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다는 개념을, 물질로 설명할 때가 많다. 어느 가정이 물질이 풍성하면 ‘아, 저 가정은 복 받은 가정.’ 그렇게 간주 한다. 세상의 많은 부자들을 지칭 하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고 가르치고 배우고 있다. 그러면 질문이 생긴다.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한 것인지 말이다. 하나님의 복을 물질에만 두면 하나님은 부자들만의 하나님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성경은 물질의 복도 물론 이야기 하지만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 할 때 결코 물질의 복에만 무게 중심을 두지 않는 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부자 청년이 근심하며 돌아가자 예수님이 간단하게 말씀하신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다(23절)’고 말이다. 모든 계명을 지킨다 할지라도 소유를 팔아 가난한자에게 주고 주님을 따르라는 주님의 명령에 근심하며 돌아간 부자 청년. 그러기에 주님이 보시고 극단의 비유로 그 어려움을 설명한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25절)고 말이다. 그런데 낙타가 바늘귀 통과 한 것 보신 분 있는가? 그런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뉴스 접하신 분 있으신가? 아무도 없으실 것이다. 실 하나도 바늘귀에 넣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안다면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말씀도 잘 이해를 해야 한다. 그러면 ‘모든 부자는 천국 못 가는가?’ 그리고 어느 정도 물질을 가져야 부자인가? 답하기 애매하다. 그러니까 물질자체를 가진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물질에 대해 우리가 어떤 생각과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느냐가 문제다.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마6:21절)고 주님 말씀하셨다. 이는 그 보물이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 시킬 수 있기에 그렇다. 그렇다면 아무리 물질이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라 할지라도 그 물질이 오히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데 걸림돌로 사용한다면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부자가 천국 가기 어렵다는 주님의 말씀에 제자들이 질문한다. 우리 또한 질문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26절) 그렇게 어렵다면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이에 주님 말씀하시기를 ‘사람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다.”(27절) 하신다. 이 말씀을 해석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사람은 자기 힘으로 자기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의 은총이 임하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를 수 있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생각대로 물질의 많음이 하나님의 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복임을 다시금 말씀하신다.
이어서 베드로가 말한다.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28절) 이 말은 자신들은 부자청년과 다름을 강조하는 말이다. 이에 주님이 ‘나와 복음을 위해 집이나 형제자매, 부모 자식, 재산을 버리면 현세에서는 박해도 받겠지만 복도 백배나 받고 또 영생도 얻을 것이다’(29-30절) 말씀하신다.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이 보상에 하나가 더 붙어 있다. 그것은 ‘세상이 새롭게 되어 예수님이 보좌에 앉을 때에 그 열두 제자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 할 것’(28절)이라는 말씀이다. 열두 제자는 주님의 날에 주님 옆에 열두 보좌에 앉는 복을 얻을 것이고 그리고 주님을 위해 자신의 삶을 드린 자는 물질의 축복뿐만 아니라 우리 인생의 궁극적 축복인 영생 까지 얻는 이 복을 주신다 말씀하신다. 여기 답이 있다. 이 땅에서 복을 누리고 영생 또한 얻기 원하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의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야한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의 “은혜가 값비싼 까닭”은 “예수그리스도의 부름”에 “따르기를 촉구하기 때문” (본회퍼, 『나를 따르라』, 33-34)이라는 말은 이런 의미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우리의 속마음을 살펴보면 우리는 두 마음, 즉 이 땅에서 물질의 복도 누리고 싶고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서 영생의 복도 누리고 싶어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 버리지 않고 두 가지 모두 얻으려는 것은 바로 부자 청년의 마음이다. 하나님 나라도 가고 싶고 그리고 이 땅에서의 부도 놓치고 싶지 않고 그러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결단의 요청에 근심하며 돌아가지 않는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두 마음을 품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시기에 부자 청년에게 결단을 요구했고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결단을 요구하신다. 왜 그런가? 우리가 쌓아둔 물질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두 마음이 함께 있으면 어느 것이 이기기 쉬운가? 물질의 마음이 하나님 나라의 마음을 뺏어가기가 쉽다. 왜 그런가? 현실이기에 그렇다. 삶이기에 그렇다. 눈앞에 바로 있기에 그렇다. 그렇게 되면 거기에는 이 땅에서의 유한 한 쾌락만 있을 뿐이다.
반대로 하나님 나라의 마음이 물질의 마음을 뺏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에게는 이 땅의 유한한 쾌락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주님이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할 수 있다.”(27절) 말씀 하셨던 것이다. 우리 주님 낮고 낮은 곳으로 오셨는데 우리는 높고 높은 곳으로 가려 한다.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복이라 믿고 그렇게 살려 한다. 그러나 우리 주님 분명히 말씀하시는 것은 “버려라”는 것이다. 우리의 복은 이 땅이 아닌 하늘나라에 있다. 그렇다면 정말로 우리의 삶에서 우리의 마음을 이 땅이 아닌 하늘나라에 두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어쩌면 그렇게 살기 원하는 의인 한 명을 찾고 계시는 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주님께서 보시기에 한 가지 부족한 것, 그것을 버리고 주님을 전존재로 따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알지 못하는 놀라운 것으로 부어주실 것이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먼저 되었다 하더라도 나중 될 것이고’ 이것을 깨달으면 ‘나중 되었다 하더라도 먼저 될 것’이다(3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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