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4 페이지

본문 바로가기

뉴스

  • 176
    [오피니언] 최재홍 목사의 하루한장 말씀 - 새해를 시작하며 크리스천헤럴드2023.12.29
    Happy New Year! 크리스쳔헤럴드 애독자 여러분 2024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소망이 사랑하는 가족들과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과 생업 가운데 충만하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새해를 다른 말로 원단(元旦)이라고 부릅니다. 원단이라는 뜻은 ‘삶 위로 하늘이 열리는 태초에 떠오른 해, 태양’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창조의 첫째 날에 빛을 만드시고 모든 날짜와 연한의 기준점, 시간의 원점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원단의 의미처럼 모든 인간은 빛을 중심으로 살아가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위를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2024년 새해를 시작하며 시편 121:6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하고 약속하신 말씀처럼 우리 모두를 세밀하게 보호하심으로 인도해 주시기를 소원합니다.새해를 시작하며 누구에게나 설레임과 기대감이 있습니다. 크게 소망이라는 단어로 함축하기도 합니다. 앞으로 펼져질 일들을 생각만해도 기쁘고 에너지가 넘치는 일들이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바라고 마음을 모아 기도하는 모든 제목들이 여기에 해당될 것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어제보다 더 행복한 오늘을 꿈꾸며 힘차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함께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꿈꾸고 바라는 것들을 이루어 주실 분에 대한 확신과 믿음입니다. 우리를 인도해 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힘과 능력으로 일으켜 주실 한 분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시편 121:1~2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라고 말씀합니다. 시편의 저자는 자신의 걸음을 인도해 주실 분을 분명하게 바라보고 자신의 인생 여정을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고 있습니다. 높은 산을 바라보면 걱정도 되고 힘이 들고 고생이 되겠지만 큰 산을 지으신 분이 우리 하나님이신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확신에 찬 신앙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나를 도우실 분은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라는 믿음입니다. 저는 새해를 살아가면서 우리들에게도 큰 산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의 마음이 담긴 고백도 간절한 기도제목 가운데 드려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새해에도 분명히 우리에게 예상하지 못했던 여러가지 벅차고 감당못할 일들이 다가올 것입니다. 급한 일도 만나고 당황스런 일들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곳이 누구에게는 메마른 땅이 되고, 광야같은 길이 될 것입니다. 물론 시온의 대로같은 형통한 은혜의 시간도 허락하실 것입니다. 이 때에 우리가 해야할 것은 시편의 저자처럼 그 순간마다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당연히 이 세상의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넘어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그때마다 우리가 일어설 수 있고 마음에 의지가 되는 생명의 말씀을 암송하며 되새기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새 힘을 얻게 하실 것입니다. 출애굽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불뱀을 만났을 때에서 장대에 높이 달린 구리 뱀을 바라보는 자들은 살아났습니다. 죄에 빠져서 죽어가던 우리들도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고 구원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눈을 들어 주를 바라보는 자들은 산 소망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인도해 주시고 보호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마음에 되새길 성경말씀을 품고 암송하십시오. 어려운 일을 만나면 찬송을 부르십시오. 새해에는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는 복된 시간들로 채워주시길 두 손 모아 기도드립니다. 우리 인생에 말씀만이 소망이요 기도만이 살길입니다. 저는 우리 크리스쳔헤럴드 애독자들과 함께 부르고 싶은 새해 첫 찬송이 있습니다. 191장 찬송입니다. ‘내가 매일 기쁘게(I’m rejoicing night and day)’입니다.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행함은 주의 팔이 나를 안보함이요 내가 주의 큰 복을 받는 참된 비결은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성령이 계시네 할렐루야 함께 하시네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는 것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그럼, 이제 우리 주 예수님과 함께 새해라는 첫 길을 기대하면서 걸어갑니다. 출발! 할렐루야!
    Read More
  • 175
    [오피니언] 김병학 목사의 소통하는 교회 - 소통은 역할이다 크리스천헤럴드2023.12.29
    성탄의 계절이다. 성탄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것 때문에 안타까워하기도 하고, 성탄절의 시작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로 조상들을 보면, 그중에는 자랑스러운 사람들도 있지만,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사람들도 있고, 이렇게 드러내놓고 말하기 부끄러운 사람들도 있다. 또한 그들은 너무나 엄청난 일을 겪기도 하였다. 어떤 때는 나라가 망하여 포로 생활을 하기도 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신앙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있기도 하였다.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방법들을 사용하셨다.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기 위하여서이다.더욱 놀라운 것은, 결혼하지 않은 여인이 임신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신 것을 기념하는 때가 바로 성탄이다. 교회는 성탄을 소중하게 기억하고 기념해야 한다. 성탄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신 성육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탄을 세상 사람들처럼 마냥 기쁨으로만 보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교회는 성탄의 의미를 다시 되새겨야 하고, 묵상하며, 적용해야 한다. 교회는 어두운 이 땅에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어두운 곳으로, 슬픈 곳으로, 배고픈 곳으로, 절망과 한숨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야 한다. 그곳에는 캐럴도 없고, 화려한 성탄 장식도 없고, 조그만 선물도 없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 그리스도인이 있어야 하고, 물질이 있어야 하고, 손을 잡아주고, 나눔이 있어야 한다. 그곳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헤롯의 궁전이 아니라, 사람들의 환영과 기대가 있는 곳이 아니라, 사람들이 있을 수 없는 곳, 짐승이 있는 냄새나고 어두운 곳에서 태어나셨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이 마음을 두지 않고 눈을 두지 않는 곳에서 태어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곳이기 때문에, 교회는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한없이 낮아지신 분이 우리의 구세주인 것을 드러내어야 한다. 그래서 교회는 오히려 소망을 갖게 되었고, 주님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이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그 소망을 심어 줄 수 있게 되었다.그러나 교회는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보다 훨씬 좋고, 그래서 더 이상 냄새도 나지 않고, 어둡지도 않다. 교회는 커졌고, 아름다워졌으며,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아름다운 음악과 음식이 있다. 사람들은 좋은 옷을 입고, 노래를 부르며, 성탄을 축하한다. 모두 기뻐하고 즐겁다. 이런 시간도 필요하다. 그런데 매년 교회는 언제나 이렇게 즐겁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파하는 사람들, 외로운 사람들, 병든 사람들과 함께 계신다. 그들은 노래할 수도 없고, 좋은 음식도, 함께 즐거워할 사람들도 주변에 없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필요하다. 교회는 그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즐거워하는 이유를 알려줘야 하고, 함께 즐거움을 나눠야 한다. 그러므로 크리스마스 캐럴은 아름다운 교회당 안에서, 무대에서, 화려한 조명 아래에서, 좋은 음향 시설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어둡고, 냄새나고, 외로운 곳에서, 목소리 하나로 불러야 한다. 그때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가 있을 것이다. 지금처럼 교회가 많고, 지금처럼 교인이 많은 때가 없었다. 교회는 더 크고 아름다워졌지만, 세상이 더 어두워진 것은 교회가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온전히 따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Read More
  • 174
    [오피니언] 신선묵 교수의 교수칼럼 - 공감적 경청의 실행 크리스천헤럴드2023.12.29
    오래 전에 이런 경험이 있었다. 학생분 중에서 연세가 좀 많으신 여자분이 있으셨는데 가끔 나의 사무실에 오셔서 대화를 나누고 가셨다. 한번은 오셔서 삶 가운데 힘든 것들을 나누기 시작하였다. 아들과 딸이 있는데 딸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잘 하는데 너무 힘들게 사니까 그것을 보는 것이 힘들고 또 아들은 사회 속에서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어서 그것이 또 답답하여 힘들어하시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나름대로 들어 드리려고 노력하였는데 계속 그 속에서 빠져나오시지 못하니까 내가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세요 등등 조언을 조금해 드렸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시다가 쓴웃음을 지으면서 “교수님도 이제 아이들 커보세요”라고 하면서 일어서시는 것이었다. 그때 “아차, 이 분이 그저 문제 해결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공감을 받고 싶어서 오신 것인데 내가 분석하고 가르치려고 하였구나”라고 생각하였다. 결국 내 말은 논리적으로 맞는 말들이었지만 그 분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 대화였다.우리가 공감적 경청의 중요성을 알고 있지만 이것을 실행하기는 참으로 힘든 것 같다. 우리가 상대방의 정서 상태를 듣어주고 공감해주기보다는 분석하고 가르치고 수정하려는 욕구가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이런 유혹을 떨치고 공감해주기 위해서는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실제적인 훈련과 노력이 필요하다. 몇가지 실제적인 방안을 생각해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있다.  첫째, 아주 간단한 공감적 경청의 방식으로는 “구나”의 법칙을 사용할 수 있다. 상대방이 자기의 감정을 이야기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고 “그랬었구나”라는 간단한 말을 통하여 그분들의 감정을 인정해 주는 것이다. 둘째, 우리가 공감적 경청을 하기위해서는 우리가 윤리적인 논리적인 판단을 유보하고 말하는 사람의 감정에 대하여 “당신이 무조건 옳다”라는 말을 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그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 윤리적으로 논리적으로 옳다고 인정해 주는 것이 아니다. 지금 느끼는 그 느낌 자체가 옳다는 것이다. 모든 감정은 그렇게 느끼는 이유가 있고 그 감정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셋째는 우리가 반영적 경청 듣기를 실행할 수가 있다. 이것은 앞에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에서 상대방의 느낌과 반응을 내가 정리해서 반응해 주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상대방의 느낌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 느낌의 원인까지도 이해해 주는 것이다. 우리 아이가 어렸을 때 이야기이다. 초등학교 2학년에서 3학년으로 올라갈 때에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아이가 힘들어했다. 자기는 수학을 잘 못해서 큰일이라고 하면서 3학년에 올라가면 공부가 힘들텐데 하면서 짜증을 내었다. 그래서 나는 열심히 “너는 충분히 똑똑하고 잘할거야, 걱정하지마, 그러면 지금 예습을 좀 해볼까” 등등 온갖 격려와 조언과 문제해결 방안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아이가 짜증나는 것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아이가 말하기를 “우리 학교에서 선생님은 그러지 않던데”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선생님이 어떻게 하던데?”하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하는 말이 선생님이 “네가 3학년 올라가서 공부가 힘들까봐 걱정이 되는 구나?”라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그 순간 “아차”하고 깨달았다. 그래서 얼른 “아, 선생님 말씀이 맞네. 네가 3학년 올라하고 공부할 것이 걱정되는구나”라고 말해주었다. 그랬더니 아이가 자기의 어려움을 아빠가 비로서 이해해주니까 곧 얼굴이 밝아지고 조금 있다가는 오빠가 쓰던 3학년 책을 가져다가 공부한다고 스스로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공감의 힘이다. 잘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관계와 지도력의 기술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의 표현이다. 데이빗 옥스버그 (David Oxberg)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누가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과 내가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너무도 비슷하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 차이를 잘 구분하지 못한다.(Being listened to is so close to being loved that most people cannot tell the difference.)”  다시말하면 사랑이라는 말과 경청이라는 말은 거의 동의어라는 것이다. 관계 속에서 또 공동체 속에서 정말로 듣는 자의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사실 기독인으로써 좋은 관계와 공동체를 찾지만 찾지를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이해받고 싶어하지 이해해주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말하려고 하지 들으려하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섬김을 말하지만 우리의 이기적인 모습들이 대화 속에서 그대로 나타나기에 관계와 공동체를 통하여 도리어 상처를 입고 힘들어 한다. 우리가 사랑한다면 경청해 주어야 한다. 우리가 아무리 사랑을 말하여도 경청하지 않고 있다면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 잘하는 훈련보다는 경청하려는 노력과 훈련이 필요하다.
    Read More
  • 173
    [오피니언] 송경화 교수 칼럼 - 아이들의 신앙 발달 단계 크리스천헤럴드2023.12.29
    인간은 기본적으로 영적 존재로서 종교성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그 종교성이 표현되는 구체적인 종교 전통과 예식은 부모, 사회, 문화를 통해 전수받게 된다. 일차적으로 신앙의 틀을 전해주는 사람이 부모 혹은 양육자라는 것을 고려할 때 한 개인의 신앙 발달에 있어서 부모의 역할은 매우 결정적이다. 종교심리학자인 제임스 파울러(James Fowler)는 개인의 신앙은 평생 동안 몇 번의 질적 변화를 통해 단계적으로 발전한다고 보았는데, 이 발달 과정은 인지적, 정서적, 관계적 발달 과정과 밀접하게 연동되어 함께 이루어지기 때문에, 전반적인 성격 발달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부모와의 상호작용과 관계가 결과적으로 자녀의 신앙 발달을 건강한 방향으로 촉진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신앙 발달을 저해하거나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신앙을 가진 부모는 그 신앙이 자녀들에게 잘 전수되기를 바라지만, 신앙의 전수는 단순히 교리와 예식을 주입하고 강제하는 것으로 이루어지기는 힘들다. 자녀들이 성장함에 따라 신앙의 발달 수준을 잘 고려해야 하고, 무엇보다 신앙이 전수되는 매개가 되는 자녀-부모 관계를 건강하고 신뢰롭게 만들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교회 지도자들이 이런 점을 인지하고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들을 교육한다면 신앙의 세대 전수가 더욱 촉진될 것이라 기대하면서, 앞으로 몇 회에 걸쳐 세대 간 신앙 전수를 위해 부모가 자녀를 양육할 때 고려해야 하는 것들에 대해 발달 심리학과 파울러의 신앙 발달 단계 이론의 관점에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신학자이자 목사이며 동시에 심리학자였던 파울러는, 당시에 주도적으로 활동했던 발달심리학자들인 피아제(Jean Piaget), 에릭슨(Erik Erikson), 콜버그(Lawrence Kohlberg), 길리건(Carol Gilligan) 등의 이론들을 신학적으로 탐구하여 인간의 성격, 인지능력, 도덕성 등의 발달과 함께 신앙 역시 단계적으로 발달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방대한 인터뷰와 연구를 통해 이를 체계화시켰다. 파울러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보편적으로 영적 존재로 누구나 영성을 타고 나며, 이는 특정 종교적 배경과는 상관이 없다. 영성은 삶을 이끌어가는 동기가 되는 삶의 목적이며 의미이고, 타인과의 관계, 궁극적으로는 초월자와의 관계를 향하는 모든 인간의 보편적인 경향성이다. 영성은 한 개인이 성장하고 발달하면서 다양한 관계 속에서 공동체와 문화를 통해 특정 모양의 종교로 발전하기도 하지만, 반드시 어떤 유형의 종교의 틀을 띄지 않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어느 경우이든 모든 인간은 인지 능력과 관계성, 그리고 성격이 발달함에 따라 영성과 신앙도 질적인 변화를 겪으며 발달한다. 파울러는 전 생애를 통한 신앙의 발달 단계를 크게 7단계로 구분하였는데, 각 단계를 미분화된 신앙, 직관적-투사적 신앙, 신화적-문자적 신앙, 종합적-관습적 신앙, 개인적-반성적 신앙, 통합적 신앙, 보편적 신앙으로 칭하였다.만 2-3세까지의 미분화된 신앙 단계에서 아이들은 신앙에 있어서 말보다는 느낌, 감각, 그리고 부모와의 관계를 통해 어렴풋하게 배워나간다. 그 다음 3-7세에 해당하는 직관적-투사적 신앙 수준에서는 아이들이 언어를 익히고 글을 배우고 또한 인간관계도 넓혀 나가면서 이미지, 스토리텔링, 감각 등을 통해 신앙을 익히게 된다. 그 후, 초등학교를 다니는 시기는 신화적-문자적 신앙(Mythic-Literal faith)의 단계로서 이 때의 아이들은 소속된 공동체의 신앙 체계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신앙이 발달한다. 이와 같은 이 시기 아이들의 인지 발달 수준을 고려할 때, 유치원 단계의 아이들은 그림이나 동화 구연의 방법으로 신앙에 대한 교육을 할 수 있고 초등학교 단계의 아이들부터는 본격적인 교리 교육이나 성경공부가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청소년기는 종합적-관습적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전에는 부모나 가까운 어른들의 영향이 지배적이었다면, 이제 아이들은 부모의 영향에서 벗어나 친구들의 경험이나 미디어 등을 통해 훨씬 다양한 참조를 얻게 되고,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해서 신앙의 체계를 발전시킨다. 청년기에 들어서면, 아이들은 점차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성찰하기 시작한다. 파울러는 이 시기의 신앙의 모습을 개인적-반성적 신앙이라고 불렀는데, 이제는 남의 관점이 아닌 자신의 관점에서 자기만의 신앙을 정립하려 한다. 그래서 이전에 순순히 받아들였던 공동체의 신앙 내용에 대해서도 성찰하고 비판하면서 받아들일 것과 거부할 것을 스스로 정하게 된다. 이전의 신앙이 교회의 신앙, 부모의 신앙, 주변의 신앙을 여과없이 받아들였다면, 이제는 자기만의 신앙을 찾아가는 단계이다. 이렇게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신앙을 배우고 내면화해 나간다. 그러므로 자녀들에게 신앙을 잘 전수하고자 하는 부모와 교회 지도자들은 아이들의 신앙발달 수준에 맞게 적절한 신앙 교육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Read More
  • 172
    [오피니언] 샘신칼럼 - 새해에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자 (창 25:21) 크리스천헤럴드2023.12.29
    만일 친구 아들의 첫 돌에 1돈 짜리 반지를 선물했을때 그 친구도 내 아들 돌 때에 한 돈짜리 금반지를가져 왔다면  인간적인 계산으로는 두 사람이 금 1돈을 서로 주고받은 것이 됩니다.  남은 것도 없고 손해 본 것도 없습니다. 겉으로 보면  같은 액수를 주고받은 것이 되므로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주고받음으로 인해 그 사람과 나 사이에  관계가 형성이 됩니다. 만일 우리가 주고받지 아니한다면 그 관계는 죽은 관계입니다. 성경은 관계가 단절된 것을 죽음이라 표현합니다. 반면에 주고받으면 생명이 역사합니다. 우리는 주고받는 것을 사랑이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시기에 하신 약속은 반드시 지키셔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이삭이 결혼을 하고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자식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약속과 이삭의 환경은 전혀 어울리지 않고 오히려 반대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이삭은 자식을 얻기위해 기도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삭의 아내인 리브가가 잉태를 했습니다. 위 본문을 보면 이삭이 아들을 얻은 것이 마치 이삭의 기도 때문인 것처럼 보입니다. 이삭이 기도해서 아들을 얻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중요한 사실을 보아야 합니다. 이삭이 기도를 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하셨기에 반드시 이삭에게 아들을 주어야만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이삭이 아들을 얻은 것이 마치 이삭의 기도 때문인 것처럼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야고보서에 엘리야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엘리야 시대에 비가 오지 않고 온 것이 마치 엘리야의 기도 때문인 것처럼 나옵니다. 그러나 구약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엘리야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된 열왕기 상 17장과 18장을 보면 엘리야가 비가 오지 않도록 기도했다는 기사가 없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엘리야에게 나타나 비가 오지 않을 것과 비가 올 것을 말씀하시고 그 말씀대로 이루어졌음을 봅니다. 엘리야가 비가 오도록 기도한 것도 먼저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겠다고 말씀을 하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즉 비가 오고 오지 않고가 엘리야의 기도에 달린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신약 성경에서 그 모든 공로를 엘리야에게 돌리는 것처럼 말씀하고 있음을 볼 때 그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는 아들이 아버지를 향해 “아버지 감사합니다. 아버지 때문에 제가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그 아들은 효자이며 기본이 갖추어진 아들입니다. 그때 수준 있는 아버지는 아들의 등을 두드리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아니야, 네가 공부하느라 수고를 많이 했지”  누구의 말이 정답입니까? 만일 여기서 정답을 찾는다면 그 사람은 본질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아들과 아버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서로를 인정하며 고마워하는 두 사람의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이삭을 보며 이삭의 아들이 하나님이 주신 것인가, 아니면 기도응답으로 받은 것인가를 따지고, 엘리야 시대에 비가 오지 않고 온 것이 하나님의 주권 인가, 아니면 엘리야의 기도 때문인가를 따진다는 것은 너무나 수준이 낮은 일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주시면서도 마치 기도했기에 주신 것처럼 기록하시는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배려와 사랑을 보면서 동시에 같은 마음을 소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마음입니까? 바울의 고백처럼 “내가 다른 사도보다 더 고했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였노라”는 고백이 우리에게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한 것이 됩니다. 
    Read More
  • 171
    [오피니언] 김병학 목사의 소통하는 교회 - 소통은 유비무환(有備無患)이다 크리스천헤럴드2023.12.20
    과학의 굉장한 발전으로 우리 실제 생활에 많은 도움을 받게 되고 있는데 앞으로는 그 영향이 더 커질 것으로 누구나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며칠 전 한국은행 조사국 고용분석팀은 AI(Artificial intelligence인공지능) 기술로 대체될 가능성이 높은 직업들이 소개되었다. 이것은 막연한 추측이라고 할 수 없고 멀지 않아 현실로 이루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산업 기술의 발달로 로봇과 소프트웨어의 상용화가 단순 작업이나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하면서 오랜 시간 그 일들에 종사해 왔던 근로자들의 일자리를 대체해 온 증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AI의 발달이 이제는 고소득 전문직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연구 결과이다. 예를 들면, 의사, 한의사, 변호사, 회계사 등 한국 일자리의 12%에 해당하는 34만 개가 AI로 대체될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예측했다. 다만 성직자나 대학교수, 가수 등은 AI로 대체될 가능성이 매우 낮았다.  AI가 매우 편리해서 누군가는 많은 혜택을 받겠지만, 마치 작업의 로봇화로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던 것처럼 안타깝게도 누군가는 직업을 잃어버리게 된다.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세상은 어차피 변할 것이니 어쩔 수 없다며 그냥 내버려 둘 것인가? 교회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나?발표된 보고서에서 밝힌 것처럼 주요국에서는 이미 3개 기업 중 한 곳은 AI를 활용하고 있고, 42%의 기업이 앞으로 활용 계획을 하고 있기 때문에 조만간 매우 빠른 속도로 AI가 확산할 것이다. 그나마 이것은 예측이고 실제로는 더 빠른 속도로 더 많은 분야로 확산할 것이다.그렇다면 교회는 AI를 거부하거나 무시하지 말고 어떻게 어느 분야에 무엇을 잘 활용할 것인지를 연구하고 접목할 수 있도록 준비해 나가야 한다.  AI 때문에 인간성과 윤리가 새롭게 재정립될 때 신앙적인 기준들과 교인들의 교육에 필요한 지침서가 만들어져야 한다. 지금도 기업 이익을 위하여 무분별한 문어발식 확장을 계속하는 대기업들의 횡포가 더욱 심해질 것이고 그 영향이 어떤 형태로든 교회에도 미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AI 활용이 일반화되면 지금과는 다른 능력들이 근로자들에게 요구될 것으로 예측이 될 때, “사회적 기술, 팀워크 능력, 의사 소통능력과 같은 ‘소프트 스킬’이 앞으로 더 많은 보상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는 그것이 맞는다면, 교회는 교인들을 양육과 훈련의 방향을 미리 재설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까지 아무런 문제도 없이 해왔던 방식, 즉 일방적으로 목회자나 리더가 가르치거나, 또는 목회자가 만들거나 아니면 시중에서 구입한 교재로 모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참석자들이나 훈련생들이 주어진 내용이나 본문을 근거로 하여 스스로 문제를 만들고 답을 만들어 보는 것이 핵심이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만들어 온 문제로 다른 사람들과 서로 나누고 토론하는 성경 공부나 훈련의 과정이어야 한다. 이것이 성경적인 교육법이다. 왜냐하면 AI에서 중요한 것이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질문을 어떻게 잘 만드는가가 기본이기 때문이다. 너무나 급속하게 변화될 세상의 문화와 생활 형태의 핵심을 미리 파악하여 준비하는 것이 바로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교회는 미리 양육 받은 훈련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어떤 직업을 갖든 그들이 세상에서 흔들림 없이 시민으로 살아가는 준비를 갖추도록 만들 수 있을 것이다.
    Read More
  • 170
    [오피니언] 조영석 목사의 생각하며 기도하며 - 특별한 선물 크리스천헤럴드2023.12.15
    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트리 밑에 둘 아이들 선물을 준비한다. 아이들이 평소에 갖고 싶었던 것들, 가격이 부담이 되어 평소에 주지 못하는 선물들도 이때만큼은 큰마음 먹고 준비를 한다. 성탄절날 아침에 일어나 포장해 놓은 선물을 신나서 풀어 볼 생각에, 아이들 못지않게 나의 마음도 부풀고 기대가 된다. 평소에 갖지 못하는 특별한 선물을 받게 되니 아이들 입장에서는 더 할 나위없이 기쁘고 좋은 것이 당연하다.그러나 아빠의 입장에서는 아이들에게 어쩌다 한번 진한 감동을 줄 수 있는 비싼 선물을 사주는 것보다, 조금도 감흥을 주지 못하는 아이들의 일상적 필요를 마련해주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 전혀 특별하지 않은 일상을 유지하는데 더 많은 돈과 시간, 노력과 희생이 요구된다. 날마다 먹는 밥, 매일 편하게 잘 수 있는 집, 계절에 따라 입을 옷 금방 헤어지는 운동화, 학원비, 병원비 등등,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일상적인 것을 마련하는 일은 사실 적지 않은 부담이다.언젠가 누군가 이 비용을 돈으로 환산한 통계를 보았는데 만18세까지, 즉 스스로의 쓸 것을 책임질 수 있는 최소한의 나이가 되기까지, 부모가 부담해야 하는 비용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 액수는 내가 모든 특별한 날마다 빼놓지 않고 아이들에게 큰 감동을 줄 선물을 준다 해도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큰 금액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기억하고, 고마워하는 것은 이처럼 어쩌다 한번 받게 되는 특별한 선물이다. 먹을 것, 입을 것, 잠잘 곳, 이 모든 것이 때때로 받는 선물하나 만도 못하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탓할 수 있으랴. 아이의 입장에서는 이런 일상의 필요가 채워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부모가 있는데 아이가 오늘 먹을 끼니를 걱정하고,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고, 오늘밤 잠잘 곳이 없어 불안해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부모로서 미안하고,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 같은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아이는 이런 일상의 필요는 부모에게 맡기고, 밝게 하루하루를 기쁘게 사는 모습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다. 그러니 아이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간혹 받는 선물이 더 특별하고, 기억날 수밖에 없다.그런데 이런 모습은 나와 내 자녀에게서만 아니라 나와 하나님아버지와의 관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때때로 내가 지금 누리고 살고 있는 일상을 특별한 축복으로 여기지 않고, 그보다는 남에게는 있는데 나에게는 없는 것을 아쉬워하며 하나님아버지께 나도 특별한 선물을 달라고 간청할 때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받게 되면 그제서야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에 감사하며 간증한다. 그러나 만약 내가 살아가는 이 일상이 무너져 버린다면 특별한 선물을 아무리 많이 받는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니 나 또한 하나님아버지께서 오늘 내게 일용할 양식을 주신 것과 나의 일상을 가능케 해 주신 것에 그 무엇보다 감사해야 한다.이처럼 아이러니 하게도 아이에게 특별한 선물을 마련해 주는 것은 쉽고, 조금도 특별하지 않은 평범한 일상을 마련해주는 것은 매우 어렵다. 또 특별한 선물은 아이를 위해서 못사줄 때보다 안 사줄 때가 더 많았다. 그러나 일상의 필요한 것들은 행여나 마련해주지 못할까 봐 염려로 잠을 못 이루던 밤도 있었고, 자존심을 버려야 한 적도 있었고, 새벽에 예배당에서 눈물로 기도한 적도 있었다. 부모로서 내게는 아이들의 일상을 마련해주는 것보다 더 치열하고 힘든 일은 없었다.그러니 아이들이 알아주던 말든, 아버지인 나로서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 중 그들의 일상을 마련해 주는 것보다 더 값지고 소중한 선물은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땅에서 하나님아버지께서 내게 허락하신 그 어떤 선물보다도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일상보다 더 값지고 특별한 선물은 없는 것이다.또 이 땅에서의 일상뿐만 아니라, 저 천국에서 예수님과 함께 살아갈 영원한 일상보다 더 소중한 선물은 없다. 이 선물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다.
    Read More
  • 169
    [오피니언] 샘신칼럼 - '나'에게 여호야다 있습니까? 크리스천헤럴드2023.12.15
    역대하 24장은 요아스 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구약 성경의 모든 사건은 말세를 만난 경계와 교훈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주 경건한 마음으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약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읽어야만 합니다.역대하 24장에 등장하는 요아스는 어린 시절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려 전 가족이 몰살당하는 사건을 치르며 유일하게 혼자 살아남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의 중심에  아주 경건한 제사장 여호야다가 있었습니다.이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과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을 볼 수 있습니다.아달랴가 유다 집의 왕의 씨를 진멸하려고 했지만 요아스가 살아남은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의 결과였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그 일에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인 여호야다를 사용했습니다.여기서 다음과 같은 영적인 법칙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아달랴가 다윗의 후손들의 씨를 진멸하려고 하는 사건 속에서 사탄의 역사를 발견하게 되고, 여호야다를 통해 요아스를 보호하는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사람을 통해 역사하지만 사탄 역시 사람을 통해 역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요아스는 제사장 여호야다가 사는 날 동안은 하나님 앞에 참으로 선한 왕이었지만, 여호야다가 죽자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왕이 되고, 급기야는 성전에서 자기의 악함을 책망하는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인 스가랴를 돌로 쳐 죽이는 악까지 범합니다. 요아스는 그 일로 인해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되어 아람 왕의 침공을 받게 되고 나중에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받아야 할 교훈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는 각 자의 여호야다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역대하 22장부터 24장까지를 자세히 보면 요아스에게 있어서 여호야다는 참으로 은인 중 은인입니다. 여호야다가 없는 요아스는 생각해 볼 수 없습니다. 생명의 은인이요  부모를 대신하는 사람이요 영적인 영향력을 미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야다가 사는 날 동안, 요아스가  여호야로부터 영적인 영향을 받으며 사는 동안에는 하나님 앞에 선한 왕이었습니다.오늘날 용어로 표현하면  여호야다는 요아스의 멘토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야다가 죽자 요아스의 삶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요아스는 여호야다가 죽자 믿음없는 방백들의 말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타락했습니다.  사람들은 보고, 듣고, 읽고, 말하는 대로 되게 되었습니다.요아스는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한 사람의 영향력입니다. 자신을 한번 돌아보세요. 그리고 나의 여호야다는 누구인지를 찾아보세요.즉 내가 누구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는지를 점검해 보라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영향을 받고 살아갑니다. 다만 나에게 영향을 주는 사람이 누구인가가 중요합니다. 더 나아가 나도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고 있음도 기억해야합니다. 즉 우리는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이 말은 나의 여호야다가 있으며, 나도 누군가의 여호야다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아스는  여호야다가 죽자  믿음없는 방백들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요아스의 영적인 타락 속에서 아주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하나님께서는 요아스에게 선지자를 보냈습니다.(대하24:19) 요아스가하나님께서 보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자 제사장 스가랴를 통해 말씀하십니다.(대하24:20) 그러나 요아스는 스가랴를 성전에서 돌로 쳐 죽입니다. 요아스의 결정적인 실수였습니다.이제 요아스를 대하는 하나님의 방법이 달라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아람을 통해 요아스를 다루십니다. 요아스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도 우리에게 아주 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하나님께서는 적은 무리로(아람)  큰 무리를(요아스) 다루심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이 사건이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요 하나님의 손길임을 깨닫도록 배려하시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인간적인 시각이나 계산으로 보면  적은 무리는  큰 무리를 이길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법칙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일반적인 법칙이 깨어집니다.
    Read More
  • 168
    [오피니언] 어리버리 서민수 목사의 낚시 전도법 - 태신자 리스트 크리스천헤럴드2023.12.15
    우리 주변에는 자동차 판매왕이나 보험왕의 이야기를 기록한 다큐멘터리가 많이 있다. 그들은 결코, 사무실 책상에 앉아서 자신의 고객을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판매왕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여러 가지의 방법을 동원해서 불특정 다수의 사람 중 미래의 고객으로 만든다. 그렇게 만들어진 자신의 고객 리스트를 꼼꼼하게 작성하고 그 리스트를 관리한다. 그들은 그들의 고객의 많은 정보와 내용을 자신들의 일마냥 잘 기억하고 있다. 그 정도의 부지런함과 성실함 없이 자신이 판매하는 상품을 소개할 수 없다. 전도도 많은 경우 다르지 않다. 우리는 복음이라는 최상품을 소개하는 책임과 의무를 갖고 있다. 이를 위해, 이 상품이 필요한 사람들의 이름과 정보를 잘 관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자동차를 파는 사람도 잠정 고객을 관리하면서 생일, 기념일, 직업, 성격, 가치관, 취미생활 등 엄청난 정보를 관리하는데, 하물며 태신자들을 대하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우리 주변에 사람들이 없는 게 아니고, 우리가 전도할 마음이 처음부터 없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닐까? 전도는 특정한 사람들만이 감당하는 것이고 적어도 나는 그 일과는 관계없는 사람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전도는 너무나 부담스럽고 불편한 일이라고 여기고 지레짐작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낚시하는 낚시꾼들을 상상해 보라. 그들은 낚시하겠다는 일념으로 바다나 호숫가로 달려 나간다. 싫어서 억지로 나가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낚시 전도법은 각자가 이런 낚시꾼들처럼 기쁨으로 즐겁게 뛰어 나갈 방법과 분야를 찾을 수 있도록 돕는 전도법이다. 남들이 이렇게 하니까 교회가 저렇게 하라고 하니까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주체가 되어, 당신 스스로가 동기부여가 되어 즐겁게 감사함으로 전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 전도법이다.위에서 소개한 방법 외에도 얼마든지 다른 방법이 존재할 수 있다. 각자의 형편과 달란트와 은사를 따라 사람들을 만나고 태신자들을 발굴할 수 있는 여러 모양의 방법이 존재한다. 각자의 형편에 맞게 여러분에게 맡기신 영혼들을 찾고 찾으면 반드시 만나게 된다. 한 영혼,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며 그들의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한다는 마음으로 각자의 리스트 북에 올릴 수 있기를 바란다. 실제 나는 이런 방법으로 태신자들을 80명 넘게 섬기고 있다. 이 태신자들이 다 교회 건물로 오는 것은 분명 아니다.그러나 몇 년이 걸려서라도 조금씩 그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각인시킬 수 있기에 감사함으로 울며 복음의 씨를 뿌리고 있다. 반드시 기쁨으로 거둘 영혼의 열매가 있음을 믿는다.조금 극단적인 이야기지만 지금 당신 마음에 영혼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태신자들의 리스트가 없다면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 만약, 당신이 목회자이거나 교회를 오래 다닌 신앙인이라면 반드시 살려야 할 영혼들의 이름이 있는 영혼 구원의 리스트가 있어야 한다. 이 영혼 구원의 리스트를 목회자와 성도들끼리 소그룹을 만들어 서로 나누며 함께 기도하는 것, 이 얼마나 우리 모두의 가슴을 뛰게 하겠는가? 부부가 서로의 영혼 구원 리스트를 놓고 함께 기도하며 기도의 씨를 뿌리는 것을 실천해 보라. 각 가정에서, 각 교회에서, 이러한 영혼 구원의 리스트를 품고 기도할 때 가정과 교회의 분위기가 달라질 것이다. 기도의 내용이 달라질 것이다. 기도의 온도가 달라질 것이다. 태신자 리스트야 말로 불특정 다수의 전도 대상자들을 특정 소수화시킨 결과물이다. 가슴에 품고 있는 태신자 리스트가 없는데 어찌 스스로를 예수님의 제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감히, 제자와 팬의 기준을 태신자 리스트의 유무에 있다고 말하면 지나칠까?
    Read More
  • 167
    [오피니언] 아모스 목사의 일터영성 - ‘자유함’ 크리스천헤럴드2023.12.15
    일터에서 많은 사람들을 보게 되고, 만나게 되고, 함께 일을 하게 된다. 어떤 분야에서든지 고수와 하수는 존재하기 마련이고, 식당이라는 일터에서도 고수와 하수는 분명히 구분되어 존재한다. 특별히 요리사의 경우, 고수와 하수의 차이는 무엇일까?  여러가지로 정리, 정의 될수 있겠지만, 이런 측면도 있다. 고수는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거나 허둥대는 법이 없다.오더가 갑자기 많아지는 경우가 생겨도, 경험이 많은 고수들은 절대로 허둥대지 않는다. 가만히 살펴보면, 고수들은 바쁠수록, 변수가 생길수록 더 기본에 충실해 지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어차피 본인이 감당해야 할 볼륨은 정해져 있기에, 여러가지를 한꺼번에 하려는 시도 보다는 오더가 들어온 순서에 집중을 한다. 그리고 웬만해서는 손놀림이 더 빨라지거나 하는 법도 없다. 사실 하수들과 비교되지 않을만큼 이미 빠른 속도가 몸에 익어 있기 때문인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하나씩 하나씩 오더가 제대로 준비가 되어 손님들에게 제공이 되는 것을 보게된다.반면 하수의 경우는 어떠한가? 변수가 생기거나 갑자기 감당하기 버거울 만큼의 오더가 들어오면, 처음 몇초, 몇분간은 오히려 아무것도 못하고 오더장만 멍하니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한 채. 그리고 나서는 뭔가 동작이 커지고 손놀림 발놀림이 바빠지는 것을 보게 되는데, 결과적으로는 오더가 순서대로도 나오지 못하고, 더 익혀서 못쓰게 되거나 넣어야 하는것 한두가지를 빼먹고 오더가 나가거가 하기가 일쑤다.바쁜시간이 지나고 나서의 고수와 하수의 행동에도 관찰되는 특징이 있다. 고수는 바쁜 시간이 다 지나고 나서도 별 얘기가 없이 평온한 반면, 하수는 바빴을때의 자신의 무용담(?)을 떠벌리는 것을 참지 못한다.신앙생활도 그렇다. 분명 이 분야에도 고수와 하수는 존재한다. 놀랍게도 식당에서 경험했던 부분들이 신앙생활 에서도 오버랩 되는 것을 자주 느낀다. 신앙의 고수들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닥쳤거나 혹은 예상했던 일에 결과가 좋지 않게 나왔더라도 당황하거나 허둥대지 않는다.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분명히 있음을 경험으로 알고 믿음으로 신뢰하기에, 어떤 상황이 닥쳐도, 자신의 본분을 지키며 조용히 묵묵하게 이 상황들을 받아들이고 차분히 해결하려 하는 것을 본다.반면 하수들은 어떠한가? Why Me? 를 외쳐대며, 평정심을 잃으며, 하나님을 원망하기 까지도 한다. 그러면서 그 상황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니 해결도 늦어지게 되고 원만한 생활도 하기 힘들어 지는 경우를 얼마나 많이 보는가.반대의 경우도 그렇다. 예상치 못한 좋은 일들이 펼쳐졌을때 고수의 반응은 어떤가? 시끄럽지 않다. 조용히 하나님께 감사하고,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며 누군가에게 자랑하거나 하는 일도 웬만하면 삼가한다. 반면 하수들은 시끄럽다. 동네방네 자랑하고 떠드느라 정신이 없고, 목사님께 부탁해서 간증한번 하겠다 하는 경우도 많이 봤다. 더 하고 싶은 얘기가 많지만 다 생략 하고, 오늘 칼럼에서 정말 말하고 싶고 나누고 싶은 단어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유함’ 이다. 모든 사람들이 자유 라는 단어를 좋아하고 자유함을 누리기 원하지만, 실제로 완전한 자유함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누리고 살아가는 인생고수들은 그리 많지 않다.믿음 좋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여러가지로 설명이 되겠지만, 필자는 믿음 좋은 사람의 기준 중 하나를, 그 사람이 얼만큼 자유함을 누리며 살아가는 지를 살핀다. 자유함을 누리는 신앙의 고수가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두가지를 명심하자. 먼저는, 하나님만 신뢰하자. 다른말로,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신뢰 하지도 말고, 하나님을 기대하는 것 이외에 다른 그 무엇, 그 어떤 사람에게도 기대를 갖지 말자.  기대를 갖지 않으면, 모든 기대치를 다 뽑아버리면, 그럼 어떤 일에도, 어떤 사람에게도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을 수 있다.다음으로는, 이미 필요한 것을 다 가졌음을 믿음으로 선포하자. 마인드컨트롤을 하라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우린 필요한 모든 것을 가졌다. 늘 내편이신 하나님이 내 아버지 이실 뿐 아니라, 성령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고 계시지 않은가?더 깊이 들어가면, 우리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대단한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면, 깨닫고 사는 사람이라면, 세상이 귀하다고 말하는 것들이 정말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것들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될것이다.다시한번 말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 한것에 대해서 (Doing) 영광을 받으시기 보다, 내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 (Being)임을 깨닫고, 그런 나 답게 살기로 결단하고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통해 더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심을 잊지말자. 진정한, 온전한 자유함을 누리며 사는 신앙의 고수, 인생의 고수로 살아간다는 것. 참 멋지지 않은가?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