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사명을 부여받다
사도 베드로는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를 섬기는 장로들을 향해 편지를 쓰면서 주님께서 그에게 주셨던 사명을 되새겨 본다. “내 양을 먹이라!” 여명이 밝아 오는 디베랴 바닷가 모닥불 곁에 앉아 젖은 옷과 몸을 말리며 주님이 떼어 주시는 따듯한 빵과 생선을 받아 먹었다.
그날 주님께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으시고, 이 사명을 주셨다. 베드로는 주님이 잡히시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려가시던 그 밤에도 멀찍이 따라가 그 집뜰에 앉아 모닥불을 쬐고 있었다. 베드로를 알아 본 사람들이 “네가 저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던 그자가 아니냐?”고 추궁하자 세 번이나 강하게 부인하였다. 바로 그날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습니다”고 장담하였지만,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것이다. 그 때 자신을 돌아 보시던 주님과 눈이 마추쳤다. 여전히 인자한 눈빛이었다. 새벽 닭이 울고 베드로는 통곡을 하였다. 날이 밝자 주님은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고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께서 디베랴 바다에 찾아오신 것이다. 밤새 헛수고를 하고 배를 돌리려던 새벽 호수가에서 어떤 분이 “배오른편에 그믈을 던지라”고 하시는 것을 들었다. 많은 고기를 잡았다. 곁에 있던 요한이 “주님이시다!”고 소리쳤다. 베드로는 벗고 있던 겉옷을 도로 걸치고 물로 뛰어들어 헤엄쳐 갔다.
주님을 처음 만난 곳도 갈릴리 해변가였다. 그 날도 밤새 그물을 던졌지만 헛수고를 한 날이었다. 그물을 씻던 그의 배에 오르신 주님은 무리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시고는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다. 그믈이 찢어질 만큼 많은 고기를 잡은 베드로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주님은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셨다.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르기 시작했다. 그 후 삼년 간 밤낮으로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시는 일을 보면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고 고백했다. 주님은 그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시고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주님을 배반하고 말았다. 다시 어부로 돌아가려는 베드로에게 주님이 찾아오신 것이다.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고 하시며 그가 어떻게 죽을 것을 예측하시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이다.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을 마음 깊이 새겼다.
기독교회 설립에 앞장서다
사도 베드로의 행적에 대해서
는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많은 기록이 남아있다. 그의 이름은 시몬으로 벳새다 출신의 어부였으며, 세례요한의 제자였던 그의 형제 안드레의 인도로 주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의 이름은 요나/요한이며 세배대의 아들들인 야고보, 요한과 함께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부름을 받고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주님을 따랐다. 주님께서 반석이란 뜻의 베드로(아람어로 게바)란 이름을 주셨다. 결혼했으며, 주님이 그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셨고, 후에 전도여행에는 아내를 동반하고 다녔다.
기독교회가 로마제국 전역으로 확대되던 일세기에 사도 베드로의 위치는 매우 중요하였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직후 마가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무리가운데서 베드로는 다윗의 시편을 인용하며 가룟 유다를 대신하여 맛디아를 제자로 뽑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오순절에 성령 충만을 받은 베드로는 설교를 통해 수천명이 회개하고 기독교로 개종하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 예루살렘 교회가
세워지는데도 핵심 역할을 한다. 44년 경 헤롯 아그리파왕이 예루살렘 교회를 박해하여 사도 야고보가 순교하였지만 베드로는 투옥되었다가 천사의 인도로 풀려나서 피신하였다. 그리고 몇 해가 지나서 예루살렘에서 공의회(51년)가 열렸는데, 베드로가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바울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예루살렘교회의 기둥과 같다고 한 것과 안디옥에서 베드로를 만났던 일을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주님께 받은 사명을 위해 온 열정을 다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의 행적은 초기 기독교 문헌들을 통해서도 추정해 볼 수 있다. ‘베드로의 회고록’이라고도 불리는 마가복음은 베드로가 진술한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을 마가가 기록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베드로전서, 후서는 정경으로 수립되어 이단 사상과 박해로 어려움을 겪는 교회를 세워가는데 주요한 역할을 한다.
그 외에 베드로가 행한 기적이나 사건 등을 기록한 베드로복음, 베드로행전, 베드로계시록 등의 외경이 전해지는데, 영지주의 기독교에 의해 기록된 것으로 역사적 사실성은 떨어지지만, 초기 교회에서 그의 역할을 짐작케 한다. 특히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보여준 환상을 기록한 베드로계시록은 신약정경의 목록이 포함된 가장 오래된 무라토리안 문서(The Muratorian Fragment)에서 요한계시록과 함께 성경으로 포함되어 있다. 이 문헌은 널리 읽혀졌지만, 교회가 정경으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로마에서 순교하다
베드로는 글라우디오 황제 때 로마에 가서 설교를 통해 많은 영혼을 구원하고 시몬 마구스의 이단 사상을 무너뜨렸고, 또 25년간 로마교회의 감독으로 있었다고도 한다. 베드로가 로마에 간 시기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로마에서 사역하다가 네로 황제가 로마대화재 사건(64년)의 범인으로 기독교인을 지목하고 살해할 때 순교한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십자가형을 선고 받은 그는 주님께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 하시던 말씀을 떠올렸다. 자신은 감히 주님 처럼 할수 없으니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게해 달라고 요청한다. 로마의 클레멘트는 사도 베드로는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많은 박해를 받다가 순교하였고, 영광의 처소로 돌아갔다고 전한다.
교부들은 베드로가 그의 후계자로 리노(딤후 4:21)를 로마 교회의 감독으로 세웠고, 이어서 클레멘트(빌 4:3)가 감독이 되었다고 전한다. 이후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가 공인되고 로마 감독의 지위가 높아지게 되었다. 11세기에는 고위 감독직을 부르던 파파(아버지)라는 호칭을 로마주교에게만 사용하도록 하고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부른다. 교황을 성경의 권위 위에 올려 놓으면서 교회는 본질을 잃고 타락의 길로 접
어들게된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는 가장 권위있고 확실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임을 지금도 소리쳐 외친다.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1: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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