분명 있지만 한 개인이 조직을 변화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조직이 스스로 변화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그 변화를 해 나아갈 때 조직의 변화가 가능한 것이다. 한 개인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조직을 변화시킬 수는 없는 것이고 조직이 변화를 해 나아갈 때에 비로소 그 속에서 필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실상 조직에 속해 있으면서도 조직의 변화를 위하여 책임지지 않는 상황이 무척이나 힘들고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 그 조직 속에 있지만 그 조직이 스스로 변화를 해 나갈 수 있는 의도와 역량을 갖추기까지 기다리고 자신을 건강하게 지키면서 또 필요할 때에 조직의 변화를 위하여 일정 부분 공헌한다는 것이 무척 힘들고 정신적인 힘이 필요한 점이다. 우리는 이렇게 기다리고 인내하기보다는 조급함으로 행동하고 좌절하기가 쉽다.조직의 변화를 위해서는 지도자나 한 사람의 조급함으로 실행되지 않는다. 조직 자체가 변화해야 한다는 한계점에 도달해야 하고, 조직 스스로가 그것을 인식하고 변화해 가야 한다. 이때 변화의 대리인이 이것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조직 속에서 갈등 속에서도 버티는 힘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조직의 변화를 이끌기 위해서는 개인의 건강함이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다. 건강하지 않은 조직 속에서 개인이 건강함을 지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인내하고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지혜롭게 건강한 세포가 되어야 한다.그런데 이런 인내심은 우리 자신의 삶에서 변화를 추구할 때나 우리가 사랑하는 다른 사람들의 삶 가운데 변화를 이끌어 내려고 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변화의 출발점은 존중이다. 우리가 억지로 변화를 이끌어 내는 것이 아니라 변화가 필요한 사람을 존중하고 그의 관점에서 그의 속도로 변화를 해 나아갈 수 있도록 기다리고 돕고 인내하고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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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김병학 목사 칼럼 - "소통은 재도약이다" 크리스천헤럴드2022.07.26
     지금 한국에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라는 드라마가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드라마가 일반 공중 방송이 아니고 사람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방송국에서 방영되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 드라마에 감동을 하고 있고 뉴스나 소셜미디어에서 대단한 인기라는 소식을 계속 듣고 있다. 특히 주인공 역할의 배우를 감독은 1년 이상을 기다렸다는 것과 주인공이 장애를 가졌다는 것도 특이한 내용 중 하나이다.그런데 어떻게 이 드라마가 사람들에게 인기일까?전문가들이 여러 가지 이유를 말하지만 공통적인 것은 그 드라마는 ‘착하다’는 것이다. 그동안 많은 드라마가 잔인하고 인간들의 어두운 면을 많이 다루었다. 그래서 가족간의 암투, 신분 상승, 출생의 비밀 등의 막장 드라마를 욕하면서 보게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런 내용에 싫증이 난 것이다. 너무나 뻔한 구성과 스토리, 늘 그 얼굴의 연기자에 사람들은 너무나 착한 드라마에 열광을 하고 있다. 그래서 처음듣는 방송국 채널을 찾아서 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시청률을 높이고 있다.채널만 돌리면 무료로 볼 수 있는 기존 TV 방송의 너무나 구태의연한 내용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이 돈을 내고서라도 원하는 방송을 보려고 넷플릭스 등의 방송을 찾더니 이제는 내용이 좋으면 잘 모르는 비록 OTT방식(over-the-top media service 인터넷을 통하여 언제 어디서나 방송을 시청하는 시청자 중심의 써비스)방송국도 찾아가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도 이런 시대적인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고 밥그릇만 지키려는 기존 방송국은 점점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 여전한 방식과 내용 그리고 구성으로 만들어진 그러나 식상한 드라마를 만들어 놓고 떠나간 시청자들의 마음을 돌리려고 하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다.이제는 이런 시대상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특히 교회는 더더욱 이런 변화를 감지해야 한다. 교회는 교회로서의 제기능을 회복해야 한다. 교회는 초월적인 하나님이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셔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풍성하신 사랑을 보여주는 곳이어야 한다. 특히 이번 코로나로 인한 코비드를 거치면서 교회로서의 역할을 재정립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때를 맞이하고 있다.교회가 예전처럼 큰 건물 지어놓고 좋은 프로그램과 시설로 사람들을 불러 모을 때가 아닌 것을 처절하게 경험하였다. 이제는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자기 자신과 인생에 대한 의미를 찾으려 한다. 무한 경쟁과 암투가 있는 세상에서 너무나 지친 몸과 마음을 교회에 와서 회복하고 새로운 힘을 얻고자 한다. 그래서 흩어지고 어수선한 인생의 길을 바로 찾으려는 마음으로 교회에 온다.그러므로 강요하듯 주장하는 내용의 설교와 일사불란한 찬양으로 채워진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고 만나고 새로워지는 예배가 되어서 이 땅에서 경험할 수 없는 신비한 은혜로 채워지는 영적인 체험이 있는 예배가 되도록 설교하고 찬양해야 한다.또한 바른 해석을 하는 성경 공부와 기독교를 잘 이해할 수 있는 교리를 공부해야 한다.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지만 지금이 바로 이 일에 집중할 때이다. 코비드 기간 동안 온라인으로 겨우 유지해 왔던 활동들과 소그룹 중심으로 움직였던 모임들을 이제는 목회자가 중심이 되어서 교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한다. 새롭게 리더십을 세우고 기존 방식이 아닌 새 시대에 맞는 교육과 양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교회는 강요와 강제가 아닌 성도들이 찾아서 올 수 있는 내용과 구성을 갖추는 기간이어야 한다. 절대 원하지 않지만 또 다른 형태의 코비드가 온다면 이제는 무방비 상태로 당하지 않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 지금은 바로 그 때이다. kim040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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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지상설교 - 박희민 목사편 - 크리스천과 노동 (1) 크리스천헤럴드2022.07.12
     설교를 제대로 준비하는 목사들이라면 설교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자세는 물론, 삶의 철학, 세계를 보는 시각과 가치관 등이 담기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존경받는 목회자들은 자신만의 명설교들을 가지고 있다. 남가주 한인 기독교계에서 몇 안 되는 존경받는 원로로 꼽히고 있는 목사 중 한 명이 새생명선교회 회장 박희민 목사다. 박희민 목사는 1936년 충남 예산에서 출생했다. 에티오피아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1974년부터 남가주에서 목회했다. 1988년부터 나성영락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취임한 후 2004년 은퇴했다. 현재 새생명선교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박희민 목사의 지상설교 4번째 주제 ‘크리스천과 노동’ 첫 번째다. (편집자 주)그러나 몇 주가 지나면 너무 무료하고 답답해서 사표를 내고 나갔다. 그런데 한 사람은 너무 권태롭고 무료한 삶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을 매고 자살하고 만다. 이 단편소설이 주는 교훈은 크다 인생과 일은 땔 수 없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데칼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유명한 철학의 명제를 남겼다. 나는 이보다 더 좋은 명제가 “나는 일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 한다”라는 말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만큼 우리의 삶과 일은 분리해 생각할 수 없는 관계이다. 일처럼 삶에서 매일 중요한 요소가 없으며, 존재 의미를 더해주는 것이 별로 없는 것이다. 할 일이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일본사람이 쓴 단편소설 중에 ‘36호실’이라는 것이 있다. 어떤 큰 회사에서 고용인들에게 많은 퇴직금을 주지 않고 스스로 물러나게 하는 방법으로 고안해 낸 것이 36호실 발령이었다. 그곳으로 발령받은 사람들은 처음에는 너무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아무 일도 하는 일 없이 그저 놀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몇 주가 지나면 너무 무료하고 답답해서 스스로 사표를 내고 나가게 됐다. 그런데 나중에 한 사람은 너무 권태롭고 무료한 삶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을 매고 자살하고 만다. 이 단편소설이 주는 교훈은 크다. 일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며 할 일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불행인가를 말해준다.무슨 일을 어떤 자세로 하느냐 하는 문제는 우리의 인격과 삶을 형성하고 결정해 주는 중요한 것이 된다. 6일 동안 열심히 일하고 주일에 안식하며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삶은 참으로 복된 삶인 것이다. 일평생 열심히 노동한 사람에게 은퇴의 삶은 더욱 빛나며, 의미가 있는 것이고 값진 삶이 되는 것이다. 크고 위대한 일만이 귀한 것은 아니다. 집에서 자녀들을 돌보고 살림을 하고 가사 일을 하는 것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아주 값지고 똑같이 귀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는 일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아브라함은 75세에 부름을 받았다. 모세는 80세에 부름을 받았다. 이것이 얼마나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는지 모른다. 강석규란 분이있다. 이분은 논산 근처에서 출생해서 성장했다. 너무 가난해 고등학교를 가지 못했다. 그러나 검정고시를 쳐서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학생회장을 지냈으며 나중에는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까지 됐다. 그리고 졸업 후 중고등학교에서 교사로 가르치다가 나중에는 명지대학 교수로 일하고 65세에 은퇴했다. 은퇴 후 건강하니까 다시 대학을 세워 1대 2대 3대 총장으로 20년간 섬기다가 4대 총장으로 정근모 장로께 맡기고 이사장이 됐다. 그 대학이 호서대학이다. 그리고 90세가 넘어서 다시 사이버 정보 통신대학교를 세워 총장으로 98세까지 일했다. 전국 사립대학총장협의회 회장도 지내고 기독교수선교협의회 회장으로도 봉사했다. 교회에서는 원로 장로다. 일본의 히노하라 박사도 101세다. 동경 세인트누가병원과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으며 병원 명예회장과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방지일 목사도 100세가 넘었음에도 설교하고 집회를 인도하신다. 창세기 6장 3절을 보면 하나님이 사람의 수명을 120세로 제한시켰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은 현대의학이 뒷받침해 주고 있다. 현대의학은 사람이 건강을 잘 돌보면 120세까지 살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나면서 시각장애자가 된 사람을 놓고 주신 교훈이 기록되어 있다.고난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우리가 고통당하는 것이 인간의 죗값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본문에 나오는 나면서 소경 된 사람에 대해 질문하기를 이 사람이 소경 된 것이 부모의 죄 때문인가 자기 자신의 죄 때문인가를 물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사람이 나면서 소경 된 것이 부모나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아주 새로운 관점에서 해석해 주셨다. 유대인들은 인간의 고통을 바라보면서 그 사람을 정죄하고 비판하고 판단함으로 더 많은 고통을 가하였다. 고통당하는 사람에게 치유보다는 더 가혹한 고통과 상처를 주므로 그것을 보고 즐기려고 하는 잔인함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 그 문제를 보시고 대답해 주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을 통해서도 오히려 더욱 강렬하게 역사해 주신다는 것을 말씀해 주셨다. C.S. 루이스도 고난은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게 해 주시는 확성기라고 하였다. 보통 때는 하나님의 음성이 잘 들리지 않는데 고통당할 때는 더 잘 들리고 분명히 들린다. 그래서 그는 고난은 변장하고 찾아오는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은 고통이라는 채널을 통해 가장 생생하게 들린다. 고정욱이라는 작가가 있다. 그는 소아마비로 장애인이 되어 비관하고 자살하고 싶었다. 옆집 할머니도 자기를 향해 아무 쓸모 없는 아이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많은 상처를 받았다. 그러나 믿음으로 일어섰고 마침내 공부해서 박사도 되고 글을 쓰기 시작하여 자기와 같은 고난 당하는 사람들을 대변하고 그들에게 희망을 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원망에서 해방되어 왜 나를 이렇게 고난 당하게 하셨는가? 그 답을 스스로 찾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 고난은 그로하여금 정금같은 인격과 신앙의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해 고난의 용강로를 허락하셨다는 것이다.하나님 뜻 알 때, 복된 삶예수님은 요한복음 4장 34절에서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 신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고 말씀했다. 누가 세상에서 가장 복되고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것인가? 나를 보내신 이의 섭리와 뜻을 이해하고 그가 나를 통해 이루어 가시기를 원하는 일을 성취하며 사는 사람이 복된 삶이다. 학벌, 지위, 많은 돈 등이 인생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 그런 것들은 결국 다 버리고 가야하는 것이다. 영원히 남는 것은 하나님의 소명 안에서 살아가는 삶인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이루어 가시기를 원하는 것을 이루며 사는 삶인 것이다. 그런 일이 어떤 일인가? 내가 즐겁게 할 수 있고 하면 힘이 생기고 보람을 느끼고 오래 계속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일 즉 노동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죄의 대가로 남자들은 땀을 흘리며 일하며 살게 되었고 여자들은 해산의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는 말씀이 있다. 그래서 노동을 죄의 대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 사회에서는 특별히 불교나 유교문화권의 영향을 오랫동안 받아와서 노동은 쌍놈들이나 하고 양반은 먹고 편히 놀고 쉬는 것이 상팔자라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서양 선교사들이 한국에 와서 땀을 뻘뻘 흘리며 운동을 하니까 양반들이 아니 종들에게 시키지 왜 저렇게 자기들이 고생하며 뛰냐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있지 않은가? 이것은 스포츠를 모르는 무식에서 나오는 말이다.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한다.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죄에서 속죄해 주셨을 뿐 아니라 우리의 노동마저도 신성한 것으로 회복시켜주셨다. 할렐루야!이 점에서 크리스천으로서 어떻게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을 바로 섬기고 믿음 생활을 잘할 수 있는가? 한마디로 매일 삶의 터전에서 일하고 노동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그를 기쁘시게 하느냐, 못하느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의 노동관과 직업관이 바로 정립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시간을 직장과 사업장에서 보낸다. 고로 그리스도인의 인격과 삶이 어디에서 헝성되는가? 일터와 사업장에서 형성된다. 삶의 중심지와 제자훈련학교가 어디냐? 일터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업장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지 못할 때 신앙인으로 바로 살 수 없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기독교 교인들은 일터에서 무엇인가 다르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 때 멋진 그리스도인이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로 살아가는 것이다.박희민 목사새생명선교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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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김요셉 목사의 카톡큐티 - 하나님의 놀라운 일 크리스천헤럴드2022.07.12
     카카오톡 아이디 kimbg1212로 연결하시면 메일 카톡으로 말씀을 묵상할 수 있는 큐티자료를 보내 드립니다.예수님은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 건너편 거라사 사람들이 사는 지역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들이 사는 지역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군대 귀신 들린 한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는 인간으로 최소한의 인격적 품위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기본인 옷을 입고 지낼 수 없었으며 집에 거하지도 못하고 무덤 사이에 거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몸을 가학적으로 자해하면서 살고 있었고 쇠사슬과 고랑에 매여 있었지만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습니다.그런 그가 예수님을 보고 엎드려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 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이름을 물었습니다. 이 사람은 ‘군대’라고 대답했습니다. 군대는 여단급 규모의 로마 군대를 일컫는 ‘레기온’의 번역입니다. 그곳에 로마 군대가 주둔했다는 뜻입니다. 아마 이 사람은 어렸을 때 로마 군대가 저지른 악행을 보고 정신이 이상해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람에게는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트라우마는 정신적 외상이라는 뜻의 질병을 가리킵니다. 어떤 충격적인 일을 경험했을 때 그것이 잊히지 않고 그 사람의 무의식에 남아서 생각과 행동을 파괴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예수님에게 제압당한 더러운 귀신은 그곳에 있었던 돼지 떼에게 들어가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자 돼지들이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빠져 몰사했다고 합니다. 귀신은 부정한 가축인 돼지와 함께 몰사했습니다. 귀신이 나간 후 그 사람은 완전한 정상인이 되어 예수의 발아래 앉아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를 온전한 모습으로 되돌려 주신 예수의 발아래 엎드려 감사의 경배를 드렸습니다. 옷을 단정하게 입고 온전한 사람으로 앉아 있는 모습은 그 마을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인간의 논리적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지방에서도 구원 사역을 펼치실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거라사의 지역 주민들은 예수께서 그 지역을 떠나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아무런 미련없이 떠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온전히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그에게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너무나 큰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 역사를 체험했으므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여러번 요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셨는데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일을 전파하게 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내시며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푸신 큰 일을 일일이 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군대 귀신을 제압하신 사건을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라고 말씀하신 것에 주목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과 자기의 일을 동일시 하는 놀라운 계시가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자신과 하나님을 동일시하는 것이며 나아가 제자들의 물었던 예수가 누구신가?(눅18:25) 에 대한 명확한 대답이 되는 것입니다. 귀신들린 자에서 온전히 회복된 자로 변화된 그는 너무 기뻐서 온 성내를 다니며 자기에게 일어났던 하나님이 행하신 큰일을 전파하였습니다. 구원의 은총을 입은 사람들은 각각 방식은 다르다 하더라도 그 은총을 나누어야 할 소명이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 받았습니다. 오늘날도 여전히 온갖 종류의 귀신들이 교묘한 방법으로 세상 가운데 역사하여 사람들의 삶과 생명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선적으로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악령으로부터 건져내어 사람을 온전하게 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해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아멘김요셉 복사가든그로브 복음루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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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송경화 교수 칼럼 - 애착2 ; 안정 애착 형성을 위한 팁 크리스천헤럴드2022.07.12
     할 수만 있는 대로 자주, 많이, 그리고 오래 아기를 안아주고 만져주어야 한다. 늘 안아주고 업어주고 쓰다듬어 주고 잘 때도 안고 자고… 이것은 안정적 애착 형성에 필수 요소다생후 만 3세까지 아기가 경험하는 부모의 양육방식이 애착의 유형을 형성해서 그 아기의 평생동안 지속되는 인간관계 유형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부모의 가장 중요한 책임은 아기의 3세까지의 양육이라 할 수 있다. 많은 부모들이 아기가 어릴 때는 기억도 못 할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혹은 어린 아기를 키우는 부모 자신도 어리고 여러 문제들로 가정이 불안정한 경우가 많아서 이 중요한 시기에 우왕좌왕하면서 지나버리곤 한다. 그리고 아이가 어느 정도 컸을 때 좋은 것을 사주고 고액 과외를 시키면서 부모로서 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잘 공급해 주고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부모가 정말 신경 써야 하는 것은 아기의 첫 3년이다. 놓치지 말고 이 시기에 아기에게 올인해서 충분히 따뜻한 양육을 해줘야 한다. 그럼 생후 첫 3년 동안 어떻게 하면 아이의 안정적 애착 형성을 위해 도움이 되는지 몇 가지의 팁을 나누어 본다. 먼저, 이 시기 부모의 일 순위는 아기여야 한다. 아기보다 우선되는 어떤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나는 할 수만 있다면 부부 중 한 명은 아기가 태어나면 3년 동안은 일이나 공부를 쉬라고 충고하곤 한다. 이 시기 아기들에게는 함께 하는 시간의 질만 중요한 게 아니라 양도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즉, 하루 종일 엄마 혹은 아빠랑 붙어 있어야 한다. 물론 아기 키우는 주부들은 이게 웬 감옥 같은 소리냐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길어야 3년이다. 이 아이의 평생에 가장 중요한 것을 만들어 주는 시기이므로 적어도 이 3년은 그 정도의 정성과 헌신이 꼭 필요하다. 나는 아기를 낳고 나서 아기에게만 집중하기 위해 2~3년 동안 휴직이나 휴학을 하는 엄마(혹은 아빠)를 진심으로 존경한다.두 번째로, 이 시기 아기들은 말로 소통하기 어렵기 때문에 몸으로 소통을 해 줘야 한다. 몸을 통해 사랑, 안전, 평화, 존중 등을 아기가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신체 접촉이다. 쉽게 말하면, 할 수만 있는 대로 자주, 많이, 그리고 오래 아기를 안아주고 만져주어야 한다. 늘 안아주고 업어주고 쓰다듬어 주고 잘 때도 안고 자고… 이것은 안정적 애착 형성에 필수 요소이다. 종종 아기를 자주 안아주면 “손탄다”거나, 엄마가 힘들다거나, 심지어는 버릇 나빠진다거나 하는 핑계를 대면서 아기를 안아주는 데 인색한 부모를 만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속으로 가슴을 친다. 그리고 그 아기의 불행이 안쓰러워 마음이 먹먹해진다. 물론 아기를 자주 안아주면 아기는 그걸 좋아하기 때문에 더 안아달라고 보챈다. 소위 “손 타게” 된다. 엄마는 자주 안아줄 수밖에 없으므로 허리도 아프고 팔이나 손목도 아프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그래 봐야 3년이다. 충분히 안아서 키운 아이는 3년이 되면 더이상 안아주려 해도 안기지 않고 세상 다양한 것들에 호기심을 가지고 뛰쳐 나간다. 이것이 안정 애착이다. 반대로 안아주기에 인색한 부모에게 자란 아이는 나이를 먹어도 부모에게서 떨어지길 힘들어하고 늘 애정표현에 목말라 하고 세상으로 나아가길 두려워한다. 어차피 부모가 되는 것은 헌신과 희생의 연속이다. 그걸 각오하고 부모가 되어야 한다. 낳아 놓기만 하면 아이들이 알아서 크는 게 아니다. 부모의 헌신과 희생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 바로 만 3년까지 아기를 안아주느라 몸 여기저기가 아프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우리 아이가 인간관계가 편안하고 자존감이 높은 아이로 자란다면 못 할 것도 없다. 아기를 “손타게” 키우는 부모가 아기에게 안정적인 애착을 만들어줄 수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하자.세 번째로, 만 3년 동안은 아기에게 늘 주의하면서 아기의 필요를 즉각적으로 채워줘야 한다. 아기가 울 때 그냥 울게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 왜 우는지 확인하고 배고프면 우유를 주고 기저귀가 젖었으면 갈아주고 졸리면 재우고 추우면 따뜻하게 해 줘야 한다. 부모가 다른 것에 골몰하느라 아기가 울어도 바로바로 반응해 주지 않으면 애착 형성에 문제가 된다. 그리고 아이에게 반응할 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따뜻함과 친절함이다. 아기는 자기를 바라보고 대하는 부모에게서 따뜻함과 친밀함을 느껴야 한다. 그래서 접촉은 부드럽게, 표정은 미소로, 그리고 사랑 가득한 태도를 유지해야지, 짜증내고 우울하고 무관심한 태도로 아기에게 반응하면 아기의 애착 형성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정리하면, 아이에게 안정적인 애착 유형을 만들어주기 위해서 엄마(나 아빠)는 아기와 많은 시간을 보내고, 늘 안아주고, 따뜻함과 친절함으로 아기의 필요에 즉각적으로 반응해 줘야 한다. 크게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리고 십년, 이십 년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길어 봐야 3년이다. 이 3년의 헌신과 희생은 아이의 삶을 180도 다르게 만들어 줄 수 있다. 아이가 평생동안 행복하길 원하면 많은 돈보다 안정적 애착을 선물로 주는 것이 훨씬 지혜로운 선택이다.송경화 교수월드미션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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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주성철 목사의 기독교와 법 - 학생들의 종교자유와 정부 크리스천헤럴드2022.07.12
     학생들이 지닌 종교자유의 권리와 정부의 압력과 관련해서 3가지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매사추세츠의 한 교육국에서 교회와 관련된 사립학교 개원을 거부하는 움직임을 발견하고 태평양법률협회의 도움을 청해 온 일이다. 교회와 관련된 사립학교에서는 성경적 가치관을 존중하고 이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성경과목을 포함시켰다. 이것을 트집 잡아 교육국이 사립학교 개원을 거부한 것이다.학교의 설립목적은 기독교 가치관을 자녀들에게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당연히 과목 중에 성경과 관련된 과목들과 기독교 윤리와 도덕에 대한 포함시켰다. 학교는 비다리얼교회(Vida Real Church)라는 교회의 후원을 받고 세워진 사립학교다. 교회가 자녀들의 교육에 앞장 설 것을 우선으로 설립한 것이었다. 세상 교육, 즉 공립학교 교육이 도덕이나 윤리적으로 너무 사악하기에 기독교 가치관을 가진 학교를 세우고 자녀들 교육에 부모가 앞장서겠다는 의도였다. 좋은 소식은 이런 극 진보주의적 사상에 맞서 싸운 학부모들이 법원에서 승리했다.두 번째는 서부 아이다호 대학에서 세 명의 기독교 학생들에 대한 차별과 불법으로 처벌한 일이다. 학생들이 주장한 것은 전통적 결혼관과 성적인 윤리와 도덕이다. 그런데 이것 가지고 대학측은 기독교 학생들을 처벌했다. 불법이다. 세 학생들은 학교에서 있는 LGBT 행사에서 자신들의 견해를 나누고자 했다. 이것도 역시 자신들이 원한 것이 아니고 LGBT준비위원회에서 이들을 초청해서 전통 결혼관에 대한 견해를 듣자고 제의한 것에 응한 것뿐이었다. 학교측은 어이없게 전통 결혼관이나 크리스천의 윤리와 도덕에 대해 말하는 것과 논의하는 것, 하물며 그에 대해 문의하는 것도 막아 버렸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집회를 방해한 것도 아닌데, 학생들을 처벌해 내려 캠퍼스에서 정당한 신앙 활동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협회는 학생들의 권리, 즉 언론의 자유, 언론 표현의 자유, 종교자유에 대한 권리를 지켜 주기 위해 학교측을 대상으로 소송을 제기했다. 헌법에서 보장한 당연한 권리를 찾아 줘야 한다는 생각에서다.세 번째는 매사추세츠의 한 시 정부가 프로라이프 응급실을 폐쇄한 이야기다. 매사추세츠 섬머빌 시의회는 프로라이프 응급실에서 낙태수술과 피임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응급실을 닫게 했다. 이것을 말도 안 되는 일이다.임신모들은 자신들의 건강과 태아를 보호하기 위해 프로라이프 응급실을 찾는다. 그런데 낙태수술 정보와 피임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고 해서 진료소를 폐쇄한다? 정말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 프로라이프 응급실이 무엇을 하는 곳인가? 태아와 산모의 생명을 지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무료 진료소다. 그런 의미에서 따져보면 이곳에서 생명을 앗아가는 낙태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더 어울리지 않는다. 이제는 우리 한인 기독교인들도 깨어 일어날 때가 됐다. 공립학교 교육을 위시해서, 시정부, 주정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유심히 바라보고 그들이 만드는 법안들이 과연 삶에 도움이 되는지 안되는지 심각하게 봐야 한다. 우리가 지켜온 가치의 상식에 어긋나고 자녀들의 올바른 교육에 해가 되는 것이 보인다면 이제는 목소리를 내야 한다.주성철 목사태평양법률협회 한국어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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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김병학 목사 칼럼 - "소통은 참여다" 크리스천헤럴드2022.06.21
     교회는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교회가 준비해야 하는 미래는 2가지이다. 하나는 다음 세대이고 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즉 다시 오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은 믿음의 영역이지만 다음 세대는 우리가 지금 겪고 있고 앞으로 겪을 실제적인 문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은 아버지 하나님이 그때를 정하시고 실행하시지만 다음 세대는 우리가 준비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은 정확한 때는 누구도 알 수 없지만 다음 세대는 지금 우리가 당면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피할 수 없는 문제이다.우리가 확인해야 할 중요한 문제는 교회가 다음 세대를 위한 준비를 하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이며 효율적인 방법이다. 물론 여러 신앙적이고 교육적인 방법들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 세대를 위한 정말 중요한 방법 중 하나는 투표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것을 너무나 생생하게 경험한 일이 있다. 30년 전 LA에서 일어난 폭동은 많은 한인에게 큰 아픔을 주었고 그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았다. 낯선 미국 땅에 와서 자녀 교육을 위하여, 즉 다음 세대를 위하여 준비하려고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쉬지도 않고 고생하며 수고하였지만 인종 차별의 벽 앞에서 꿈이 무너져 버린 것을 처절하게 경험하였다. 우리를 지켜야 할 경찰과 국가는 피부색을 기준으로 하여 경계를 나누었고 우리는 미국 시민이었지만 미국 국가의 도움이 없이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지키는 싸움을 해야 했다. 미국 땅에서 살면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것이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공부를 잘해서 명문대를 나오는 것도 아닌 것과 총과 칼로 지킬 수 있는 것도 아닌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위급할 때 국가와 경찰이 우리를 지키지 않았던 것은 우리가 돈을 조금 벌어서도 아니고 학벌이 없어서도 아니다. 미주 한인 중에 상당한 재력을 가진 사람들과 높은 학력의 사람들이 이미 미국 시민권을 가졌지만 신분 해결용 였을 뿐 누가 선거에 출마하더라도 큰 관심도 없었고 그래서 투표에 참여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국가는 우리를 중요한 사람들로 여기지 않았다. 그 이후 우리를 지킬 수 있는 것은 인재를 키워서 그들이 국가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자리에 가는 것을 인식하였다. 그래서 이제는 많은 한인이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에서 일하고 있다. 이런 인재들이 영향력이 있는 자리에 가기 위하여서는 개인의 역량과 자질로는 한계가 있다. 그들이 영향력을 발휘하고 다른 인종의 사람들까지 우리를 위하여 일하게 하려면 우리가 할 일은 한 가지이다. 그것은 투표에 모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물론 교회들은 국가와 지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한다. 당연히 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드린 기도가 열매를 맺으려면 투표에 참여해야 한다. 우리가 투표에 많이 참여할수록 2가지 변화가 일어난다. 국가가 우리에게 더 큰 관심을 갖고 우리를 지켜 줄 것이며, 우리 다음 세대가 준비될 것이다. 우리가 투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 할수록 우리는 안전해질 것이며 우리 다음 세대는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투표에 참여하면 우리가 우리 다음 세대를 위한 길을 열어 주는 것이며 피부색 때문에 우리가 당할 고통을 줄이는 것이다. 우리가 당한 일 때문에 분노하고 고함지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투표에 참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교회는 함께 국가를 위하여 기도하며 우리를 보호할 사람을 뽑는 투표에 참여하도록 독려해야 한다. 총과 돈이 아닌 투표로 현재를 누리고 미래를 준비하자. kim040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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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신선묵 목사의 교수칼럼 - “공감으로 변화를 추구하라” 크리스천헤럴드2022.06.21
     삶에서 감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인간의 구성 요소 중 지, 정, 의에서 지성과 의지는 중요한 것으로 보고 강조를 많이 하면서도 감정에 대해서는 많은 관심을 두지 않는다. 현대로 넘어오면서 심리학의 발전과 더불어서 감정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하고 이해하게 되었고 그것이 우리 삶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이해하게 되었다. 감정은 삶 가운데 가지고 있는 여러가지 문제들의 뿌리이자 근원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감정의 상태를 살피고 건강하게 회복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동시에 인간의 감정은 긍정적인 행동을 가져다 주는 힘의 근원이기도 하다. 감정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따라서 상상할 수 없는 에너지를 얻는다. 다니엘 골만은 지도력의 실행에 있어서 감정의 역활을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론을 전개하였다. 그는 인간의 감정 지능을 제시하면서 이것이 삶에서 지도력의 실행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준 학자이다.지도력 분야에서 감정지수의 중요성을 많이 다루고 있지만 특별히 변화에 연관하여 감정의 중요성을 다룬 사람이 있다. ‘스위치’라는 책의 저자이다. 그는 변화를 위하여 세 가지의 중요한 원리를 제시하였다. 그는 변화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를 코끼리 위에 있는 기수에 비유하면서 기수는 변화를 위한 구체적인 비전을 제시해야 하지만 자신이 코끼리라는 통제하기 힘든 위치에 놓여져 있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코끼리는 감정이다. 사실 비전을 기수가 가리키고 있지만 그 곳에 가기위해 필요한 것은 감정이라는 코끼리가 움직여 주어야 한다. 우리가 변화의 목표를 분명하게 정하는 것이 일차적으로 중요하지만 둘째로는 바로 감정을 잘 이끌고 다루어야 비전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삶의 변화는 감정을 잘 다루어야 한다. 개인적인 삶에서 변화를 이끌어 내고자 할 때도 자신이 먼저 동기부여가 되어있어야 한다. 동기부여가 되어있으면 변화를 추진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목적을 가지고 있어도 움직여지지 않는다. 자신의 삶에서 변화를 추구하고자 할때도 조급하게 자신에게 부담만 주는 것보다는 자기 스스로 충분히 공감해주고 기다려주고 편한 마음을 가지고 자발적인 동기로 변화를 추구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사랑과 원칙이 있는 자녀 교육’의 저자는 부모가 아이들과 맺어야 하는 관계를 두 가지로 묘사한다. 하나는 원칙이 있는 대화이고 다른 하나는 공감이 있는 대화다. 자녀들을 바른 원칙으로 살아가는 인간이 되도록 교육시켜야 되지만 우선 아이들의 느낌과 생각을 존중해주는 공감의 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공감되지 않는 상태에서 아무리 원칙을 강조해도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없다. 그래서 저자는 80:20의 원칙을 제시하였다. 공감의 대화 80%를 하고 그 위에서 20% 원칙을 가르치는 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삶 가운데서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변화를 이끌어 낼 때도 마찬가지다. 상담가들이 이 문제에 있어서는 전문가이지만 어려움에 있는 분들을 돕기를 원하는 분들이 가져야 할 필요한 측면이다. 우울증과 같은 병을 앓고 있으면 쉽게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때로는 도움이 되기보다는 더 좌절하게 만든다.어려움에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합리적이고 조언이 아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감정의 상태에 대한 공감과 이해다. 공감과 이해를 받을때 스스로 변할 수 있다. 반면 지혜와 지식으로 해결책을 제시하고 또한 강요 할 때는 더 좌절하고 힘들어하게 만드는 경우가 태반이다.변화에 있어 공감도 중요 하지만 정서의 다른 측면도 중요하다. 바로 인내심과 참을성과 정서적 회복 능력이다. 특별히 조직의 변화를 이끌어 갈 때에 지도자가 현장 속에서 실제적으로 변화를 이끌어 가면서 동시에 자주 현장에서 나와서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평가하고 변화를 이끌어 나갈 필요성을 강조한 적응적 지도력 이론이 있다. 이 이론에서 지도자는 객관적으로 자신의 상황을 분석하고 현장 속에서 변화를 이끌어 내는데 자신이 조급하게 변화를 이끌어 낼려고 하지말고 조직 스스로가 그 변화를 절실하게 느끼고 움직여 나아가고자 하는 순간을 기다려야 한다. 조직의 변화를 이끌기 위해서는 지도자가 혼자 조급하게 이끌어 가려고 해서는 안된다. 적절한 시간을 기다릴 줄 아는 인내가 필요하다. 정말 힘든 정서적인 면이다. 자기 감정을 스스로 인식하고 조절하고 통제하고 회복 시킬 수 있는 능력이 지도자에게 필요하다는 것이다.이런 학문적인 접근은 아니지만 많은 목사님들이 당회를 운영하면서 일들을 처리할 때 투표에서 다수결의 원칙을 가지고 일을 진행하지 않고 만장일치로 움직여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찌보면 일의 처리를 늦게하는 비효과적인 방식이라고 할 수 있고 또한 지도자가 많이 기다려야 하므로 많은 정서적인 에너지가 소비되는 방식이다. 그런데 그 목사님들이 그 방법을 선택하면서 초점을 맞춘 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고자 하는 것이다. 그 조직에서 한 사람도 상처입지 않고 한마음으로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구성원들의 감정 상태를 다루는 지혜로운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변화를 이끌어 내기위해서는 마음을 사야한다. 단순히 행동만을 얻어내려 해선 안된다. 누군가가 말하기를 “어느 곳이든 무엇인가를 향해 갈 때는 발로 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가는 것이다”라고 했다. 목적지를 향해 갈 때 발을 움직여서 간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어떤 곳을 향하여 갈때 중요한 것은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감정이 중요하다는 의미다.대부분 사람들은 변화를 주제로 다루면서 그 변화를 논리적이고 이성적이고 의지적으로 접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측면을 잘 정리하고 변화를 추진하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변화를 위해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하는 부분은 바로 감정이다. 결국 마음이 움직여야 다른 모든 것들이 변할 수 있는 것이다. 공감, 동기부여, 정서적 회복, 인내심, 정서 관리와 같은 것들이 변화를 이끌려는 지도자들에게 요구되는 자질들이다.신선묵 교수월드미션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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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김요셉 목사의 카톡큐티 - 갈등을 너머 하나로 크리스천헤럴드2022.06.21
     카카오톡 아이디 kimbg1212로 연결하시면 메일 카톡으로 말씀을 묵상할 수 있는 큐티자료를 보내 드립니다.사람이 살아가는 삶은 어쩔 수 없이 오해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오해를 받을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할 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베드로는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환상을 순종하여 고넬료와 그의 집안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의 말씀을 더 듣고자 하는 갈망으로 그를 몇일 더 머물러 줄 것을 간청했습니다. 이 일은 복음이 이방인 가정에 증거된 일로 베드로가 이룬 이일은 칭찬을 받기에 마땅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의 할례자들이(할례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유대 전통을 자랑하는 자들) 베드로가 무 할레자인 고넬료의 집안에 복음을 전한 일과  그들과 함께 식사한 것이 유대적 관습을 어긴 잘못된 행위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푼것 또한 잘못된 행동이라고 하는 비난하였습니다.교회 안에서 자신을 부당하게 비난을 하는 그들을 향해 베드로는 동일한 비난이나 분노로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본 받아야 할 모습입니다. 베드로는 부활 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복음 증거의 사명을 받고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교회의 지도자로 복음을 증거하면서 변화된 위대한 사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도 또한 철저한 유대주의자였고 오늘 본문의 할례자들과 똑같은 생각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고넬료의 가정을 구원하시기 위해 베드로에게 환상을 연속 세번 보여주셔서 그의 유대 주의적 생각을 변화시키신 것입니다.베드로가 본 환상은 부정한 것으로 먹을수 없는 네발 가진 것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을  보여 주시면서  베드로에게 “잡아 먹으라” 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속되거나 깨끗하지 아니한 것은 결코 먹은적이 없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내가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해서는 안 된다. 하시면서 이 환상을 세번이나 반복적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베드로가 본 환상은 할례 받은 사람과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 즉 모든 인종이나 뿐만 아니라 어떤 계층도 차별도 없이 다 담아야만 하는 주님이 원하셨던 그 교회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 이라고 말하면서 비방하는 할레자들에게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라고 다시 질문하여 그들 스스로 깨닫게 하는 지혜로운 화법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갈등이 생겼을 때 이렇게 대응하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베드로의 질문을 받은 예루살렘 교회는 은혜롭게 이 갈등의 문제를 마무리하게 되는데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로 결론을 내립니다.그들은 하나님의 일하심 앞에서 잠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사람들은 자기들의 잘못을 인정하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이방인들도 생명을 얻는 회개를 주심으로 하나님이 구원하셨다.” 라고 선포하였습니다.(18절) 이 선언으로 교회가 갈등을 풀고 하나가 되어 성숙한 공동체로  나아가는 생각의 전환이 이루어졌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는 이방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대한 새로운 믿음의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이제 교회는 유대주의적 기독교회를 넘어서 누구든지 성령의 임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며 세례를 받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의 시대가 감동으로 그들에게 다가 왔기에 기쁨으로 그 뜻을 받아들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보여주신 방향으로 순종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도록 기도하여야 합니다. 내가 항상 옳을 것이다고 생각하는 고정 관념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은 솔직히 인정하고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사용하실수 있는 아름답고 고귀한 신앙의 인격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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