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1:24)”
바울은 자기 자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복음을 전파하도록 따로 세우심을 받고 은혜로 사도의 직분을 받았다는 분명한 소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특별히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확신으로 소아시아, 헬라, 로마를 넘어 스페인까지 이방인 복음전파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그의 전생애를 헌신하였다. 광범위한 지역과 대상을 향한 열정적인 복음 전도와 서신들을 통해 교회의 기초를 놓은 바울은 사도시대를 이어 펼쳐지는 기독교회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의 생애와 신학은 다른 어떤 사도나 인물보다 바울 자신이 기록한 서신과 사도행전을 통해서 비교적 소상히 알려져 있다.
다메섹에서의 회심과 소명
사도 바울 생애의 전환점은 다메섹 근처의 길 가운데서 홀연히 일어난다. 율법과 유대종교에 열성적이었던 사울이란 한 유대계 로마 청년은 예루살렘에서 새로 시작된 예수운동을 유대교에 대한 신성모독으로 여기며 예수 추종자를 색출하여 핍박하는 일에 가담한다. 어느날 그는 예수를 메시야라고 증언하던 스데반이란 청년의 마지막을 목격한다. 유대 역사를 꿰뚫는 인상적인 연설과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예수를
주님으로 부르며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는 사람을 용서해 달라고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던 그의 모습은 놀라웠다. 그러나 사울은 스데반의 죽음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후에 바울은 주의 교회를 심하게 핍박했던 것을 고백한다. 대제사장에게 공문을 받아 다메섹의 기독교인들을 잡으러 가던 그의 앞에 하늘로부터 홀연히 눈부시게 밝은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다. 바로 자신이 박해하던 예수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사람들
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간 사울은 아나니아라는 예수의 제자를 만나 세례를 받았다.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주님께서 말씀셨다고 전해주었다. 이때부터 바울은 사도직에 대한 도전과 비난이 많았지만 한 순간도 자신이 이방인의 구원을 위해 소명받고 보냄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임을 잊지 않았다.
다소와 예루살렘에서: 성장과 교육 배경
사도 바울은 소아시아 길리기아 다소에서 베냐민지파 유대인이며 바리새파인 가정에서 태어난 로마시민권자라고 밝힌다. 길리기아의 다소(Tarsus)는 터키 남동부 지중해 해안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유서 깊은 도시이다. 당시 유대는 로마 변방지역에 불과하였지만, 다소는 길리기아 지방 주도로서 정치, 군사, 경제, 문화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주전 50년 경에는 키케로(Cicero)가 총독으로 부임했었고, 아우구스투
스 황제 때에는 자유도시가 되면서 시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였다. 당시 이곳에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로마시민권자에게는 투표와 공직에 나갈 수 있는 등 많은 권리가 주어졌다. 특히 법적으로 기소되었을 때 변론을 할 수 있고, 항소할 수가 있었다. 로마시민권자는 사형선고를 받아도 극형인 십자가형은 받지 않았다. 바울에게 시민권은 극적인 순간마다 복음전도에 촉매작용을 하게된다.다소사람 바울은 당대 최고의 율법학자인 가마리엘에게 엄격한 율법교육을 받았다. 이런 성장과 교육 배경은 바울이 헬라어와 히브리어에 능통하고 유대와 헬라문화 모두를 아우를 수 있게 되었다. 헬라어로 기록된 바울서신서들은 그가 헬라적 사고와 논리에 능하고, 로마의 정치, 경제, 문화에 익숙할 뿐만 아니라, 구약성경 인용과 신학적인 논지는 율법과 유대교에도 정통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유대에서 시작되어 로마제국을 향해 빠르게 확장되던 기독교회의 사도로서 바울은 이방인의 복음화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그리스도 예수 외에는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겼던 바울이지만 그의 배경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의 진리를 전하는데 요긴하게 사용된다.
복음의 사도로서의 여정
사도행전은 바울이 회심한 이후 바나바와 안디옥교회에서 사역했고, 3차에 걸친 전도여행을 통해 교회를 세우고 지도자들을 양성했으며,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로마로 호송되는 여정, 그리고 로마에서 가택연금된 상태로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교부들의 전승은 바울이 스페인도 방문해 복음을 전했고, 베드로와 함께 리누스를 로마감독으로 세웠다고 한다. 바울에 대한 성경의 기록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애와 연대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로마제국의 역사적 맥락과 연결해서 살펴보면, 33-34년경 다메섹에서 소명을 받았고, 49-50년경에 열린 예루살렘 공의회에 참석했으며, 로마 대화재가 있었던 64년 이후에 로마에서 순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바울의 외모에 대해서 성경에는 언급이 거의 없지만, 외경 바울 행전과 몇몇 초기문서에 따르면, 바울은 키가 매우 작고 다리가 휘어져 꾸부정하며, 얼굴은 석류처럼 붉고, 양쪽 눈썹이 붙었고, 매부리코에 대머리였다고 한다. 바울 자신이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고전 15:8)라고 한것과도 일맥상통한다. 바울을 공격하는 사람들 중에는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고후 10:10)고 한 것을 보면 언변도 그리 좋았던 것 같지 않다. 그의 말년에 디모데에게 보낸 서신에는 오랜 선교여정과 온갖 고난으로 인해 쇠약하고 춥고 외로운 노사도는 모두가 떠나고 누가만 함께 있으니 자신의 겉옷을 갖고 겨울 전에 어서오라고 재촉하고 있다. 하지만 죽음을 앞에 두고 주님께서 예비하신 의의 면류관을 바라보며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고백하는 사도의 두 눈에는 소망으로 인한 기쁨이 가득하였다.
바울의 죽음
전승에 따르면 바울은 네로 황제 때 베드로와 함께 순교당했다. 베드로는 십자가형을 받았지만 바울은 참수형에 처해졌다. 그의 머리가 세번 튕겨나가 땅에 닿은 곳에 샘이 터졌다는 전설이 전해지면서 5세기 경에 그곳에 교회가 세워지고 지금도 ‘세 연못의 성 바울’(St. Paul at the Three Fountain)이라고 불린다. 그의 시신은 로마 성벽 밖에 있는 오스티안 거리 곁에 묻혔고, 콘스탄틴 황제는 그곳에 교회를 세웠다.
사도 바울의 주의 복음을 위한 열정과 그리스도를 닮은 희생의 삶은 그가 밟던 로마제국의 영토를 넘어 전 교회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며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의 귀감이 되고 있다. 사도는 오늘도 주의 제자된 우리에게 조용히 말씀하신다.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며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딤후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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