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척 알아보는 실력이 뛰어나야 좋은 목회자가 된다. 지난 주일에 등록한 새 가족인데, “아이고, 처음 오셨나 봐요?” 그렇게 묻는 담임목사가 있다면 직무유기죄에 걸린다. 만나자 마자 그 가족들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반색하는 것이 목회자의 기본자격 아닌가.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될 이름 곧 하늘에서도 유명한 이름인데 그걸 담임목사가 몰라서야 되겠는가. 그건 또 사람은 누구나 그토록 이름 알아주는 걸 좋아한다는 뜻도 된다. 유명인이 되고 싶은 욕망이다.
그런데 온 인류 역사 최대 유명인이 누구일까? 바로 ‘예수’ 그분이시다. 어느 누구가 감히 예수 그 이름에 필적할 만큼 알려졌던가. 열렬한 추종자도 제일 많고, 죽어라 증오하는 사람들도 제일 많다. 공산주의자들이 그 대표세력이다. 그런데 논쟁은 유명인이냐 악명인이냐에 그치지 않는다. 예수가 사람이냐 하나님이냐, 실존인물이냐 가상적 인물이냐, 동정녀의 아들이냐 창녀의 아들이냐, 미혼남이냐 축첩자이냐, 죽었
다가 다시 살아났느냐 꾸며낸 거짓말이냐…. 그 가운데 그의 십자가 죽음이 자살이냐 타살이냐도 포함된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단연 타살사건이다. 열두 제자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예수님 생명을 놓고 은화 30개의 뒷거래를 했다. 성전경호대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체포했다. 대제사장과 공회의원들이 유죄판결을 했고, 빌라도 총독이 사형처분을 내렸다. 로마군인들이 해골언덕에서 십자가에 처형했다. 6시간쯤 뒤에 확실하게 운명하셨다. 어느 모로 보나 타살임을 의심할 여지가 전혀 없다.
그런데…. 그것만일까.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성삼위 하나님의 오래도록 치밀한 계획 아래 이루어졌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참새 한 마리도 떨어진다.(마 10:29).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하고,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리라.”(창 3:15)는 말씀, 그리고 장대에 달린 놋뱀(민 21:4-9)으로도 예고되었다. 예수님도 그 사실을 알고 계셨다.(요 3:14).
게다가 십자가 처형을 막으실수도 있었다. “열두 군단(7천명)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도록” 아버지 하나님께 부탁하면 간단히 해결된다(마 26:53). 그런데 의도적으로 그런 방어를 포기하셨다. 비록 ‘피동적 자’이기는 해도 자살은 자살이었다.
그래서 하는 말이 무엇인가. 그분의 죽으심은 ‘완전한 타살이면서 동시에 완전한 자살’ 아닌가.
‘온전한 하나님, 온전하신 사람’(vere Deus, vere homo)이시라는 신앙고백과 같은 논리다.
성경에는 자살사건이 매우 드물다. 하지만 그래도 분석해 보면 두 가지가 있다. 삼손처럼 적들을 죽이는 순교형 자살과 하나님 뜻에 어긋나는 가룟 유다의 자살이다(마 27:5). 유다가 제 정신이라면 결코 자살할 것이 아니라 평생토록 십자가 지고 헌신해야만 했다. 사도 바울이 그 모범사례이다. 스데반과 예수쟁이들을 무차별로 죽였던 그였지만 바르게 회개했고 선교에 평생을 바쳤다. 마침내 로마에서 참수당해 순교함으로 예수님의 발자취를 마지막까지 따랐다.
<대표저서: 목회자의 최고표준 예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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